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롱드
'''지롱드 파'''(Girondins)
1. 개요
프랑스 혁명 중 프랑스 정치 파벌의 하나이다. 주요 지도자들은 피에르 베르니오와 자크 피에르 브리소 또는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담 롤랑 등이 있으며, 여러 형태로 ‘지롱댕’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롱드 지방 출신의 부르주아 계급이 다수를 차지했던 보르도, 클뢰브 데 자코뱅 소속 의원(베르니오 등)을 핵심으로 한 것에서 유래한다. 단, 혁명 당시 "지롱드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학적 용어로 정착한 것은 1847년, 라마르틴의 《지롱드 당사》가 출판된 이후의 것으로, 후대에 이름이 붙은 것이다. 명확한 당파가 아니라 중산층 부르주아, 개신교 등 이어지는 온건 공화파 계열의 여러 파벌의 집합체이며, 자주연방주의자라고 불렸다.
2. 초기
원래 클뢰브 데 자코뱅에 속해 있으며, 1791년의 입법부의 탄생에 맞추어 동일한 뿌리의 몽테뉴파와 함께 민주파의 세력을 형성했다.
국왕 루이 16세 등 왕가와 망명 귀족(에미그레)이 음모를 꾸미는 동안 다른 유럽 국가와 전쟁의 기운이 고조된다. 지롱드파는 대외 전쟁을 통해 국왕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주전론을 전개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반전론을 주창하였지만, 1792년에 지롱드파가 중심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그러나 혁명의 여파로 군대 및 지휘명령 계통이 없는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패전을 거듭했다. 따라서 지롱드파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정권을 ‘푀양파’에 넘겨준다.
3. 지롱드파 정권
대외 전쟁으로 고전하는 가운데, 1792년 입법부 대신 국민공회가 개최된다. 지롱드파는 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선언을 채택한다.
그러나 혁명의 일단의 종결을 목표로 한 지롱드파와, 급진적인 혁명을 계속 추진하려는 몽테뉴파(산악파)의 대립이 거세져 갔다.
곧, 루이 16세가 외국을 획책했다고 되는 문서가 튈르리 궁전 내에서 발견된다. 또한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외적 통첩도 전해졌다.
몽테뉴파는 국왕과 왕비의 배신행위에 대해 재판을 요구했지만, 더 이상 혁명의 추진을 원하지 않는 지롱드파는 재판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와 생상스 쥐스트 같은 몽테뉴파의 연설로 국왕 재판이 진행된다.
재판 결과, 루이 16세의 사형이 결정된다. 재판에서 지롱드파는 사형에 찬반에 대해 일관된 견해를 낼 수 없었다.
4. 쇠퇴
루이 16세를 처형한 프랑스에 대해 영국과 스페인 등에서 경제 제재를 가하였다. 프랑스는 이들 국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한다. 지롱드파의 경제적 및 군사적 실정으로 인해 의회의 주도권은 몽테뉴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지롱드파는 다양한 방식으로 몽테뉴파를 배제하려고 했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주도 하에 1793년 5월 31일 봉기가 발생하고, 곧 6월 초에 지롱드파의 주요 멤버가 잡혀 처형당해 실각하고 만다.[1]
5. 같이 보기
[1] 다만 실권을 잃긴 했어도 여전히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의 다수였고 이것은 훗날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중요하게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