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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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12대 임금. 묘호는 순종(順宗), 시호는 정헌영명선혜대왕(靖憲英明宣惠大王). 휘는 훈(勳), 자는 의공(義恭)[5] . 고려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문종 인효대왕의 장남이며 공인된 태자였다.
2. 생애
고려사 순종 세가 총서에 따르면 아버지인 문종 8년 2월 계묘일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6] 그러나 태자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지라 이래저래 부왕과 신하들의 걱정을 많이 산 듯. 아니나다를까 문종이 죽자 너무 슬퍼한 것이 탈이 되어 안 그래도 원래 병약한 몸이 악화되면서 즉위한지 고작 3개월만에 결국 부왕의 뒤를 따라간다. 태자로서 28년이나 있었으나 왕으로는 3개월 뿐이었으며 조선의 제12대 임금인 인종보다도 재위기간이 5개월이나 짧다.
그래서 문종의 조문을 위해 요나라의 사신이 고려로 오다가 다시 되돌아가 순종의 조문까지 준비하고 다시 오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 입장에서는 순종이 3개월만에 죽자 요나라가 이를 정변이라 트집잡아 외교 문제로 번질까 우려하기도 했다. 강조의 정변으로 거란과의 2번째 전쟁이 시작된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시 고려 조정의 우려대로 순종의 죽음을 알리러 갔던 외교관 이자인[7] 이 요도종의 힐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자인은 요나라를 설득해 요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
별다른 업적 없이 붕어하여 그의 동생인 국원공 왕운이 왕위에 오른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사도 엄청 짧다.
- 8월
- 갑신일. 문종을 경루에서 장사지냈다.
- 경자일. 왕이 신봉루로 가서 사면령을 선포했다.
- 겨울 10월
- 초하루 계유일. 회경전에서 사흘동안 도량을 열고 승려 3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 갑신일. 왕이 자신의 동생인 왕운을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올려주고 식실봉 1천 호를 덧붙여주라고 지시했다.
- 왕은 젊어서 지병이 있었는데 선왕의 장례를 치르면서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병이 더욱 심해졌다.(王小有疾 居廬哀毁 疾益篤)
- 을미일. 친동생 국원공 왕운으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짐(朕)은 군부(君父)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방가(邦家)의 중기(重器)를 손에 쥐었다. 매사에 조심하여 부탁받은 권한을 조심히 살폈다.
군공(群公)과 장구(長久)의 책략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경사를 누리고, 조상의 공로를 빛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을 치루던 중 너무나 슬퍼하니, 걱정이 병이 되었다. 때가 흘러 계속 누적되니,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번 겨울 초에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바람 앞 등불같은 몸이 어떻게 환기(幻期)[8]
를 견더낼 수 있겠는가.그러나 사직의 도(社稷之圖)는 반드시 예속에게 이어져야 한다. 지금 모제(母弟)[9]
인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 국원공(國原公) 운(運)은 다능하고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다. 성덕(盛德)이 날로 갈수록 커지고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형정(刑政)의 이로움과 병폐를 마음 깊히 알고 있으니, 구오지존(九五之尊)[10] 에 오른다면 억조(億兆) 명의 소망을 채울 것이다.그러니 구소(柩所)[11]
앞에서 군권(君權)을 가지도록 하라. 무릇 국조(國朝)의 상벌대사(賞罰大事)는 모두 사군(嗣君)의 뜻을 따르라. 밖에 있는 주진(州鎭) 관원(官員)들은 본군(本郡)에서 거애하고 자신의 관사를 떠나지 마라. 상복의 제도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오호라(於戱)! 생에는 굴곡이 있으니, 아무리 험난해도 대의를 좇아야 한다. 사람 중 누가 사라지지 않는가, 다만 슬픈 것은 내 삶이 짧다는 것이다.
오로지 몇몇 고굉(股肱)과 중외(中外)의 문무(文武)들이 충력(忠力)을 다하여 내 친왕(親王)을 보좌하고, 보력(寶曆)이 무궁(無窮)하도록, 환구(環區)[12]
를 잇는다면 짐(朕)이 눈을 감아도 어떤 유감이 있겠는가?
- 고려사 순종 세가 중. 순종의 유조(遺詔).
3. 가족관계
부인으로 정의왕후 왕씨, 선희왕후 김씨, 장경궁주 이씨가 있다.
정의왕후 왕씨는 정간왕의 딸로 순종과 사촌지간으로 보통 이렇게 가까운 친척이면 혼인할 때 외가의 성씨를 택하는데 그녀는 왕씨로 적혀 있다.
선희왕후 김씨에 대한 정보는 문서 참조.
장경궁주 이씨는 이호의 딸이다. 이호는 이자겸의 아버지기도 하니 이자겸과 순종은 처남 매부지간이 되는 셈.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궁에 거처하였고 장경궁주에 봉해졌으나 자신의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그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이 때 이자겸도 그녀의 오빠란 이유로 축출되었다.
4. 태묘 악장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순종 왕훈의 찬가 제목은 "익선(翼善)"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왕이 되어서 뭐라도 한게 없으니 찬가에도 왕태자로써 역할을 잘했다고만 한다.생각컨데 왕께선 하늘을 받들고[13]
공손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을 우선하였습니다.무군(撫軍)하고 감국(監國)하시니[14]
삼십여년 동안 행했습니다.[15]밝게 빛나는 촛불을 잇고 더 흥하게 하신지 얼마 안되어 구름을 타고 멀리 가셨습니다.
그러나 큰 덕이 형성되어 노래와 악기에 흘러들어갔습니다.
화목하신 선왕(先王)께선 덕이 으뜸이셨습니다.
따뜻한 문덕(文)은 하늘이 낳았으며 부드러운 은혜는 날로 드러났습니다.
의(醫)로 민(民)을 구했으며 고(考)[16]
를 이어 효를 다했습니다.때를 맞추어 규범있게 제사를 지내니, 식에 따라 태묘를 우러러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