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고려)

 


'''고려 제11대 대왕
文宗 仁孝大王
문종 인효대왕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묘호'''
'''문종(文宗)'''
'''시호'''
장성인효대왕
(章聖仁孝大王)[1]
'''별호'''
성조(聖祖) / 문조(文祖)
'''군호'''
낙랑군(樂浪君)
'''절일'''
성평절(成平節)
'''성씨'''
왕(王)
'''휘'''
서(緖) → 휘(徽)
'''자'''
촉유(燭幽)
'''왕후'''
인평왕후(仁平王后), 인예태후(仁睿太后)
'''왕태자'''
왕훈(王勳)
'''부왕'''
현종(顯宗) 원문대왕(元文大王)
'''모후'''
평경원혜태후(平敬元惠太后)
'''능호'''
경릉(景陵)
'''출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안복궁(安福宮)[2] /
양광도(楊廣道) 수주(水州) 안산군(安山郡)[3]
'''사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4] 정궁(正宮) 중광전(重光殿)
'''생몰연도'''
'''음력'''
1019년 12월 1일 ~ 1083년 7월 18일
'''양력'''
1019년 12월 29일 ~ 1083년 9월 2일
(63세 263일)
'''재위'''
'''음력'''
1046년 5월 18일 ~ 1083년 7월 18일
'''양력'''
1046년 6월 24일 ~ 1083년 9월 2일
(37년 79일)
1. 개요
2. 묘호, 시호, 별호
3. 생애
3.1. 즉위 이전
3.2. 내정
3.2.1. 재정 개혁
3.2.2. 사법제도 정비
3.2.3. 중앙집권체제 강화
3.2.4. 개성부 복구, 남경 및 서경 부속도서 설치
3.2.6. 조세 제도의 완성
3.2.7. 유불 조화 정책
3.2.8. 무신 처우 개선
3.3. 외교
3.3.1. 연려제요(聯麗制遼)
3.3.2. 여진족 복속
3.4. 지속되는 태평성대
3.5. 거신의 난
3.6. 태평천자의 붕어
4. 최전성기의 그늘
4.1.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
4.2. 사학의 창궐
5. 태묘 악장
6. 가족관계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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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제11대 임금.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인효대왕(仁孝大王).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현종삼남이자 10대 정종의 공식 후계자.
아버지 현종 시절부터 형들이 제위에 있을 때까지 이어져 오던 고려사 리즈 시절의 절정을 찍은 성군명군. 조선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고려사에도 "문종 시절에는 백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를 받을만큼 문종의 치세 37년 동안 고려는 사회,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발전을 이룬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재위 기간에 문벌귀족들의 힘이 막강해져서 문벌 귀족 사회의 폐해를 초래했다는 실책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애매한게 문제의 발단이 되는 정책들은 이미 제6대인 성종 시절부터 시행되었던 것들이었고 문벌 귀족의 폐해로 설명되면서도 이를 처음 드러내준 이자겸의 난조차 그의 사후 43년이 지나서야 일어났기 때문이다.

2. 묘호, 시호, 별호


태자 순종이 올린 공식 묘호는 문종(文宗). 고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였으니 묘향산 보현사 비문엔 '성조(聖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종이 명의태후에게 올린 시책문엔 '문조(文祖)'라고 표현했다.[5]
시호는 두 개가 전해지고 별호도 많다.
  • 고려사 문종 세가 총서:
    • 장성인효대왕(章聖仁孝大王)
  • 고려사 문종 세가 마지막 조:
    • 명대강정인효대왕(明戴剛正仁孝大王)
시호를 줄여부를 땐 태자 순종이 올린 시호만 부른다. 그래서 '문종 인효대왕(文宗 仁孝大王)', 더 줄이면 '문종 인효왕(文宗 仁孝王)'이다.
  • 의천 묘지명:
    • 문종 인효성왕(文宗 仁孝聖王)
의천 묘지명이 위 약칭에 미칭을 붙여 '문종 인효성왕(文宗 仁孝聖王)'이라 높혀 불렀다.
  • 묘향산보현사비:
    • 성조 문왕(聖祖 文王)
인종 대에 지어진 보현사비엔 묘호를 높혀 부르고 원 묘호를 시호로 하여 '성조 문왕(聖祖 文王)'으로 불렀다.
  • 별호:
    • 문종이 재위하던 중에 제작된 '이자연 묘지명'엔 문종을 '성황(聖皇)'이라 부르고 있다.
    • 역시 문종 재위 중에 만들어진 '부석사원융국사비'에선 문종을 '황상(皇上)', '태평천자(泰平天子)'라고 불렀다.
    • '이정 묘지명'에선 '오황(吾皇)', '제(帝)'로 등장한다.[6]

3. 생애



3.1. 즉위 이전


'''등극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의 아들'''
'''9대'''
'''10대'''
'''11대'''
덕종 경강왕
정종 용혜왕
문종 인효왕

文宗章聖仁孝大王 諱徽 字燭幽 古諱緖。顯宗第三子 母曰元惠太后金氏。顯宗十年己未十二月癸未生 十三年 封樂浪君 靖宗三年 冊爲內史令。十二年五月丁酉 靖宗薨 卽位于柩前 百官奉國璽 詣重光殿朝賀。

문종 장성인효대왕의 휘(諱)는 휘(徽)이고 자는 촉유(燭幽)이며 원래 이름은 서(緖)이다. 현종의 셋째 아들로 모친은 원혜태후 김씨이다. 현종 10년 기미년 12월 계미일에 태어나 같은 왕 13년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고 정종(靖宗) 3년에는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되었다. 정종 12년 5월 정유일, 정종이 죽자 그 영구 앞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국새를 받들고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 하례했다.

고려사》 문종 총서.

王幼聰哲 及長 好學善射。志略宏遠 寬仁容衆 凡所聽斷 不復遺忘。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다. 품은 뜻이 웅대했고 사람들을 관대하게 포용했으며, 한 번 결재했던 일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고려사》 문종 37년

부왕은 여요전쟁을 치른 현종 원문대왕, 모후는 원혜태후다.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문종의 즉위 이전 관작'''
'''군호'''
낙랑군(樂浪君)
봉지인 낙랑은 옛 한사군 중 하나이며 평안도 일대의 별칭이다.
'''직위'''
내사령(內史令)
고위 왕족에게만 봉하는 명예직. 명목상 중서문하성의 최고위 관직이다.[7]
1037년에 중서문하성의 명예 최고위직인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1046년 5월, 정종이 붕어하자 유조에 따라 왕이 되었다. 정종이 아들이 있음에도 문종에게 선위한 이유는 태조 신성왕훈요 10조 중 제 3조에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내사령(內史令) - 낙랑군 왕휘는 짐이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약한 성품이 이웃 나라까지 알려졌으니 그에게 보위를 전해 밝은 빛을 나타내게 하리라.

- 정종의 유조(遺詔).


3.2. 내정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 서산(書算)을 정리하도록 명하였으며 불교를 증흥시키고 치세 기간 측신인 이자연과 최충을 중용하였다.

3.2.1. 재정 개혁


制曰 諸州府郡縣 逐年盛設輪經會 慮外吏憑此聚斂以成勞弊。今後醉飽娛樂之事 並宜禁斷。

(2월) 정유일. 왕이, "모든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는 해마다 성대하게 윤경회(輪經會)를 여는데, 외리(外吏)들이 이를 핑계로 재물을 거두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금후로는 거창하게 술자리를 벌이거나 풍악을 울리는 일을 모두 엄금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고려사》문종 정해년(원년)

27살의 혈기넘치는 청년 임금 문종은 즉위 초부터 선왕인 정종이 마련한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중 하나가 각 지역마다 강제적으로 열려 외리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악용되었던 윤경회를 폐지한 것이다. 윤경회는 불교의 경전을 여러 사람이 서로 돌리는 의식으로 불교 의식 중 하나였지만 그 규모가 커지고 방대해졌고 이에 드는 경비가 커지자 폐단이 생겼다. 문종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윤경회가 놀이화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또한 왕이 검소해야 나라가 검소해진다며 금은으로 장식된 왕좌와 발 디딤판을 동과 철로 바꾸고 금실, 은실로 짜여진 이불과 요는 모두 견직으로 교체하였고 환관을 10여명으로 축소시켰다.

3.2.2. 사법제도 정비


戊申 制曰 法律刑罰之斷例也 明則刑無枉濫 不明則罪失輕重。今所行律令 或多訛舛 良用軫懷 其令侍中崔冲 集諸律官 重加詳校 務從允當。 書算業 亦令考正。

(6월) 무신일 왕이 말하길, "법률은 형벌을 부과하는 기준이니, 그것이 명백하면 억울하거나 지나친 형벌이 없게 되고 명백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평성을 잃게 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율령 가운데 어떤 것은 오류가 많아 매우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시중(侍中) 최충으로 하여금 율관(律官)들을 모아 다시 세밀하게 검토한 후 적합하게 고치도록 하라. 서업(書業)과 산업(算業)도 역시 잘 검토해 바로잡도록 하라."

문종 원년 6월 기사

또한 문종은 범죄자들이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원년에도 위와 같이 최충에게 법을 개정하도록 조치했고 이어 1047년 8월에는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여 한번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다. 짐(朕)은 사형수를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심사를 하고도 오히려 실정에 어긋나지 않았을까 염려해 왔다. 그럼에도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한(恨)을 품게 되면 가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법관들은 부디 잘 살피고 조심하라."라며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토록 하였으며 1061년인 문종 15년에 "지금부터는 형조의 관리들을 정선해 일을 맡김으로써 억울한 형벌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이 발생하는 것에 안타깝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다음 해인 1062년 죄수 심문에는 반드시 형관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최대한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해 불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문종은 억울한 죄수가 생기는 것을 염려해 최대한 벌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아래 나오는 거신의 난 때도 주도자인 거신을 제외하면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그쳤다. 보통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을 했을 때 왕은 해당 가문을 아작을 내는데 그에 비하면 정말 파격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 기록들에도 죄수들의 건강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가 있는지 염려하거나 본인이 직접 재심사를 하는 기록들이 자주 나온다.

3.2.3. 중앙집권체제 강화


한편 문종 집권기 이전까지 고려는 중앙 집권의 이룩을 위해 지방의 호족과 향리들의 힘을 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성종 대에 처음으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한 이래로 현종, 덕종 대를 거치며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해 나갔는데 이를 문종이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
기존 12주에 절도사를 배치했던 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부/75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토록 하였다. 그후 4도호부/8목/56지주/56군사/18진장/20현령으로 다시 개편했다. 그 뒤에도 1077년 향리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도록 해 지방 호족들의 힘을 빼놓는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되었다.

3.2.4. 개성부 복구, 남경 및 서경 부속도서 설치


재위 16년 차에 문종은 부왕 현종이 폐지한 개경의 부속도서 개성부를 복구한다. 현종은 개성부를 폐지하고 개성현과 장단현으로 찢어 상서성에서 직속 관리하게 했는데, 문종은 개성부를 복구해 중앙정부의 부담을 줄였다.
재위 21년 차, 문종은 양광도(楊廣道)에 속한 도시 양주(楊州)[8]를 부수도인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개경, 서경, 동경의 기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겠는 의미를 내포했는데 훗날 왕권 강화를 전면적으로 시도했던 15대 숙종은 남경개창도감을 두어 이궁까지 창건했다. 남경의 설립으로 인해 제1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동경, 서경, 남경 삼경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종의 남경은 큰 변화없이 계속 존재하다가 충렬왕 34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고, 우왕, 공양왕 때 잠시 수도가 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게 된다.
재위 16년 차, 7대 목종이 개칭한 호경(鎬京)은 문종에 의해 서경(西京)으로 복구된다. 문종 대의 서경은 부수도였지만 황성을 두른 장락궁이 존재하고[9] 독자적인 분사(分司) 정부가 있어[10] 고려 제2수도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었다. 문종은 제1수도 개경에 부속도서 개성부(開城府)가 있듯이 서경에 '경기사도(京畿四道)'를 설치해 제2수도 서경의 부속도서를 구성했다.[11]부속도서의 단위가 부(府)가 아닌 도(道)인 이유는 서경이 제2수도이기 때문에 지위의 차이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 서, 남경 중 유일하게 서경에만 부속도서를 설치해 서경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서경의 경기사도는 고려 역사 최초의 경기도이며, 후 묘청의 난으로 인해 폐지되어 6현으로 찢어지고 격하된다.

3.2.5. 오등봉작제 완성


문종은 공, 후, 백, 자, 남으로 대표되는 오등작 제도를 도입해 제도를 성문화하였다. 문종의 오등작을 '오등봉작제(五等封爵制)'라고 하는데, 오등봉작제는 왕족이 받는 작위와 신하가 받는 작위가 서로 달라 이원화되어있었다는 독창성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오등작 문서 참조.
문종의 오등봉작제는 고대 중국 왕조인 주나라의 제도를 본 떠 천자인 주나라 왕 아래 오등작 제후가 천하를 수호한 것을 고려에 대입했다. 문종의 오등봉작제로 인해 고려는 왕 아래 오등작 이성제후, 삼등작 종실제후가 나뉘어져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나타내게 되었다.
즉 문종은 고려의 외왕내제를 강화한 셈이다. 오등봉작제는 25대 충렬왕 재위 초기까지 사용되다가 원의 간섭으로 인해 폐지되었고, 공민왕이 다시 부활시켜 재위 5년 ~ 11년, 재위 18년 ~ 21년까지 사용했다.

3.2.6. 조세 제도의 완성


재위 3년째인 1049년에 현직 귀족들에게만 토지를 내렸고 공음전을 지급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법은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법. 공음전시법은 상속과 매매가 가능한 공음전시를 내리는 별도의 법률로 이걸 1049년 시행해서 고위 귀족들에게는 피해가 없게 만든 다음에 퇴직 관리에게는 전지를 주지 않는 경정 전시과가 1076년 시행되는 것이다. 사실상 고위 관직에 대한 땅 몰아주기에 가깝다는 평도 있다. 또한 이 공음전이란게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라 말도 꽤 많이 나왔다.
이는 경종이 976년에 시행한 시정 전시과(始定田柴科)라는 토지 제도를 실시한 것을 목종덕종이 개정을 했고 이것을 다시 문종이 공음전시법으로 개정한 것이었다. 원래 이 공음전시법은 관리들의 생활을 안정화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고위 관리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좀더 안정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종이 시행한 것이었다.[12]
다음 해인 1050년 기상 이변 등의 천재지변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피해액에 따라 세금을 면해주는 재면법(災免法)과 현지 수확 상황을 지방관이 조사한 후 농작의 피해 정도에 따라 세금을 줄여주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제정하였다.
1054년 전품제(田品制)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상전, 1년 경작하고 1년 쉬어야 하는 땅을 중전, 1년 경작하고 2년 쉬어야 하는 땅을 하전으로 하여 등급별로 나눈 땅에 세금을 다르게 매기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만들었으며 1076년 12월 기존의 전시과 제도를 약간 손을 본 경정 전시과(更定田柴科)를 시행했는데 이 제도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토지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 왕건이 부분적으로 시행한 이래 간간히 유지되던 녹봉제(현물이나 월급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직책만 있고 별다른 업무를 하지 않는 관리들에게도 지급되던 토지를 더이상 지급하지 않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현안은 토지 지급 대상자인 공신과 관리들 수가 늘어나 토지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시행한 것이다.

3.2.7. 유불 조화 정책


문종은 자신의 넷째 아들 의천을 포함한 총 3명의 왕자를 출가시키는 한편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13]시켰는데 이를 통해 고려의 국교인 불교가 다시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승과(僧科), 왕사(王師), 국사(國師) 제도를 완성시켜 승려들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모습도 보였다. 반면 이러한 승려들의 우대를 이용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059년 8월 아들이 3명 이상인 집에 한해 15살 이상인 아들 1명만 출가가 가능하도록 제한하는 칙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요나라의 거란 대장경이 처음으로 고려에 반입되기도 했다.
1067년에 전무후무한 규모의 흥왕사를 창건한 것으로 유명한데 어느 정도였냐면 완공에 13년이 걸렸으며 총 2천 8백 간으로 규모가 궁궐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쳤다고 전한다. 문종은 또 여기에다 144근, 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였으며 절 주변 성벽까지 둘러쳤다. 여기에 거주하는 승려만 수천 명 규모. 각종 불교 행사를 주최해서 하루 걸러 하루씩 불교 행사를 빙자한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도성 백성들은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비대해진 대신 세력을 견제하고 전란으로 지친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14] 이 시기 교종 파벌들은 모두 문벌 귀족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왕실은 광종의 불교 통합 운동이 실패한 이후 가끔 사찰이나 세우면서 한 축만 챙기고 있었던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종을 왕권 강화 차원에서 통합하려고 한 것이 의천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발달은 사찰과 승려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고 술과 고기를 먹는 등 세속화되는 모습을 낳았는데 1056년에 문종이 "승려답지 못한 자에겐 엄히 벌을 내릴 것이다."라는 칙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참고로 훗날 유학자였던 이제현은 "문종께서는 고려 역사상 최고의 왕이시다."라고 하면서도 "근데 궁궐보다 사치스러운 절 만든건 나라 말아먹은 양무제의 뻘짓과 동급이여서 까야댐."[15]이라며 문종을 깠다.
이처럼 불교가 부흥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문종은 유교의 발전도 같이 꾀했다. 그는 직접 아버지가 최초로 문묘에 배항했던 설총최치원 등을 존숭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3.2.8. 무신 처우 개선


문관의 힘이 강력했던 고려 초중기에 무관에 대해 혜택을 주었던 것도 바로 문종이다.
성종의 관제 개편 이후 고려의 관직은 문반직과 무반직으로 나뉘었다. 무반직 중 최고위 직위인 상장군(上將軍) 직의 품계를 정3품[16]으로 정하여 상당히 높은 대우를 해주었다. 2성 중 중서문하성 최고위 직위이자 문반직 중 최고위 직위인 문하시중이 종1품[17], 상서성 최고위 직위인 상서복야가 정2품[18]인 것을 감안하면 상장군이 정3품이 된 것은 문벌귀족이 지배층인 국가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현종 당시 외세의 침략을 겪은 것을 반영해 나라를 이끄는 것 만큼이나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 이와 같은 정책을 펼쳤다.

3.3. 외교


고려의 국력이 정점에 달했던 황금기답게 국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비록 요나라(거란)와 송나라의 연호를 쓰고 그들을 상국으로 대하긴 했지만, 고려도 나름대로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고 요와 송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최종필의 이름 강제 개명 사건이 있는데, 사건 내막은 이렇다.

1055년 10월, 거란(요나라)의 예부(禮部)에 갔던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종필(崔宗弼)이 돌아와서 "거란 놈들이 제 이름에 지네 황제 이름[19]

이 들어가있다고 지들 마음대로 바꿨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최종필의 말을 들은 신하들이 "이 미련한 작자야. 사적인 편지도 아니고 국가 간의 서신인데 거란 놈들이 네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가 자기네 왕 이름과 같다고 빼 버리면 우리 폐하의 체면이 어떻게 되시겠느냐. 바꾸기 전에 폐하의 뜻을 물어보겠다고 대답했어야지. 그리고 글자에서 획 하나 빼거나 점 하나 줄여도 되는 일인데 글자가 통째로 빠지는 걸 팔짱 끼고 보고 있었더냐. 폐하, 저 얼빠진 놈을 즉시 벌하소서!"[20]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문종은 "그럴수도 있지 뭐" 라고 쿨하게 넘어가 줬다.

1056년 10월에 일본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개성에서 장사하는 이슬람 상인들 수가 급격하게 불어나기도 했다.
또 단교 84년만인 1078년 거란의 묵인 아래 북송신종과 재수교했다. 거란과의 수교는 현종 때인 1019년 혹은 1020년이지만 송과 국교를 끊은 것은 성종 때인 994년이다. 여요전쟁 1차 침공 때 송이 원병을 거절했기 때문. 송과 재수교 할 때 문종이 풍비증에 걸려 송의 형조라는 의사가 신종의 명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3.3.1. 연려제요(聯麗制遼)


1004년 거란과의 영토 전쟁에서 패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송나라는 신종(神宗 : 1068년 ~ 1085년 재위) 때 신법당(新法党 : 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 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으로 혁신 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외교 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 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 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박종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송·거란·여진 사이 줄타기 외교 … 103년 만에 보주 탈환

송나라 역사 단교해온 고려에 손을 뻗으며 고려와 연합해 요나라를 제압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라는 외교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고려 문종은 송나라의 이러한 계산을 파악, 현종 대 이후 끊겼던 송나라와의 연줄을 다시 잡았다.
또한 송나라(북송)와의 재수교는 고려의 급격한 국력 상승을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문종은 요나라에 어떠한 긍정적인 제스쳐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 동쪽 영토를 거란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를 청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055년 7월, 압록강 동쪽에 요나라가 성을 쌓고 다리를 설치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가을 7월 초하루 정사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거란의 전 태후와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 동쪽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란이 성과 교량을 가설하거나 전투용 방책과 사격용 궁구를 설치하면서 점차 국경선을 넘어오니 이는 욕심이 지나친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까지 새로 만들어 우리 영토를 잠식하고 있으니 『춘추』에서 지적한 '제멋대로 뻗어나가게 방치하지 말리니 더 이상 방치하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을 중지하도록 경고하되, 그들이 거부하면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건의에 따라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국에서는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교량과 보루를 다수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해왔으며,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허락을 얻지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최근에는 내원성(來遠城.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의 군사들이 우리 성 바로 근처까지 사격용 궁구(弓口)를 이설했으며, 망루를 만들려고 건축 자재까지 쌓아 놓음으로써 변경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동경유수께서는 이웃나라와의 친선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실정을 잘 헤아려 황제께 잘 보고해 주셔서 우리 땅을 돌려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임의로 설치한 성과 교량, 전투용 방책과 궁구 및 망루는 모두 철거하도록 해주십시오."

고려사 세가 문종 9년(1055) 을미년 가을 7월

간단히 요약하자면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에 다리를 설치 → 문종 曰 "니네 지난번에 우리 아부지랑 협의할 때 압록강 경계가 우리 영토라고 했는데? 좀 꺼지지?"
이러한 요구에도 요나라가 답변을 하지 않자 문종은 "저놈들 대답할 때까지 사신 보내."라고 명했는데 그래서 요도종에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는데 항의문도 같이 보냈다(...). 그럼에도 요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진 않았는데 태자 책봉이나 사절단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보내주는 등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요나라가 고려의 이러한 강경한 반응에도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은 고려의 국력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21] 문종은 이러한 고려 국력을 바탕으로 1058년 8월 서해를 건너게할 큰 배를 만들도록 지시해 송나라와의 재수교를 명령했지만 신하들이 "송나라 가는거 요나라에게 걸리면 X되는 겁니다."라고 반대해 실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068년, 송나라에서 상인 황신(黃愼)을 고려로 파견해 재수교를 강력하게 원했고, 문종도 송나라와의 관계 복구를 통해 송 - 거란 - 고려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판단,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문종의 집념으로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1071년 3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송나라와의 재수교를 강행했다(송신종 5년이기도 하다).

희령(煕寧) 3년(1070년) 군(郡), 현(縣)에서 고려의 사신을 접대했었던 사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 사신이 중국 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물과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접근해 올까 염려해 고려 사신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휘(徽.고려 문종의 이름)가 이부(二府)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을 내려 시장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값이 비싼) 겸백(縑帛.비단)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했다. 휘(徽)가 또 표(表)를 올려 의약(醫藥. 의원과 약) 및 고려 사람을 가르칠 화공(畵工), 소공(塑工) 등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니 아중(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희령 9년(1076년)에 고려가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해 도정서역(都亭西驛)의 예에 따라 고려 사신들이 묵는 객관을 수리하여 매우 후하게 대우하게 하였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송나라에게는 고려와의 외교 라인 개설이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고려 사신은 지나가는 곳에 사람을 못다니게 할 정도로 굉장히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후 고려 사신들에 대한 대우도 좋아져 예종 대에 국신사로 승격받아 서하보다 높고 요나라와 동등한 대접을 받기에 이른다.
송신종과 고려 문종은 서로 친필 편지로 건강도 위문, 걱정할 만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종이 1078년(원풍 원년)에 중풍에 걸리니 의사 안도(安燾)와 진육(陳陸)을 고려에 파견하여 문종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었다. 같은해 다시 한림의관(翰林醫官) 형개(邢愷, 혹은 형조), 주도능(朱道能), 심신(沈紳), 소화(邵化)를 고려에 파견하여 대량의 우황용뇌주사사향과 행인 등 100여 종의 귀중한 약재 등을 고려 문종에게 증여하였다. 2년 뒤 고려에서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으로 하여금 인삼 각각 1000을 답례로 보냈으며, 그해 7월 계절풍을 타고 송나라에서는 의관(醫官) 마세안(馬世安)을 다시 고려에 파견하였다. 이런 송과 고려의 "의료 외교"는 양국의 친교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북송이 망하는 송휘종, 송철종 때까지 이어진다.
송나라는 또 괄지지, 여지지, 고려풍속기, 고려지 등의 지도지리서를 도서관에 채우기 위해 고려에 청하기도 했다. 심지어 외국의 지도를 주문받아 만들어 준 적도 있어 단순한 교환이 아닌 고려의 지도 자체가 수출 대상이었다는 사례가 된다.

3.3.2. 여진족 복속


재위 기간 동안 총 5차례의 동여진족의 침략이 있었지만 모두 격퇴하였고, 이후 여진족은 토산물을 바치는 등의 저자세 기조를 띄었다.
문종 재위 10년차인 1055년 7월엔 동번적(東蕃賊)을 치기 위해 시어사(侍御史)[22] 김단(金旦)을 동로 마병이사(東路 馬兵貳師)로 봉해 파견했다. 김단은 전쟁 시작 전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적을 맞이했을 땐 가족을 잊고 순국하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다. 우리의 생사는 바로 오늘에 달렸다!"

臨敵忘家以身徇國分也我生死正在今日

- 고려사 문종 세가 中.

이후 김단 휘하의 고려군은 기세등등하게 여진을 공격했고, 촌락 20여 곳을 차지하자 동번적은 모두 도망쳤다. 뒤엔 무기, 양, 말을 엄청나게 획득했다고 전한다.
특히 문종 재위 35년차인 1080년 12월엔 동번(東蕃)이 난을 일으켰다. 동번이 정확히 어떤 사태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종은 매우 화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평장사 문정[23]을 판병마사로 임명해 3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 이 진압 작전으로 동번이 버리고 간 수많은 무기, 소와 말 100여 마리를 노획하는 한편 촌락 10여 곳을 점령했다.
다음 해인 1081년, 문종은 곧바로 서번(西藩) 추장들의 직위를 승진시켜 위무한다. 동번은 추장 몇 명을 보내 말을 바쳤고, 아들을 데리고 와 문종에게 입조(入朝)시켰다. 이듬 해 1082년엔 동번이 조공 및 입조를 해왔고 문종은 동번의 추장 중 자주 전쟁을 일으켰던 자들을 잡아 남쪽으로 유배보낸다.
이렇듯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가며 여진족과 평화관계를 이어갔다.

3.4. 지속되는 태평성대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근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송나라에서는 매번 왕을 칭상하는 조서를 보내 왔으며, 요나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동쪽의 왜국에서도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자발적으로 투항해 와 우리 국적을 얻고 거주지까지 받았다[受廛].''' 그러므로 임완(林完)은 문종을 두고,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라고 칭송했다. 다만 개경 부근의 한 개 현(縣)의 치소를 옮기면서 을 세운 일은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 웅장한 건물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높다란 성벽은 개경의 성벽과 같았으며 황금으로 탑을 쌓는 등, 모든 것들을 그에 준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나라를 망친 양무제[蕭梁]의 어리석음에 견줄만한데, 문종은 후대에 자신의 덕행을 찬미하는 자가 이 점을 탄식하게 될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현의 논평'''. ##


현종(顯宗)이 중흥의 공을 이룬 덕분에 종묘와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으며 '''문종(文宗)이 태평성대의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었습니다.'''

'''김종서. 《고려사》 전문 中'''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은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이렇듯 문종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불교유학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외교적으로도 송, 요, 일본과의 관계의 중심추를 잘 잡아 외침이 없었으니 이 시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은 송에 밀항 유학 뒤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 불교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고, 해동공자 최충도 이 시기의 인물로 유학 또한 흥성하게 된다.
심지어 보통 명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상당수는 재위 기간이 길수록 재위 후반부에 혼란이 일기 쉬운데, 문종은 재위 후반부로 접어들어도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다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은 기껏해야 여진족 침입을 막아냈다 정도 뿐. 재위도 37년으로 고려에서는 고종(46년) 다음으로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
다만 이처럼 한국사에 손꼽힐만한 태평성대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대인들 사이에서 문종의 일반적인 인지도는 그 업적에 비해 다소 낮은 축에 속한다. 사극 드라마에라도 나오면 대중적 인지도가 좀 올라가련만, 이시기는 작가들도 잘 몰라서인지 아님 알지만 얘기거리가 딱히 없어서인지 어쨌는지 잘 나오질 않는다. 물론 사극에서 고려 시대 자체가 조선 시대에 밀려 취급이 좀 안습하긴 하다만..
교과서에서도 고려의 태평성대 기간은 거란의 침공(여요전쟁)과 윤관여진정벌(동북9성) 사이에서 생략되며, 바로 문벌 귀족의 폐해를 설명하고 무신정권으로 넘어가는 등 은근히 소외받는 시기다. 안습 또 안습.
교과서에서도 등장이 없으니 한능검이나 공무원 시험 등 일반인들이 주로 치는 시험에도 등장이 없다. 그래서 시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종대를 전성기로 아는 사람도 은근히 있는편.[24]

3.5. 거신의 난


이러한 태평성대 속에서도 한차례 쿠데타가 일어날 '''뻔''' 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바는 이러하다.

(중략) 처음에는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왕을 폐하고 왕기를 세울 것을 꾀했다. 문종 26년에 병사(兵士) 장선(張善)이 고변을 올리므로 명하여 거신을 죽이고 그 족속들을 주멸(誅滅)하였다. 왕기는 이미 죽은지라 이에 왕진(王璡)을 남해에 유배하고 왕영(王瑛)은 어렸으므로 면하였다. 또 평장(平章) 왕무숭(王懋崇),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李氏),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李氏)가 그 음모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에 왕무숭 및 그의 아들 왕정(王靖)을 안동에 내치고 장녕공주와 수안택주는 곡주에 내쳤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자손에게도 각각 직 1급을 사하였다.

고려사

병오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했다.

고려사》 문종 26년 7월 기사.

하급 무관 거신이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왕기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쿠데타는 취소된 상황에서 장선이라는 병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문종에게 "저 자식들 저거 쿠데타 일으킬뻔했음요"라고 꼰질렀고, 거신을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유배보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웃긴 건 쿠데타를 들킨 게 쿠데타의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왕기의 사망 2년 후였다는 거다. 쿠데타 모의가 일어난 건 장선이 왕에게 말하기 수년 전에 이미 흐지부지된 일이었다는 것. 이런 식으로 좀 정황이 묘한데다 이 반역에 대한 자료들이 부족한 형편이라 지금도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예를 들어 이 때 언급된 장녕궁주와 수안택주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왕의 후궁 아니면 왕족 여성일 거고, 정황상 인천 이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 거라는 것 정도만 추측이 가능할 뿐.[25]
한편으론 역모에 가담한 왕무숭[26]의 직책이 판상서병부사[27]였던 점을 들어 병권에 대한 정치적인 싸움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당시 정국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쿠데타 모의였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문종 세가에선 저 단 한 줄이 쿠데타에 대한 설명의 전부다.

3.6. 태평천자의 붕어


문종은 만 28살에 즉위해 총 37년 동안 재위했다. 재위 36년째인 1082년엔 남부를 순수하고 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지만 이듬해 1083년 5월 병자일에 병에 걸리고 만다.
결국 7월 신유일, 문종은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유조(遺詔)를 남긴다.

(朕)은 하찮은 몸으로 조업(祖業)을 수호해 왔다. 천명(天命)은 끝이 있으니, 이제 날(予) 돌보지 않아 오랫동안 병에 걸려 결국 대기(大期)를 만났다.

하루라도 만기(萬機)를 비울 수 없다. 오늘부터 군국정사(軍國政事)는 모두 태자 훈(勳)에게 위임하니 보위(寶位)를 전해 받도록 하라.

경 등은 나의 간곡한 말을 몸에 새겨 충효를 다하라.

- 고려사 문종 세가 中. 문종의 마지막 조령.

유조를 선포한 뒤 본궐의 편전 중광전(重光殿)에서 눈을 감았다. 빈전은 선덕전(宣德殿)에 세워졌고 무덤 경릉은 불일사(佛日寺) 남쪽에 조성되었다. 후 흥왕사가 문종의 원찰이 된다. 향년 만 65세였다.
고려사 문종 세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배움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쏠 줄 알았다. 품은 지략은 원대했고 관대하며 민중을 끌어 안았다. 무릇 듣고 결정했었던 일은 절대 잊지 않았다.

효자사왕(孝子嗣王) 순종은 문종 인효대왕 애책을 만들어 바쳤다. 순종이 올린 봉책(鳳冊)엔 7월 18일 신유시에 문종이 붕어(崩于)했다고 나오며 신성(神聖)이 만든 나라를 인효(仁孝)가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찬양했다.

4. 최전성기의 그늘



4.1.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


사실 고려의 최전성기를 만들어 태평성대를 꽃 피웠지만 그것이 문종의 역할인지, 또 문벌귀족들의 성장을 촉진했던 시기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기는 문벌귀족 출신 재상인 이자연최충이 중심이 되어서 통치한 문벌 귀족 통치기였다. 실제로 문종의 업적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꽤 많은 편이다. 스스로 움치고 뛸 수 있는 여건을 태종으로부터 받은 세종과 거물급 재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조선 문종과는 상황도 다르고 주도력이 다르다고 볼 수 있을지도. 예를 들면, 이 시기 고려 문벌 귀족들은 스스로의 특권을 늘려가고 있었는데, 문종이 이에 대한 저항을 한 것이 흥왕사를 만든 것뿐으로 볼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인천 이씨 같은 문벌귀족 세력의 대두에는 어느 정도 문종 본인이 기여한 책임이 있는데 이는 문종이 이자연의 세 자매와 결혼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인천 이씨 세력이 외척 가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자연의 맏딸 인예태후순종, 선종, 숙종 등을 낳았다.[28] 그러나 마지막 주자가...
이자연을 키운 이유가 흥왕사 건립과 송과의 국교 재개 등에서 의견이 일치한 것을 생각하면 약간은 김조순안동 김씨 느낌도 없지 않아 있는 듯. 공음전시로 세습 가능한 토지를 물려주게 한 것도 음서와 함께 문벌귀족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다만 귀족이라고 해서 다 우왕굳, 하는 게 아니라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귀족이 전부 능력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상층은 당연히...
어쨌든 이러한 태평성대의 모습들 중에서도 곳곳에 문벌귀족들의 권력 강화의 움직임도 상당량 보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재위 3년째인 1049년엔 5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시행된 것과 남반직의 최고위가 이전의 "4품위"에서 "7품위"로 떨어져 계급이 낮아지기도 했는데 이는 남반이 천시되고 양반들의 신분 우월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4.2. 사학의 창궐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이 실시되었고, 또한 최충의 9재 학당을 포함하여 사학 12도가 이뤄지는 등 귀족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다만 이게 큰 문제가 되버린 것이 국자감이 이후 지리멸렬해졌기 때문. 애초에 문음이 중시되던 고려에서 과거 제도마저 문벌귀족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시점이 바로 사학의 창궐이다. 더구나 여기에 좌주 - 문생 관계라고 하여 지공거 시스템까지 더해지고 만다. 소위 말하자면 지공거는 과거 시험 출제 위원 즉 현재로 따지면 공무원 시험 출제 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과거 서험 출제 경향을 잘 알고 있는 지공거 출신들에게 당연 학생들이 따르는 건 당연했던거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문벌귀족의 입지는 절로 탄탄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고려국왕들은 국학인 국자감의 부활을 위해서 개고생하게 된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문종 시대엔 '''사립 학원과 학벌의 대두가 심각해졌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국립 대학인 국자감은 자연스럽게 쇠퇴기에 접어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이걸 타파하기 위해 그의 아들 숙종이 국자감 내에 서적포를 설치하고 그의 손자인 예종이 7재라는 전문 강좌를 편성하면서 보문각과 청연각(학문 연구), 그리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까지 설치하게 된다. 예종이 만든 7재는 그의 아들인 인종이 경사 6학으로 재편하고 100여년 뒤 충렬왕이 장학 재단인 섬학전을 설치하고 관리 교육을 위해 경사교수도감이라는 임시 관청도 만든다. 그리고 국자감은 충선왕 때부터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고 공민왕 때부터 전문 유학 기관으로 바뀌게 되면서 이 명칭과 목적이 조선을 거치게 된다. 이게 문종 이후 후대 왕들의 관학 진흥책이었다.

5. 태묘 악장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문종 왕휘의 찬가 제목은 "대명(大明)"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당신은 문왕(文王)[29]

과 맞먹으시니, 총명하시고 차고 넘쳤습니다.

민을 인자하게 이끄니, 창고가 꽉 찼고 억 개가 넘었습니다.

포정(布政)[30]

을 뛰어나고 넉넉하게 하시니, 신이 그 덕을 밝혔습니다.

경사가 운손(雲孫)[31]

에게까지 흐르고 하늘과 함께 끝이 없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밝고 밝은 아조(我祖)여.

무(武)와 함께 문(文)과 함께 공(功)과 은(恩)을 베풀었습니다.

즐거움이 궁정에 있으니, 여러 악기가 연주됩니다.

그리워하는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많은 편안한 도움을 주시옵소서.

주문왕과 비유하며 고려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문종을 찬양했다. 백성의 삶이 가장 풍족했을 때니 다 찬 창고가 억 개가 넘는다며 극찬했다.

6. 가족관계


  • 인평왕후(仁平王后): 친부 현종과 이모 원성태후의 딸로 덕종, 정종과는 동복남매, 남편 문종과는 부계로 이복남매 사이로, 모계로는 이종 4촌간이다.
  •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자연(고려)의 딸.
    • 조선국양헌왕: 양헌왕의 3남 강릉공(江陵公) 왕온(王溫)은 의종의 1비 장경왕후, 명종의 왕비 광정태후, 신종의 왕비 선정태후의 아버지로, 의종, 명종, 신종은 문종의 증손자이면서 동시에 증손녀 사위가 된다.
    • 부여공 왕수: 왕위에 오른 순종, 선종, 숙종과는 이복 형제 사이. 숙종 재위기 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소문에 얽혀서 유배형에 처해졌다.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는지는 불명이지만 하여튼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 와서야 복권되었다.
    • 진한공 왕유: 문종의 손자인 예종의 3비 문정왕후의 아버지.
  • 인목덕비(仁穆德妃): 김원충의 딸.

7. 기타


  • 문종 본인은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65세까지 살았지만, 아들들과 손주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그나마 삼남 숙종이 50줄을 넘긴 52세라는 나이로 아버지 다음으로 장수하기는 했지만, 사실 52세라는 나이도 당시 기준으로 봐도 장수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편.
  • 동문선에 태자 순종이 만든 문종의 애책문이 남아있다. 외왕내제의 나라답게 문종의 죽음은 붕어(崩於)로 표현되었다.[32] 고려사와 동일하게 7월 18일에 죽었으며 애책엔 추가로 신유시, 오후 5시~7시 사이에 붕어했다고 더 상세히 기록했다.
  • 거란이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라고 불렀는데 주몽과 일중유자는 모두 고구려동명성왕을 의미한다. 비슷하게 아들 숙종도 삼한(三韓), 오부(五部)의 주인으로 불렸는데 오부는 옛 고구려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를 의미한다.
  • 당시 왕경 개성부 우봉군[33]에 위치한 박연폭포와 관한 민담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문종이 폭포에 가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포가 크게 흔들려 문종이 놀랐다고 한다. 호종하러 따라간 신하들이 분노해 폭포에 사는 용의 죄를 따지는 글을 써 물 속으로 던지자 용이 나와 사죄했다. 이에 신하들이 곤장을 쳤고, 용의 피로 인해 폭포가 붉어졌다고 한다.
  • 1047년 7월, 개경 개성부 장연현에 사는 문한(文漢)이란 사람이 자신이 신의 뜻을 받았다며 자신의 부모, 여동생을 살해하는 패륜 행각을 벌인 뒤 아이 4명을 추가로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식을 듣게 된 문종은 곧바로 문한을 체포 후 처형하고 그 수급을 저잣거리에 걸어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또한 장연현 현령과 현위를 바로 파면시켰다. 기록에 남을 정도로 당시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1] 고려사 문종 총서 기준.[2] 고려사 현종 세가 기록.[3] 고려사 지리지 기록.[4] 아버지 현종이 통합시킨 개경과 개성부를 다시 분리했다. 개성부는 충렬왕 때 개성현으로 격하되었고, 공양왕 때 경기좌우도로 바뀐다.[5] 고려사 종실 열전 숙종후비 발췌.[6] 더불어 태자 순종은 저황(儲皇), 왕족들은 친왕(親王)으로 등장한다.[7] 실제 실권을 가진 최고위직은 문하시중이다.[8] 양광도의 양이 양주를 가리킨다.[9] 황성은 천자가 있는 수도에 세우는 성이다. 즉 서경은 천자가 있는 도시라는 것.[10] 고려사 백관지 외직 기록.[11]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평양부 기록.[12] 하지만 마냥 좋은 제도는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문벌 귀족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자세한 것은 하단의 그늘 항목 참조.[13] 사실 현종 때 이미 부활했으나 완전히 정착된 것은 문종 대였다.[14] 실제로 이후 의천이 주지로 부임한 흥왕사는 왕권 강화를 위한 중심 사찰로 급부상하게 된다.[15] 원문 : 다만 개경 부근의 한 개 현(縣)의 치소를 옮기면서 절을 세운 일은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 웅장한 건물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높다란 성벽은 개경의 성벽과 같았으며 황금으로 탑을 쌓는 등, 모든 것들을 그에 준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나라를 망친 양무제(蕭梁)의 어리석음에 견줄만한데, 문종은 후대에 자신의 덕행을 찬미하는 자가 이 점을 탄식하게 될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의 논평 (국역 고려사 : 세가, 2008년 8월 30일, 경인문화사)[16] 정3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17]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8] 정2품 특진(特進).[19] 전대황제인 흥종(興宗, 재위 : 1031년 ~ 1054년) 이름이 야율'''종'''진(耶律'''宗'''眞)인데, 최종필의 '''종(宗)''' 자와 같다고 거란 측에서 서신에 적히는 이름을 최필(崔弼)로 바꿔 버렸다.[20] 고려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冬十月 乙酉 生辰回謝使戶部侍郞崔宗弼, 還自契丹, 奏, “禮部云 ‘帝名宗眞, 汝名犯宗字, 宜改之.’ 臣於表狀, 改稱崔弼.” 門下省奏, “宗弼, 宜答以, ‘我國不知所諱, 誤犯之, 表章所載, 未敢擅改.’ 彼若强之, 但减點畫, 庶合於禮, 宗弼擅改表文, 有辱使命, 請科罪.” 原之."[21] 사실 이미 1019년 귀주에서 쓴 맛을 본 거란은 덕종 때 정주에 침입한 것을 빼고는 다시는 고려의 강역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성종과 도종 이후 다시금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주변국 침략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 탓도 컸다.[22] 어사대(御史臺) 소속 종5품 직위.[23] 문종의 둘째아들 선종의 배향공신이다.[24] 언급이 전무한건 아니다. 경정전시과가 언급이 되긴 하지만, 시험에는 경종의 시정전시과가 주로 출제되는 편이며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최충의 9재학당 설립 당시의 왕 정도로만 언급되는 편.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이라는 언급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5] 사료에서 '수안택주'는 이 시기 이후의 기록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수안택주는 1088년생이라 저 쿠데타 모의 사건(1071년)에서 언급된 수안택주와 동일인물이 아니다.[26] 왕가도의 아들로 문종의 이복형인 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남매가 된다. 왕무숭의 딸이 이자연의 조카 이예(인예태후의 사촌)의 후처가 되었기에 인주 이씨와 사돈 관계가 된다.[27] 判尙書兵部事. 상서성 병부의 장관.[28] 이러한 일은 이자연의 고모부가 되는 김은부가 먼저 행한 바가 있다. 두 집안 모두 3대에 이르기까지 세도를 누렸다.[29] 주나라 문왕을 말한다. 문종의 묘호, 주문왕의 시호가 서로 같다는 걸 은유함.[30] 정치를 베풀다. 철원 태봉 본궐의 정전 이름도 여기서 따옴.[31] 머나먼 후손.[32] 천자의 죽음을 붕(崩)이라 한다. 고려사는 제후의 죽음인 훙(薨)으로 표현했다.[33]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