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역관
譯官
1. 개요
고려와 조선시대에 통역과 번역 업무를 담당하였던 관리.
역관은 사대교린, 즉 외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은 역학 또는 역관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역관의 임무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자주 강조하였다. 역관이 없는 부득이한 경우엔 한문을 이용해서 필담을 나눌 수도 있었지만, 필담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으므로 외국어 전문가인 역관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고려시대에는 통문관과 사역원을 통해 외국어학습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서민 출신이 임명되었으나 후기에는 양반 계급의 사람들도 통문관을 통해 학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종의 출세 지름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증조부 조인규도 몽골어 열풍에 편승해 재상에까지 오르기도 했다.[1]
조선시대에는 사역원과 승문원을 통해 외국어학습을 장려하였다. 잡과 중의 하나로 역과가 있었는데 한학, 몽학, 왜학, 여진학(청학)의 네 종류가 있었다. 대부분의 합격자가 한학이었지만 소수어 직렬에서도 각각 2명정도는 합격하였다. 합격자는 종7품에서 종9품의 품계를 받았다. 후에 정3품 당하관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무역을 자주 행해서 품계보다 부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거부 변씨의 모델이 된 변승업도 역관으로 있으면서 사무역으로 치부를 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역관들은 기술과 행정실무뿐만 아니라 지식과 경제력에서도 양반계층에 뒤지지 않았으나 늘 중인으로 대우받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신분해방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섰고 근대화의 흐름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개화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오경석(吳慶錫)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상대국에도 한국어를 습득한 통역관들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선교를 목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서양인들이 있었다. 서양인과의 통역은 초기에는 당나라 역관을 불러와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기록에 모두 당나라의 역관을 이용해 통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무역이 발달한 당나라가 통역에도 발달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희빈 장씨는 이 역관 집안 출신이다. 친아버지인 장형이 역관 출신이었고, 장형이 일찍 죽은 뒤 후견인이 된 5촌 당숙 장현 또한 역관으로 활동하며 효종에게 큰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장씨의 외할머니인 변씨도 위에 언급된 변승업 가문 출신이다.
2. 외국어 학습
사역원에서는 당시의 4대 외국어인 한학, 몽학, 청학, 왜학을 가르쳤다. 당연히 제 1외국어는 한학이었다. 또 우어청이라는 곳을 두어 '''하루종일 외국어로만 대화'''하도록 한 곳도 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영어마을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외에도 위구르어도 중요시되어서 가르치기도 했다.
역관은 추천에 의해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외국어 학습을 시작했다.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바로 역관이 되지는 않았다. 미친 듯이 외국어를 공부하여야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외국어를 공부하고 매달 2일과 26일에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씩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원시를 쳤다. 수련을 거친 뒤에는 잡과의 역과[2] 에 응시해야 했다. 초시와 복시에 통과한 후에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유명한 중국어 외국어 학습교재로는 '노걸대'가 있었다. 고려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는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노걸대의 내용은 세 명의 고려 상인이 중국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국어 학습을 꾀한 책이다. 상권과 하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되어있다.
노걸대는 다른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번역된 책은 청어노걸대, 몽어노걸대등으로 불렀다.
노걸대다음으로 유명한 중국어학습서로는 '박통사'[3] 가 있었다. 노걸대가 상인 중심의 비즈니스 회화에 가깝다면 박통사는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걸대보다 고급 단계의 중국어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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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학습교재로는 '첩해신어'[4] 나 인어대방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강우성이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어를 다루지 않다가 나중에 개설되었기에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역과시험답안지를 살펴보면 첩해신어를 거의 다 외워서 그대로 쓸 수 있어야 합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최고의 어학달인으로 인정받는 조선 초기 문신 신숙주가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일본어, 힌디어, 아랍어에 능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구전으로 배우는 경로가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숙주뿐만 아니라 당시 고위지식계층은 중국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이전의 삼국시대 때에는 많은 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까지 가서 당나라에서 급제하여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외국어능력이 높았다.
외국어 습득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구전으로 배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역관으로 유명한 집안이 나오기도 했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 밀양 변씨(密陽 卞氏), 우봉 김씨(牛峰 金氏), 천녕 현씨(川寧 玄氏), 해주 오씨(海州 吳氏) 등이 대표적인 역관 가문이다. 중인인 역관의 신분으로 권세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는데 김홍륙독차사건의 김홍륙이다. 심지어 김홍륙은 중인도 아닌 천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