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서울/럭키금성과 LG 시절
1. 소개
FC 서울은 1983년 12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창단하여 그 후 LG 치타스(1991년~1995년), 안양 LG 치타스(1996년~2003년) 이렇게 구단명칭과 연고지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며 2003년까지 K리그를 3차례(1985년, 1990년, 2000년) 우승하였다.
2004년 FC 서울로 개명하면서 대기업 구단 중 처음으로 기업명을 구단명칭에서 완전히 배제했는데 이로 인해 축구팬이 아닌 사람들은 과거에 럭키금성,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이런 구단들이 있었던 것은 들어봤던것 같은데 이 구단들이 현재의 FC 서울 구단인지 모르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유럽식 연고주의에 골몰하는 타팀 서포터들 중에는 연고이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현 FC 서울의 역사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연고지는 수없이 바꿨을지언정 구단 자체는 1983년에 창단하여 해체나 흡수 없이 이어져 왔고, 이 역사를 FC 서울의 역사에서 빼야 한다면 울산 현대의 강원도 연고 시절, 제주 유나이티드의 이전 연고지(서울, 부천) 시절, 성남 FC의 시민구단 전환 이전의 역사도 문제가 되며 프로축구 K리그뿐만 아니라 연고이전이 자주 있는 대한민국 모든 프로스포츠 종목[1] 에서도 문제가 된다.
구단 측에서는 당연히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 프로스포츠단과 마찬가지로 기업이 축구단을 창단한 연도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연혁에 표시하고 있고, LG 축구단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강제로 내쫒았던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도 군말없이 이 시절 역사를 인정한다. 김현회의 부화뇌동으로 역으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실체를 알게된 서울팬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서울팬들은 안양 시절을 타의에 의해 집 잃고 쫒겨난 안타까운 시기로 치부한다.
2. 시기별
3. 럭키금성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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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이라는 명칭으로[3] 창단하였고 연고지는 서울을 요구했으나 전국 연고지 안배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충청도를 배정 받았다.[4]
첫 시즌인 1984년에는 8개 팀 중 7위를 기록하였으나 1985년 태국 출신 외국인 선수인 피아퐁의 대활약에 힘입어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기세를 몰아 1986 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89년 고재욱 감독 취임 후 1990년에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였으며 그 해 우승을 차지하여 럭키금성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우승이자 대한민국 프로축구 사상 서울 연고팀으로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1990년에는 똑같이 서울을 연고로 하던 같은 그룹 야구단 LG 트윈스도 MBC 청룡 시절을 포함, 창단 사상 처음으로 우승에 성공해, 신문 기사에 우승! 또 우승! 이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였다.
- 럭키금성 시절 선수로 활약한 이용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경기 영상
- 럭키금성 시절 피아퐁 선수 경기 영상
3.1. 당시 주요 선수
- 이용수 (1984)
- 피아퐁 (1984-1986)
- 한문배 (1984-1986)
- 조영증 (1984-1987)
- 박항서 (1984–1988)
- 정해성 (1984–1989)
- 강득수 (1984–1989)
- 김현태 (1984–1991, 1994, 1996-1997)
- 최진한 (1985–1991)
- 차상광 (1985–1991)
- 조민국 (1986–1992)
- 구상범 (1986–1993)
- 이영진 (1986-1995, 1997)
- 최순호 (1988-1990)
- 윤상철 (1988-1997)
3.2. LG 치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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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고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두번째인 1991 시즌부터, LG 치타스라는 명칭으로 구단명칭을 개명하였다. 간혹 LG 치타스 시절이 동대문 시절의 전부인 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동대문 시절 첫번째인 1990년에는 럭키금성 황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5]
LG 치타스 시절에는 1회 컵대회였던 아디다스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1993 시즌에 준우승을 차지했던 것이 최고 성적으로, 그 외의 시즌에는 암흑기에 버금갈 정도로 성적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영향으로 서울 연고지의 LG 치타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1996년부터 연고지를 안양시로 이전하고, 구단명 역시 안양 LG 치타스로 변경되었다.
1993 시즌, 스타팅 11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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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당시 주요 선수
- 이영진 (1986-1995, 1997)
- 윤상철 (1988-1997)
- 김동해 (1989-1995)
- 임근재 (1992~1994)
- 서정원 (1992-1997)
- 최용수 (1994-2000, 2006)
3.4. 안양 LG 치타스
홈구장은 안양종합운동장으로 애칭은 아워네이션(Ournation) 이다. 메인 서포터는 RED. 특히 안양은 수원과 '''지지대 더비'''라는 K리그를 대표하던 더비를 이룰 만큼 두터운 팬층을 가졌던 구단이다. 다만 그만큼 팬들의 성향도 꽤나 강했던 편. 수원과의 더비 라이벌 관계에서 보여준 열정이나, 홍염으로 대표되는 화끈한 응원 문화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 해외축구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4년, 결국 아래 링크에 기재되어 있는 사과문과 함께 '''안양 LG 치타스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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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타 구단인 성남 FC, 제주 유나이티드, 그 외 울산 현대 축구단 등등과 마찬가지로 연고지 이전과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안양 LG 치타스 역사를 현재의 FC 서울의 역사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만 이전 안양 팬들과, 일부 K리그 팬들 중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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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단이 연고이전을 한 이후에도 소수의 서포터즈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나, K리그 경기가 있는 경기장에 걸개를 걸며 안양을 연고지로 하는 구단의 창단을 희망하고 있었다. 위 사진은 K리그의 최대 흥행매치인 수원과 서울의 경기에서 걸개를 건 안양팬들.[6] 이후에도 안양에 구단이 창단되기를 소망하는 안양 서포터즈의 끝임없는 노력에 힘입어, 결국 2013년에 안양을 연고지로 하는 FC 안양이 창단했다.
여담으로 연고 이전 당시 안양공고 출신이며, 데뷔도 안양에서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동진은 당시 연고 이전에 적극 찬성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아직까지 안양 팬들에게 금지어가 되어 있다.[7]
정조국 역시 연고 이전에 적극 찬성하여 안양 팬들에겐 금지어이다.
2021년 기준으로 안양 LG 치타스에서 뛰었던 선수들 중 고명진과 김동석만이 현역으로 뛰고있다.
3.5. 당시 주요 선수
- 조병영 (1988-1997)
- 이영익 (1989-1997)
- 임종국 (1991-2000)
- 서정원 (1992-1997)
- 김봉수 (1992-1999)
- 최용수 (1994-2000, 2006)
- 강준호 (1994-2001)
- 손현준 (1995-1998, 2000-2003)
- 김대성 (1995-1999)
- 정현호 (1996-2000)
- 무탐바 (1997-2000)
- 정광민 (1998-2002, 2007)
- 김성재 (1999-2005)
- 진순진 (1999-2003)
- 이영표 (2000-2002)
- 안드레 (2000-2002)
- 히카르도 (2000-2004)
- 신의손 (2000-2004)
- 최태욱 (2000-2003, 2010-2013)
- 김동진 (2000-2006, 2011)
- 최원권 (2000-2010)
- 박용호 (2000-2011)
- 이정수 (2002-2004)
- 김치곤 (2002-2009)
- 이을용 (2003-2004, 2006-2008)
- 정조국 (2003-2010, 2012, 2014-2015)
3.6. 울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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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서포터즈로 RED가 있었다.[8] 지금도 가끔씩 울트라스 하면 회자되는 단체인데,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홍염부터 까고 봤다. 어찌나 홍염을 자주 사용하는지, 안양 축구의 상징 하면 홍염으로 각인될 정도였다. 그리고 호전성 또한 엄청났는데, 다른 팀 서포터즈들이 원정을 가기 꺼릴 정도로 호전성이 강했다. 그리고 지지대 더비가 일어나는 날에는 경기장 인근에서 항상 수원 삼성의 서포터즈인 그랑블루[9] 와의 충돌이 있었다.
연고이전으로 팀을 잃은 뒤에도 시민구단 창단을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2010년 이전까지는 안양시의 냉담한 반응에 눈물지어야만 했다. 그러다 2012년 말, 고양 국민은행이 해체되고 FC 안양이 다시 창단되면서 예전의 호전성을 다시 보이고 있다. 만약 서울과 안양의 경기가 성사될 경우, 유례없는 폭력사태가 벌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3.7.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스 사고
대구 FC 창단 직후 대구와의 경기를 '''불전동차 홈경기'''라며 서포터즈 홈페이지에 올라와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아픔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10] 당시 그 문장은 홈페이지에 3일간 노출되어 있었으며, LG 치타스 홈페이지와 대한프로축구협회 홈페이지가 수많은 항의 글로 다운되기도 했다. 관련뉴스
4. 관련 문서
[1] 특히 한국프로농구는 남자 KBL, 여자 WKBL을 막론하고 연고이전을 해본 구단이 안 한 구단보다 많다. KBL은 10개 구단 중 6개 구단이 연고를 최소 한 번 옮겼고, WKBL은 6개 구단 중 한 번도 이전하지 않은 구단이 '''없다!'''[2] 디자인은 원로 만화가 박현석이 했다. 이 디자인으로 우려먹은게 럭키금성 황소 씨름단과 금성 황소 배구단(현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이다. 황소 머리만 거의 동일하고 나머지는 각각 샅바를 맨 몸으로 자세를 낮춘 모습과 유니폼을 입은 몸으로 네트 위에서 공을 때리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3] 과거 명칭인 럭키그룹으로 참여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당시 럭키금성 이외에는 이렇다 할 그룹 약칭이 없어서 신문기사, TV 중계 편성표는 물론 경기장 전광판에도 부득이 '럭금'이라는 약칭을 써야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당시 그룹 회장이었던 구자경이 매우 싫어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럭키면 럭키고 금성이면 금성이지 럭금은 대체 뭐냐"는 것이 구 회장의 뜻이라고. 참고로 축구단이 창단되던 시절은 LG라는 약칭이 생기기 한참 전이다.[4] 물론 당시 K리그는 말로만 연고지가 배정됐던 시절이고 실상은 전국 순회 경기 시절이었기에 충청 연고팀으로서의 큰 의미는 없었다.[5] 프로야구 LG 트윈스는 1990년부터 LG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축구단은 1년 늦게 사용하였다.[6] 당시 안양 서포터들이 서울 서포터들에게 '''라면국물'''을 뿌리고, 서울 서포터들은 강제로 걸개를 철거하려고 하는 등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7]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 풀백이었던 이영표 역시 찬성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안양시 출신이라 금지어였다.[8] 사진을 보면 경기장 내부에 화재가 나 연기가 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홍염으로 인해 저렇게 보이는 것이다.[9] 現 '''프렌테 트리콜로'''[10] 당시 참사가 일어난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