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궁궐

 



1. 개요
2. 현존 기록
3. 상세


1. 개요


고려 왕조 제11대 임금 문종 인효대왕이 서경에 지은 두 별궁.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장락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한 채, 서쪽에 한 채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또한 두 궁은 한 궁궐로 불리는 기록이 많다.

2. 현존 기록


오래된 궁궐이다 보니 제대로된 기록이 없고 단편적으로만 등장한다.
  • 고려사 문종 세가

제령(制)을 내리길: "서경궁궐(西京宮闕)은 오래되어 무너진 곳이 많으니, 마땅히 공사로 수리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서경의 동서 각 10여 리에 길지를 잡아 '''좌우궁궐(左右宮闕)'''을 구성해 순어할 숙소로 정하라."하였다.

문종 재위 35년(1081년) 8월에 내린 제령이다. 이 때 처음으로 좌우궁궐에 대한 기록이 등장했으며 서경을 중심으로 동서 10 리 씩 거리를 두고 궁궐 2채를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용언궁(龍堰宮)을 짓는데에는 세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문종께선 밝으신 지혜로도 술수에 빠져 '''서경좌우궁(西京左右宮)'''을 지으셨습니다. 곧 후회하시고 감응이 없다 여기시었고, 끝내 순어하지 않으셨으니 재력을 허투루 낭비하셨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생략)

서경구궁(西京舊宮)은 지금 구하시는 용언(龍堰)과도 서로 멀지 않으니, 지세의 길함과 흉함이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별무반의 부원수 오연총은 문종이 서경에 좌우궁을 만들어 놓고도 막상 간 적이 없다며 재력 낭비라고 깠다. 그리고 문종이 술수에 빠져 좌우궁을 지었다고 했는데, 이 술수는 아마 풍수지리 및 도참 사상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경구궁이 용언의 땅과 멀지 않다고 했는데, 이 서경구궁이 문종의 좌우궁궐인지 장락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용언의 새로운 궁궐(龍堰之新闕)'''에 거주하지도 못하시고 영원히 여산의 저승길로 가셨습니다...

동문선 28권에 기록된 문종의 애책문이다. 태자 순종이 올린 것으로, 용언신궐을 언급하고 있다. 예종 문효왕이 지은 용덕궁의 별칭이 용언궐인데, 이는 용덕궁 부지가 풍수지리 상으로 '용언(龍堰)의 터'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 문종의 좌우궁궐은 용덕궁과 비슷하게 용언의 터에 자리잡은 듯 하다. 애책문에 따르면 문종은 결국 좌우궁궐에 가지 못한 걸로 보인다. 오연총의 문종이 끝내 가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고 ,문종이 건설을 시작한 때는 재위 35년인데 2년 뒤인 재위 37년에 붕어했으니 좌우궁궐의 공사가 문종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못한 모양이다.

3. 상세


기록이 이렇게 파편으로 남아있다보니 좌우궁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매우 적다. 그나마 위 기록을 종합해보면:
  • 궁궐은 두 채지만, 한 궁궐처럼 취급되었다.
  • 장락궁을 중심으로 동쪽, 서쪽에 있었다.
  •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다.
  • 문종은 좌우궁궐에 가지 못했다.
  • 좌우궁궐은 11대 문종 대에 지어져 최소 16대 예종 대까지 남아 있었다.
정도만 파악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