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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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에 의해 보강된 금주성
锦州(錦州) / 금주 / Jinzhou

1. 개요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지급시. 선양시에서 서쯕으로 150km, 친황다오에서 동북쪽으로 150km 떨어진 해안 도시로 인구는 340만명이다. 북경 일대와 요동, 만주를 이어주는 요서주랑(辽西走廊)의 일원으로서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가지는 소릉하(小凌河) 하류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에서 15km 떨어져 있다. 석탄 공업 도시이면서 동시에 발해만의 수산물과 요서의 농산물이 집결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영원성은 서남쪽으로 60km 떨어진 후루다오시 흥성(興城)에 위치해 있다.

2. 역사


역사적으로 그저 그런 도시였지만 명청 교체기에 산해관 바깥의 군사 기지로서 명나라의 국운을 함께하며 역사에 자주 기록되었다. 원숭환은 영원성(흥성)을 요새화 한 후 그 외성의 느낌으로 금주 역시 중시 여겼으며 금주성 인근에 송산, 대릉하, 소릉하 등에도 군사를 배치하였다. (1624년) 하지만 환관 위충현은 장성 바깥의 모든 요새를 포기하고 산해관으로 철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원숭환은 영원성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고 1626년에 영원성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듬해에 숭정제가 즉위하며 위충현이 숙청되자 원숭환은 조정의 지원을 받아 요서회랑을 재무장하였고 원숭환의 충복 조솔교(趙率敎)가 3만 대군을 이끌고 주둔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압한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대릉하, 소릉하의 요새를 점령하거 금주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14일의 공성에도 조솔교의 금주성은 충분한 식량과 홍이포의 위력 덕에 끄떡 없었다. 이에 후금 군은 원숭환이 주둔하던 영원성을 공격하였으나 그역시 건재했고 재차 금주로 들이닥쳤으나 다시 격퇴되었다. 결국 홍타이지는 부왕 누르하치에 이어 요서에서 패하고 후퇴하였다. 이를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 부른다.
하지만 1629년 말, 원숭환은 산서성 방면으로 요서를 우회하여 북경까지 다다른 후금군을 격퇴하였음에도 모함을 받아 구금되었고 이에 부관 조대수는 요서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숭환은 옥중 서신으로 조대수에게 끝까지 명조에 충성을 다하라 하고 1630년에 책형으로 죽었다. 한편, 화북 지역을 휩쓴 후금 측은 홍이포 기술자를 생포하였고 그 대포를 앞세워 1631년, 원숭환, 손승종의 설득으로 복귀한 조대수가 지키는 대릉하 요새를 포위하였다. 조대수는 결국 항복하였고 후금 측에 충성을 다하는 척하며 금주성에 항복을 권하겠다고 해놓고서는 금주성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1641년 초, 청나라 대군은 금주를 포위하였고, 외성이 항복하자 조대수는 명 조정에 도움울 요청한다. 이에 홍승주를 위시로 한 13만 대군이 파견되었는데, 송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후 조대수는 몇달간 고립된 채로 수성하였는데 식량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하여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다시 투항한다. (1642년 2월) 이때 청 장수들 중에서는 이미 한번 배신한 조대수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홍타이지는 그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그 이후부터 그는 충실한 청의 신하로서 명나라 공격에 종사한다. 금주가 함락된 이후에도 영원성은 관외의 유일한 명나라의 보루로서 남아 있다가 1644년에 숭정제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을 막기 위해 그 군대를 철수시키며 청이 접수하였다. 그 군대가 북경에 다다르기 전에 자금성이 이자성에 넘어가고 숭정제가 자살한 것은 함정.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맹공을 받았고 끝내 함락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이 스팀슨 선언을 발표하는 등 일본 제국의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1948년 10월, 2차 국공내전의 일환으로 이틀간 국민당과 공산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