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회황후 유씨

 


'''북송의 황후
昭懷皇后 | 소회황후
'''
'''시호'''
소회황후(昭懷皇后)
'''별호'''
원부황후(元符皇后)
'''존호'''
숭은태후(崇恩太后)
''''''
유씨(劉氏)
'''출생'''
1073년, 명주(洺州)
'''사망'''
1113년
'''재위'''
'''북송의 황후'''
1099년 ~ 1100년
'''북송의 황태후'''
1103년 ~ 1113년
'''배우자'''
철종
'''자녀'''
헌민태자
1. 개요
2. 상세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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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昭懷皇后 劉氏
(1079년 ~ 1113년)
북송의 황후이자, 제7대 황제였던 철종의 황후.

2. 상세


유안성의 딸인 유씨는 처음에 철종의 궁녀로 입궁하였으며, 총명하고 다재다능하여 당시의 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 상씨에 의해 철종의 첩여가 되었다. 유씨가 궁에 있을 때 철종의 첫번째 황후였던 맹황후는 복경공주를 낳았는데, 복경공주가 3살에 요절한 이후, 맹황후는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첩여 유씨가 철종의 현비가 되어 철종의 총애를 받는다.[1]
첩여 유씨는 아들인 헌민태자 조무를 낳았으며 철종에 의해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조무는 그 해에 바로 요절해버렸고, 철종도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100년에 세상을 떠나게된다.
뒤이어 즉위한 철종의 이복동생 조길은, 철종의 황후였던 유씨를 원부황후(元符皇后)로 추앙한다. 이때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섭정을 하면서 철종 생전에 조정에서 배제되었던 구법당 인사들이 조정으로 복귀하고, 철종의 첫번째 황후였던 맹씨도 복권되어 원우황후(元祐皇后)로 추앙된다. 하지만 1년 뒤에 흠성헌숙황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원부황후는 채경과 손을 잡아 원우황후을 다시 궁에서 쫓아냈으며, 원부황후는 휘종에 의해 숭은태후(崇恩太后)로 추앙받았다.
이후 숭은태후는 휘종의 재위기에 야심만만한 모습을 보이며 조정의 정치에 백방으로 관여하여 신하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휘종과 대신들은 논의 끝에 태후를 폐위할 계획까지 세운다.
숭은태후는 결국 정화 3년(1113년)에 스스로 목을 매 죽었고, 사후 소회황후로 추시되었다.

3. 둘러보기






[1] 맹황후의 폐출과 첩여 유씨의 귀비 책봉은 사실 단순한 궁중 암투가 아니었다. 철종이 즉위할 당시 태황태후였던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섭정을 하면서 구법당 인사들이 복귀하였고, 신종 이래로 벌어졌던 신법당과의 신구당쟁은 사마광과 왕안석 사후 한층 더 격화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맹황후의 집안은 구법당에, 첩여 유씨의 집안은 신법당에 각각 끈이 닿아있었다. 선인성렬황후의 섭정 하에서는 구법당이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선인성렬황후가 죽고 철종이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하면서 첩여 유씨가 맹황후의 행동을 문제삼았고, 결국 철종이 맹황후를 폐출시키면서 신법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사건은 격화되는 신구당쟁의 연장선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