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
中人
1. 개요
조선 시대의 신분 계층.
중인은 양반과 양인 사이의 계층으로, 그 정의는 어느 정도 모호함이 있다. 때문에 양천제론에서는 이들을 신분이 아닌 계급으로써 양반계급과 차별되는 존재로 정의한다.
2. 상세
중인은 좁게는 역관(譯官), 의관(醫官), 율관(律官), 산관(算官), 화원(畵員) 등 잡과 출신 기술 관리를 가리킨다. 현재의 통역사, 의사, 법조인, 하위직 공무원, 회계사 등에 해당한고 볼 수 있다. 넓게 보자면 관청에 소속된 녹사 아전 향리 계급이나 서얼까지 포함한다. 잡과에 급제해도 벼슬을 받기는 하지만, 문,무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대접을 받았으며[1] 승진 품계에 한계가 명확했기에(한품서용) 문과 급제 가문에서는 잡과를 천시했고, 사대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중인이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의가 되거나 역관으로서 큰 공을 세워 왕의 총애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았다.
3. 특징
중인들은 대개 한양 중심에 살았는데, 가운데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가운데 살기 때문에 중인이다 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양천제였으므로 중인은 공식적인 신분은 아니었다. 양반에 비해 여러 차별대우를 받았지만 전문기술자로서 실무를 담당했고, 그 중 잡과 합격자들은 일단 관료로 대접은 받았기에 일정의 권리를 누렸고 수완을 발휘하는 자들은 양반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특히 역관들은 사신단에 참여하여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중인 중 하나인 향리는 본래 고려시대 지방 호족세력의 후예이다. 고려는 지방 호족의 영향력이 큰 사회였는데,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이 주도한 중앙집권 사회에서는 호족세력의 영향력이 급감한다. 여말선초 기간 지방 호족세력들은 향리로 전락하여, 지방 관아에서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고 이들도 중인으로 분류되었다. 외지에서 부임해 와 임기 후 떠나는 지방관들은 그 지역의 정세에 밝은 향리에게 실무를 전담시켰다. 조선 후기 갈 수록 지방행정의 주축으로서 커진 영향력 탓으로 부패가 만연하기도 하였다.
중인들의 직역은 대체로 세습되어 의관 가문 역관 가문등이 나타났고 전통의 과학기술들도 중인가문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광복이후 제헌 국회 국회의원 중 60%이상의 출신 가계가 중인계급이었다.
[1] 다만 조선후기에 무과 급제자가 폭증하여 합격해도 벼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무과에 비해 잡과의 위상이 크게 낮지는 않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