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

 

1. 개요
2. 역사
3. 주요 도시
4. 관련 문서


1. 개요


遼西
요하(중국명 랴오허) 강줄기 서쪽의 땅을 일컫는 역사적 지명. 요하 동쪽의 요동과 대응된다. 요하 서북부의 해안지대(또는 회랑)이다.
그 범위는 요동도 그렇듯 경계가 다소 애매하다. 선진시대에 설치된 행정구역 요서군(遼西郡)이 지금의 랴오닝성 서부와 허베이성 동부 지역에 있었는데, 행정구역 이외에 관습적으로는 좀 더 넓은 범위를 칭하기도 했다. 대략 산해관을 포함한 만리장성 동부지역과 난하 동부, 그리고 대흥안령 동쪽, 시라무렌강 남단과 요하 서부지역이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2. 역사


요동에 비해 요서에 자리잡은 세력이 드문데 이는 고대 요서지역의 지리적인 특성에 기인한다.
요서의 북쪽은 해발 200~800m의 산지로서 대릉하와 대요하의 수많은 강줄기가 분포해 있고 요서의 남쪽은 이 강을 따라 생긴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에 접한 남쪽은 해발고도가 낮아서 해수면이 변화하던 선사시대에는 바다였던 지역이 많으며 갯벌과 습지가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자연퇴적되기도 하고 간척되기도 하면서 습지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오늘날에도 습지는 많이 남아있다. 고대 요서의 모습을 예로 들자면 보령의 갯벌지형과 을숙도의 늪지가 혼합된 땅이었다고 보면 된다. 열대우림이란 차이만 빼면 방글라데시의 순다르반스와 같은 늪지대. 이러한 늪지대를 고대에는 '''요택(遙澤)'''이라 불렀다.
지형이 이렇다보니 하류는 농경도 힘들고 대규모의 인구가 상주하기 힘들어 무주공산 지역이 많았지만 해수면이 높은 강 상류를 따라 고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으며 청동기 유적도 출토된다. 또한 요서 지역의 청동기 문화 가운데 하나인 십이대영자 문화가 고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고, 후에 영토를 확장하면서 요동반도 전역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로 진출하게 되는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고조선 최초의 수도인 아사달이 요서에 있다는 말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인지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장소임을 짐작케 할수있다.
육로로 이동하기란 가히 헬게이트. 곳곳이 늪지와 갯벌이라 걸을때마다 다리가 푹푹 빠지는 것은 기본. 허리나 가슴높이까지 오는 수초밭을 헤쳐나가야 하고 우마나 마차를 이동시키려면 작은 배와 판자를 깔아야 하며 하천도 수십개를 도하해야 한다. 바닷물이 섞인 하천에 염분이 스며든 토양이라 마실물조차 구하기가 힘들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에 갯벌도 넓게 분포하다보니 연안으론 큰 배가 다니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렇게 교류가 힘든 지형으로 인해 요동에서는 고조선이나 고구려같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국가가 형성되었다. 또한 중국의 공격으로부터 오랫동안 국가를 방어할 수 있었다. 고당전쟁에서 당태종이 회군할 때 기록을 보면 이 요서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드러난다.[1]
이렇게 보면 쓸모없는 땅이었지만, 만주와 중원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이곳을 지배하는 자가 곧 중국의 패권을 쥐고있었다.[2] 북쪽으로도 길이 있지만 산악지대라서 사실상 이동경로는 해안가 인근 몇 km로 제한되었다. 만주의 유목민족들도 대부분 이 해안선을 따라서 침공해왔다. 중원왕조들도 이곳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어서 이곳의 끝에 산해관이라는 우주방어 요새를 세워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거리가 먼 요동과 달리 역사적으로는 대체로 오늘날 차오양시에 속하는 대릉하 중류 일대까지가 중원 왕조가 차지하였으며 동쪽 국경의 거점으로 기능한다. 주로 유주에 속하였다. 삼국지에서는 공손찬이 지배하는 유주가 요서 일대를 포함한다.[3]이후 광개토왕이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요서를 공략한 이래로 이쪽으로 세력을 팽창하였으며 고구려 말기까지 일부를 분점하는 등 고구려와 중원 세력의 1차적인 국경지대 내지는 중간지대였다. 중원 측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 주변의 제종족들을 통제에서 이탈시키려 노력하였고 일부는 이 일대에 배치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을 비롯한 유민 집단들이 모여있기도 하는 등 발해 건국의 기반이 되었으며 무왕 때는 이곳을 거쳐 당나라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정기의 가문도 이곳 출신이다.
중국 측 몇몇 기록에서 백제가 바다를 건너 이 지역을 잠깐 지배했다고 쓰여 있는데,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

3. 주요 도시



4. 관련 문서



[1] 1차적으로 눞지대 '''요택'''을 넘어야 요하가 나오고 그 요하를 넘어야 고구려의 군대가 있는 천리장성이 나온다. 즉, 수십kg의 갑옷과 군수물자를 들고 수백마리의 모기가 웽웽 울어대는 늪지대를 씻지도 못한채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통과해야 고구려의 군대와 겨우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만나더라도 전투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2] 여기서 만리장성만 넘으면 바로 화북지방, 그것도 베이징이 코앞이다.[3] 공손도, 공손강 등이 지배하던 곳은 요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