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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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의 변호사, 혁명가, 정치가이자,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기 시절의 공포 정치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현대 프랑스 공화국의 슬로건인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우리는 조국의 낡은 것을 갈아치우길 희망한다. 관습이 지배하는 독재 정권 대신 이성이 지배하는 제국을 희망한다. 불쌍하고, 어리석고, 비참한 백성들 대신 고결하고, 강하고, 행복한 백성을 희망한다. 이는 군주제의 모든 악덕과 유치함 대신 공화국의 모든 덕과 기적을 희망한다는 뜻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발언 中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중에서도 급진파에 해당하는 인물로 앙시앵 레짐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혁명을 반대하는 반동 세력에 대한 탄압 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 중에서도 혁명성이 의심되는 인물[4] 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는 단두대 매니아로 '공포정치'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때문에 혁명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능하고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가였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부패할 수 없는 자(l'Incorruptible)'. 그의 폭압적 정치에 반발하던 반대파들도 이 점만큼은 인정했다고. 하지만 보통 이러한 자들이 그렇듯 "자신은 사리사욕이 없으므로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는 독선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로베스피에르는 정권을 잃었고 자기 목숨도 잃었다.
2. 대혁명 전까지
프랑스 아라스 시에서 법률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에 사산으로 어머니를 잃고 8살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1777년 뮌헨에서 사망했다.)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11살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콜레주 루이 르 그랑 (Collège Louis-le-Grand)[5] 에 진학했으나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 루소와 카토, 키케로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 12년간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6] 상당히 가난한 편이라 종종 찢어진 옷, 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때때로 옷이 없어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도 하고.
하지만 성적은 우수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루이 16세가 대학을 방문하자 17세의 로베스피에르는 성적 우수자의 자격으로 500명 학생을 대표해 축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날 비가 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맞으며 연설을 해야 했고, 애초에 한 나라의 국왕 폐하께서 비 맞아가며 17살짜리 애가 떠드는 알아듣지도 못할 장문의 라틴어 연설을 듣고 싶을 리도 없었으니 건성으로 듣고 대답없이 돌아갔다고.[7][8]
대학을 졸업한 뒤 아라스시의 법률가가 되어 괜찮은 수입을 올리며 살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그들을 대변하는 등의 행위로 여러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다. 법률가 시절의 유명한 사건 중에는 피뢰침에 대해 신성모독 혐의로 철거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변호해 피뢰침을 지킨 사건이 알려져 있다. 또한 '''사형제 폐지'''(!), 처벌 앞에서의 평민과 귀족의 평등, 유죄를 선고받은 자에 대한 재산 몰수 폐지, 서자(사생아)들의 처우 개선 등의 개혁을 주장했다.
3. 자코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31세의 나이로 시민층의 지지를 받아 아르투아주 제3신분 대표[9] 로 삼부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한다. 혁명 초기의 로베스피에르는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부터 가장 단호한 제3신분 대의원의 한 사람이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 45번째로 맹세했고 7월 9일 국왕에게 파리 주변의 외국 군대 철수를 요구할 24인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7월 17일 루이 16세의 파리 방문을 수행했다.'''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천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코 현명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의회에서 파벌의 분화가 이뤄지기 시작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거두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의 준수를 촉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보통 선거, 근위대·공무원·군장교 계급의 자격 제한 철폐 및 청원권을 위해 싸웠으며, 왕의 거부권을 반대하고 행정권의 남용과 종교적·인종적 차별을 배격했다. 또한 '''사형제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 당시 연설문(영어), 범인 친족에 대한 형벌(연좌제)을 금지하는 법안에 관여하였으며 배우·유대인·흑인 노예들을 옹호하고 과거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이 프랑스에 재통합되는 것을 지지했다.
이러한 로베스피에르의 활동은 상퀼로트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소속된 자코뱅은 의회 내에서 소수파였고, 그런 탓에 의회에서의 활동의 성과는 미미했던 편이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바렌 사건 이후였다. 바렌 사건은 국왕이 파리 시민들을 외국으로 도망쳐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토벌해야 하는 반란군으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퀼로트들로 대표되는 파리 시민들이 살아남거나, 왕이 살아남는 둘 중 하나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의회 내부의 왕당파와 지롱드파는 국왕을 옹호하는 쪽을 택했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은 상퀼로트의 편에 선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바렌 사건의 충격을 덮기 위해 지롱드파와 왕당파가 이 사건을 '국왕 유괴 사건'으로 조작하려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고, 국왕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각 정파들의 기묘한 이해관계 합치로 최후의 수단으로서 제시된 유럽 각국에 대한 선전포고[10] 에도 로베스피에르는 거의 유일하게 반대하는 의원이었다. 프랑스는 전쟁을 치뤄내기에는 너무 막장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11] 그러나 결국 선전포고와 함께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고, 당연히 프랑스는 연전연패한다. 게다가 프로이센군이 파리 인근으로 접근했고, 이를 지휘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파리 시민들에게 협박을 가하자, 격분한 상퀼로트들은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일으키고, 그 결과 국민 공회가 들어선다.
4. 공화국을 구하다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국민공회 정부가 들어섰고, 왕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더이상 파리 시민들의 격분에서 국왕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했고,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상퀼로트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지롱드파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파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지롱드파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한 반면 자코뱅은 확고한 혁명의 완수와 공화국 체제의 완비를 위해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코뱅은 파리의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벌어진 투표 끝에 승리하게 된다.'''"여러분은 어떤 정부가 승리했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국민공회의 정부입니다. 빨간 보닛을 쓰고 거친 모직 옷을 입고 나무신을 신은, 보잘 것 없는 빵과 질 나쁜 맥주를 먹으며, 너무 피곤해서 더이상 깨어서 논의할 수 없을 때는 그들 집회실의 마룻바닥에 깔려 있는 이불 위로 잠을 자러 갔던 열정적인 자코뱅의 정부입니다. 프랑스를 구했던 것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황제의 거처를 자랑으로 여기듯 저는 이 사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훗날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의 도지사 장봉 생앙드레가 국민공회 시기는 더 망한 상황에서 이겼는데 왜 나폴레옹 황제는 그걸 못 하냐고 까는 연설
국민공회 안에서는 지롱드파가 갈수록 산악파(몽테뉴파Montagnards)[12] 에 밀려 기세를 잃어갔다. 거기에 지롱드 계열의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지롱드파는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결국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마르세유, 보르도, 리옹 등지에서 군대를 동원해 파리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으로 부당한 체포가 연이어 일어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 체포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6월 2일,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의회에 난입하여 시민들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들의 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제명되어 지롱드파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만다. 이로써 국민공회는 자코뱅이 장악하게 된다.[13]
이렇게 되자 프랑스 안의 반혁명세력들은 혁명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곳곳에서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부 방데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이는 지롱드파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들이 내전 준비를 하고 있던 리옹, 보르도 등지로 확산되었다. 또한 프랑스를 고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에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나폴리, 교황청 등이 가담하여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윽고 프랑스 공화국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1793년, 프랑스의 80개 지역 중에서 60개가 파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북쪽과 동쪽에서 프랑스로 침공하고 있었으며, 영국군이 남쪽과 서쪽에서 침입해 오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정부는 고립무원이었고, 당연히 파산 직전이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두 번 연속으로 외세와 연계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도주하기까지 했다.[14]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혁명의 승리를 위해 창설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 한 명이 된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를 단순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의 한 명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조르주 당통, 강경파 장폴 마라 등을 중재하며 자코뱅을 이끄는 지도자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자코뱅이 국민공회 내에서 다수파는 아니었을지라도, 국민공회의 다수파는 이 시점에서 자코뱅이 공화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공안위원회 역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요청에 응해 창설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공회기의 상당기간 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사실상의 프랑스의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지롱드파에 의해 지연되었던 급진화한 새 헌법(1793년 헌법)이 포고되었다. 여기서 보통선거, 저항권, 노동과 생계유지의 권리, 모든 사람의 행복이 정부의 목표이며 인민의 권리는 손에 넣을 수 있고 실시되어야 한다는 공식성명이 이뤄진다. 이는 근대국가에 의해 포고된 최초의 민주주의적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모든 잔존해 있던 봉건적 권리들을 무상으로 완전히 철폐하였고, 몰수된 망명귀족들의 토지를 소규모 구매자가 매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진시켰다. 아이티의 흑인노예혁명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영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프랑스 혁명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총동원을 표방한 징병제가 실행되었으며,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경제적 통제를 실행했다. 완전히 붕괴해버리다시피 한 장교단을 충원하기 위해 하사관, 병사들에게 능력과 실적에 따른 승진 기회를 제공했으며, 혁명군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공안위원회 파견의원들이 전선에서 군대를 독려했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공화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94년 3월 경에는 이전의 3배에 달하는 군대를 1793년 3월의 절반에 불과한 비용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공화국은 적군을 압도했으며, 혁명군은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군사적인 우세를 시작해 나갔다. 이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한 유일한 재원이었던 아시냐 화폐의 가치조차도 최하 3분의 1 선에서 지켜내기까지 했다.[15] 또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파리 코뮌의 각 구들을 비폭력적으로 무장 해제하는 데 성공하여, 중앙집권과 안정적인 의회의 통치가 가능하게 된다.
4.1. 로베스피에르가 구했다?
정작 로베스피에르 집권 시기의 프랑스 혁명전쟁은 엄청난 참패가 계속됐다. 국민개병제를 통한 가공할 머릿수로 이를 버텨내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인구 3천만이던 상황에서 1794년 기준으로 150만을 징집했고, 이중 80만 병력이 정규군 취급을 받았다. 이는 전근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비율을 아득히 넘어버린 것이었다. 이 덕분에 보급이 징병을 따라가지 못해서 보급상황도 악화되고 결국 군대로서는 최악인 현지 보급 명령까지 내려진다. 위에 언급된 3배의 병력을 같은 비용으로라는 문구가 내포하는 진실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전만큼 보급을 안 해주니 돈이 들어갈 리가 없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군은 곤봉으로 무장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안정된 중앙집권과 의회통치가 시작되었다는 파리와 달리 지방에서는 반란이 속출한다. 아래 언급에는 혁명군의 성과로 벨기에 점령과 함께 언급되지만 규모에서 비교도 안 되는 플랑드르 전역에 시간이 이렇게 소모된 것은 지롱드를 축출한 1793년에 지롱드 파벌이 많았던 남프랑스에서 반란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왕당파도 아니고 지롱드 반란이라는 것은 완전한 정치적 실패이다.
그리고 이 시기 연이어 벌어졌던 툴롱 공방전은 그 당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다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툴롱의 왕당파는 외국군을 끌어들여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할 프랑스군 지휘관은 전직 화가에 변호사, 의사 출신 무능력자들이다. 이 때문에 병력이 2, 3배가 되는 프랑스군은 희생자만 쌓았고, 여기에 나폴레옹이 내려꽂힌 다음에는 나폴레옹까지 포함된 지휘관들의 정치싸움이 시작된다. 결국 정치싸움으로 일개 장교이면서 장군들을 다 날려버린 나폴레옹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장군과 함께 사실상 자기가 지휘해서 툴롱을 함락했고, 툴롱의 왕당파들은 학살당한다.
실제로 이 시기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은 우습게도 사관학교 경력을 갖춘 낙하산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고, 프랑스 혁명전쟁 시기 프랑스군의 업적은 대부분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국민공회가 붕괴된 다음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전쟁을 치러왔던 하사관들이 경험을 쌓았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로베스피에르 사후 성립된 부르주아 정부는 혁명보다 생존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존 귀족집단 장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다시 군대에 받아들이고, 혁명군을 기존의 정규군으로 재편한 결과였다. 기존의 혁명군 시스템[16] 이었던 민병대 국민위병은 로베스피에르 시기에는 수시로 예비대 형태로 전선으로 보내졌다. 아래 언급되는 로베스피에르가 전선에 보내서 문제가 생겼다는 혁명군이 바로 이 국민위병인데, 예비병을 계속 전선에 밀어넣다보니 기존에 로베스피에르가 장악하고 있던 국민위병 상당수도 전선으로 보내졌고,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보충된 국민위병을 로베스피에르 반대파가 장악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혁명성향이 강한 민병대를 이런 식으로 소모하다 보니 당연히 자기 지지층은 줄어들고 혁명의 피로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 성향이 약한 사람들을 보내기도 곤란한데, 프랑스 혁명전쟁 문서에도 있지만 정신무장이 안된 사람들을 무작정 전선으로 보내면 전투를 거부하고 탈영하거나 심지어 사령관을 죽이고 스스로 해산해버리는 상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목표의식이나 동기부여가 없이 머릿수만 억지로 채운 군대는 도적떼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될 수 있다. 후에 나폴레옹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을 다 뜯어고쳐서 해당 부대를 철저한 예비대로 만들었다.[17]
5. 공포정치
"여러분이 세우는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민중은 이성으로, 민중의 적들은 공포로 이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화국 내외의 적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화국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혁명 정부는 전제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독재입니다. 언제까지 독재자들의 분노는 정의로, 민중의 정의는 야만이나 반란으로 불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기간은 공포 정치의 기간이기도 하다. 반혁명 분자, 반역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1793년부터 1년 동안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1만 7천 명이 사형을 당했다. 특히 가톨릭, 반혁명 지지 방데 반란에 대한 학살진압은 근대적인 학살의 효시로 기록될 정도로 잔인하고 철저했으며, 이 기간 동안 갓난아이, 임산부까지 포함해 최소한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나는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압제자들에 대해 완고합니다.''' 나는 민중을 학살하면서 전제군주를 용서하는 인류애를 알지 못합니다. 제헌의회에서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사형제의 폐지를 요구하게 만들었던 그 감정은 오늘 그것을 내 조국의 압제자와 그가 구현하는 왕정 자체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게 하는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나는 사형에 찬성합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사형을 주장하는 연설 中
이러한 숙청은 자코뱅파 내부에게까지 미쳤다. 로베스피에르는 급진 혁명주의자 자크 르네 에베르와 그 지지자들을 고발했으며 이들은 1794년 3월 처형당했다. 조르주 당통은 공포 정치와 전쟁의 중단을 요구하며 공안 위원회의 정책을 점점 더 격렬하게 비난했다. 당통파 지도자들과 의원들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청산할 때의 부패 혐의로 1794년 4월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여기서 공안 위원회와 국민 공회, 로베스피에르를 분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자코뱅은 사실상 국민 공회를 주도해가고 있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확고한 지도자였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정치범 숙청은 (10월 봉기로 인한 지롱드 완전 실각 이후 기준) 특별 법원에서 행하였고, 로베스피에르는 단 한 번도 이 특별 법원의 검사 혹은 재판장을 맡은 적이 없다고는 하나[18] 혁명 재판소 역시 1793년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로베스피에르파 에르망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또한 프레리알법[19] 의 입법과 시행에도 로베스피에르는 큰 영향을 끼친다. 다만 공안 위원회와 국민 공회, 혁명 재판소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공포 정치가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선동과 민중들의 학살'이라는 편견과 달리 당시의 법과 제도에 따른 국가 권력의 집행이었다는 것이며, 로베스피에르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선동적 학살이 아니라 제도적 국가권력의 집행이라고 한다면 수정주의적 혁명사가들이 프랑스 혁명과 전체주의 사이의 친연성을 지적하며 제기한 공포정치가 대숙청 같은 국가권력의 대량살해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도 대답해야 할 것이다.
수정주의적인 시각에서 주목받는 방데 반란에 대한 진압 역시 일방적인 폭력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니고 양쪽 모두 폭력을 휘둘렀으나 왕당파의 학살보다 로베스피에르의 집정부 쪽 학살이 압도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잔혹했다. 그리고 혁명정부가 방데 지방에 혁명 정부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권리를 제한해서 주민들이 혁명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하고 공화파가 먼저 당했다는 학살도 실상은 150에서 160명 정도로 추정되며 오히려 공화국 군대가 먼저 방데 농민들을 처형했음을 알아야 한다.[20]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억울한 희생양 정도로 미화하는 당통 역시 부정부패의 죄목은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다. 애초에 당통 - 로베스피에르 - 마라의 자코뱅 3두정 시기에도 당통의 도덕성은 자코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당통파는 당통의 부패 혐의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차라리 로베스피에르가 필요할 때는 당통의 혐의를 책하지 않았냐는 것을 묻는 게 더 나을 지경. 또한 로베스피에르가 과격해져서 당통마저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상은 당통이 갑자기 원래의 입장을 뒤집은 쪽에 가깝다. 일단 공안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전반기를 주도한 게 당통이다. 에베르의 경우에도 실제로 쿠데타 기도까지 간 상황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며, 에베르는 에베르 이전에 과격파를 이끌던 자크 루 등의 격앙파(The Enraged) 지도자들을 숙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식 무분별한 처형에 반대했으며[21] , 지롱드 당원과 국왕의 누이를 체포하는 데 대해 항의했던 의원들을 보호했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순찰 의원'(지방의 반대파를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들)이 저지르는 학살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혁명을 모독하는' 그들의 소환을 요구했다. 위에 언급된 방데 내전과 주민 학살의 경우도 이 문제와 관련된 격론에 그가 참가를 하지 않았고 파견된 군대가 그의 지시에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면도 있어서 학살 사건이 단순히 그의 책임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하다. 오히려 엄밀히 말하면 로베스피에르의 무자비한 학살자적 이미지는 파리 코뮌과 생쥐스트에게 어울린다고 할수 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가 처형을 남발했고 자코뱅을 제외한 프랑스 시민들의 반감이 이로 인해 강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로베스피에르가 국민 공회 내부의 숙청을 하지 않고, 지롱드파 의원들을 보호하며, 지방의 무분별한 숙청을 반대하고 그를 이끌던 순찰 위원들을 소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야말로 로베스피에르의 몰락과 테르미도르 반동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6. 테르미도르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만일 자신들이 성공한다면 극단적인 관용에 의해 현재의 상황과 대조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잠시 혁명의 고삐를 늦춰보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은 군사독재가 혁명을 탈취하고 당파들의 지도자가 국민의 타락한 대표체를 전복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 전 날의 연설에서[22]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모든 성공은 그를 몰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는 전쟁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이는 더이상 비상조치의 필요성이 없어짐을 의미했다. 국민총동원에 의해 열성적인 상퀼로트들이 혁명군에 입대했고, 이는 파리 시민들 중 자코뱅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혁명군은 공세를 취해 남프랑스의 반란을 평정하고 벨기에를 정복하며 라인강 일대로 진격했다. 이는 최악의 상황에서 자코뱅이 혁명군에 기댈 여지조차 없음을 의미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에 의해 파리 코뮌은 약화되었으며 코뮌과 의회의 충돌은 거의 사라졌으나, 이 역시 자코뱅의 최고의 기반이었던 파리 코뮌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민주주의는 두 가지 과도함으로 망합니다. 통치하는 자들의 귀족주의로 망하거나, 인민이 스스로 확립한 권위를 경멸함으로써 망합니다."'''
이와 같은 역설적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종래의 가톨릭 대신 이성에 대한 신앙으로 공화국의 통합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도로 이루어진 행사가 바로 최고 존재의 제전(La fête de l'Être suprême). 이 시도는 간단히 써져 있어서 그렇지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였고, 로베스피에르가 했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를 꼽으며 비호받기도 하는데 누가 봐도 미치광이 같은 짓이었고 당연히 소용이 없었다[23] . 도대체 뭔지도 모를 "최고존재" 따위를 숭배하라는데 먹힐 리가 있나. 또한 공포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무엇보다 로베스피에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시점에 '순찰의원'들을 소환해서 지방에서 저지른 학살 등에 대해 규명하고 처벌할 뜻을 밝혔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1794년 7월 26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누구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은 채 지금 이 공회안에 반혁명파가 존재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시작했다. 장장 2시간이나 비난을 퍼부어대는 연설이었고 오늘은 또 누가 죽어나가나 하는 공포와 불안감 속에 결국 탈리앵과 바렌이 단상에 뛰어올랐다.
탈리앵의 외침에 이어 자코뱅을 제외한 의원들 대다수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독재타도!"라고 외치며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공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공회를 빠져나온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코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의견불일치로 결정을 머뭇거리는 사이, 조제프 푸셰가 이끄는 '순찰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 로베스피에르 세력을 결성했으며 로베스피에르가 보호해 주던 지롱드파 의원들이 여기 결탁했다. 여기에 더해 로베스피에르가 숙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다수파였던 국민공회의 비자코뱅 의원들이 이에 연합했으며, 공안위원회 소속의 상당수 의원까지 이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는 그를 고발하였고, 그를 비롯한 일파들의 체포안도 통과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되면서 '''"공화국은 망했다. 악당들이 이겼다"'''라고 소리질렀다."저는 어제도 그저께도 이런 고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또 어김없이 의원들에 대한 중상과 모략입니다. 이 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동료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 속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제안합니다. 이 사악한 음모의 장을 이제 그만 걷어치워 버립시다!"
- 장랑베르 탈리앵(Jean-Lambert Tallien)
그가 체포된 후 파리 코뮌들에 의한 로베스피에르 구출작전이 일어났으며 이 작전은 상당한 지지를 받아 파리 시청을 한때 점거하기까지 했지만,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 테르미도르파가 지휘하는 국민군에 의해 쉽게 분쇄되었다. 이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에 의해 파리 코뮌들이 순순히 무장을 해제하고 조직을 해체한 데서 기인한다. 공포정치를 통해 민중들이 로베스피에르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보는 것은 왜곡이지만[24] ,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 탓에 쉽게 파멸해 버린 것.
7월 28일 오전, 법정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자신들이 정적들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사실 관계 조사와 변론의 기회는 없었다. 그들을 기소한 검사나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 모두 이제까지 해왔던 절차를 이번엔 그대로 로베스피에르 일파에게 적용했다.
그는 체포되는 과정에서 권총탄에 턱뼈가 날아가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교도관들이 보기 흉한 그의 턱뼈를 붕대로 대충 고정시켜놓은 채 로베스피에르는 다음날 단두대 앞에 서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당대의 연설가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지만, 거칠게 떼어진 붕대 때문에 턱뼈가 달랑달랑거리는 와중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꼴로 잡혀왔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고발 이후 잡히기 직전 그는 자살하기 위해 턱에 총구를 대고 총을 발사하는데, 불행히도 죽지 않고 턱뼈만 날아갔다는 설이다. 권총으로 자살할 때 턱 밑을 대고 쏘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대부분 저렇게 턱이나 코까지 날아가고 죽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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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가지는 당시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기 위해 모인 헌병 중 하나인 샤를앙드레 메르다(Charles-Andre Merda)라는 사병이 지근거리에서 그의 입에다 발포(!)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 기록화도 있다. 메르다는 이 사건 이후 출세해 나폴레옹 1세 치하에서 육군 기병대령까지 올랐다가, 보로디노 전투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사, 육군 준장으로 사후 추서됐다.
물론 어찌되었든 로베스피에르는 턱이 망가진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가 죽여 없앤 루이 16세 &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비참하게 죽는 신세가 되었다.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턱뼈가 날아갔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된 상태라면 다른 사람이 잘게 부수고 물에 탄 음식 비슷한 무언가를 계속 목구멍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
로베스피에르가 너무 유명해져서 그렇지만, 현장에 있던 여러 자코뱅파 지도자들이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와 앙리오는 창밖으로 투신했고[25] , 르 바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다. 하지만 죽은 것은 르 바 뿐이었고, 오귀스탱과 앙리오는 군중들에게 몇시간이나 조리돌림과 구타를 당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기요틴에서 죽여야 한다는 외침에 목숨만 건져서 감금되었다. 하반신이 마비된 쿠통은 인파에 떠밀려 계단아래로 곤두박질 쳤고, 생쥐스트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어서 그나마 얌전하게 체포되었다.
어쨌든 테르미도르 10일(7월 28일) 오후 5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로베스피에르, 동생인 오귀스탱과 동료 쿠통, 생쥐스트 등의 최초의 22인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26]
22인의 머리는 나무상자에 담겨 공동묘지에 던져졌고, 그 위에는 생석회가 뿌려졌다. 그 뒤 모두 108명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죽었다. 이후 프랑스 전국에 걸쳐 자코뱅파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었으며, 재산과 관계없는 보통선거제 도입, 노예제 폐지, 투기 금지와 최고가격제 등등의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가 취한 개혁적 조치는 모두 폐지되었다.오후 4시 정각, 사악한 행렬이 정의의 궁전 마당에 나타났다. 지금까지 파리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로베스피에르가 타고 있는 수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불행한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으며, 처형대로 옮겨질 때야 다시 눈을 떴다. 이 비참한 사내의 머리는 이제 끔찍하고 징그러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머리가 몸에서 떨어졌을 때, 사형 집행인은 그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끔찍한 장면이었다.
- 로배스피에르의 처형을 지켜본 한 시민의 증언
역사학계에서는 테르미도르 반동을 기점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끝났다고 평가한다. 즉 그의 사망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이 끝났다고 봐도 된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집권한 총재정부가 왕당파와 자코뱅파의 중간에 속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을 대혁명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의 종말을 프랑스 대혁명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7. 사생활
다른건 몰라도 사치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 '''부패할 수 없는 자'''(incorruptible)라는 그의 별명은 반대파들도 인정했다고 한다. 특히 어린 시절에 매일 해진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근검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근검했다. 이때문에 국민 공회기 전부터 자코뱅의 도덕성을 책임졌으며, 당통이 왕창 깎아먹었던 자코뱅의 이미지를 회복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나중에 사실상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뒤에도 관사가 아닌 목공 장인인 뒤플레가 세놓은 방에서 출퇴근했다. '''셋방에서 집무실로 출근한 국가 원수는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래도 항상 깔끔한 옷차림과 몸가짐은 했다고 한다.
취미 생활도 독서와 산책 정도뿐이었으며 여자관계도 매우 깨끗해서, 기술한 셋방 주인 딸과 처형 직전 약혼한 것 이외에는 없었다. '''연애의 전설인 프랑스에서, 그것도 국가 원수급이, 심지어 혁명기라는 큰 혼란기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로베스피에르나 루이 16세,[27] 루이필리프 1세, 샤를 드골 등을 제외하고 미라보, 조르주 당통, 바라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수아 미테랑,[28] 니콜라 사르코지[29] , 프랑수아 올랑드,[30] 등등 프랑스의 권력자들은 대개 화려한 여성 편력을 뽐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이다. 그래서인지 로베스피에르는 미라보에게 애초부터 영 수상쩍다는 반응을 보였고, 당통에게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살라고 지적했다. 약혼자에게 남긴 편지에서조차 루소의 도덕론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 가득했다고 한다.
심지어 마시는 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 일로 당대에 무척이나 유명했다. 하루는 그의 동지인 당통이 찾아와서 함께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설탕을 달라고 요구하는 당통의 말에 "내 집에는 설탕이 없습니다. 설탕을 마시면 악마의 유혹에 빠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차에 설탕을 넣지 않고 그냥 마셨을 정도로 금욕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그 말에 당통은 무척이나 불쾌했는데,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와는 정 반대로 온갖 사치스러운 향락과 미식을 즐기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31]
8. 역사적 평가
프랑스 혁명기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대의 중심에 있었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꽤나 양분된다. 그러한 양 갈래의 평가는 그가 정치를 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32] 그에 대해서, 공포정치를 주도하며 피에 굶주린 독재자였다는 비판과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행동한 진정한 혁명가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한 편이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부터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됐다.공안위원회는 강력했고 방탕했으며 아마 부패했지만 무한한 재능을 가진 보기보다 온건했던 혁명가 당통(그는 최후의 왕정을 대신했다.)을 잃고 로베스피에르를 얻었는데,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위원이 되었다. 미덕을 개인적으로 독점했다는, 다소 과도한 의식을 지닌 멋쟁이이며, 냉혈하고 광신적인 이 변호사에 대해 냉정했던 역사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인간도 중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영광스러운 혁명력 2년의 체현자(體現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오늘날 스파르타식 낙원의 건축가인 젊은 생 쥐스트의 빛나는 수학적 엄격함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종종 편협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부상시킨 인물 중에서 그 주위에 숭배가 생겨났던―나폴레옹을 제외하면―유일한 인물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듯이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자코뱅 공화국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출된 하나의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와 미덕의 무섭고도 영광스러운 통치이며, 이러한 통치 아래 국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선량한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였고, 인민들은 반역자들을 죽였다. 장자크 루소와 정의에 대한 투명한 신념은 로베스피에르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단지 국민공회에 속한―결코 전능하지는 않지만 가장 강력했던―소위원회에 불과했던 '''공안위원회의 한 위원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독재 권력이나 심지어 관직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권력은 인민―파리의 대중―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그들의 공포정치였다. '''인민들이 로베스피에르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했다.'''
에릭 홉스봄, 1998, 『혁명의 시대』, 한길사, p.17
8.1. 긍정적 평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그가 죽고 나서는 그에 대한 향수가 일기도 하였다. 특히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던 자코뱅이나 좌파 세력에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 특히 '네오 자코뱅'으로 유명한 바뵈프는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당시에는 그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출범한 총재 정부에 실망하여 그를 재평가하였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를 재평가하는 바뵈프의 글 이외에도 총재정부의 친(親)부르주아적 정책에 반발한 상퀼로트들은 "빵과 93년 헌법을!"이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테르미도르 반동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도 재평가가 있을 정도였다![33] 하지만 부르주아 공화정의 수립과 나폴레옹의 쿠데타, 그리고 이어진 프랑스 제1제국과 왕정복고는 그에 대한 옹호론에 재를 뿌렸다. 이후 2월 혁명, 7월 혁명, 파리 코뮌 등의 혁명적 사회 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나는 이제, 예전에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생쥐스트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을 후회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그들이 그들만으로도 모든 혁명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낫고, 그들의 독재정부가 진실로 훌륭하게 고안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혁명정부가 사라진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이 나의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정당화해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무거운 범죄를 저질렀으며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을 죽였다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이 결백하다 해도 나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죄가 없다고 믿는다. 명예를 탐하고 자만심으로 꽉 찬 자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우리의 로베스피에르가 보기에 수레의 방향을 놓고 그와 다투려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틀림없이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경쟁자들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해도 모든 것을 방해하고 망쳐놓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성가진 요정(妖精)들을 그들의 선한 의도와 함께 질식시켜버리자.’ 그래도 나의 견해는 그가 잘했다는 것이다.
'''쇄신을 도모하는 자는 넓게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고, 가는 길을 막고, 그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거나 오만하거나 명예를 탐하는 사기꾼들에게 모두 마찬가지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들이 거기 있단 말인가? 로베스피에르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그 점이 내가 그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를 '''진정한 재생의 이념을 지닌 천재'''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진보적이고 좌파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왔다. 1889년 처음 개설된 이후 상당기간 프랑스 혁명사 해석의 "주류"를 상징하게 된 소르본 대학 프랑스 혁명사 강의의 첫 주임 교수였던 알퐁스 올라르(Alphonse Aulard)는 자코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 해석의 기틀을 닦았다.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강의를 맡게 된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즈(Albert Mathiez)는 온건공화파를 강조하는 기존 학계를 비판했는데, 특히 전임자 올라르가 혁명적 정통성의 담지자로 평가한 당통을 깎아내리고 로베스피에르를 대안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많은 사료를 검증하여 '부패할 수 없는 자'라는 별명의 로베스피에르를 복원하였으며, 그의 도덕적 권위와 혁명적 순수함을 입증하였다. 또 '로베스피에르 학회'를 만들어서 로베스피에르와 프랑스 혁명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도록 도왔다.[34] 그의 뒤를 이은 조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ebvre)는 마티에즈의 연구 성과를 그 동안의 주류 역사학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전기작가 장 마생(Jean Massin)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전기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35]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자코뱅에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들의 프랑스 혁명사 인식을 자코뱅-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며,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 혁명사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전통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전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계속 주류 역사학에서 비판받는 입장인 것처럼 서술한 부분이 있었지만 적어도 20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전통주의로 대표되는 혁명사학계 다수파는 로베스피에르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기존의 '피에 굶주린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어느 정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혁명, 자유, 평등, 민주주의, 민중 등의 가치에 대해 순수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부르주아를 넘어서서 상퀼로트들에 대한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것, 프랑스 대혁명기의 인물 중 도덕적 권위를 가졌다는 것, 사생활이 아주 깨끗했다는 것 등이 20세기 중반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그는 위대한 웅변가도 아니었고 뛰어난 조직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태를 명석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입증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혁명 초기부터 이미 민주주의자로서 평판을 지녔고 죽을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가 민주주의자였음은 곧 혁명 프랑스가 대내외적인 반혁명의 위협 앞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으려면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곧 '''스스로 혁명적 부르주아로서 민중 세력과의 연대를 적극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감지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전술이나 전략의 차원이 아니라 신념으로서 추구하였다. 민중에 대한 그의 사랑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이데올로그이자 혁명 프랑스의 조타수'''로서 우파의 부동주의, 좌파의 모험주의 양자를 모두 배격하였다. 그는 민중세력의 동참과 민중 운동의 활력이 혁명을 지켜내는 데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인식하여 그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지롱드파의 숙청을 받아들였다.
최갑수(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36]
8.2.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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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파는 물론이고, 온건한 혁명을 지향하는 공화주의자들이나 지롱드파에게는 상당히 위험스럽고 증오스러운 인물이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그가 몰락한 후 그는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냉혈동물"''', '''"피에 굶주린 독재자"''' 등 온갖 악명을 획득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19세기 역사학계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아주 많이 깠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자신의 저서 『폭군』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잘못된 종교정책과 폭군적 야망을 지닌, 시대에 역행한 인물로 규정했다. 실증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 텐느(Hippolyte Taine)는 "고전적 정신의 조생아, 낙제생", "혁명적 현상을 타락한 소수의 자코뱅의 기도"라며 그를 비난했다.
이외에도 로베스피에르에게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서술이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프랑스 혁명 관련 서적을 차지했다. 그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큰 것은 공포정치에 대한 것이다. 공포정치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혁명을 변질시켰다는 것이다.[37]
로베스피에르는 미덕과 선, 정의에 관해 끝도 없이 긴 연설을 늘어놓았고, 프랑스를 미덕의 본보기가 되는 진정한 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미덕(les vertus)의 공화국'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감시하는 현대의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유를 위해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정작 집권후에는 통제적 경제정책으로 자유를 말살하는 모순을 저질렀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나 아렌트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유를 위해 자유를 없앴다며''', 이것이 나중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과 굴라크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이 가진 전체주의적 속성을 꼬집은 것.
다만 이런 사례로 유명한 '''로베스피에르의 우유'''일화[38] 는 오로지 '''한국에서만 유행하는 이야기'''로서 서양에서는 전혀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Food Control and Price-Fixing in Revolutionary France: II 보면 생필품에 대한 가격통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가격통제 목록에서 우유는 제외였다.
반면 서양권 사이트에서 로베스피에르와 우유를 엮은 사례로는, 그의 아침식단에는 과일, 버터, 커피와 함께 우유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에세이라든가#, 그가 매일 아침 우유만 간단히 먹고 일하러 갈 정도의 워커홀릭이었다든가#의 이야기만 확인되지, 그가 우유 가격을 통제했다든가 그로 인해 우유가격이 올라갔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이 우유는 아니지만 버터, 고기, 포도주, 등 30여개의 식품과 생필품에 가격상한제를 실시한 것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한 것은 맞다. 자세한 것은 후술할 생필품가격상한제 실시 항목 참조. '''
한편, 좌파 내에서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먼저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왜 더 과격하지 않냐(...)고 비판한다. 당장 대혁명 때도 자크 르네 에베르 등의 자코뱅 급진파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을 싸잡아서 '''온화주의자'''라고 비판했고, 그를 재평가했던 바뵈프도 테르미도르 반동 전까지 로베스피에르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쓸모없고 잔인한 권력자'''라고 깎아내렸고,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진정성만큼은 인정해주었으나) 그가 부르주아적 사상을 탈피하지 못한 채로 정치의 힘에만 의존하고 경제를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39] 한편, 로베스피에르보다 온건한 성향의 좌파들은 우파들의 비판처럼 그의 공포정치가 가지는 잔인함과 비민주성에 초점을 맞춰 비판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가 일으킨 혁명은 죽 쒀서 개준 꼴'''에 불과했다. 애초에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의 왕정제를 폐지하려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본인은 그 혁명에 대한 혜택을 일절 받지도 못한 것은 물론이요, 본인 역시 반혁명분자로 몰려 단두대로 처형당했으며 그가 일으킨 혁명은 그저 '''프랑스 왕정제에 일절 흠집조차 못 냈으며 단지 왕가만 부르봉 왕조에서 보나파르트 왕조로 변경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결국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일으킨 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어이없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되었다.
8.2.1. 생필품 가격상한제 실시와 그 영향
로베스피에르는 생필품 가격상한제 법(The Law of the Maximum / La loi du Maximum)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식품의 공급과 가격을 규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로 수도 파리의 상퀼로트들을 만족시키고 달래기 위해서였다.
사실 프랑스는 1793년 경에, 임금과 생필품의 가격 그리고 파리의 생활환경은 1789년의 대혁명 발발 이후로 거의 개선 된 것이 없었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유럽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프랑스의 수출과 수입이 감소된 상황이었고 국내무역은 무너져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쟁을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지방에서는 이러저러한 많은 사건들로 농업 생산이 붕괴되고 있었다.[40]
그래서 1793년 초, 파리의 상퀼로트들은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la Convention nationale)로 하여금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런 캠페인을 주도하던 자들을 '화난 사람들(The enraged/ Les Enragés)'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정당이나 클럽에 속한 자들은 아니었다. 높은 식품 가격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런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일군의 화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화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던 인물은 자크 루(Jacques Roux,1752-1794)라는 카톨릭 성직자이자 급진적인 운동가였다. 그는 일관되게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부르짖었다. 자코뱅파가 부르주아적인 무기력함을 보이고 있다고 성토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모든 이가 식품을 구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물건 사재기를 하는 부자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극단적인 급진주의 때문에 후에 그에게 '붉은 사제(Red Priest, le curé rouge)' 또는 '작은 마라(le petit Marat)'라는 별명이 붙었다. 자크 루의 열렬한 연설은 당시 자코뱅들이 장악하던 국민공회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지만 상퀼로트를 비롯한 평민들이 있는 파리의 거리에서는 그의 연설이 크게 먹히고 있었다.
1793년 2월이 되자 파리에서 폭동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 폭동들은 처음에는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이 일으켰는데 빵, 설탕, 커피, 비누 등의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2월 말이 되자 남자들도 가세하면서 가격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는 빵가게 주인과 식료품가게 주인들에게 폭력으로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식품 폭동들은 빵 부족 상황이 완화되기 시작하던 3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1793년 3월부터 6월 사이의 기간 동안 당시 국민공회는 주로 전쟁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또한 지롱드파와 급진 자코뱅인 몽테뉴파가 서로 권력투쟁을 하던 때였다.
자코뱅과 같이 하던 급진적인 언론인들은 높은 식료품 물가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온건파인 지롱드파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지롱드파 인사들이 지방 세력, 사업적 이득을 보는 세력, 그리고 부르주아 세력들과 결탁된 자들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낙인은 지롱드파들을 식품 공급 문제와 관련되어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1793년 5월 초, 파리의 자코뱅들은 식품 정책과 관련하여 상퀼로트 편을 들기 시작했다. 이는 계산된 움직임이었는데 이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어 지롱드파를 영원히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때껏 식품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상퀼로트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식량을 비축해 놓은 자들과 가격 투기세력, 이를 통해 폭리를 취하던 자들에게 불호령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5월 4일, 국민공회는 가격통제를 위한 첫 조치로 밀과 밀가루의 가격을 고정시켰다.
이에 지롱드들은 가격통제를 반대했다. 왜냐면 가격이 오르면 식품 공급이 증가할 것이고 그러면 물가도 결국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코뱅들은 이런 경제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도했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상퀼로트들이 자코뱅파와 몽테뉴파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상퀼로트들은 지롱드파들을 국민공회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793년 5월까지 대중들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결국 6월 2일에 지롱드파들은 축출되었다. 이로써 자코뱅파와 몽테뉴파들이 공회에서 완전히 승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제부터의 파리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그 책임을 오롯이 자코뱅들만이 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더 이상 남탓하며 비난할 대상, 희생양으로 삼을 대상이 없어지게 되었다.
1793년 6월 25일, 자크 루는 공회 내에서 열성적인 연설을 하였다. 후에 이 연설을 '화난 사람들의 성명서(마니페스토)(Manifesto of the Enrages)[41][42] '라 부르게 되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자코뱅파와 몽테뉴파가 상퀼로트들의 요구에 충분히 호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물품을 독점하고 높은 가격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자코뱅과 몽테뉴파가 엄벌을 취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자크 루가 사라졌지만 상퀼로트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다. 상퀼로트들은 공회측이 조치를 취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1793년 9월, 이들은 공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청원을 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귀족들은 박살이 났지만 여전히 새로운 엘리트들과 상인들, 그리고 식품 투기꾼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상황에 왜 상퀼로트들은 자신들의 피를 조국을 위해 흘려야 하는가? 왜 상퀼로트들은 떨쳐일어나 그들이 왕과 귀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자들의 목을 치기 위해 일어서지 않는가? 만약 당신네들이 가격상한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부자들의 목을 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청원이 일어나 며칠 후인 9월 29일, 공회는 가격상한제 법(the Law of the Maximum, 또는 the General Maximum[44][45] )을 통과시킴으로써 상퀼로트들의 청원에 응답하였다. 이 급진적인 법은 30여가지가 넘은 필수품들(대부분 식품이었다.)의 가격에 상한을 설정하였다. 상한가가 설정된 물품들 중에는 신선육, 소금간을 한 육고기, 베이컨, 버터, 올리브유, 소, 소금에 절인 생선, 포도주, 브랜디, 식초, 사이더, 맥주, 장작, 석탄, 숯, 양초, 램프오일, 소금, 소다, 설탕, 꿀, 종이, 가죽, 철, 주철, 납, 강철, 구리, 삼(hemp), 마직류(linens), 모직류(woollens), 나막신, 신발, 순무(turnips), 유채씨(rapeseed), 비누, 담배, 칼륨 등이 대상이었다.
상인들은 그들 가게 바깥이나 창문에 법에 따라 모든 판매 물품의 최고 가격 목록을 보이게 붙여 놓게 강제되었다. 만약에 이들 가격 중에 법으로 정해진 최고가격을 초과하는 것이 있으면 일반 대중들이 관계 기관에 알리도록 만들었다. 상인들은 최고가격을 위반한 가격의 두 배를 벌금으로 내도록 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벌금은 관청에 내는게 아니라 위반을 알린 사람이 받도록 하였다. 이런 가격통제 법은 또한 삯(wages)에도 적용시켰다.
물가와 삯에 고정된 제한을 가한 이 조치는 좋은 의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재앙이었다. 강제로 부과된 제한으로 인해 농부들과 생산자들은 생산 의욕을 잃게 되었다. 이들은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파는 것을 포기하고 덜 생산하거나 생산한 것들을 숨겨 쌓아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시와 마을로 들어오는 식품의 양이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식품 부족은 더 악화됐다.
게다가 중간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자들은 도시의 소매업자들과 쁘띠부르주아들(가게주인, 정육점주인, 빵집주인, 시장가판대업자)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원가와 매가의 차이가 극히 적은, 작은 이윤으로 버텨나가고 있었다. 결국 정직한 상인들이 최고가격제의 희생자가 되었고 부패하고 비윤리적인 자들은 이를 악용하였다. 정육점주인들은 질좋은 고기보다는 고기 부스러기를 이전보다 더 많이 붙여 고기 무게를 쟀다. 가게주인들은 최고가격제로는 1급 보다는 2급 제품을 팔았다. 대중들은 품질에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때 얼마나 품질이 나빴냐면 포도주를 샀지만 배 주스였고, 올리브유를 샀지만 저질기름을 사게 되었고, 후추를 샀으나 재가 들어있는 후추였으며, 설탕을 샀지만 전분가루가 섞인 설탕이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불법적으로 상품을 팔고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암시장이 창궐하였다.
가격상한제로 설정된 가격은 1790년의 물가수준의 133%에 해당하는 가격수준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최고가격을 정할 때 운송비용을 과소하게 설정하였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상품을 필요로하는 시장에 내다팔기 보다는 가장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최고가격의 통제를 받는 식품들을 구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암시장에 의존하거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46]
9. 기타
로베스피에르의 전기로 장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 혁명의 탄생>이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인생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을 풀어낸 작품인데, 로베스피에르를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꽤 괜찮다. 다만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을 것.
베르사유의 장미에 프랑스 혁명 관련으로 나온다. 베르나르 샤틀레와 생쥐스트의 스승격이자 공화주의자로 지하에서 혁명 세력의 중심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려 하자 시민들 스스로가 혁명의 주체가 되길 원했던 베르나르와는 달리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주도하는 혁명으로 이끌어 나가길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생쥐스트도 그를 '''권력을 탐하는 테러리스트'''라고 평하였다. 혁명을 마친 이후에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기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진정남 나폴레옹에서는 작중 내내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포스 있는 정치인으로 등장하는데, 동정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47] 한편 일명 '''사형간지 로베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재판에 임해서 '사형' 아니면 '무죄'만을 선고했다는, 당대부터 유명한 카더라이다. 참고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권력을 잡은 후 종종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 이게 다름 아닌 로베스피에르의 선글라스다. 이 작품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꽤 우호적으로 묘사하는 편인데 작품에서는 로베스피에르에서 생쥐스트를 거쳐 나폴레옹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정신적 후계 구도를 묘사하고 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나폴레옹은 원래 워낙의 하급 장교라서 출세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출세할 수 있도록 전방 장교로 꽂아주고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이다. 오귀스탱이 나폴레옹을 낙하산으로 임명한 것은 알려지기로는 나폴레옹이 쓴 공화제옹호 정치선전물을 보고 감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군사쿠데타를 경고한 로베스피에르이지만, 그 씨앗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던 셈이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가 숙청된 다음에는 곤란을 겪게 되지만, 자신이 자코뱅이 절대로 아니라고 열심히 부정을 한 결과 같이 단두대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소설가 전민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막시민 리프크네와 란지에 로젠크란츠 등은 로베스피에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캐릭터 조형이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실종된 상태의 장남이라는 가족배경과 어린 시절 해진 옷을 입고다니는 패션 그리고 이름[48] 등에서 막시민 리프크네와의 공통점을, 청렴결백한 것으로 유명한 공화주의자 혁명가라는 점에서 란지에 로젠크란츠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초기 판타지 작가로 지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확고한 팬층을 가진 '에누마 엘리시'의 작가 김유나 역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이 사람을 들었다고.
만화 슈발리에에서는 데옹 드 보몽을 지원해주는 소년으로 등장한다.(애니메이션/코믹스 판 공통) 하지만 이 작품이 실제 역사물보다는 팩션에 가까운 물건이므로 단순히 이름만 같은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Fate/Grand Order에서는 슈발리에 데옹의 인연퀘스트에서 등장. 성배가 일으킨 영향의 잔재 때문에 망령으로 소환됐다. 망령으로 소환된 탓인지 자신의 정의를 잃고 숙청과 죽음만 외치는 상태. 본래는 결의에 찬 기백을 지닌 남자로, 데옹과 검을 나눈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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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성전기사단, 정확히는 신 성전기사단과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실제 역사적 사실보다는 공포 정치의 수장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49] 어찌되었든, 공포정치로 프랑스를 장악하였지만, 게임 후반부에 신 성전기사단을 토벌하려는 아르노 도리안과 엘리즈 드 라 세르가 여론을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물밑 작업을 하는 바람에 체포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코뮌의 보호를 받으며 숨게되면서 최종보스에게 도달하게 된다. 결국 뒤쫓아온 경비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였고, 여기서는 그가 죽기 전에 입가에 총을 맞아 말을 못했다는 가설을 따랐다. 그리고, 그 총을 쏜 사람이 엘리즈 드 라 세르다! 로베스피에르가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소원대로(?) 바로 총을 쏴버리는 것이 압권
게임 아머드 코어 포 앤서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로 스토리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맥시밀리안 테르미도르라는 링크스가 반체제 혁명 조직 오르카 여단의 보스로 등장한다. 또, 공교롭게도 그 체제의 꼭대기에는 그가 사형당한 날인 28일을 이름으로 하는 링크스가 존재한다...
혼블로워 시리즈를 오마주한 밀리터리 SF 겸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아너 해링턴 시리즈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로버트 스탠튼 피에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예 작중에서 '롭.S.피에르'라는 약칭이 나온다. 프랑스를 모델로 한 헤이븐 인민공화국의 유력자로, 정치경찰의 2인자 오스카 생쥐스트, 극단주의 포퓰리스트 코델리아 랜섬[50] 과 함께 자작극을 벌여 정권을 손에 넣는다. 붕괴한 헤이븐의 산업과 교육을 정상화한 업적이 있지만[51] 패전한 지휘관들을 그 가족까지 함께 처단하거나 열악한 환경의 행성을 비밀 수용소로 운영하는 등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자신이 중용한 에스더 맥퀸 국방장관이 일으킨 쿠데타 와중에 사망한다. [후속작스포]
영화 4교시 추리영역에서는 그가 남긴 '''"범죄는 원하는 바를 얻으려 결백을 도살하고 결백은 범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운다."'''라는 명언이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