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1. 서쪽 수도 西京
일반적인 의미로, 서쪽의 수도.
1.1. 한국 역대 왕조의 서경
1.1.1. 발해 왕조
발해의 다섯 중요 도시였던 5경 중 하나로 발해에서 당나라로 무역을 하러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중국 지린 성 린장 시(臨江)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여기서 바로 강 건너가 바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여겨지는 중강진이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부흥운동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잠깐 동안 정안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1.1.2. 고려 왕조
서경은 고려 삼경(三京)[1] 의 하나로서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직할시의 고려시대 명칭이다.
태조는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을 옮겨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분사제도를 시행해 조정의 일부를 서경에 놓기 시작한다. 서경은 그 후 줄곧 중요 시설과 기관이 설치되고 풍수지리, 도참설에 따라 역대 임금이 장락궁에 행차했다.
광종 11년(960년)에 서도(西都)로 개칭되었다.[2]
성종 14년(995년)엔 지명이 서경으로 돌아오고 지서경유수사 등 관원이 설치되었다. 이후 문·무반 및 5부를 별도로 설치하여 개경과 대등한 제도와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목종 때엔 호경(鎬京)으로 개칭되었다.
현종 때는 장락궁에 황성이 설치되었다.
문종 때엔 서경으로 지명이 돌아오고 부속도서인 '''경기사도(京畿四道)'''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서경은 삼경 중 유일하게 부속도서를 가진 경이 되었다.'''
인종 때는 묘청 등이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켰고, 그 일환으로 대화궁을 건설한다. 결국 개경파에 밀려 서경파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난을 일으키는데 당시 끈질긴 항전으로 진압군에 의해 많은 타격을 받았다. 뒤에 서경의 복구 문제가 대두하여 인종 16년(1138년) 6조를 설치하고 영(令), 승(丞) 등을 두었다. 경기사도는 폐지되어 6현으로 나뉘어졌다.
원종 10년(1269년) 최탄, 이연령 등이 난을 일으켜 여러 성을 바치고 원나라에 항복하였고, 원은 이곳을 동녕부로 삼았다.
충렬왕 1년(1275년)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충렬왕 16년(1290년) 고려에 다시 반환되어 서경이 되었다.
충선왕 대에 평양부(平壤府)로 격하되었다.[3]
공민왕 5년, 평양부에서 다시 서경 지명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8년에 평양만호부(平壤萬戶府)로 강등되었다.[4] 이후 다시 평양부로 격하되었다. 우왕 대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군이 여기서 출발하였다.
서경은 서도(西都), 웅도(雄都), 호경(鎬京), 소성경(小城京)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평양직할시/역사#고려 문서 참조.
1.1.3. 기타 지명
1.2. 중국 역대 왕조의 서경
1.2.1. 한나라·당나라
장안 : 동쪽의 뤄양에 대하여 서경이라고도 불렀다.
1.2.2. 송나라
뤄양 : 동쪽의 동경 개봉부에 대하여 서경 하남부(西京 河南府)라고 불렀다. 경락(京洛)이라고도 했다.
1.2.3. 요나라 (거란)
서경 대동부 : 다퉁 (대동)
1.2.4. 금나라 (여진)
서경 대동부 : 다퉁 (대동)
1.3. 일본의 지명
사이쿄 (西京 / 사이쿄우)
교토부의 별명으로, 도쿄 (東京 / 토우쿄우)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교토시의 구로 니시쿄구 (西京区 / 니시쿄우구)가 존재하기도 한다.
1.4. 관련 문서
2. 사서오경의 하나 書經
유교 사서오경의 하나. 상서 문서로.
3. 고려, 조선 시대 제도 署經
고려, 조선 시대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의 제정 등에 있어 대간(臺諫)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이다.
간쟁(諫諍), 봉박(封駁), 관리에 대한 탄핵 등과 함께 대간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4. 西經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자오선의 서쪽 부분의 경도.
5. 걸그룹 공원소녀의 멤버 서경
6. 서울경제신문의 약칭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