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종(송)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북송 제8대 황제'''
'''徽宗 顯皇帝 | 휘종 현황제'''
'''묘호'''
'''휘종(徽宗)'''
'''시호'''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
(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연호'''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출생'''
1082년 11월 2일
'''사망'''
1135년 6월 4일 (53세)
'''재위'''
'''북송의 황제'''
1100년 2월 23일 ~ 1126년 1월 18일 (25년 1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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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
조(趙)
''''''
길(佶)
'''부모'''
부황 신종(神宗) 조욱(趙頊)
모후 흠자황후(欽慈皇后) 진씨(陳氏)
황후 ||[[현공황후 왕씨|{{{#000,#fff 현공황후 왕씨(顯恭皇后 王氏)
]]
현숙황후 정씨(顯肅皇后 鄭氏)
명달황후 유씨(明達皇后 劉氏)
명절황후 유씨(明節皇后 劉氏)
현인황후 위씨(顯仁皇后 韋氏)
}}}}}}}}}
1. 소개
2. 생애
2.1. 내력과 출생
2.2. 형의 사망과 계승권 논쟁
2.3. 예술적 재능
2.3.1. 연산정
2.3.2. 도구도
2.4. 채경의 만행
2.5. 국가를 파탄내다
2.6. 반란과 몰락의 징조
2.8. 쓸쓸한 최후
3. 그의 사후 평가
4. 여담
5. 미디어 믹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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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북송의 제8대 황제이자 금나라의 혼덕공.[1] 묘호는 휘종(徽宗),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휘는 길(佶). 도교에 심취하여, 재위 중 존호로 옥청교주휘묘도군황제(玉淸敎主徽妙道君皇帝)가 올려졌는데 흔히 사서에 송 도군(道君) 혹은 도군황제라 하면 이 사람이다. 예술가로서는 최고였지만 황제로서는 암군폭군중에서도 상위 10인 내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 송 제국이 영토의 절반을 잃게 만든 원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 생애



2.1. 내력과 출생


6대 황제 신종의 11남이며 7대 황제 철종의 이복동생이다.[2] 황자 시절에는 단왕(端王)으로 불리었다. 그가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는 말은 둘째 치더라도, 애초에 항렬이 멀었다. 즉 원래라면 제위 계승권이 없었을 것이다.
철종이 승하할 당시, 그의 살아있는 동복, 이복 동생 중에서 신왕 조필에 이어서 두번째 연장자였고, 철종의 친동생인 간왕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어서 즉위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신종의 생존한 아들들 중에서도 제위 계승권 상 휘종 앞에 2명이나 있었고, 앞에 있는 두명이 무슨 불상사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황제 자리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더해 철종의 아들인 조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제위 계승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2.2. 형의 사망과 계승권 논쟁


그러나 철종의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요절하고 철종 본인도 일찍 붕어하자 후계를 세워야 했다. 철종의 친동생 간왕은 '누구는 황제 친동생이라서 예법상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대, 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신왕 조필은 눈병이 있는데 황제 업무 보기 힘들 것이라고 반대하자[3] 황태후 상씨(상태후)[4]가 단왕을 직접 차기 제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따라서 철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장돈 등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분 노는 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 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그분이어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상태후가 회의에서 황실 예법을 무시하고 단왕을 후계로 지명하자, 장돈이 “단왕께서는 성품이 가벼워 황제로선 불가합니다.”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래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유독 단왕을 좋게 보았다고 한다. 평소 행실과 달리 단왕은 황궁을 들러 상태후를 뵐 때 예의를 갖추고 상태후의 비위를 워낙 잘 맞춰 다른 왕들과 달리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태후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단왕의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고 멋쟁이인 데다 외모 역시 단정하다고 하여 단왕을 좋게 보았다.
이런 까닭에 상태후는 “내가 정실임에도 불운하여 후사가 없고, 신종의 자제들이 모두 서출이라서 모두 내겐 똑같다.”라고 말하며, ‘공평하게’ 연장자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눈병이 있어서 일찌감치 참석자 모두에게 황제 후보에서 탈락한 신왕 다음 연장자인 단왕을 지지한 것이다. 더해 '단왕 조길의 외모가 잘생기고 단정하며,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펼쳤고, 평소 같은 신법당파였지만 재상 장돈을 시기한 증포[5][6]

“장돈은 저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태후마마 의견이 맞습니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채변[7], 허장상이

“태후마마의 의견이 맞사옵니다. 이대로 해야 합니다.”

라고 합세하면서 그대로 상태후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단왕 조길은 상태후의 수렴청정 아래 철종의 뒤를 잇게 됐다. 이후 즉위를 반대하던 장돈은 장지로 가는 상여꾼들이 철종의 관을 진흙탕 위에 올려놓고 잠시 유숙한 것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파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 탄핵받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는 당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당쟁,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도 관련 있었다. 즉 신종의 정처[8]와 철종의 모후[9]가 사이가 나빴다는 점과 선인태후 고씨 사후 상태후를 중심으로 재편된 구법당파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한 철종과 장돈 등 신법당파의 향후 헤게모니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간왕, 신왕 대신 단왕이 선택된 것이다[10]. 따라서 철종 사후 철종의 유지와 장돈 등 신하들이 예법대로 동복동생 간왕, 생존해있는 신종의 아들 중 철종 다음의 최연장자인 신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 무시되고 휘종이 옹립됐다.

2.3. 예술적 재능


[image]
휘종의 수금체[11]
휘종은 문인이자 예술가로서 확실히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시서(詩書)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이 개발한 서체인 수금체(瘦金體)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후대의 역사가나 감정가들로부터 ''''글자에 기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서체''''라고 까이기도 한다. 글씨에는 개인의 성품이 묻어난다는데 역시 그런 모양이다.

2.3.1. 연산정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 휘종이 지은 연산정(燕山亭).
裁剪冰绡 새하얀 비단 마름하여
打叠数重, 사뿐히 몇겹을 접어서
冷淡胭脂匀注。 가볍게 연지를 골고루 칠한 모양
新样靓妆, 새로운 유행의 화장이라도 했는가
艳溢香融, 한껏 예쁜 자태 향기 감돌고
羞杀蕊珠宫女。 예주궁의 선녀가 무색하구나
易得凋零, 그렇지만 이 꽃은 시들고야 말겠지
更多少无情风雨。 또 몇번이나 모진 풍우 겪어야 하겠는지.
愁苦。 아, 이 괴로움!
问院落凄凉, 이 처량한 뜨락엔
几番春暮。 봄이 몇번이나 지났던가.
凭寄离恨重重, 겹치고겹친 상실의 서러움 전하고싶지만
这双燕, 이 한쌍의 제비가
何曾会人语? 사람의 말을 어찌 알수 있으랴
天遥地远, 멀고먼 하늘 저 멀리
万水千山, 첩첩한 산과 강을 건너서
知他故宫何处? 예전의 궁궐 그 어디에 있는가
怎不思量, 어찌 생각이 나지 않으랴
除梦里有时会去。 깨여서도 몇번이나 가보았건만
无据。 이제는 의지할데 없구나.
和梦也新来不做。 어이하여 요즘은 꿈에도 보이질 않느냐.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된 휘종의 심란함이 드러나는 시. 절절하기 그지없다.

2.3.2. 도구도


[image]
휘종이 그린 도구도(桃鳩圖). 복숭아 꽃과 비둘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화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실제로 휘종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단순히 황제가 그려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게 아니라 '''진짜로 그림을 잘 그렸다.'''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 踏花歸去馬蹄香"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더니 다른 화가들이 모두 데꿀멍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 시절 이야기.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황제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유능한 이를 등용해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예술을 즐겼거나, 국정을 돌보다가 잠깐 시간 날 때의 취미생활 정도에서 끝냈다면 모를까 휘종은 다스리라는 나라는 안 다스리고 예술활동에만 심취한 나머지 국정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2.4. 채경의 만행


신종 사후 어린 철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던 선인태후 고씨가 구법당을 다시 복권시켰던 원우연간 시기와 철종 친정기인 소성,원부 연간의 기간 동안 장돈 등 신법당파가 집권한 이후 북송의 당쟁은 점점 심해져갔다. 따라서 철종 사후 휘종을 수렴청정한 상태후는 구법당과 신법당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구법당의 한충언,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하여 국정을 운영했다.[12]
그런데 상태후가 얼마 안 가 갑자기 죽고 채경이 등장하자 정국은 다시금 요동쳤다. 평소 그림 그리기와 회화첩을 좋아한 휘종에게 총애를 받은 환관 동관이 휘종의 명으로 항주로 가서 회화첩을 가지러 올 때마다 그 옆에서 비위를 잘 맞추던 채경은 신법당이었지만 장돈 등 당시 집권 대신들이 신용 없는 인사로 평가하여 파직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종의 측근 환관인 동관의 추천과 평소 채경과 친했던 휘종의 후궁 유씨의 도움으로 채경이 다시금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후 채경은 증포의 도움과 추천을 통해 대명부지사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했으며 휘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16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증포를 시작으로 자신에 반대된다면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13]
[image]
기암괴석을 그린 송 휘종의 그림. 이런 소재를 앉은 자리로 옮겨오면 자기는 좋지만...

2.5. 국가를 파탄내다


우선 선대 황제였던 신종, 철종왕안석, 장돈 등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고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놨는데, 이걸 '''고귀하신 황제님께서 예술활동한다는 이유로 파탄'''내버렸다. 그러자 채경 등의 신하들이 나서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거나, 소유문제가 애매한 토지들을 일괄적으로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식으로 파탄난 국고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휘종은 예술품을 좋아하여 예술품 수집을 위해 명금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국의 진귀한 예술품들을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집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행패가 극심했는데 그들은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부과하여 돈도 주지않고[14] 강제로 징발해 일을 시키면서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가는데 집이 있으면 집을 무너트리고 길을 내기도 했다. 워낙 이 기암괴석을 싣고 가는 배가 많아서 '화석강' 이라고도 불렀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암군. 수호지의 등장인물 양지도 화석강 운반 감독이었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때 '''감히 황제폐하의 돌을 가라앉혔다'''(...)는 죄목으로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녔다.

2.6. 반란과 몰락의 징조


결국 시달리다 못한 민중들이 폭발하여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대표적으로는 수호지의 주인공인 송강과 최종보스격인 방랍이 있다. 반란이 점점 격화되고 방랍의 경우 아예 독립 국가를 세우는 수준에 이르자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지만, 송나라의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들에 대한 민심수습책으로 반란 진압과정 동안 화석강 수집을 금하였다가 방랍의 난이 진압된지 2달도 안되어서 또 화석강 모으기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송의 남부지역은 송왕조와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15] 이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의 고종이 북벌하는데 간접적으로 방해요소가 된다. 불과 몇 년전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라 언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후방이었던 것.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2.7. 정강의 변


이에 분노한 금태조가 군대를 파견하자 휘종은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16]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휘종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며 연회를 즐기고 후궁들과 어울리는 등 평상시와 같은 생활을 했다. 게다가 이미 무너진 군대가[17]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진정될 리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금군한테 깨끗하게 갈려나가고 뒤이어 개봉마저 함락당하고 만다.[18] 이때 피신하지 못한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혀 황후, 후비, 황자, 황녀, 왕, 왕비 등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정강의 변 문서로.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19] 서진 시대 영가의 난처럼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
휘종의 아내들을 비롯한 많은 황족 여성이 세의원(洗衣院)으로 보내졌다. 세의원이 금나라의 기방이고, 금나라에서 모욕을 주기 위해 송나라 황족 여성들을 이곳으로 보내 창기(娼妓)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송사나 금사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머물던 대부분의 황족들은 금나라로 끌려갔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사실 금으로 끌려가면서 휘종은 '기생 이사사와 함께 끌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기생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말을 주절대는 꼬락서니가 금에서 보기에는 혼덕공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휘종 때문에 북송이 망했다는 주장도 사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그를 금나라로 끌고 갈 때 한 백성이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은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 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했다. 거기에 도중에 쉬는 도중 술을 마시던 대장이 흠종의 황후 주씨에게 술을 따르도록 권했고 주씨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 때 한 대신이 '''금나라 놈들은 인면 수심의 인간말종이다!'''라고 부르짖다가 끌려나가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본 금나라인들은 "요가 망할 때는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이가 그래도 족히 10명은 되었는데, 송이 망한 지금은 의를 위해 죽는 자가 '''저 사람 단 한 명뿐이구나!'''" 라고 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것이 요와 달리 송은 이 시점에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고 그나마 충성스러운 인재들은 다 남송으로 갔기 때문. 남송이 망할 때는 그래도 문천상이나 육수부 같은 인물이 나와서 '''나라가 망할 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송나라가 요나라의 인구수의 10배는 되었음을 감안하면[20] 안습이긴 하다[21].

2.8. 쓸쓸한 최후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성[22]에 끌려가 한 칸자리 방에 수감되어 망국의 한을 품다 1135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23] 그나마 아들 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다. 남송으로 송환된 휘종의 유해는 고종이 황릉 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며, 이 후 도종까지 남송의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 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24] 아래에 묻혔다.[25]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5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와 1960년대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밭으로 마개조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공현[26]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질 않았다.

3. 그의 사후 평가


휘종이 나라를 잃은 이유를 상고해보면, 만약 진나라혜제의 어리석음과 오나라손호의 폭정이 없었고 또한 조조사마의의 찬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휘종은 특히 그 사사로운 지혜와 작은 지혜를 믿어 한편으로 치우치며 마음을 썼고, 의로운 선비를 멀리하고 물리쳤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하였다. 이에 채경이 경박하고 교묘하게 아첨하는 자질로,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하게 노는 뜻을 도왔다. 휘종은 허황된 것을 맹신하고 꾸미며 노는 것을 숭상하여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력이 곤궁하여 없어졌다. 임금과 신하가 멋대로 즐기고 놀며 서로 방종하여, 국정을 게을러 돌보지 않고 하루 종일 터무니없는 짓을 행하였다. 동관을 등용하여 부릴 때에는 또한 전쟁을 좋아하여 근심이 오래되었고 화가 쌓여서 빠르게 어지러워졌다. 훗날 나라가 무너지고 몸에 치욕을 당한 것이, 결국 석진석중귀와 같았으니, 어떤 핑계를 셈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서주가 나라를 새로 만들면서, 소공은 오히려 무왕에게 무익한 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유익하게 하였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도 쓸 물건이 아니라면 천하게 여겼다. 하물며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치며 송나라를 다스려야 하거늘, 희녕(熙寧)·원풍(元豐)·소성(紹聖)을 이어받아 신법을 다시 중용하여 이에 휘종 또한 두 일의 폐단을 몸소 행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임금이 놀면서 뜻을 잃고 욕망을 좇아 법도를 무너뜨리면 망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는데, 휘종은 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특별히 저술하여 경계로 삼는다.'''

-송사, 휘종에 대한 논찬 일부

후한 영제, 사마염, 수양제, 당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황제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황제로, 예술에 심취해 나라를 말아먹었기에 조선 포함 후세의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예술 활동을 반대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은 ''''황제는 글씨만 쓸 줄 알면 됐지. 예술에 심취하면 송 휘종처럼 될 수 있다.''''며 만력제의 예술 활동을 반대했다. 문제는 만력제에게 파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는 점은 생각을 못한 것. 이는 중국만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미쳐 조선 성종도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휘종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라고 대차게 까여야 했다. 연산군이 예술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말로는...
물론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린 군주들도 얼마든지 있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조조,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을 뿐더러 나름대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선덕제라든지 셀주크 제국을 세운 토그릴 베그,[27] 수학과 천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치정에도 재능을 보인 울루그벡[28] 같은 군주들처럼. 하지만 휘종은 명나라 말에 취미 생활로 국정을 내팽개친 천계제프리퀄 격으로 천재 예술가인 동시에 역대급 암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휘종의 업적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휘종 시기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의 미술은, 미술사학적으로 중국 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휘종의 예술 사랑은 궁내 도화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고, 재야 미술가 발굴과, 송나라 이전 미술품들의 평가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송 시기에 이성과 범관 등 걸출한 미술가는 물론, 휘종 자신도 서예 뿐만 아니라 그림에 능해, 미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때문에, 송나라의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중원의 황제는 일개 제후국의 왕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산이 생기고 없어지는 와중에, 그는 그 막강한 힘을 예술과 사치품에만 쏟았다. 그의 예술사랑은 북송은 물론이거니와, 남송 대에 풍부한 예술자원과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도자기 문화도 그 기법이 완숙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산과 개봉의 불야성과 송의 막대한 경제력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레시피도 송 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완숙된 시기였으며, 현대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으나, 그것은 곧 '사치'를 의미하며, 사치는 언제나 망국에 다다르는 요소 중 하나였다. 송 휘종은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동방을 아우르는 천자였다. 중국 미술과 문화의 활로를 열었지만, 북송의 망국의 길도 열어버린 황제이다. 대국적인 경영과 경제 측면에서 고려한 문화 융성이 아닌, 개인의 단순히 취미와 사치를 위해, 대륙을 뒤엎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4. 여담


  • 휘종이 황자 시절 고모 촉국공주[29]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때 촉국공주의 남편이자 영종의 부마였던 고모부 왕선을 흠모하고 존경했다. 왕선에게는 세 가지의 두드러진 개성이 있었는데 우선 금기서화(琴棋書畫)[30]에 능하고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할 정도로 문예적 기질이 뛰어났다. 실제로 당시의 장원 정해는 왕선의 글을 읽고 "니가 쓴 글은 문장이 멋지다. 훗날 반드시 출세하겠구나." 라고 감탄했고 북송의 문학가인 황정견 역시 그의 시서화를 극찬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하면서.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의 개성이 문제인데, 사치를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다는 것이다.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무녀(무희)까지 집에 둔 인물이기도 했다. 좋게 표현하면 풍류남아, 나쁘게 표현하면 문화건달.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읜 채 고모네 집에 머물던 10대의 휘종은 고모부를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복사판처럼 따라하고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40살이나 연상인 고모부 왕선 역시, 자신을 흠모하고 자신의 재능과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려 하는 처조카를 아끼며 몸소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스승이자 보호자로서 함께 했다. 그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힐방루로 휘종을 데리고 가 몸소 침대 위에서의 모든 스킬들을 알려주고 여자와 노는 법, 유흥을 즐기는 법들을 세세히 알려줬다고 한다. 그 결과 이미 10대 초반의 나이에 휘종은 수도 내 홍등가들을 돌아다니며 글공부보다는 주색잡기, 유흥, 축국(공놀이), 미술에만 몰두했고, 주변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래사 철종이 승하한 뒤 후계 논의가 벌어졌을 때, 이런 사정을 알던 장돈 등 반대파 조정대신들은 단왕(휘종)은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면서 철종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 어린 시절부터 여색을 무척 좋아했던 만큼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후들과 100명이 넘는 비빈들에게 자녀를 계속 얻었다. 그래서 역대 중국 황제들 중에서도 자녀가 많기로 유명한 황제가 바로 휘종이다. 송사 <종실전>과 <공주전>에 따르면 휘종은 황제 및 태상황으로 있는 동안 아들 31명과 딸 34명 총 65명의 자녀를 황후 및 비빈들에게 얻었다고 한다. 더해서 훗날 금나라에 끌려가 혼덕공으로 불리며 포로생활을 할 동안에도 다시 6남 8녀를 더 얻어서, 죽기 전까지 총 80명의 자녀를 뒀다고 한다.
  • 고려 예종이 지은 안화사에 친필로 편액을 써서 보내준 적이 있다. 또한 '직접' 국서를 써서 사신편에 전달한 적도 있다.
  • 고려 인종 때 화가 이령(李寧, ?~?)의 예성강도를 보고 그 솜씨를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령은 전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인종 때 추밀사 이자덕을 따라 송나라에 갔을때 휘종을 만났다. 이때 휘종은 한림대조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에게 명을 내려 고려에서 온 이령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하면서 이령에게 고려 예성강을 그리게 했는데,이령이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이를 휘종에게 바쳤다. 휘종이 이 그림을 감상한 뒤 “근래 사신을 따라온 고려 화공이 많았지만 이령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다”고 감탄하고는 이령에게 술과 음식 및 화려한 비단옷과 명주실로 짠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31][32]
  • 상술하듯 그림에서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 '계산추색도' 같은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후대에 고서화 수집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악명 높은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큼지막한 도장이 여기저기 찍히고[33], 좌측 상단부에는 엉터리 시까지 적히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사실 건륭제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작자가 예술활동을 한답시고 망쳐놓은 고서화가 한둘이 아니다.

  • 휘종은 피휘에 매우 엄격해서, 황실의 시조 조현랑의 이름자 현(玄)[34], 황제를 상징하는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했다. 명군이나 하다못해 능군이었으면 이런 조치도 욕을 크게 먹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암군인 휘종이라... 그래서 수호전에서 이규 등 여러 양산박 호걸이나 반란군이 송 휘종의 휘를 막 부른다.
  • 전설에 따르면 휘종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신종의 꿈에 휘종과 마찬가지로 예술가 황제로 유명한 남당의 3대 황제 이욱이 나타나 신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35]

5. 미디어 믹스


  •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수호지에도 등장한다. 바탕은 선량한데 놀기만 좋아하는 탓에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순진한 황제로 나오다가 개봉부에 잠입해 이사사와 의남매가 된 낭자 연청을 통해 양산박 호걸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이들을 용서하고 장군으로 임명하는 대인배로 등장. 하지만 이들이 각지의 난을 평정한 뒤에는 이들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나중에 이를 알고는 크게 슬퍼하며 그들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준다. 휘종보다 그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하던 간신 4명(고구, 채경, 동관, 양전)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에 불과하고, 북송 멸망의 중심은 애시당초 휘종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4명의 간신들도 모두 휘종이 어리석은 것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한 것이다. 본래 송나라는 황제권이 막강했기에 황제의 의도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고 관직을 편성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채경 등 간신들을 등용하고 지나친 예술 탐닉과 사치로 국정을 파탄낸 1차 책임은 휘종 자신에게 있기에 수호전에서 지나치게 휘종을 옹호한 면이 있다.
  • 코에이 전략시뮬레이션 수호전 시리즈에는 이벤트에만 등장하며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나라 걱정을 하며 고구를 해치우길 바라는 모습으로 미화되어 나온다. 이 게임에서 최종목표인 고구 척결을 달성하려면 인기를 모아서 이 인물에게 칙령을 받아야 한다. 이벤트에만 등장하는 까닭에 아쉽게도 능력치가 안나오는데 나왔다면 F4급의 환상적인 능력치가 나왔을듯 하다.
  •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이나 수호지에서 휘종은 희대의 멍청이로 나온다. 수호지의 리메이크작인 수호지 2000에선 초반 빼고 아예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 드라마 "정충악비"에서는 정강의 변으로 금에 끌려가면서도 아름다운 수석과 그림만 챙기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한심하게 본 금나라 장군인 올출이 수석들은 모두 황하에 버리고 서화는 모두 태워버린다. 그리고 금태조의 명으로 송휘종은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같이 지내게 되는데 물론 역사적 고증오류다. 물론 그런 꼴 당해도 싼 인물이지만..

6. 둘러보기



[1] 혼미하여 덕을 망친 공으로, 실제로 금 황제가 내린 작위이다.[2] 생모는 진귀인(陳貴人)으로서, 흠자황후(欽慈皇后)에 추존되었다[3] 당시 신왕 조필의 눈병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왕은 심한 안질로 거의 앞에 있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는 과거 중국 황제 중 지능이 모자란 이들보다 더 큰 결점으로 인식되었다.[4] 신종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였던 흠성황후 상씨로 명재상 상민중(向敏中)의 증손녀이다. 신종과의 사이에서는 주국장공주(周國長公主)를 낳았지만 11세 나이에 요절했고 이후 자녀를 얻지 못했다. 상씨는 철종과 휘종에게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므로 ‘어머니’였다. 당시 황실 어른 중에서도 가장 어른이기도 했다.[5] <송사> 간신편에 증포 역시 수록되었다. 그는 장돈이 재상이 되었을 때 철종 앞에서 장돈을 잘 대해주고 계속 칭찬하면서 내심 장돈이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매몰차고 정치적 계략을 잘 쓰고 알던 장돈은 평소처럼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할 뿐 증포를 추천하지 않아 증포가 원한을 품었다.[6] 증포는 철종 친정기 때 원우당인 사건이 일어나자 평소 자신과 처남에게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라고 찍힌 구양비를 원우당인이라고 모함해 지방지주로 좌천시키고, 장돈 역시 '황제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장돈을 두려워하니까 내가 탄핵한다.'고 주장해 공격했다. 하지만 이때 장돈은 철종에게 사마광 등의 위훈, 명예, 묘비 등을 파괴하면 아니된다고 주장해 관철시키고, 여러 명사들을 추천해 등용케 했기에 증포의 이런 주장은 동의를 받지 못했다.[7] 채경의 친동생이자 왕안석의 사위. 신법파였으며 철종 친정 당시 구법파와 상당히 대립하고 원우당인 사건에서도 구법파 탄압에 앞장선 까닭에 구법파 관료들에게 원성을 많이 들었다. 그는 형 채경과 마찬가지로 서예가로도 유명했지만 형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8] 흠성황후 상씨(欽聖皇后 向氏)[9] 흠성황후 주씨(欽成皇后 朱氏)로 당시에는 덕비 주씨라고 불렸다. 따라서 덕비의 아들 철종은 적자가 아닌 서자였다.[10] 물론 상태후 생전에는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균형적 인사 속에서 재상으로 증포가 선택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11] 천지현황의 현玄자를 원元으로 쓴 것은 송 황실의 시조인 조현랑의 이름자 중 玄을 피휘한 것이다.[12] 여담이지만 한충언은 키가 크고 증포는 키가 광장히 작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증포와의 대립 끝에 한충언이 사퇴하면서 증포가 모든 국정을 쥐게 된다.[13] 증포를 탄핵할 때 채경은 “재상 증포가 부정한 뇌물들을 받고 황제가 내려야 할 하사품 등을 마음대로 측근들에게 줬습니다.”라고 휘종과 증포를 포함한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그의 부정을 폭로했다. 당연히 자신 면전 앞에서 모욕을 받고 탄핵당한 증포는 얼굴까지 빨개져 휘종 앞임에도 크게 화를 내고는 채경을 이성을 잃어가면서 논박하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대신들은 증포의 무례함을 지적했고, 휘종 역시 증포가 앞뒤 안 가라고 황제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당연히 증포는 조사를 받은 뒤 채경의 폭로가 사실로 드러나자 파면되어 지방으로 쫓겨났고 잠시 명예를 회복했으나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윤주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채경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면 신구법 인물에 상관없이 약 300여 명을 모조리 몰아내고 나아가 그 자손들까지 연좌제로 과거응시금지 등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조치 등을 무기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여 조정 전체를 장악했다.[14] 사실 원래 전근대의 부역은 재물 대신 노동력으로 지불하는 세금에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에, 부역을 부과할때는 돈을 주지 않는 것이 맞다. 근현대와 같은 화폐경제구조나 유통구조가 형성되지 않은 전근대에는 '일단 화폐/현물로 세금을 부과하여 국고를 조성하고, 국가에 노동력이 필요할 경우 국고에서 임금을 지불하여 노동력을 고용하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이었기에 토목공사등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일을 진행할때는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일정 기간의 부역을 부과하여 일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역은 그 자체가 세금의 일부이므로 세금에도 세율이 있는것처럼 매년 일정 일수까지만 부과하거나, 이보다 더 부과할 경우 다른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의 제도적 기준이 있는 법인데 문제는 이 관리들이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답시고 그 기준을 넘겨서 마구잡이로 부역을 부과했기에 문제가 된 것. 즉 현대 기준으로 보면 '백성들을 막 잡아다가 강제노동시켰다' 라기보다는 '별로 긴급하지도 않은 이유로 임시추가과세를 마구 때렸다' 에 더 가깝다.[15] 특히 송나라 관군이 진압 도중 남부의 백성들을 300만명이나 학살했다.[16] 당시 휘종은 수도가 함락되면 자신이 다시 제위에 복귀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17]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정예군을 많이 소모한터라 송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18] 사실 당시 개봉에는 수비군으로 금군(禁軍) 3만명이 있었지만 문제는 금군은 금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방비하기는 커녕 대부분이 도망간터라 개봉은 금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만다.[19] 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20] 대충 요는 5백만, 송은 5천만은 잡는다.[21] 그런데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을 일종의 비장미라고 본다면, 송(남송)의 멸망만큼 블록버스터급 비장미가 넘치는 망국의 사례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애산 전투 문서로. 즉,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로 끌려가는 휘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가 없는 것은 송나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휘종이 한심한 찌질이라 그런 충성을 받지 못랬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여하간 남송이 망할 때는 '의를 위해 죽은 이' 가 (원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10만명은 나왔다.[22] 오늘날의 한반도 북부,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회령청년역 자리라는 설이 있지만, 정설은 오늘날 하얼빈 이란현 부근이라는 것이다.[23] 다만 정강의 변 항목에도 나오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24] 남쪽, 즉 남송의 기운을 진압한다는 주술적인 의미의 탑으로 도굴을 한 것은 양련진가가 남송의 부활을 막기 위해 건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도굴이었고, 진남탑 축조는 혹여나 죽은 황제들과 황후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 봐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복 왕조라 할지라도 이전 왕조를 계승했다고 보고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양련진가의 행위는 원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되어 결국 양련진가는 주살되었고 수하 승려들은 같이 주살당하거나 부장품 분배를 가지고 싸우다가 이미 죽거나 병으로 갑자기 모두 죽었다고 한다. 당시 원 세조는 양련진가가 도굴한 보물들을 몰수해서 대도에 절과 탑을 지았다고 한다.[25] 진남탑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진남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대치되는 기록이 있다. 양련진가에 의해 황릉이 비참한 피해를 입자 이를 비통하게 여긴 그 일대 주민들이 황야에 버려진 역대 황제와 황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상자에 담고 비단으로 싸서 감람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대신 소뼈와 말뼈를 황야에 흩어놨고 이걸 자기가 버린 황제의 유해인지 알았던 양련진가는 완벽하게 속았다.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감람나무를 찾을 길이 없다. 8백년 가까이 됐는데 그 나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26] 낙양 근처에 있다.[27] 천문학과 시나 온갖 글에도 재능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갓 세우면서 온갖 전쟁도 이기며 국토도 엄청 넓힌 군주다.[28] 1394~1449. 티무르 제국 황제로 8자리 소수까지 계산하는 수학 재능과 같이 온갖 천문대를 만들고 천문학에서도 재능을 보이던 인물이다. 심지어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간 거리를 측정하는 등 수학과 천문학에 보이던 기록과 재능은 서구 천문학자들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1794년 ~ 1874년)는 울루그벡을 칭송하며 자신이 발견한 달에 난 분화구를 울루그벡이라고 이름지어 그를 기렸다. 황제로 제위한 건 겨우 2년뿐이고 일생 대부분을 선황 샤루 흐(1377~1447)가 오래 살아서 지방 영주로서 있으면서 영지를 잘 다스리면서도 저런 천문학과 여러 연구도 한 걸 보면 치정에서도 무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무슬림인 울루그벡이 종교적으로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자 아들이 극단파랑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참수당하고 만다. 하지만 아버지와 많은 형제를 죽이고 제위한 아들 압달 라티프 미르자는 겨우 6달만에 똑같이 반란으로 무너져 나이 서른에 아버지랑 똑같이 참수당해 죽는 인과응보를 당한다.[29] 영종과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둘째 딸이자 신종의 누이동생. 일반적으로 보안공주, 위국대장공주라고도 부른다. 남편 왕선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1명을 얻었다. 하지만 아들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촉국공주 자신 역시 1080년 불과 29세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30]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31] 『고려사』권122, 「열전」35 ‘방기’ 이령[32] '천수사남문도'를 그린 화가도 이령이다.[33] 보통 고서화를 수집한 주인들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인감을 찍는데, 보통은 그림의 운치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세심하게 위치를 선정해가며 찍었다. 그런데 건륭제는 인감 찍는 게 취미였는지(...), 여러 개의 도장을, 그것도 큼지막한 도장을 그림 한 가운데에(...) 떡하니 찍은 것도 수두룩하다.[34] 이로 인해 당 현종은 송대 이후로 묘호인 현종대신 시호인 당명황(唐明皇)으로 많이 지칭된다.[35] 둘다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똑같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그래도 이욱은 백성을 쥐어짠다던가 하는 폭정은 하지 않았다. 폭정은 하지 않아서인지 적어도 이욱은 나라 망한 후에 "ㅉㅉ 황제만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말을 들었고 그가 죽자 옛 남당의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