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전쟁 이후
5. 관련 문서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1]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인조실록 인조 5년(1627) 3월 3일자 기사


1. 개요


丁卯胡亂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 전쟁.

2. 배경


1616년 후금광해군의 적절한 이중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1623년 이후 정세가 급변한다.
중요점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반정 이후 광해군대와 달리 후금과의 외교 문서 교환을 끊어버린 점.
  2. 조선이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군을 평안북도 철산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은밀히 원조한 점.[2]
  3. 슈르가치(Šurgaci)[3]의 장남 아민(Amin)과 홍 타이지의 갈등, 누르하치가 전제적 권력을 휘두른 반면 홍 타이지는 즉위 초에 4명의 대버일러의 대표자적 위상으로서 이 되었는데, 그가 권력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아민은 누르하치 사망 이래 희망하던 독립을 조선 정벌을 통해 추진하고자 했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조선 정벌을 건의한 것은 아민을 비롯한 원정군 지휘부였다. 그는 명군이 해도로 도주하자 내친 김에 조선을 치자고 결정한 것은 그였다. 아민은 정묘화약 이후 한양으로 진입하여 독립을 꾀했으나 천연두의 유행과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을 약탈하고 평양에서 또다른 맹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반항을 그쳤다.[4]
  4. 명나라를 치기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공격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성이 급격히 부상한 점.[5]
  5.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6]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했던 점.
  6. 조선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던 누르하치를 이어 집권한 홍 타이지는 아버지와 달리 조선에 대해 강경한 실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광해군 때의 방비와 외교정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후금도 대기근에 시달려 조선과 전쟁을 벌이기에 무리였으나 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이 붕괴되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도 모자라 그 과정에소 길잡이들까지 확보됨으로서 홍 타이지는 전쟁을 실행에 옮길 현실적 여건을 확보하였다.

3. 전개


1627년 2월 23일(인조 5년 음력 1월 8일), 초봄에 아민이 이끄는 후금군 3만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사르후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7] 심양을 출발했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군에게 장악된 것이다.[8]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 등지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패하면서 그 본진이 개성까지 후퇴하였고, 인조를 포함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후금을 향한 공세[9]와 더불어 정봉수(鄭鳳壽, 1572년 ~ 1645년)라는 무관은 의병을 모아 평안북도 철산군의 용골산성에서 적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평안북도 용천군의 이립(李立, ? ~ 1627년)도 의병을 모아 적의 배후를 끊었다.
결국 후금군은 3월 25일(음력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10]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는 조약을 맺고 4월 18일(음력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종실인 원창군[11]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4. 전쟁 이후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12] 실제로 화약 과정을 보면 주거니 받거니 협상도 제법 이뤄지고, 후금에서 화친을 재촉하기도 하는 등, 이후의 굴욕처럼 조선 입장에서도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은 아니었다. 유생들을 위로한다고 강화도에서 과거 시험을 치르질 않나, 상소에 '항복'이라는 표현을 쓴 관리를 파직시키라고 인조가 몽니를 부리질 않나.[13] 후금이 급한 걸 알긴 알았는지[14] 때아닌 여유(?)를 부리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화약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15]시켜 가도의 모문룡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골 지역 등 근처 유목 부족들을 규합,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니 후금 입장에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16]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 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 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혔다.
그러다가 정묘호란 발발 9년째인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했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5. 관련 문서


[1] 자질구레한[2] 다만 이는 모문룡이 이뻐서 주둔을 허용한 것도 아니었으며 모문룡이 이뻐서 원조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이 명의 속국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작용하여, 모문룡이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는데 기여하고 명 조정의 실세들과 친밀했다는 점으로 인해 모문룡에게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조는 정묘호란이 벌어지기 전에 정세를 오인하고 후금의 침략은 현실성이 없지만 모문룡의 침략이 현실성이 있다고 여겨 모문룡의 침략에 대비해야하는 논의를 자주하고 5천의 군사도 징발했다.[3] 누르하치의 동생으로, 누르하치와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유폐되어 숨졌다.[4]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8;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중국사연구》 54. [5] 1626년 영원성 전투로 산해관의 굳건함을 안 후금이 배후를 확보하고 동시에 명에 총력을 기울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 주력하기 위해 고려를 먼저 쳤던 요나라가 떠오르는 대목인데, 조선고려만큼 버텨 주었더라면 동북아에 묘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 명나라 역시 송나라처럼 오래 갔을지도 모르는 일.[6] 이괄의 난(인조 1년)으로 인해 북방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되었다.[7] 실록을 보면 후금의 길잡이로 돌아온 강홍립을 두고 조정에선 "얘를 죽여 살려"하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인조 선에서 삭탈 관직으로 정리되었다.[8] 이로 부터 9년 뒤에 치른 전쟁에선 산성을 생각 안 하고 한양으로 내달렸다.[9]양면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10] 협상 과정에서 천계 연호 사용에 대해서 유해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기록이 여럿 있다. "발끈 성을 냈다(勃然生怒)."라고 표현했는데, 조정의 해결책은 '시비 붙지 않게, 답서 보낼 때 그냥 날짜를 쓰지 마' (...)[11] 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으로 원래는 부령(종친부 종5품)이었던 이름뿐인 왕족이다.[12] 당시 화약을 주도했던 유해는 이후 이중 첩자 혐의로 목이 잘렸다. 또한 이 당시의 후금이 품은 불만은 이후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된다.[13] 웃긴 건 '얼른 항복하세요.' 하고 상소를 올린 게 아니라 '아 쪽팔리게 왜 오랑캐한테 항복하나요 ㅠㅠ 나가서 싸우죠 ㅠㅠ'라는 상소를 올린 것. 인조도 창피하긴 했는지 '야, 우리가 지금 화친 협상 하는 거지, 항복 협상하는 거냐? 너 지금 나 놀리냐?' 하는 반응이었다.[14]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인조는 강홍립, 박난영을 만나 후금이 오래오래 조선에 머물러 있을 상황이 못됨을 전해 들었기 때문[15] 화약 내용을 사실상 어기고...[16] 그렇게 불려진 세는 병자호란에서 압도적인 규모로 표출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