조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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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던 FC 소쇼-몽벨리아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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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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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청 축구단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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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은퇴한 그의 최근 모습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現 축구 코치.
어린 나이에 축구 천재로 각광 받았으며 맨유가 귀화 전제로 영입을 제안한 사실이 화제가 되었었다.
조원광은 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당시 조광래가 이끌던 안양에 입단했는데, 미성년자로선 파격적인 계약금과 연봉[2] 을 받고 들어갔지만 해외 이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구단과 선수측에 갈등이 생겼던 바 있다. 조원광은 2군에만 머물러서는 자신의 기량 향상이 느릴 것으로 판단했다. 조원광이 상당기간 2군에 머물렀는데 이는 조원광이 유소년 시절 또래보다 뛰어난 피지컬로 중학교 무대를 평정했지만 중학교 이후로 신체적 성장이 멈추면서 성인무대에서는 평범한 피지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또래들과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피지컬적인 우위에서 나오는 힘과 스피드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그후 조원광은 PSV 아인트호벤, 스타드 렌, FC 소쇼-몽벨리아르 등과 협상을 하게 됐다.
2003년 12월, 조원광은 프랑스 리그앙 소속의 소쇼에 최종적으로 입단했다. 그는 3년 6개월의 계약 기간에 파격적인 계약조건[3] 으로 입단에 성공했고, 팬들의 주목도 많이 받았다.
조원광은 유스, 2군 단계부터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리 큰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과거 동료들은 프로에 모습을 보이는 데 성공했으나 그는 2군에만 머무르고 있었고 그를 데려온 감독[4] 까지 팀에서 나가며 입지를 잃었다.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결국 한국으로의 유턴을 선택하였다.
조원광은 소쇼에서 방출된 이후 J리그 입단 시도도 실패하는 등 6개월을 방황하다가 인천 유나이티드에 합류해서 새 기회를 받았으나, 내내 2군에만 머무르고 1군에서는 아직 부족함만을 보여준 채 실패했다. 천안시청 축구단에서는 주전급 선수로 분류되어 나름의 가능성을 입증했고 이를 통해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해서 다시 기회를 잡았지만 제주에서도 부상이 겹치며 1군 데뷔조차 실패했다. 제주에서 실패한 이후 조원광은 천안으로 돌아갔으나 2012 시즌 종료 이후 재계약에 실패했고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은퇴 후 천안시청 축구단 소속으로 유소년 선수들을 담당하고 있다가 2020년 현재는 서울 양강초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일하고있다.
부친은 1960년대에 국가대표팀에서 스위퍼로 활약한 조인수 씨이고 큰아버지는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 출신인 조정수 씨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많은 국내 지도자들이 그를 지도하기를 부담스러워 했다고 선수 본인이 언급한 적이 있다.
조광래 감독은 그를 두고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추진한 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고 회상하였다.
거스 히딩크가 PSV를 감독하고 있던 시절 입단테스트를 받았고, 마침 PSV가 참여한 피스컵[5] 에 PSV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였다.
'''모두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던 FC 소쇼-몽벨리아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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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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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청 축구단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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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은퇴한 그의 최근 모습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現 축구 코치.
2. 경력
2.1. 안양 LG 치타스
어린 나이에 축구 천재로 각광 받았으며 맨유가 귀화 전제로 영입을 제안한 사실이 화제가 되었었다.
조원광은 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당시 조광래가 이끌던 안양에 입단했는데, 미성년자로선 파격적인 계약금과 연봉[2] 을 받고 들어갔지만 해외 이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구단과 선수측에 갈등이 생겼던 바 있다. 조원광은 2군에만 머물러서는 자신의 기량 향상이 느릴 것으로 판단했다. 조원광이 상당기간 2군에 머물렀는데 이는 조원광이 유소년 시절 또래보다 뛰어난 피지컬로 중학교 무대를 평정했지만 중학교 이후로 신체적 성장이 멈추면서 성인무대에서는 평범한 피지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또래들과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피지컬적인 우위에서 나오는 힘과 스피드를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그후 조원광은 PSV 아인트호벤, 스타드 렌, FC 소쇼-몽벨리아르 등과 협상을 하게 됐다.
2.2. FC 소쇼-몽벨리아르
2003년 12월, 조원광은 프랑스 리그앙 소속의 소쇼에 최종적으로 입단했다. 그는 3년 6개월의 계약 기간에 파격적인 계약조건[3] 으로 입단에 성공했고, 팬들의 주목도 많이 받았다.
조원광은 유스, 2군 단계부터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리 큰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과거 동료들은 프로에 모습을 보이는 데 성공했으나 그는 2군에만 머무르고 있었고 그를 데려온 감독[4] 까지 팀에서 나가며 입지를 잃었다.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결국 한국으로의 유턴을 선택하였다.
2.3. 국내 무대에서
조원광은 소쇼에서 방출된 이후 J리그 입단 시도도 실패하는 등 6개월을 방황하다가 인천 유나이티드에 합류해서 새 기회를 받았으나, 내내 2군에만 머무르고 1군에서는 아직 부족함만을 보여준 채 실패했다. 천안시청 축구단에서는 주전급 선수로 분류되어 나름의 가능성을 입증했고 이를 통해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해서 다시 기회를 잡았지만 제주에서도 부상이 겹치며 1군 데뷔조차 실패했다. 제주에서 실패한 이후 조원광은 천안으로 돌아갔으나 2012 시즌 종료 이후 재계약에 실패했고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3. 여담
은퇴 후 천안시청 축구단 소속으로 유소년 선수들을 담당하고 있다가 2020년 현재는 서울 양강초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일하고있다.
부친은 1960년대에 국가대표팀에서 스위퍼로 활약한 조인수 씨이고 큰아버지는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 출신인 조정수 씨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많은 국내 지도자들이 그를 지도하기를 부담스러워 했다고 선수 본인이 언급한 적이 있다.
조광래 감독은 그를 두고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추진한 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고 회상하였다.
거스 히딩크가 PSV를 감독하고 있던 시절 입단테스트를 받았고, 마침 PSV가 참여한 피스컵[5] 에 PSV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였다.
[1]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2010년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포지션을 수비수로 변경했다.[2] 계악금 1억, 연봉 2000만원[3] 계약금 6억, 월급 1800만원에 주택과 차량에 통역까지 제공하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이는 당장 1군에 뛸 수도 없는 유망주에게는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4] 훗날 AS 모나코에서 박주영을 지도하게 된 기 라콤브[5] 2003년 피스컵 1회 대회 였으며 21번을 받았다. 그 전에 21번이었던 박지성이 등번호를 7번으로 변경한 직후였었는데 박지성이 7번 유니폼을 입자 기존에 21번으로 등록되어있어 부정 선수 지적을 받자 박지성이 조원광의 이름(W.K.CHO)이 마킹된 유니폼을 입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