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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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제16대 임금.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문효대왕(文孝大王).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어린 조카인 헌종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보위에 오른 숙종의 장남.
승하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부왕 숙종이 마련한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예종은 신하들을 억제하고 정권을 차지해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음악, 시, 연회를 좋아했지만, 국자감 세분, 학문 연구 각(閣) 설치, 서경 용덕궁 건설을 통해 중앙귀족 견제, 무과 최초 설치, 북방 정벌, 대 여진 강경외교, 대 송 친화외교를 성공시켜 국정을 탄탄하게 이끌었다.
다만 부왕 숙종 때부터 이어져오던 측근 정치가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을 심화시켰으며,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금나라를 세울 정도의 힘을 가진 여진과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강력한 왕권을 지니며 국정을 주도했던 예종 때까진 이런 단점이 억눌러졌으나, 태자 인종 대부터 안좋은 점들이 줄줄이 터지게 된다.
2. 묘호와 시호
공식 묘호는 예종(睿宗)이다. 예종 시책문[5] 에선 '허(虛)로 명(明)에 이르고 사(思)로 성(聖)을 만들었다(虛以致其明 思以作其聖)'란 뜻으로 예 자 묘호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문(文)으로는 문학 진흥에 힘썼고, 무(武)로는 17만 대군을 출정, 북벌을 진행하여 고려의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예(睿) 자에 맞다고 볼 수 있다. '현화사승통각관묘지명'[6] 에선 예묘(睿廟)로 등장한다. 다음 왕조의 묘호가 같은 왕과는 아버지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호는 제순명렬문효대왕(齊順明烈文孝大王). 태자 인종이 문효를, 또 명렬을, 4대손 고종이 제순을 올렸다. 대표시호는 문효대왕(文孝大王)으로 예종의 공식 묘호 및 시호는 예종 문효대왕(睿宗 文孝大王)이다. 예종 시책문엔 문 자는 '경영의 근원에 통달하다(達經緯之本)', 효 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배우다(博愛敬之心)'란 뜻에서 올렸다고 한다.
신하들이 예종을 황옥(黃屋)[7] , 고려 조정을 천공(天工)이라 불렀다.[8] 신하 곽여는 자신의 시에 예종을 옥제(玉帝), 일월(日月)로, 만월대를 천문(天門)으로 비유했다. 예종은 자신의 보위를 천서(天序)라고 칭하는 등 천자로서 군림했는데, 이는 당시 여진족의 발호와 맞물려 고려는 더욱 보수적으로 변하게 된다.
3. 치세
왕우는 할아버지 문종 재위 33년차인 1079년 1월 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 국왕, 왕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며 그저 왕위 계승권에서 먼 방계 왕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 문종이 붕어하고 나서 그 자리를 이어받은 순종조차 한 달만에 붕어, 그리고 즉위한 큰아버지 선종이 재위 11년만에 승하하면서 어린 사촌 헌종에게 자리를 넘기자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나라 사람들이나 조정, 심지어 같은 친척들조차 아버지인 계림공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형이었던 선종이 승하 전 유조를 통해 헌종을 후계자로 임명했고 끝내 그가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왕의 등극과 권신의 출현 등으로 인해 점차 조정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세력을 키워 이자의 등 반대파를 몰아낸 아버지 숙종이 헌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9] 이 때 왕자가 된 예종의 나이는 만 16살이었다.
예종은 처음부터 태자 혹 왕자였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왕족들 중 한 명에 불과했으며, 장성하고서도 다른 왕족들 및 자신의 숙부들과 형제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근신들과 경쟁해야했다.[10] 이런 배경 속에서 예종은 살아남는 방법과 정치적 감각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11] 이리하여 예종은 만 21살일 때, 드디어 태자에 봉해졌다.[12]
만 26살이 되었을 때, 서경 장락궁을 순수하고 돌아오던 중 아버지가 붕어하였고, 본궐 중광전(重光殿)[13] 에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14]
3.1. 내정
3.1.1. 국자감 7재 설립과 경연 실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한편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자감(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서기도 했다. 최충의 9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자감 7재를 개설하였다.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국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 기관인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靑讌閣)도 설치하는 등 고려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조선왕조에만 행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경연을 한국사 상 처음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3.1.2. 무과 설치 및 군사력 강화
1109년(예종 4년), 앞서 언급한 국자감 7재 중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고도 불린 강예재를 설치하였고, 후기에는 무학재에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 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임금이었다. 고려 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
그러나 당시 문벌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 심한 편이어서 강예재 설치에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명, 무학재 8명으로 시작한 관학 7재를 10년 뒤에는 60명과 17명으로 조절해버리는 강수를 둔다. 겉보기로는 유학재가 3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명으로 오히려 1.7배가 늘어난 셈.
윤관의 별무반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문종과 더불어 무관 대접을 잘 했던 군주이다.
전쟁에 나가 싸운 문무신료들의 죄는 그동안 공을 생각해서 묻지 않았는데, 이유는 숙종이 동북 9성을 추진했고 당시 참여했던 문무신료들은 숙종의 뜻에 따라 움직였으니 참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는 세종대왕조차도 이점을 인정하여 예종의 장점을 흡수해 4군 6진때 참여한 문무신료들에 대한 견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우대해주었다.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국왕인 인종 11년(1133년, 24년만)에 바로 폐지되었고, 7재는 경사 6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15] ,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그래서 고려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 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공양왕 2년에도 무과가 257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국가가 멸망 직전이라 의미 없는 부활이었다.
3.1.3. 혜민국(惠民局) 설치
9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의약 부문을 담당하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3.1.4. 제례악 정비
예종은 현재 아악(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다. 태묘 자체가 북송이 정비한 유교식 제사방식인 것을 고려가 수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종묘제도를 한차례 개선한 셈이다.[16]
또한 고려 태묘악장을 완전히 새롭게 고쳤다. 예종 이전에도 분명히 태묘악장이 있었겠지만 현존 기록 상 예종이 제작한 악장이 제일 오래됐다.
고려사 악지 기록으론 태조, 혜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 9명에게 올렸으며 각 임금 문서에 내용이 나와있다.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엔 태자 인종이 올린 본인의 태묘찬가가 적혀있다. 제목은 '미성(美成)'이며 아쉽게도 가사가 없다.
3.1.5. 불교와 도교 진흥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 담진(曇眞), 낙진(樂眞), 덕연(德緣) 등의 불교 고승들이 있었다.
이 중 담진은 1107년 예종의 왕사(王師)가 되었고, 1114년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로 행차한 예종에게 설법하였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로서 일승법(一乘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한국사상 최초의 도관(道觀)[17] 인 복원궁(福源宮)을 세운것도 예종 때의 일이다. 예종은 송휘종에게 도사를 요구해서, 궁궐 내에 도관을 세웠다.
3.2. 외정
3.2.1. 對 북송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 대를 거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자신들을 제외한 나라 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다.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 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자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 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아뢰길: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18]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19]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은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20]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했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이 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 황제와 대면하기 전 고려 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1118년, 송휘종은 예종에게 '''직접 쓴''' 사찰 간판[21] 과 부처 상을 보냈으며 역시 직접 쓴 어필국서를 전달했고, 예종도 보답으로 어필국서를 써서 보냈다.
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1120년 7월, 송나라의 사신들이 떠날 때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송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음에도 전각의 계단 밑에서 절하게 했다. 그 전엔 계단 위에서 절했는데 너무 과하다고 여긴 것이다.
3.2.2. 對 거란
당시 거란은 발해 유민 출신인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켜 대발해를 세운 탓에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년)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년 ~ 1117년)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고려사절요 기록엔 예종 15년 1120년 7월, 거란은 사신을 보내 여진을 거란과 고려의 같은 원수란 뜻인 '동구(同仇)'라고 표현하며 은근히 같이 여진과 싸워 주길 바랬다.
허나 막상 고려는 등거리 외교를 취해 1117년 의주를 수복했을 때 거란과 여진을 두 적국이란 뜻인 '양적(兩敵)'으로 부르며 서로 싸우다 망하라고 놀린 적이 있다.[22] [23]
3.2.3. 對 여진
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승하하자, 그 뜻을 이어 윤관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9성을 쌓는 등 꽤 큰 수확을 얻었다(1107년).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 고려사 윤관 열전 중 발췌. 예종의 북벌 선언문이다.
허나 그만큼 손해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여진족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그 지역을 지키던 고려군의 피해가 누적되자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양도함으로서 아이러니 하게도 여진 중흥의 발판이 되었던 것.[25] 이후 패전의 책임을 명분으로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고 만다.[26]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1115년 8월, 금의 성장에 당황한 요는 고려에 군사 파견을 부탁해 협공을 도모하고자 시도했다. 예종은 재추[27] 와 시신[28] , 도병마사의 의원들, 2군 6위의 대장군과 상장군[29] 들을 소환해 다시 정벌을 재개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했다. 장기간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3차 원정은 포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30]
그렇다고 여진족에게도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2년 뒤인 1117년, '형제국이 되자(물론 금이 형)',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글을 보낸다."며 아골타[31] 가 제의해온 것을 무시하는 모습도 보였다.[32]
이후 2년 뒤 1119년 8월 정축일,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의 글 중엔 '''"너(彼)의 근원은 내 땅(吾土)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구절이 있어 금 황제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33] 사신이 가져간 글은 고려의 국서인데 국서에다가 당시 황제를 자칭하던 아골타를 "'''너(彼)'''"라고 대놓고 부른 것이다.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은 내 땅에서 발(發)한 것이다(况彼源發乎吾土)."'''
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예종 14년(1119년) 12월 계미일,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이 보고를 받은 금 조정은 그저 정찰만 늘릴 뿐,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34]
3.3. 말년
그러나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붕어하고 만다. 향년 44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죽기 전 한국의 유명한 산과 강에 제사도 지내고 이자겸을 시켜 하늘에 제사도 지내지만 곧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얼른 태자 왕해에게 양위한다. 예종은 태자가 어린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1122년 4월 2일, 예종은 부축을 받고 앉았다. 여러 중신들을 소환해 일렀다.
군신(群臣)들은 엎드려 울고 있었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곧이어 태자를 불러 말하니: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저공(諸公)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그가 태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날 따라하지 말고 위대한 선조들을 배워라." 아버지로서 어린 아들이 걱정 된 듯하다. 이 말을 마치고 태자에게 국새(國璽)를 넘겨주었다. 이후 신하에게 남긴 유조(遺詔)는 태자를 잘 따르라고 당부하고 있다.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풀어 너(汝)에게 전해 돌려주마.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득소실다(得少失多)하니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왕의)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태자는 울며 머리를 들지 못했고 일어나질 못했다.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1122년 4월 8일, 예종은 붕어한 뒤 본궐 선정전(宣政殿)에 재궁[39] 이 안치됐다. 태자가 즉위하니 인종 공효대왕이다. 인종은 아버지의 빈전[40] 선정전에서 며칠동안 크게 울었다고 한다.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옷을 대충 입고 식사를 대충했다.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랑(元良)[35]
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방진주목(方鎭州牧)[36]
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와 사(社) 덕분에 저지(儲祉)[37]
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38]
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예종의 유조.
4. 평가
43세 ~ 44세인 고려 왕의 평균 수명을 산 국왕이다. 재위 기간도 17년으로 평균인 14년과 흡사할 정도. 더구나 폐위당하거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종 이후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더 나아가 '''고려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명군'''이라 칭할 만하다. 최충의 9재 학당 등 사학으로 인해 관학이 침체되자 살리려고 노력했고, 비록 나중에 9성을 돌려주긴 했으나 아버지 숙종도 실패한 여진을 윤관을 시켜 이기기까지 한 숨겨진 성군이다.
예종 사후 사실상 고려 전기는 막을 내리고 사실상 인종부터 '''혼란기'''인 중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어느 정도냐면 고려왕으로서 순번으론 절반에 못 미치는 예종 이후로 고려는 무탈하게 재위 기간을 마친 왕이 드물 정도. 인종은 이자겸, 묘청의 난이라는 대혼란을 겪었고,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위된 후 이의민에게 처참히 시해당했으며, 최충헌, 최우는 왕을 4번이나 마음에 안든다고 바꾸는 등 무신정변 ~ 원 간섭기는 한반도 역사상 유례 없는 기나긴 국왕들의 수난사였다.
그나마 이 시기를 극복하나 싶었던 공민왕은 말년에 실정을 저지르다 시해당했고, 우왕 이후로는 사실상 멸망 테크를 밟았다.
고려 중기 최대의 문제아 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시기 이전에도 이미 외척으로 있었지만, 그의 대에선 감히 꼼짝도 못하고 그냥 일반 친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시 그의 후계자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인종의 안전한 재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41]
선대의 왕들이 받아먹었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나기도 했고, 문벌 귀족들에게 휘둘린 감도 없지 않지만, 예종은 부왕 숙종이 강화시킨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이후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며 고려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이 막장#s-1.2의 후반기 300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인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의 내정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왕인데, 보통 양현고와 7재, 도관인 복원궁 건립, 윤관과 동북 9성으로 대표된다.
5. 가족관계
- 경화왕후(敬和王后) 이씨(李氏): 경화왕후는 1079년에 선종과 정신현비의 딸로 태어났으며, 성씨는 외가의 성을 따라 이(李) 씨로 하였다. 남편인 예종과는 친사촌이 된다. 1109년(예종 5년)에 사망한 후 시호 경화가 올라갔다. 예종의 첫 왕후임에도 불구하고, 예종의 시호인 文의 시호를 덧붙이지 못했다. 이는 인종이 의도적으로 생모인 문경왕태후를 높이기 위해서 했을 가능성이 있다.
- 문정왕후(文貞王后) (왕씨)[43] : 문경왕태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왕씨의 아버지 진한후 왕유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숙종의 이복 동생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이다. 또 남편 예종의 친조모는 이자연의 딸인 인예태후이며, 그녀의 할머니 인경현비도 역시 이자연의 딸이다. 예종과 문정왕후의 혼인은 친가로는 4촌간, 외가로는 6촌간의 혼인인 근친혼이다. 선왕 숙종이 6촌 이상 근친 금지령을 내렸지만 민간이나 왕실이나 안지키고 있었다.
- 후궁 안씨(安氏)(?): 유응규 묘지명 및 고려사 유석 열전에 나오는 인물.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44] 출신이다. 예종이 후궁과 결혼해 딸을 낳아 성씨를 안(安)으로 하였는데, 아마 어머니의 성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 부인 안씨: 예종과 후궁의 딸. 개국공신 유금필의 후손인 유필과 결혼했다. 부인 안씨의 증손자인 유석은 부인 안씨가 예종의 서녀란 이유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6. 이모저모
6.1. 예술가적 면모
예종은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서경 장락궁에 행차해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 이는 왕권 강화 목적으로 공산 전투에서 태조를 지키고 전사한 김락과 신숭겸을 기리는 글을 써,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목적이었다.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는데 이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45] 이나 고대 삼국 고구려, 신라, 백제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이 기록된 속악 중 '벌곡조(伐谷鳥)'란 노래가 있다. 벌곡조는 뻐꾹새, 즉 뻐꾸기의 음차인데 예종이 직접 지은 노래라고 한다. 노래가 우리말로 되있어 고려사는 실 가사를 기록하지 않고 노래 내용만 기록했는데 뻐꾸기의 내용은 예종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겁내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라고 한다.임을 완전하게 하신 / 主乙完乎白乎 주을완호백호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 心聞際天乙及昆 심문제천을급곤
넋은 갔지만 / 魂是去賜矣中 혼시거사의중
내려 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했구나 / 三烏賜敎職麻又欲 삼오사교직마우욕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 望彌阿里刺 망미아리자
그 때의 두 공신이여 / 及彼可二功臣良 급피가이공신량
이미 오래 되었으나 / 久乃直隱 구내직은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 跡烏隱現乎賜丁 적오은현호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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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이장가(悼二將歌), 김완진 해독본 기준.
이 노래 뻐꾸기는 조선시대까지 남은 듯 하다. 조선왕조에서 만든 '시용향악보'에 '유구조'란 노래가 있는데 유구조는 비둘기를 뜻한다. 노래의 내용이 설명한 예종의 뻐꾸기와 똑같아 사실상 둘이 같은 노래로 보인다.
이 노래는 의외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14년에 방영된 KBS의 사극 정도전에서 이 노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장면은 한양 천도 직후 열린 연회에서였는데, 당시 흥에 겨운 태조가 궁에서 판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46] 본인이 지은 도이장가도 그렇고 예종 세가에 보면 장락궁에 가서 노래를 하나 또 지었다고 하는데 예술가적 면모가 꽤 있던 듯 하다.비두르기 새는
울음을 울지만
뻐꾹쟁이야
난 좋아
뻐꾹쟁이아
난 좋아
- 조선조 시용향악보에 기록된 노래 유구조.
이인로의 파한집 권중엔 예종이 지은 시가 실려있다. 예종이 시를 쓰자 신하 곽여가 응제한 문답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종이 수춘궁에 머물며 태자로 있을 때 곽여란 신하를 알게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곽여는 관직을 버리고 산 속에서 살았는데, 예종은 산 속 곽여의 집에 '동산재(東山齋)'란 이름을 붙혀주고 가끔 놀러 갔다.
어느날 예종이 '종실열후(宗室列侯)'라 칭해 위장하곤 동산재로 갔다. 그러나 곽여는 임금이 올 줄 몰랐으니 타지에 가 있던 참이었다. 곽여를 놀래키는 데 실패한 예종은 동산재에 잠시 있다가 ''''직접'''' 붓을 들어 벽에 시를 쓰고 갔다.
파한집에선 예종의 시를 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술을 잊을 곳이 어디일까? / 何處難忘酒
진인을 찾았지만 못 만나고 간다. / 尋眞不遇廻
창문엔 햇빛이 들어오고, / 書窓明返照
옥같은 꽃잎은 재를 덮었다. / 玉篆掩殘灰
지팡이는 아무도 지키지 않고, / 方丈無人守
문도 온종일 열려 있네. / 仙扉盡日開
원에서 새가 늙은 나무에서 울고, / 園鶯啼老樹
정에서 학이 푸른 우리 안에서 잔다. / 庭鶴睡蒼笞
도에 대해 누구와 얘기할까? / 道味誰同話
선생은 가서 오질 않으니. / 先生去不來
깊히 생각하면 마음이 생기고, / 深思生感慨
머리를 돌려 서성거리네. / 回首重徘徊
붓을 휘둘러 벽에 시를 남기고, / 把筆留題壁
누대에 내려갈려 하니 싫증이 나네. / 攀欄懶下臺
시 읊게 해줄 태도는 많은데 / 助吟多態度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곳이네. / 觸處絶塵埃
더위는 숲 아래서 없어지고 / 暑氣蠲林下
좋은 바람은 전 안으로 들어오니, / 薰風入殿隈
이럴 때 한 잔 하지 않으면 / 此時無一盞
번뇌를 어떻게 씻겠는가? / 煩慮滌何哉
- 파한집 권중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예종의 어제시.
와 당(唐) 황(皇)의 무봉지필(舞鳳之筆)[48] 을 실로 겸비하고 있으니, 고금에 찾아볼 수 없도다.
6.2. 창작물에서
- 수호전의 스핀오프작인 수호후전에서는 고려국왕 이우(李俁)로 나온다. 배경 시기를 감안하면 인종이 나오는 게 맞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