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필(송)

 


趙佖
(1082년 ~ 1106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


중국 북송시대의 황족으로 신종의 아들.

2. 생애


조필은 1082년 신종과 혜목현비 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필은 신종의 14명의 아들들 중 9남이었지만, 연안군왕 조용(趙傭)을 제외한 위의 형들이 모두 요절해버려서 조필이 사실상 신종의 차남이 되었다. 연안군왕 조용은 신종의 황태자로 책봉된 이후 이름을 후(煦)로 고치고, 신종 사후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북송의 제7대 황제인 철종이다.
조필은 처음에 산남동도 절도사로 제수되고 의국공(儀國公)으로 책봉되었다가, 1085년 신종이 사망하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개부의동삼사, 대녕군왕(大寧郡王)으로 임명되었다가, 재위 후반기에 신왕(申王)으로 책봉되고 사공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철종이 1100년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1], 신종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야 했다.
철종이 사망한 110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신종의 남은 아들들은 신왕 조필, 단왕(端王) 조길(趙佶), 신왕(莘王) 조우(趙俁), 목왕(睦王) 조시(趙偲), 간왕(簡王) 조사(趙似)였다. 여기서 신왕 조필은 신종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 가장 장성했지만, 조필은 어릴 적부터 심한 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될 수 없었고 결국 후보는 조길, 조우, 조시, 조사로 좁혀졌다. 이 중 조사는 철종의 모후였던 흠성황후 주씨[2]의 소생으로, 철종의 동복동생이었기에 조사가 황제로 즉위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북송의 황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 상씨는 조필 다음으로 가장 장성한 단왕 조길을 후계자로 주장했고[3], 결국 흠성헌숙황후의 주장이 관철되어 1100년에 단왕 조길이 북송의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북송의 제8대 황제인 휘종이 된다.
휘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조필은 진왕(陳王)으로 책봉되었으며, 숭녕 5년(11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조필은 상서령 겸 중서령, 서주목, 연왕(燕王)으로 추증되고 영목(榮穆)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사후 작위가 연왕에서 오왕(吳王)이 되었다.

[1] 철종은 소회황후 유씨와의 사이에서 헌민태자 조무를 낳았으나, 조무는 태어난지 3개월도 안되어 요절해버렸다.[2] 당시에는 덕비였다. 1102년 사후 황후로 정식 추존되었다.[3] 물론 단왕 조길이 조필 다음으로 장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후계자 논의 과정에서 흠성헌숙황후가 한 주장의 이면을 보면 단왕 조길에 대한 개인적인 총애와 더불어 덕비 주씨가 사실상의 정실이 되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가 흠성헌숙황후에게 깔려있었다. 그리고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흠성황후 주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여기에 작용한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