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 전투

 

송산-금주 전투
날짜
1641년~1642년
장소
중국, 산해관 이북 송산(松山), 금주(锦州)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명나라(明)
청나라(淸)
지휘관
주장 홍승주
부장 조대수

청태종 홍타이지
지르갈랑
유림[1]

병력
홍승주의 군대 10만 이상
조대수의 군대 2만5천
불명
사상자
약 60000명
알려지지 않음 (추정치: 다수)
결과
청군의 결정적인 승리
기타
산해관을 제외한 명나라의 북방 방어선 붕괴, 홍승주의 투항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청실록의 기록


1. 개요


송산(松山) 전투는 1641년에서 1642년에 걸쳐 벌어진 사이의 전투이다. 일련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송산에서 금주(錦州)[2]에 걸쳐 있어서 중국에서는 송금전투(松锦戰鬪), 또는 송금대전(松锦大戰)이라고 부른다.
홍승주가 지휘한 10만 명 이상의 명나라 정예군이 금주에 고립된 조대수를 구원하고자 출진하였으나 결국 청태종이 이끄는 청군에게 완파되었고, 구원군이 격파된 것을 알게 된 조대수 역시 곧 항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정예 병력을 다수 상실한 명나라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만한 역량을 상실하였고, 결국 2년 뒤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멸망하였다.[3]

2. 배경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우고 1618년 무순(撫順)을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명나라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요동요서 지역의 대부분을 후금에게 빼았겼다. 웅정필원숭환과 같은 명나라의 걸출한 명장들은 야전에서 후금군의 우세를 인정하고 방어적인 전략으로 후금의 공세를 저지하였다. 특히 원숭환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과 만리장성 너머의 송산성, 금주성 등의 4개 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진 방어 전략을 구축하였는데, 요새를 중심으로 홍이포 등의 화약 무기를 이용하는 전략은 1626년 영원성 전투 등에서 그 효용을 입증하였다.
누르하치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청태종 홍타이지는 1629년 내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만리장성의 취약한 부분이었던 섬서성북부[4]산서성, 허베이성 남부로 침입하여 여러차례 대규모 약탈을 감행하였다. 후금군이 명의 수도인 북경에까지 접근하자 원숭환은 부관 조대수와 함께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북경을 구원하였다. 그해 말 원숭환이 모함을 받아 구금되자 조대수는 요서로 달아났는데, 원숭환은 책형으로 죽음을 당하면서도 조대수에게 옥중 서신을 보내 끝까지 명조에 충성을 다하라고 설득하였고, 이러한 설득에 의해 조대수가 복귀하였다.
한편 후금 측은 명의 포로와 귀순자들로부터 홍이포의 제작과 사용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나중에는 홍이포를 자체적으로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그 다음에는 40문의 대포를 앞세워 1631년 조대수가 지키는 대릉하 요새를 포위하였다. 조대수는 결국 항복하였으나, 후금 측에 충성을 다하는 척하며 금주성에 항복을 권하겠다고 해놓고서는 금주성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조대수는 10년간 금주를 지켰다.
후금은 1636년 칭제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으며, 1636년 조선을 침공하여 배후를 안정시켜 명과의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병자호란 문서 참조).
1641년 초, 지르갈랑(濟爾哈朗)이 지휘하는 청나라 대군 4만이 금주를 포위하였고, 외성이 항복하자 조대수는 명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숭정제는 자신이 믿던 에이스 홍승주에게 금주를 구원하라 명하였고, 이에 홍승주는 그해 4월 오삼계 등의 장군 8명과 함께 화승총, 홍이포 등으로 무장한 10만명 이상의 보병과 4만 가량의 기병이 포함된 정예병력 14만을 이끌고 산해관을 나섰다. 명이 구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을 탐지한 청나라는 금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대신에 명의 원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3. 전개


명의 구원군과 청의 요격군 사이의 첫 전투는 송산과 금주 사이에서 일어났다. 지도를 보면 송산은 금주에서 남쪽으로 1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고 두 성채 사이에는 산악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1641년 6월 교전이 벌어졌다. 지르갈랑이 지휘하는 청군은 대패를 당했고[5], 4차례나 포위되었으나 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명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속전속결을 독촉하던 숭정제의 압박을 받고 있던 홍승주는 금주로 계속 나아가려 했으나, 명군의 진격은 청군이 곳곳에 설치해 놓은 목책 등의 장애물에 의해 지지부진하였다.
지르갈랑의 패전 소식을 들은 청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와서 전선에 합류하였다. 당시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청나라의 입장으로는 전쟁을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지만, 청태종은 용골대 등 부하장수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히려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로 하였다. 이 전략에 따라 청군이 명의 전방에 소규모 공격을 지속하는 사이 일부의 청군이 명의 배후로 돌아가 명의 보급로를 끊었다. 특히 송산성 남쪽으로 25km 가량 떨어져 있는 필가산(筆架山)에 있던 명군의 보급기지가 함락되어 청의 손에 넘어갔고, 명군은 청군에게 포위되고 만다.
그해 8월 포위된 명군은 결전과 후퇴 사이에 하나를 결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홍승주는 최후의 결전을 계획하였지만, 휘하의 장군들은 반대하며 보급을 위해 산해관으로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공포에 질린 여러 장군들이 제멋대로 퇴각해 버렸고 홍승주의 수중에는 수만명의 병력도 남지 않았다. 한편 청태종은 명군이 퇴각한다는것을 전해듣고는 명군의 퇴로에 복병을 배치해 두었는데,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후퇴하던 명의 장군들과 병사들은 청의 복병에 걸려 궤멸되었고, 이들 중에 후퇴 계획을 면밀하게 세운 오삼계를 포함한 3만명 가량만이 산해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6]
홍승주는 남은 군대를 이끌며 송산성으로 밀려들어갔으나 여기서도 다시 포위되었다. 명군은 포위를 뚫으려고 여러 차례 야간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식량이 떨어졌다. 결국 홍승주의 부장이었던 하승덕이 몰래 항복하고 청군을 맞아들이면서, 1642년 2월 송산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많은 명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송산에서 죽었으나, 홍승주는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청태종의 극진한 요청으로 인해 청에 귀순하였다.
한편 고립되어 금주를 수성하고 있던 조대수는 식량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하여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송산성이 함락된지 한달도 지나치 않아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때 청 장수들 중에서는 이미 한번 배신한 조대수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청태종은 그를 관대하게 용서하였고, 이후부터 그는 충실한 청의 신하가 되어 명나라 공격에 종사한다.
여담으로 청의 요구에 따라 조선도 원병을 보내어 싸웠다. 유림(柳琳)이 지휘한 조선군은 비록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 포수들은 뛰어난 저격 실력으로 명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도 금주에 와서 조선군을 독려하였다.

4. 결과


이 전투의 패전으로 큰 충격을 받은 명의 조야는 청에게 강화를 제의하였다. 청 태종은 계속 공격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명에게 유리한 강화 조약을 제시하였는데, 조약의 내용은 양국이 길흉의 대사에 서로 조야할 것, 명이 매년 금 1만냥과 은 1백만냥을 청에게 주고 청은 인삼 1천근과 담비 가죽 1천장을 명에게 줄 것, 연산을 완충지로 하는 국경을 정할것, 연산에 시장을 열어 교류할 것 등이었다. 명에게 있어서 큰 영토를 떼어주거나 군신관계를 강요받지 않은 좋은 조건이었지만, 강화조약은 병부상서 진신갑의 실수로 결렬되었고, 이후 청은 명에 대한 약탈 전쟁을 재개하였다.
무엇보다 송산 전투의 패전은 가뜩이나 쇠퇴하고 있던 명의 운명에 치명타를 날렸다. 일단 명의 정예병 다수가 쓸려나갔으며, 총사령관인 홍승주가 청에 항복하고 많은 장군들이 항복하거나 사망하면서 명에서는 유능한 장수의 씨가 거의 말라 버렸다. 뿐만 아니라 홍승주는 마침내 청이 입관에 성공한 뒤 많은 명의 장수들을 설득하여 청에 귀순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 많은 명의 장수들이 청으로 귀순하였다.
한편 1627년 명나라의 하남, 섬서 지역에서는 그동안 누적되어온 명나라 내부 체제의 문제점들(세금 폭증, 농민들의 유민 화(化), 농민 반란, 북로남왜로 대변되는 이민족의 침략, 부정부패의 만연, 명 4대 암군)과 결정적으로 이쯤에 발생한 기후 변화로 나타난 대기근으로 인해 민생이 파탄났으며 결국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자성을 위시로 한 농민 반란 세력은 한때 세력을 떨쳤지만 1630년대 중반 홍승주, 손전정, 양사창 등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자성의 무리는 수십명만이 살아남아 산중에 은신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고, 명의 주력군이 송산 전투에서 소멸되어 버리자 기회를 잡은 이들은 하남으로 이동하여 세를 모아 재궐기하였다. 예전에 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 탈영한 병사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의 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기하는데 성공했고, 이들은 파죽지세로 쇠약해진 관군을 연파하였다. 결국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은 북경을 점령하고 명을 멸망시켰다.
송산 전투의 결과는 조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의 임경업은 병자호란 이후로도 명과 내통하여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홍승주가 청에 투항하면서 임경업과 주고받았던 그간의 서찰들이 모두 청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일찍부터 임경업을 의심하고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던 청은 확증을 잡게되자 조선에 임경업과 최명길 등을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임경업은 체포되기 전에 탈출하여 명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명의 장수가 되었지만 청나라가 중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후 임경업은 조선으로 압송되어 죽음을 당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최명길은 스스로 모든 책임을 혼자 껴안고 청나라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는데, 이후 최명길의 당당한 태도에 감탄한 청태종은 최명길을 풀어주었고 최명길은 조선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5. 청실록의 기록


○임신일(壬申)에, 다라패륵(多羅貝勒) 다탁(多鐸) 등(等)이 환영(還營)하였다.
또 명(命)하여 내대신(內大臣) 초품공(超品公) 탑섬(塔贍)과 이이등(伊爾登)은
8기(旗)의 호군(護軍) 참령(參領) 각(各) 1원(員)과 매기(每旗)의 정병(精兵) 50명(名)을 인솔(率)하여,
고교(高橋)로 왕(往)하여 설복(設伏)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출영(出營)하자 명(明) 보병(步兵) 천인(千人)을 우(遇)하였는데,
행산(杏山)으로부터 궤둔(潰遁)하니, 아군(我) 전봉(前鋒)의 병(兵)으로 추격(追)하게 하였다.
탑첨(塔瞻)과 이이등(伊爾登) 등(等)이 다시 솔병(率兵)하여 협추(協追/협동하여 추격함)하여 모두 참(斬)하였다.
마침내 고교(高橋)에 이르러 설복(設伏)하였고, 명(明) 기병(騎兵) 8천과 보병(步兵) 6백을 조우(遇)하였는데,
행산(杏山)으로부터 도둔(逃遁)하였는데, 탑첨(塔瞻)과 이이등(伊爾登) 등(等)이 진섬(盡殲)하였다.
_'''이 역(役)에서 참살(斬殺)한 적중(敵眾)을 계(計)하니 53783명이고,'''_
획마(獲馬)는 7444필이고, 낙타(駱駝)는 66필이고, 갑주(甲冑)는 9346부(副)하였다.
명병(明兵)이 행산(杏山) 남(南)으로부터 탑산(塔山)에 이르기까지 부해(赴海)한 사자(死者)가 심중(甚眾)하였고,
소기(所棄)한 마필(馬匹)과 갑주(甲冑)는 수(數)로써 만계(萬計)하였다.
해중(海中)의 부시(浮屍/물에 뜬 시체)가 표탕(漂蕩/넓게 떠다님)하였고, 다(多)함이 안목(鴈鶩/기러기와 집오리)과 같았다.
상(上)의 신모(神謀)한 용략(勇略)과 제승(制勝出奇/상대방이 생각하지 못한 특출한 전략)으로
명병(明兵) 13만(萬) 격파(破)하였고,
최고납후(摧枯拉朽/마른 나무 꺾기와 썩은 나무 부러뜨리기)와 같았다.
지고(指顧/신속하게 지시함)하고 정(定)하니 이로 인(因)하여 혼(昏/어두움)한 야중(夜中)에
아군(我軍)의 오상(誤傷/잘못하여 다침)한 자(者)가 8인과 시졸(廝卒/쿠투러) 2인에 지(止)하였다.
나머지는 좌뉵(挫衄/부러지고 코피남)한 자(者)가 없었다.
그 송산(松山)에서 아군(我軍)의 포위(圍)를 피(被)한 자(者)는,
총독(總督) 홍승주(洪承疇), 순무(巡撫) 구민앙(邱民仰), 병도(兵道) 장두(張斗), 요공(姚恭), 왕지정(王之禎),
통판(通判) 원국동(袁國棟), 주정사(朱廷榭), 동지(同知) 장위민(張為民), 엄계현(嚴繼賢), 총병(總兵) 왕정신(王廷臣),
변교(曹變蛟)와 더불어 조대수(祖大樂) 등(等)이었고,
사졸(士卒)은 만여(萬餘)에 불과(不過)하였다.
성내(城內)의 양식(糧)이 또한 절(絕)하자 세(勢)가 궁축(窮蹙/곤궁이 극에 달함)이 익(益)하였다.
아군(我軍)이 다시 외호(外壕)를 굴(掘/팜)하고 곤지(困之/지치게 함)하였는데,
총병(總兵) 오삼계(吳三桂), 왕박(王樸), 백광은(白廣恩), 마과(馬科), 이보명(李輔明), 당통(唐通),
낭중(郎中) 장약기(張若麒) 등(等)이 각로(各路)로 궤찬(潰竄/흩어져 달아남)하였고,
그 여(餘) 역시(亦) 하루 이틀 사이에 잠둔(潜遁/몰래 달아남)하였고,
완성(成)되기 전에 마침내 탈출한 자들이었다.
이에 다시 칙유(敕諭)를 찬(撰)하여 필첩식(筆帖式) 사포해(查布海)와 혼달(渾達) 등(等)을 견(遣)하여
성경(盛京)에 이르게 하여 첩음(捷音)을 선포(宣布)하게 하였다.
○1641년 8월 29일에 도로이 버이러 도도 등이 영으로 돌아왔다.
또 명을 내려 내대신 초품공 탑섬과 이이등은 8기의 바야라 잘안 장긴 각 1인과 매 니루의 정병 50명을 인솔하여
고교로 가서 매복을 설치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영을 나오자 명 보병 1천인과 조우하였는데 행산으로부터 무너져 달아나니
아군 전봉(갑시햔 초오하)의 군사로 추격하게 하였다.
탑첨과 이이등 등이 다시 군을 인솔하여 함께 추격하여 모두 참하였다.
마침내 고교에 이르러 매복을 설치하였고 명 기병 8천과 보병 6백을 조우하였는데
행산으로부터 도주하여 달아나니 탑첨과 이이등 등이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역에서 참살한 적의 무리를 헤아리니 53783명이었고,
획득한 말은 7444필, 낙타는 66필, 갑주는 9346벌이었다.
명군이 행산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다다라 죽은 자가 심히 많았고
버리고 간 마필과 갑주의 수는 만을 헤아렸다.
바다에 뜬 시체가 넓게 떠다녔는데 그 많은 것이 기러기와 집오리 떼 같았다.
상의 신모한 용략과 특출난 전략으로 명군 13만을 격파하기가 마르고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았다.
신속하게 정하고 지시하니 이로 인하여 어두운 밤중에
아군이 잘못하여 다친 자가 병사 8명과 쿠투러 2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부러지고 코피 난 자도 없었다.
그 송산에서 아군의 포위를 당한 자는 총독 홍승주, 순무 구민앙, 병도 장두, 요공, 왕지정,
통판 원국동, 주정사, 동지 장위민, 엄계현, 총병 왕정신, 조변교와 더불어 조대수 등이었고 사졸은 만여 명에 불과하였다.
성내의 양식이 또한 떨어지자 세가 곤궁함이 극에 달했다.
아군이 다시 밖의 해자를 파고 지치게 하였는데
총병 오삼계, 왕박, 백광은, 마과, 이보명, 당통, 낭중 장약기 등이 여러 길로 흩어져 달아났고
그 나머지 역시 하루 이틀 사이에 몰래 달아났으니 완성되기 전에 마침내 탈출한 자들이었다.
이에 다시 칙서를 써서 빝허시 사포해와 혼달 등을 보내 성경(심양)에 이르게 하여 승전보를 선포하게 하였다.
[1] 조선의 원병 지휘관[2] 간체자로는 锦州[3] 이 전투 전에는 명나라도 일정 수준의 군사력이 잔존했고 이자성의 반란군에게도 어렵지않게 대적할 수 있었다.하지만 반란군이 완전히 궤멸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예병력 대부분을 투입한터라 이 전투로 명나라 군사력의 중핵이 소멸되었다고 보면 된다.[4] 당시의 섬서성은 닝샤 후이족 자치구감숙성의 남부 지역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이 두 지역은 각각 중화민국 이후의 시대와 청나라 중기에 독립된 신설 지역이다.[5] 4만중 3만 8천의 사상자를 냈다.[6] 혹은 오삼계휘하 1만명정도만 제대로된 퇴각을 했고 남은 2만명 정도는 붕괴된 상태에서 어떻게든 복귀했다고 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