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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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 자는 백종(伯宗), 산양군 고평현 출신, 손자로는 왕겸(王謙) 증손자로는 왕찬(王粲)이 있다.
2. 생애
왕공은 대대로 호족집안으로 효렴으로 천거된 후 청주자사(青州刺史)를 지내면서 횡령을 한 2천 석관[1] 을 탄핵하여 한안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21년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임명되고 122년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자리를 옮긴다. 원앙(袁閬)을 공조로 황번(黃憲)과 진번(陳蕃)을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진번이 태수부(太守府)에 왔어도 왕공이 바로 진번을 만나지 않았다. 본래 고명한 선비인 진번은 병으로 물러난다는 쪽지를 남기고 돌아갔다. 왕공은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진번을 제명하려고 하였지만 원앙이 진번을 천거한 이상 제명시켜서는 안된다고 만류하였다. 왕공은 이내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진번하려고 하였지만 원앙이 진번을 천거한 이상 제명시켜서는 안된다고 만류하였다. 왕공은 이내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진번을 예로 대했고, 후에 사람들은 왕공에게 경복하였다.
126년 입조하여 태복(太僕)과 태상(太常)을 지내었다.
129년 9월 12일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어 133년 5월 19일 지진으로 인해 파면당하였다.
136년 12월 26일 태위(太尉)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위 관리들로는 오직 공적인 일로만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왕공이 천거한 자들은 모두 명망높은 자였다.
왕공은 환관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보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왕공은 한순제에게 환관을 추방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왕공의 폭탄발언에 겁이 난 환관들은 문객을 풀어 왕공을 모함하도록 하였다. 한순제는 이에 왕공에게 자백을 명하였다.
이고(李固)는 대장군 양상(梁商)에게 "왕공은 지조가 높은 선비로써 간악한 환관들의 이유없는 모함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본래 삼공은 대역죄가 아닌 이상 심문을 받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데도 조정은 심문 중에 그에게 조그만한 불만으로도 자살을 시킬 것이니 조정은 현인을 죽인다는 오명을 뒤집어 쓸 것입니다."
양상은 이말을 듣고 한순제에게 진언하여 왕공은 목숨을 건졌다.
137년 중상시(中常侍) 장규(張昉)이 권력을 잡자 순제에게 장방을 주살시키라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친척 중 누군가가 전 태위였던 양진(楊震)의 일을 말하며 만류하자 그만두었다.[2]
140년 9월 14일 병을 이유로 태위직을 내려놓고 집에서 죽었다. 아들로는 사공을 지내는 왕창(王暢)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