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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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원숭환(袁崇煥)
'''출생'''
명나라 만력(萬曆) 12년 음력 4월 28일
(그레고리력 1584년 6월 6일)
'''사망'''
명나라 숭정(崇禎) 3년 음력 8월 16일
(그레고리력 1630년 9월 22일)
'''출생지'''
광둥성(廣東省) 둥관현(東莞縣)
'''국적'''
명나라
'''자'''
원소(元素)[1]
'''호'''
자여(自如)
1. 개요
2. 등용
3. 활약
3.2. 영원(寧遠), 금주(錦州) 전투
4. 해임과 복귀
5. 모문룡을 참하다
6. 기사년의 변(己巳之變)(기사만족대겁략)
7. 반간계
8. 최후
9. 죽음 이후
10. 논란
10.1. 명장인지에 대한 논쟁
10.2. 모문룡의 처형
10.3. 성격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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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말기의 문신[2]으로 사르후 전투 이후 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던 누르하치영원성 전투에서 막아내고, 홍타이지의 공격마저 막아낸 '''무너저가는 명나라 최후의 명장.''' 그러나 억울하게 처형당해 후세 역사가들이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원숭환의 죽음이라고 할 정도로 고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2. 등용


1619년 3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 해가 바로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이 명나라와 조선의 군을 각개격파로 물리친 해였다.
어쨌든 무과가 아니라 문과로 급제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그는 본래 문관이었다. 다만 명에서는 문관들도 총병이 무관이면 부총병은 반드시 문관인 식으로 전쟁 및 군사 업무에 투입하였기에[3] 문관이 무관으로 전환하거나 무관에 가까운 업무를 맡는 일은 비일비재하였으며[4][5] 또한 그는 본래 평상시에도 군사적 업무에 관해 토론하길 즐긴 일종의 밀덕후였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지나가는 군사들이나 군졸들을 보면 항상 변방의 정세를 물었고 친구와는 군사적인 일을 잠도 안 자고 토론하며 즐길 정도였다고 한다.
어사 후순(侯恂)은 원숭환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쓸만하다고 판단해서 병부(兵部)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1622년부터 병주에 부임하였는데 혼자 위장을 하고 적의 진영을 직접 염탐하는 충공깽 수준의 일을 벌이고는 돌아와 말했다.[6]

"제게 산해관(山海關)을 맡겨 주십시오. 방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산해관을 맡게 된 원숭환은 바로 떠나지 않고 고향을 돌며 병사를 모아 산해관에 입성했다.

3. 활약



3.1. 영원성 전투


중국에서는 영원지전(寧遠之戰) 혹은 영원대첩(寧遠大捷)이라 부른다.
당시 명군은 무려 120~300만 수준의 대군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동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후금군에 패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세를 반전시킨 것이 요동경략사 웅정필이었다. 웅정필은 만력제에게 '''“안에서 나 흔들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내 발목잡지 말아 달라.”''' 며 다짐을 받고서 요동경략을 하러 나가서 '''후금군이랑 전면전 하면 못 이기니까''' 삼방포치책을 도입하여 18만의 병력을 모아 이를 조련하고, 언제 후금군이 쳐들어와도 알 수 있도록 각기 연락 체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산해관의 방비를 강화'''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고 수군으로 찔러서 후금을 상대하자라는 전략으로 후금과 대치 상태를 유지한다.
누르하치 역시 이를 보고 경계하여 결국 1년간 성공적으로 후금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웅정필을 밀어주고 국방 부분에서의 사고력은 정상이던 만력제가 사망하고, 뒤이어 즉위한 태창제 역시 29일만에 사망, 백치에 가까웠던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이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요동 순무 왕화정이 명군이 후금으로 쳐들어가면 '''몽골에서 40만이 호응하고, 이영방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모문룡이 가도에서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후금으로 쳐들어간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을 믿고서 '6만 명만 주면 후금을 멸망시키겠다'며 상관인 웅정필을 흔들기 시작한다. 웅정필은 '''꿈과 같은 소리'''라며 디스했지만 왕화정은 계속해서 고집 부리면서 웅정필의 방책을 따르지 않다가 결국 믿었던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누르하치에게 털리고 요동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긴다. 이 패전의 책임은 전적으로 왕화정에게 있고 웅정필은 단지 명목상의 상관이었을 뿐이지만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환관 위충현의 참소로 웅정필은 1625년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고 그 머리는 변방 각지로 돌려져 전시된다. 왕화정은 위충현한테 뇌물을 바쳐 무사했으나 훗날 숭정제 때인 1632년 이때의 책임을 물어 처형된다. 이렇게 당시 누르하치의 기세는 파죽지세나 다름이 없었고, 요동의 거의 대부분이 후금의 손에 있었다.
결국 요동 지역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나서 명나라의 방어는 산해관에 집중되게 되었다. 당시 만리장성의 끝인 산해관은 말 그대로 명나라 방어의 핵심이었고 열리지 않으면 반드시 지킬 수 있지만 열리기만 하면 명나라는 바로 끝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원숭환은 이런 산해관의 위험 부담을 좀 더 줄이기 위해 산해관 밖 200리 지점인 영원(寧遠)에 성을 만들자고 주청을 올렸지만 이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원숭환은 굴하지 않고 계속 주청을 올렸고,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 원숭환의 의견을 존중해 이는 드디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후 요동 원수가 된 원숭환은 영원성(寧遠城)을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영원성이 만들어지자, 명나라는 기존의 산해관에서 200리나 앞에 방어선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유럽에서 수입하던 홍이포의 자체 제작에 막 성공하였는데, 원숭환은 그 위력에 주목하여 '''서광계가 산해관에 설치해 놓았던 홍이포들'''을 영원성 요지에 재배치하고, 대포를 다룰 수 있는 화포 전문가를 불러서 포병들의 교육에 힘쓴다. 이 선택은 정말 탁월한 것이었는데, 당시 명은 후금의 막강한 기병을 제압하는데 여러모로 힘이 들었으나[7] 홍이포의 강력한 화력 덕분에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사들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영원성도 완성되자 원숭환은 자신감을 가지고 1624년 1만 4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요서 일대를 순찰한다. 이때 원숭환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명나라 군대를 밥으로 알던 후금군도 이때만큼은 전혀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원숭환은 손승종에게 금주(錦州), 송산(松山), 대릉하(大陵河), 소릉하(小凌河) 등의 요새에 군사를 배치해 요서 방위를 더 단단하게 굳힐 것을 건의하고 손승종이 여기 흔쾌히 응하여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 다시 한 번 위기가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 위충현이 자기 말을 잘 안 듣는 손승종을 몰아내고 고제(高第)라는 용렬한 인물을 산해관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해 버린 것이다. 특히 고제는 원숭환과 손승종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요서 방어선을 모조리 포기하고 산해관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린다. 원숭환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상대는 위충현이 임명한 정권 실세였고, 원숭환의 반대에는 아랑곳없이 영원성을 제외한 다른 요새 지대의 병력과 식량을 모조리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켜 버린다. 영원성 한 곳만 남겨둔 건 원숭환보고 거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고제의 심사였다.
원숭환이 산해관 200리 앞에 있는 영원성을 건설하고 요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바람에 사실상 요동을 거의 다 차지한 상태에서도 영토를 요서까지 확장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누르하치는 고제의 삽질을 최고의 기회로 보고 1626년 10만[8]의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까지 수백 번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을 만큼 신출귀몰의 평가를 얻던 영웅이었던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하라.
이 싸움의 결과는 누르하치에게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주었는데

'''"짐이 25세부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하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때의 패배 과정에서 누르하치 자신이 중상을 입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설이 있지만 청의 기록으로는 병사이며, 누르하치는 이 전투 이후로도 정무를 처리하고 몽골 원정도 했다가 8개월 후인 6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래서 대포를 맞고 8개월간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죽었다고 하기에는 큰 의문이 있다. 실제 누르하치 사망설은, 영원성 전투 당시 원숭환과 함께 있다가 대포를 쏘더니 이겼구나 → 이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아 그러고 보니 이전에 영원성에서 누르하치가 대포에 맞아서 이틀 만에 퇴각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그 때 죽었구나!' 라던 당시 영원성에 있었던 조선의 역관인 한원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정황증거로 봤을 때 병사보다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원성 전투의 패배에서 입은 심리적 타격이 그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된 건 분명해 보인다. 육체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심해 죽은 것. 하긴 홧병으로 죽는 역사적 위인들도 있었고(대표적인 인물이 원술) 현대인들도 이런 경우가 종종 나오긴 한다.

3.2. 영원(寧遠), 금주(錦州) 전투


중국에서는 영금지전(寧錦之戰) 혹은 영금대첩(寧錦大捷)이라 부른다. 영원성 전투는 당시 명나라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적 같은 대승이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였던 환관 위충현은 어떤 의미로 봐도 극악무도한 악인에다 요동 방어선의 붕괴와 웅정필의 죽음에도 직접적 책임이 있는 위인이지만 이때만큼은 원숭환의 대승에 기뻐하며 고제를 해임하고 원숭환을 요서 방어의 총책임자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나름대로 빠방한 지원을 해준다.
원숭환은 다시금 금주과 송산 등의 요새에 병력을 배치하고 성을 강화하며 다음 싸움에 대비하던 중 누르하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그의 죽음을 조문한다. 적이지만 일세의 영걸이 분명하니 그의 죽음을 조문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누르하치 사후 후금의 정세를 살펴보려는 목적이었다. 이 조문 이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이 조문에 대한 답례를 하고, 또 후금의 지위를 인정하고 세폐를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하기도 하는 등 그와 원숭환 사이에 여러 번 사자가 왕복하게 되는데, 이는 홍타이지와 원숭환 둘 다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정의 허락도 없이 한터라 이는 원숭환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때의 일이 훗날 그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처형 당시 죄목을 보면 이때부터 후금과 내통했다고 되어 있다.
다음 해인 1627년 조선정묘호란 패전 이후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침공을 개시했다. 후금군은 대릉하, 소릉하를 비롯한 여러 작은 요새들을 점령하고는 금주성(錦州城)을 포위했다. 홍타이지로서는 아버지 누르하치의 원수를 갚고 새로 즉위한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영원성 공략의 전초전으로 임한 전투였지만 여기서 홍타이지는 체면을 제대로 구긴다. 원숭환이 명나라 조정의 지원을 받아 성벽을 강화하고, 믿을 수 있는 부장 조솔교(趙率敎)가 지휘하는 3만의 병력과 충분한 식량을 준비해 둔 데다 홍이포까지 대량으로 배치된 금주성의 방어력은 간단하게 점령할 수 있는 잔챙이 요새로 생각했던 홍타이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14일 간이나 금주성을 포위 공격하고도 함락이 되지 않자 홍타이지는 방향을 돌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금주성이 안 되는데 영원성이 될 턱이 있나. 홍타이지는 영원성 공략에 실패하고 방향을 돌려 다시 금주성을 공략해보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평생 동안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뛰어난 지략과 판단력이 이때만은 작동하지 않는 듯, 홍타이지는 금주성과 영원성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그답지 않은 모습들만 잔뜩 보여주다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군사를 물려 후퇴한다.
아버지 누르하치도 아들 홍타이지도 중국사를 조금만 읽어본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빼어난 인물들이다. 원숭환은 이런 영웅 부자들과 싸워서 승리한 희대의 공을 세운 것이다.
이때 홍타이지도 마음 속 깊이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원숭환이 살아있는 한 요서 방어선의 돌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4. 해임과 복귀


이 때 정사는 환관 위충현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목수 일에만 열중하던 천계제가 죽고 동생 숭정제가 즉위하며 명 조정에 큰 변화가 생긴다.
막 즉위한 숭정제의 한 마디로 역사상 환관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고 평가받는 위충현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였고,[9] 당연히 후속 조치로 그의 세력들도 숙청당한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이런 정세 변화의 불똥이 엉뚱하게 원숭환에게까지 튀어서 뜬금없이 원숭환이 위충현의 지원을 받은 점 때문에 그의 일당으로 몰려 해임되고 조정으로 소환된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시대가 바로 명나라 말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가장 큰 위협이 후금이며 이를 막아낼 적임자로 원숭환 이상의 인물이 없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아는 사실이었고, 결국 여러 신하들의 청원으로 1628년 인숭정 원년에 원숭환이 다시 요서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승진까지 해서 병부상서(兵部尙書)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 계료독사(薊遼督師)라는 지위에다 휘하의 모든 장병을 보고 없이 주살(誅殺)해도 좋다는 특권과 이를 상징하는 상방보검(尙方寶劍)까지 하사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 숭정제와 대면한 자리에서 원숭환은 '5년 안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장담한다. 물론 인구와 경제력 등을 고려한 총체적 국력은 여전히 명이 후금을 압도하였으나, 당장의 군사력은 여러 번의 전투를 통해 후금에 계속 밀리고 있던 것이 입증된 것이 당시 명나라의 현실이었다. 비록 영원대첩과 영금대첩 2번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야전이 아닌 모두 수성에 성공한 전투였으므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는 후금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가능하다. 비록 당시 후금은 군사적으로는 강했으나, 경제적으로 극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흔히 후금의 중심 민족인 여진족을 수렵, 채집 활동을 중심으로 여의치 않으면 한반도나 중국을 약탈하는 야만인들로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여진족 유력 세력들의 생계는 후금 건국 전부터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당장 누르하치의 경우를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이 오인해 억울하게 살해당했고 명나라에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누르하치에게 보상으로 말 30필과 교역에 관한 문서 30통을 주었다. 다시 말해, 청태조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숨 값인 30개의 물목 거래권으로 군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10]
그런데 명나라와의 교역은 당연히 양국이 적국으로 돌아섰으니 완전히 정지되었고, 후금은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해보고자 점령한 요동 땅의 한족들을 동원해 농지도 개간하고 정묘호란도 일으켜 조선에게서 물자를 얻어내려고도 한다. 그러나 요동 한족들의 반감으로 개간 작업 진행은 더디었고, 조선도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11]
설상가상으로 그 시기에는 이상 기후로 명과 후금 모두에서 인육을 먹을 정도로 흉년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명에서도 민란이 이어졌는데 조정에서도 이런 백성들의 현실을 이해하여 유화책을 쓰다가 그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자 홍승주가 강경책을 주장하여 무자비하게 반란을 진압하며 다소 잦아든다. 그러나 농지도 훨씬 적고, 존속 기간도 훨씬 짧으며 여러 세력이 연합한 정치 형태에 백성들도 여러 민족들이 혼재된 청은 명보다 훨씬 상황이 위험하였다. 이와 관련한 후금의 일화들을 보면 당시 후금의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이해된다. 명과 청의 강화 조건 중 하나가 명으로부터 일정량의 물자를 받는 것이었는데 전술했듯이 명도 상황이 안 좋아서 이행되지 않자, 청이 적장 원숭환에게 '여의치 않으면 약속한 양의 절반이라도요.' 하면서 구걸조의 글을 보내야 했을 정도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황제의 친정임에도 정공법이 아니라 인조만을 목표로 북방의 조선군을 무시하고 남하하는 다소 위험한 전격전을 전개한 것도 이러한 물자 부족이 원인이고, 심지어 청태종은 상식적으로 전쟁 전 여러 부대들의 손발을 한 번 맞춰볼 필요가 있음에도 군량이 모자라서 청의 몽골족 군대에게 '출전 직전에 올 것'을 명령할 정도였다.[12] 그나마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난 것으로 후술할 기사년 이후 요동 방어선 우회를 통한 약탈전으로 어느 정도 청의 상황이 나아진 상황이었는데도 이러했다는 것을 볼 때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장담할 당시에 후금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용맹해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는 법, 현재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원숭환은 이렇게 열악한 후금의 상황을 인지하고 숭정제에게 저렇게 장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5. 모문룡을 참하다


재기용된 다음 해인 숭정 2년 1629년 4월 원숭환은 수군 좌도독 모문룡에게 "군사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쌍도(雙島)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낸다.
모문룡은 당시 압록강가도(椵島)에 주둔하며 자신에게 맡겨주면 요동 전 지역을 수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인물로, 바다의 싸움에는 조금 재주가 있었지만 사람됨이 좋지가 못했다. 애초에 요동에서 후금군 5천의 병력에 참패하여 도망친 뒤에는 조선의주로 들어가 광해군인조를 압박하며 여러 차례 행패를 부리고 다녔으며, 조선의 평안북도 철산가도에 주둔하여 이후 밀무역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정묘호란 때에도 후금에게 무수히 패하는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13] 명나라 조정에는 후금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한다고 말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타먹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평안도 해안을 약탈하고 적인 후금을 상대로 조정에서 금지한 물품을 팔아먹는 등 해적이나 밀수꾼 두목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막강한 함대와 수만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휘하의 수하들을 보고없이 주살할 수 있는 상방보검을 하사받은 인물이었기에 후금이나 원숭환도 쉽게 여길 대상은 아니었다.
모문룡은 갑자기 원숭환이 자신을 소환하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원숭환은 그의 직속상관, 그가 군사 일을 의논하자고 소환하는 데 불응할 수는 없었다.[14] 모문룡은 2만8천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쌍도로 간다.
모문룡은 1629년 5월 26일 쌍도에 도착했다. 6월1일 원숭환과 모문룡 두 사람이 만나 회견하고 군사일을 의논했다. 6월 3일 모문룡은 원숭환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깊어가자 이 자리에서 원숭환은 은근히 모문룡에게 은근히 은퇴를 종용했지만 모문룡은 요동의 위급함이 남아있어 은퇴할 수 없다고 은퇴를 거절하며 이때 요동이 안정되면 조선을 기습하여 차지하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조선을 얼마나 만만한 먹이감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월5일에도 두 사람은 만나서 원숭환 휘하와 모문룡 위하의 병사들 사이에 활쏘기 경기를 했다. 활쏘기 경기가 끝나자 원숭환은 비밀리에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며 섬의 산꼭대기에 설치해 둔 장막으로 모문룡을 데려갔다. 이때 장막 부근에는 이미 복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숭환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부하들에게 모문룡을 포박하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 12가지 죄를 거론하며 모문룡을 질책했다.
수 년 동안 병마와 전량(錢糧)을 공급받으면서도 조정의 감사를 전혀 받지 않은 것. 전공이 없으면서도 공을 세웠다고 황제를 속인 것, 나라에서 금하는 시장을 멋대로 열어 오랑캐와 무역한 것, 도적이 되어 상인들을 약탈한 것, 민간의 부녀자들을 빼앗아 음행을 일삼은 것, 위충현을 숭배하고 환관들과 결탁한 것, 몇 년이나 군사를 맡고 있으면서 촌토도 수복하지 못하고 관망만한 것 등이었다.
모문룡은 겁에 질려 대답도 못했다. 원숭환은 북경을 향해 절한 뒤에 죄인 모문룡을 죽이겠다고 외친 뒤 숭정제로부터 하사받은 상방보검으로 모문룡의 목을 베었다. 이때 원숭환이 말한 12가지 죄는 실제로 모문룡이 지은 죄들로 그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처형당할 중죄였다. 모문룡이 데려온 2만8천이나 되는 군사들은 일이 너무 급박하게 벌어진데다가 원숭환의 추상같은 위엄에 몸이 굳어 모두 식은땀을 흘리며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원숭환은 다음 날 모문룡의 장례를 치러주고 죄는 모문룡에게 있을 뿐 모문룡의 수하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그들을 위로하고는 다시 재배치한다. 가도는 모문룡의 부하였던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지휘하게 하고 자신의 부하인 부총병 서부주(徐敷奏)를 파견하여 이를 감시하게 했다.
모문룡이 처형되자 모문룡의 부하들이 바로 달아나 후금에 붙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두 원숭환에 의해 재배치되었고 원숭환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원숭환이 죽고 나자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곧 배반하여 해적이 되거나, 나라를 세우고서 '''왕을 자칭하거나''' 하다가 명나라가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에 투항한다. 이 대표적 인물들이 청나라 입관 후에 번왕으로 임명되는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이다. 이들의 입관 이후 운명은 삼번의 난 참조.
그리고 이들 모문룡의 잔당이 모문룡 처형 때문에 후금에 투항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들은 처음부터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희박한 집단이었고 그 수령 모문룡 자신도 기회만 되면 명나라를 배신할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들의 행태가 잘 나타나는데 후금이 자신을 유예로 삼으려 한다는 말을 조선의 신하들 앞에서 태연히 지껄이는 인물이었다. 유예는 금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세웠던 괴뢰국가의 제의 황제였던 인물이다. 왕조국가에서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 무리가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군사적 실재는 형편없더라도 수많은 해군과 무역으로 번영하던 가도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다만 모문룡이 살아있을 때도 후금에 위협이 되지 않았던 점은 마찬가지였다. 모문룡이 죽은 뒤로는 예전의 위세를 부릴 수 없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조선을 삥 뜯으려는 점은 모문룡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망할 때까지 조선에는 민폐만 끼친 집단이었다. 오죽하면 그 형편없는 인조 정권에서 가도를 원정할 생각까지 했을까.
하여간 이렇게 모문룡 주살에는 성공했지만 이건 원숭환의 상당한 월권행위였다. 비록 숭정제로부터 휘하의 부하들을 보고 없이 참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진짜 행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 법이다. 더구나 모문룡은 원숭환과 마찬가지로 상방보검까지 하사받은 거물이었다. 원숭환은 모문룡 주살한 사실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조정에 보고한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주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다고 하는데 모문룡의 악명은 이미 이전부터 조정에 보고되고 있었고 모문룡 집단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는 각료가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원숭환이 없으면 요서 방위를 책임질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문룡 주살 건은 원숭환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간다. 그러나 이 정도 큰 사건은 당장은 주위의 상황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당사자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문룡 주살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원숭환이 처형당했다고 알고 있고 실제로 중국에서도 그런 글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원숭환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모문룡 주살이 아니라 바로 아래에 나오는 기사년의 변이다.

6. 기사년의 변(己巳之變)(기사만족대겁략)


영원, 금주 전투에서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체면을 구긴 홍타이지의 가슴에는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 있었다. 바로 '''원숭환이 지키는 한, 명나라 요서 방어선은 절대 돌파할 수 없다'''는 뼈저린 현실이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대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방향전환은 침공경로의 변경이었다. 후금의 근거지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최적 루트는 누가 봐도 요서를 지나 산해관을 통하는 길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원숭환이 버티고 있어 돌파가 불가능했다. 후금으로서는 우회가 불가피했다. 홍타이지가 선택한 경로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일대를 우회하여 몽골족의 영역을 지나 하북 북방의 장성 일대인 용정관(龍井關)과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 경로의 장성 북쪽 일대는 수렵, 채집과 원시적 농경민족인 여진족의 땅이 아니고 유목민인 몽골 코르친 부족의 영역으로 후금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후금은 여러 번의 전쟁과 혼인을 통한 회유 등으로 코르친 부족을 완전히 포섭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향전환은 바로 전쟁 목적의 변경이었다. 그 동안 후금의 전쟁은 조선을 침공했던 정묘호란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복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땅은 모두 자신들의 영토가 되었고 그 주민들은 모두 자신들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부터 전쟁의 목적은 정복을 통한 영토 획득이 아니라 물자 획득을 목적으로 하게 돈다. 정복전에서 약탈전으로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사촌 아우인 지르갈랑에게 영원, 금주 등을 가볍게 공격하게 하여 원숭환의 시선을 요서 일대에 묶어두고는 1629년 10월 2일 그가 직접 지휘하는 10만의 대군이 장성을 넘었다. 경로는 위에서 말했던 용정관(龍井關),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 장성을 넘은 후금군은 대대적인 약탈전을 감행하는 동시에 북경 일대를 초토화하더니 10월 26일 마침내 명의 수도인 북경성 코앞까지 진격해왔다. 명으로서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명나라 조정과 북경 시민에게 전쟁이란 무릇 천리 밖 요서의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북경성 자체가 포위 당해버렸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직 홍타이지가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 침공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에 막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꿈도 못 꿀 후금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사람이 어이없는 사태를 만났을 때 정상적 사고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출처필요]. 북경 시민들에게 원숭환이 길을 내주어 후금의 오랑캐들이 침공할 수 있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원숭환의 정치적 반대파인 엄당(閹黨)[15]에서 이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엄당에게 원숭환은 자기 일파인 모문룡을 죽인 정적인 동시에 해마다 모문룡이 보내오던 뇌물을 차단한 경제적 원수이기도 했다. 또 당시 조정 대신들은 북경 인근에 토지와 별장을 가진 자가 많았다. 이들도 자신의 재산이 침해된 원인을 원숭환에게 돌렸다. 결국 조정 대신들과 북경 주민들의 마음속에 원숭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게다가 사태를 제대로 인지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옛날식 세는 나이로 19살, 지금 한국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애송이였던 숭정제 역시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원숭환을 탓했다.
원숭환은 예전부터 후금이 자신이 지키는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부터 침공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조정에 알리고 경계를 촉구했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게 갑자기 후금의 우회 침공이 시작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하다.
후금의 북경 침공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대경실색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급히 모아 북경으로 달려왔다. 산해관에 도착하자 준화성(遵化城)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참장 조솔교에게 4천의 군사를 나눠주며 후금의 공격을 받는 준화성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왕원아(王元雅)가 사수하던 준화성은 조솔교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고[16] 미리 대기하고 있던 후금의 복병을 만나 조솔교와 그가 이끈 원병도 전멸하고 말았다. 후금군은 함락된 준화성에서 약탈과 대학살을 벌였는데 이 소식은 그대로 북경에 전해져 북경 시민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고, 원숭환에 대한 원망도 같이 깊어졌다.
한편 원숭환은 9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11월 17일 북경 광거문(廣渠門)에 도착한다. 부총병 주문욱은 먼길을 달려와 병사들이 몹시 지쳤으니 일단 북경 안으로 들여보내 휴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원숭환은 거절하고 북경성 밖에 주둔한다. 그리고 20일 광거문 밖에서 원숭환이 인솔하는 9천 병사는 6시간에 걸쳐 후금군과 10차례 이상 싸워 결국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혹자는 이때 원숭환이 후금의 10만 대군과 싸웠다고 하지만 당시 후금군의 대부분은 약탈에 바빴으니 아마도 실제로는 후금의 선봉 일부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원숭환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들이 과거와 달리 얼마나 잘 훈련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단 한 번도 후금군과 평지에서 싸워 이겨보지 못했다. 아니 평지는커녕 수성전조차 못하고 지리멸렬하다가 원숭환 등장 이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수성전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약졸 명나라 군이, 천리의 먼 길을 달려온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평지에서 후금군을 무찔렀다. 이는 원숭환이 수성전만이 아니라 야전에서도 충분히 유능하며 다수의 적과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회피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11월 23일 후금군을 물리친 원숭환은 병사들이 오랜 행군과 전투, 그리고 장기간의 노숙으로 지칠대로 지쳤으니 성 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이미 숭정제의 머리에는 원숭환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원숭환이 이끄는 병사들은 음력 11월 북경의 차가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성밖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원숭환은 11월 27일 북경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시 후금군을 격파한다. 평지의 싸움에서도 원숭환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북경 함락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홍타이지는 군사를 남해자(南海子)라는 곳까지 철수시킨다. 하지만 약탈전은 계속되었다. 통주(通州)에서는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북 일대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이때의 약탈은 대단한 성공이어서 병사 1명당 우마(牛馬) 1마리씩이 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더불어 수만 명의 남녀 포로도 얻었다. 후금 최대의 약점은 인구 부족이고 잡혀간 이들은 후금의 영토로 끌려가 요동 일대의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후금의 약탈전이 기사년의 변이었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박이었다. 후금의 가장 큰 약점인 인구 부족과 고질적 물자 부족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명나라의 약점을 발견한 후금은 이때부터 명이 멸망할 때까지 하북, 산서의 장성 루트를 통해 10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약탈전들을 감행한다. 이제 후금에게 전쟁은 위험은 적고 수익은 높은 최고의 경제활동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이 최고의 경제활동이 된 것은 후금 정부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후금의 백성 개개인에게도 최고의 경제활동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일어나 가족이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온 가족이 비탄에 잠겨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만주족 가정에서는 이와 반대로 전쟁이 일어나 집안의 가장이 전투에 나가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울음소리는커녕 집집마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 기록을 보면 거리에서 들리는 환호성을 듣고 원정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전쟁은 참전하는 팔기병 개개인과 그 가족들에게도 위험은 적으면서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는 대박의 기회였다. 재산은 물론이고 잘하면 사회적 지위까지 일거에 상승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팔기병만이 아니라 이민족이나 노예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었고 그들까지 어떻게든 전쟁에 한 발 담그기 위해 노력했다.
하북, 산서, 산동 등 명나라의 황하 이북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유린당한다. 이 결과는 명나라 재정의 붕괴와 도적의 창궐이다.[17]
명나라로서는 후금의 이런 침공을 막아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후금의 침공로로 이용되고 있는 하북, 산서의 장성 일대에 요서 방어선에 버금가는 방어선을 건설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걸 이룰 수 있는 인물은 명나라가 아무리 땅이 넓고 사람이 많다고 해도 단 한 사람, 원숭환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 사람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7. 반간계


원숭환에 대한 반간계는 너무나 유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후금은 광거문 밖의 전투에서 비록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라는 궁중의 환관 두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명나라 조정에서 환관이 받는 대접을 잘 아는 후금군은 두 사람의 환관 포로를 비교적 관대하게 대접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둘이 구금되어 있던 바로 옆방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숭환과 홍타이지 사이에 이미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약속했으니 북경은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두 환관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밀담을 들었다. 자신들이 여기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11월29일, 홍타이지는 명나라 조정에 평화를 제의하면서 양춘과 왕성덕 두 사람도 풀어주었다. 풀려나 황궁을 돌아온 두 사람은 숭정제에게 자신들이 들은 바를 고했다. 이전부터 원숭환을 의심하던 숭정제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만주인들이 삼국지연의에서 주유장간을 이용해 채모장윤을 모살한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이 계책을 꾸몄다고 한다. 주유가 반간계로 채모와 장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소설에 불과하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만 당시 무식한 만주인들은 실제 역사는 잘 모르고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계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너무 작위적이라 예로부터 그 진실성을 많이 의심받아왔다. 다만 에피소드 자체는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일지 몰라도 반간계 자체는 존재했던 게 분명하다.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1630년 인조 8년 2월 27일 정축 2번째 기사에 후금에 사신으로 갔던 박난영이 보낸 글에

골대가 좌우를 물리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원공(袁公) 이 과연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반간계(反間計)를 쓰는 말이 분명합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명나라 조정의 신하도 아닌 외국 조선의 사신에게까지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당시 후금이 주도하는 대 원숭환용 반간계가 다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직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위의 일화는 원숭환이 체포된 이후의 일이니 어쩌면 원숭환의 체포 당시에는 반간계가 없었더라도 원숭환의 구금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르며 원숭환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 불리한 증거들을 마구 만들어 퍼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건 당사자인 후금이 자기 쪽에서 조작하는 일이니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선 사신도 듣자마자 코웃음을 치는 이런 유치한 속임수에 어느 바보가 넘어가겠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숭정제가 평생토록 보여준 지독한 의심증과 당시 명나라 조정의 고질적인 당쟁은 이런 유치하고 졸렬한 속임수가 충분히 통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고, 명나라 조정은 자신들의 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8. 최후


1629년 12월 1일, 아직 후금군이 물러가지 않고 북경 조금 아래 쪽에 주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원숭환을 군량에 관해 의논할 것이 있다는 구실을 붙여 황궁으로 소환한다.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은 원숭환은 수하인 총병 만계(滿桂)와 그의 부장 흑운룡(黑雲龍)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황성으로 달려갔다. 후금군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으니 성문을 열 수 없다면서 문은 열리지 않고 성 위에서 큰 바구니가 내려왔고, 원숭환은 바구니를 타고 북경성으로 들어가 황궁에서 숭정제를 만난다.
그러나 원숭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량에 대한 의논이 아니고 배신에 대한 숭정제의 추궁과 힐난이었다. 생각도 못했던 급작스런 추궁에 원숭환은 당황하여 제대로 입을 열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것을 숭정제는 배신의 또 다른 증거로 보았는지 불문곡직 원숭환을 금의위 감옥에 투옥하고 만다. 원숭환이 대동했던 총병 만계와 만계의 부장 흑운룡에게는 승진과 함께 상이 내려졌다.
북경성 아래에 있던 원숭환의 수하 조대수는 원숭환 구금의 소식을 듣자 자기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을 넘어 도망친다. 애초에는 후금에 투항하려고 했지만 숭정제의 명으로 원숭환이 옥중에서 보낸 서신과 손승종의 만류로 도로 귀환한다.
원숭환이 체포 구금되었다는 소식에 먼저 조정의 대신들이 놀랐다. 즉각 그를 구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먼저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뒤를 이어 손승종이 '''“적이 성 아래에 와 있는 상황에서 원숭환을 죽이는 것은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리는 일과 같다.”'''고 말하며 구명을 청했다. 반대로 원숭환을 즉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엄당(閹黨)의 인물들이었다. 천계제 시절 권세를 누리던 환관 위충현이 만든 엄당은 위충현의 실각과 함께 세력이 약해졌으나 이 기회에 다시 세력을 만회하려는 목적으로 동림당의 지지를 받는 원숭환을 말살하려고 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엄당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막대한 뇌물을 보내주는 고마운 화수분이던 모문룡을 죽여버린 원숭환이 증오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북경 시민들의 여론도 결코 원숭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원숭환을 구명하려는 동림당과 그를 죽이려는 엄당의 논쟁은 몇 개월에 걸쳐 계속되고 마침내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준다. 아니 오히려 원숭환 처형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 바로 숭정제였고 엄당은 그런 황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열심히 원숭환 처형을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1630년 음력 8월 16일 원숭환은 임금을 속인 죄와 모반의 죄로 서시(西市) 거리에서 책형(磔刑)에 처해진다. 책형은 시대에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명청 시대에는 '''능지형'''이었다. 시장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점이 한 점씩 잘려나가는 형벌로 적게는 수백 번, 많게는 천 번이 넘는 칼질을 받을 동안 죄인은 살아 있다는 끔찍한 형벌이다. 이때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북경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나눠진 그의 살점을 씹었다고 한다.[18]
걸국 누르하치홍타이지라는 2명의 영웅을 패퇴시키며 조국을 수호하던, 어쩌면 '''명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었을지도 모를 원숭환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국의 백성들 앞에서 능지형을 받으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명장의 억울하기 그지없는 최후로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원숭환의 죽음이 명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부분에서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9. 죽음 이후


원숭환이 북경에 소환될 때 동행했던 두 사람 총병 만계와 그의 부장 흑운룡이 숭정제로부터 상을 받고 승진했다는 이야기는 위에 적었다. 만계는 원숭환 구금 직후 상방보검을 받고 경략으로 승진 북경 방위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때 후금군이 다시 몰려와 북경성을 포위하자 숭정제는 만계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한다. 만계는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성을 나가 싸우면 승산이 없으니 농성할 것을 건의했지만 숭정제는 계속 나가 싸울 것을 재촉했다. 특히 숭정제의 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죽음을 의미했다. 12월15일 만계는 어쩔 수 없이 수하인 흑운룡, 마등운(麻登雲), 손조수(孫祖壽) 등을 대동하고 북경성을 나가 북경성 영정문(永定門) 밖 2리 되는 곳에 진영을 세우고 다음 날인 16일 후금군과 싸우지만 당연히 대패한다. 만계와 손조수는 전사하고 흑운룡과 마등운 등은 후금군에 생포된다. 흑운룡은 훗날 탈출하여 명으로 귀환한다. 훗날 흑운룡은 북경성으로 이자성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노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하고 아들들과 함께 저항하다 순절한다.
홍타이지가 인솔하는 후금군은 약탈전에 완전히 성공, 후금 최대의 현안이던 물자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염원하던 홍이포 제작 기술자까지 손에 넣는다. 1631년 후금이 제작한 홍이포가 전선에 등장한다.
북방 루트를 통한 후금의 약탈전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를 막아내고 방어선을 건설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은 명나라 스스로 죽여 버렸다. 후금의 약탈전은 북경 일대를 넘어 산동, 산서까지 미쳤고 이를 저지해야 할 군사들은 진영 안에 머문 채 이들이 그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심지어 홍타이지는 수만의 군대가 있었지만 화살 하나 쏘는 놈 없더라며 명나라를 비웃는다. 산동을 약탈한 도르곤이 천진 운하를 건널 때는 도하에 며칠이 걸렸고 방비도 허술했지만 사기를 잃은 명나라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이를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19] 이제 명나라는 조선과 더불어 후금에 백성과 재물을 공급해 주는 좋은 공급원에 불과했다.
졸지에 역적의 가족이 되어 몰살당할 판이 된 원숭환의 유족들은 그가 조정에 잡히자마자 바로 후금으로 도망친다.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뒤에 한군 팔기에 소속되어 후금군에서 공을 세우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벌어진다. 조정의 대신도 전선의 군인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인물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일생을 명왕조를 위해 바치며 충성했던 원숭환의 이런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이상, 명나라를 위해 충성할 마음이 생겨날 수 없었다.
후금은 이후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마저 명나라를 사실상 버리게 되고 청나라 편으로 돌아선다. 청나라는 요서 방어선을 공략한다. 과연 원숭환이 없는 요서 방어선은 차례로 무너지고 명나라의 대청 방어선은 산해관까지 후퇴하고 만다. 결국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요서 방어선을 지키던 원숭환의 부하들은 요서 방어선 붕괴와 함께 차례차례 청에 항복한다.
원숭환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수하들이 후금에 항복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원숭환이 기른 인물들은 모문룡 집단의 무리와는 달리 나름대로 최대한 직업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들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요서 방어선이 붕괴된 이후다. 가장 많이 알려진 조대수(祖大壽)의 경우 원숭환의 죽음에 불만을 가져 투항한 것이 아니고 원숭환이 구금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산해관 밖으로 도망쳤다가 원숭환의 옥중서한과 손승종의 권고로 도로 귀환한다. 이후 1631년 대릉하를 방어하다가 자체 제작한 홍이포와 대장군포를 앞세운 후금의 공세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항복한다. 하지만 금주를 투항시키겠다고 위장하여 탈출한 뒤 오히려 금주성 방위의 책임자가 되어 금주를 방어한다. 1641년 초, 청나라 대군은 금주를 포위하였고, 외성이 항복하자 힘에 부친 조대수는 명 조정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홍승주를 위시로 한 13만 대군이 파견되었으나, 송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후 조대수는 몇 달간 고립된 채로 수성하였는데 식량이 떨어지고 아사자가 속출하여 방어가 불가능해지자 정식으로 청나라에 투항한다. (1642년 2월) 이때 청의 장수들 중에서는 이미 한번 배신한 조대수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홍타이지는 그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그 이후부터 그는 충실한 청의 신하로서 명나라 공격에 종사한다.
이런 역사상 일대의 억울한 죽음을 명한 숭정제 자신은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점령하자 다른 신하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단 한 명의 환관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무하게 자결하고 만다.
요서 방어선 붕괴 후 산해관은 오삼계의 지휘 하에 청나라 군을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이자성에 의해 명이 망하자 오삼계는 군사를 거느리고 청에 투항한다.
원숭환은 청나라 건륭제 때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된다. 그렇다고 이때 이르러 원숭환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 그런 건 아니고, 이미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건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청나라와 싸웠던 인물이라 공식적 복권이 늦어졌던 것뿐이다.
원숭환의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나 반간계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 등이 건륭제 당시에 조작되는 이야기도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적었듯이 반간계는 원숭환이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나온 이야기이며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은 영웅이라는 이미지도 건륭제 때 조작된 이미지가 절대 아니다. 다만 원숭환이 처형되는 시점에서부터 청나라 초기까지는 원숭환이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걸로 보인다. 당시에 기록된 야사 중에는 사람들이 반간계인 줄 알았는데 진짜 배신이었다는 식으로 이런 반역자 원숭환의 이미지가 그대로 나타나는 기록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강희제 중기 쯤 되면 이미 원숭환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히 반전 역사상 보기 드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명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712년에 쓰인 노가재 연행일기[20][21]에 보면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길에 영원 지방을 지나며 반간계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원숭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때가 강희 51년이고 이때 이미 원숭환은 완전한 영웅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22]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그동안 만주족에 의해 핍박 받던 한족들에 의해 멸만흥한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원숭환의 죽음은 중국 역사상 가장 억울한 죽음으로 꼽혔고, 그를 찬양하는 작업이 활발해진다. 청나라 말기의 양계초도 그런 인물 중 하나로 원독수전(袁督師傳)을 지어 그를 기리고,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광서(光緖) 연간에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이다. 그는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에다 한족 민족주의자로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을 만든다. 그는 원숭환을 죽인 것은 명나라지만 그 원인은 반간계를 쓴 청나라를 지목하여 청나라에 대한 한족의 반감을 고조하고자 했다. 덕분에 반청 한족 민족주의 상징같은 인물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위치에 있다 보니 아래 논란 부분에 나오는 엉뚱한 주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도 평가는 높다. 중국 공산당베이징에 입성하여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직후인 1952년 베이징 시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지식인들이 마오쩌둥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을 건의했고, 마오쩌둥 역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평가하며 당시 베이징 시장에 원숭환 묘의 보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분묘는 문화대혁명홍위병한테 완전히 망가져서 평지가 되어버렸다.
그후 원숭환의 무덤은 복원되어 베이징시내에 있고 현재는 많은 중국인들이 그의 무덤에 헌화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10. 논란



10.1. 명장인지에 대한 논쟁


원숭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이 옛날부터 있어 왔고 그가 명장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우선 원숭환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요약하면 '명은 사르후 전투 패배 후 청에게 연전연패하다가 원숭환에 의해 겨우 명맥을 보존했는데 어이없게도 그가 지켜내고자 혼신을 다했던 명나라 황제 숭정제와 명 조정, 북경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고,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그의 죽음으로 명군의 전력은 물론이고 사기와 충성심도 저하되어 결국 명나라가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인데[23] 이는 앞뒤 사실 관계를 무시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1) 홍이포 도입은 서광계가 했고, 산해관을 위시로 한 대청 방어선 구축이나 조선과의 연계 작전인 삼방포치책을 주장한 사람은 웅정필이다. 원숭환이 직접 한 일은 산해관 앞에 영원성을 짓고, 산해관의 홍이포를 영원성으로 옮겨 배치한 후 홍이포의 전문가인 손원화를 불러들여 부하들을 교육시킨 것 뿐이므로 청을 저지한 모든 군공을 모두 원숭환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되었다.
2) 공성전은 대포가 발명되어 실용화되기 전까지 공격 측이 방어 측보다 월등한 전력을 보유했어도 승리하기 힘든 전투 형태였다. 그런데 오히려 방어 측인 원숭환이 대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장기간도 저지한 것도 아닌 영원성 전투와 홍타이지 시절의 영원성, 금주성 전투를 원숭환의 군재를 고평가할 근거로 삼기에는 부적합하다.
3) 명은 원숭환 사후 14년이나 더 유지되었으며 청이 아니라 이자성에게 멸망하였다. 다시 말해 청은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어오지 못했고, 오삼계가 자발적으로 열어줘서 입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숭환 처형과 명의 멸망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4) 원숭환은 모문룡을 함부로 죽였고, 그로 인해 모문룡의 수군 전력이 청에 투항했으며 이 때 홍이포도 같이 넘어갔다. 다시 말해 가도 수군 전력을 와해시키고 산해관 방어선을 간접적으로 약하게 만든 책임이 원숭환에게 있으니 그의 처형이 아닌 그의 독단이 명의 멸망에 기여한 것이다.
5) 원숭환을 고평가하는 주장은 그 뿌리가 청에서 서술한 명사인데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이전 왕조인 명나라를 폄하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명나라가 원숭환 같은 충신이자 명장을 어이없게도 스스로 죽였고, 그런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정당했다.'라는 것이다. 그 예로 청에서는 입관 후 원숭환의 자손을 찾았으나 이미 가문이 몰락하여 찾을 수 없었고, 건륭제는 원숭환의 죽음을 '1만 년에 1번 있을 억울한 죽음'으로 표현하였다. 자신들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적장을 이례적으로 고평가한 것은 만주족 정권으로서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도덕적으로 폄하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정치적 논리로 원숭환이 과대평가된 것이다. 또 청나라는 남송 시대에 여진족에 맞서 싸운 악비의 지위를 폄하하였는데, 과연 청나라가 원숭환을 자신의 호적수로 인정해서 고평가할 정도로 대범했다면 왜 악비에 대하여는 이렇게 박한 평가를 내렸는지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하나씩 살펴 보면 이는 매우 잘못된 주장들이다. 일단 1)의 논리대로라면 세상에는 명장이라고 불릴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충무공 이순신도 왜선보다 훨씬 우수한 화포와 판옥선을 직접 만든 것은 아니며,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거북선 또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전부터 제작 논의가 상당히 있었던 것을 이순신이 실현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남긴 군대와 전술을 그대로 활용했을 뿐이고, 나폴레옹도 이미 당시 유럽 젊은 군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던 전술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명장의 조건은 적과 아군의 현실을 냉철히 파악한 후 장단점을 분석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강구해 실현하는 것이다. 원숭환은 당시 기병 위주의 전투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후금군의 장점과 전력이 매우 약화된 데다가 연패로 사기까지 저하된 명군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그래서 평지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 영원성을 쌓아 수성전을 계획하였고 보급에 문제가 없도록 했고 휘하 병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연전연패로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끝까지 유지하는 등 명장이라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잘 수행하였다.
그건 기본이지 않느냐는 말은 군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느 상황에서든 기본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말은 세상만사에 다 통하는 이야기이며, 특히 생사가 갈리는 현장이라 냉철한 판단력보다는 격한 감정과 공명심, 정치적 논리, 조급함 등이 앞서는 것이 만연할 수 밖에 없는 군사 부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 어렵잖은 기본도 못 해내서 운에 모든 것을 걸고 대충 추스린 병력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하다가 적만 도와주는 장면이 전쟁사에 수두룩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명청 전쟁에서 원숭환을 처형한 직후 숭정제는 원숭환의 부하 장수들에게 출전을 명했다가 대패를 당했고, 이후 명군을 대표하는 장군 홍승주는 재정 상태의 열악함을 이유로 속전속결을 주장하는 명 조정에 떠밀려 출전했다가 송산 전투에서 대패해 명의 중앙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청군에게 겁을 먹은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최고 사령관인 홍승주를 방치하고 도주한 것도 패인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사기가 저하되어 청군과 이자성의 반군에게 투항한 지역은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이 논리대로라면 명의 관리들은 모두 기본도 못 한 쓰레기들이다 .
현실은 무협소설이 아니다. 기적적인 승리를 흔히 '대첩'이라 부르는데 그런 전투의 승리들도 살펴보면 분명 승리한 쪽이 갖고 있던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장 이순신이 치른 전투 중 가장 기적적인 승리인 명량 대첩도 판옥선이 왜선에 비해 가지는 우위, 작은 배인 왜선도 3척 이상 통과할 수 없는 울돌목의 지형적 이점을 자신의 용맹을 더해 극대화시켜 만든 승리이다. 다시 말해 명장의 조건이 '모든 것이 불리한데 1인의 능력만으로 전투를 뒤집는다.'라면 세계 역사에 명장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성 전투는 누르하치를 고작 이틀밖에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불과 이틀만에 격퇴한 것이다. 일생동안 승리밖에 몰랐던 누르하치라는 영걸을 이틀만에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게 만든 인물이 원숭환인 것이다. 누르하치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탄식하며 상심한 기록은 원숭환 숭배자의 창작이 아니라 누르하치의 후손들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국정 운영 능력이든 군사적 재능이든 아버지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모자란다고 평가하는 이가 없고, 사후 묘호 중에서도 가장 영예로운 묘호인 '태종'을 받은 인물이 홍타이지인데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영원과 금주 사이를 소득 없이 오가며 기력만 허비하여 체면을 완전히 구긴 게 영원, 금주 전투(영금대첩) 였다. 여기서도 홍타이지의 현명함이 드러나는데 전쟁에 패해 일생일대의 망신을 당했음에도 '원숭환이 있는 산해관 방어선을 군사적으로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나라의 혼란한 정계와 의심 많은 숭정제의 성격을 이용하여 명나라 스스로 원숭환을 제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승승장구만 거듭해 온 제갈각이 합비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폭주하다가 죽음을 자초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청태종은 영웅이며 이것이 전술한 명장의 기준인 것이다.
홍이포가 있는 원숭환의 명군과 그렇지 못한 후금군의 전투를 제국주의 시절 유럽 근대식 군대와 아프리카 원주민들 또는 아편전쟁 때 영국군과 청군이 벌인 전투를 떠올리면 안 된다. 물론 홍이포가 당시 기준으로 가공할 무기였던 것은 사실이나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포와 달리, 폭발성이 없는 쇠구슬을 빠른 속도로 날리는 것으로 상대가 홍이포가 없다고 필승을 장담할 화력 무기까지는 아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추가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화포도 마찬가지였고, 이순신이 파직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의 조선 수군은 병력과 화포를 고스란히 갖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단종진 (동양식 명칭으로는 학익진)을 펴고 포격 섬멸을 시도한 연합함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돌진해 쪼개버린 트라팔가 해전은 영원성 전투보다 무려 180년 뒤에 일어난 일이다. 이 당시는 물론 한참 뒤의 대포도 기술력이 충분하지 않아 그 부족분을 운용자의 능력으로 채워야 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원숭환은 공성전 뿐 아니라 기사년에 급히 장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친 병력으로 후금의 선봉군을 대적해 연전연승했으며, 휘하 군사들은 행군과 전투로 지쳤고 성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원숭환의 지휘에 충실히 따랐다. 원숭환 이전 명군은 후금군에게 공성전과 야전을 막론하고 연전연패했는데 원숭환이 통솔한 명군은 청군에게 전승한 것이다. 이런 군사적 능력과 통솔력을 가진 인물을 명장이라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명장이라 부를 인물은 없을 것이다.
원숭환이 죽은 뒤에 명이 14년이나 유지되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계산한 정말 근시안적인 주장이다. 일단 원숭환이 생전 산해관 방어선을 잘 구축해뒀기에 그나마 명이 14년이나 버텼다고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원숭환의 처형은 당장 명의 멸망을 불러오지는 않았지만 명나라 장졸들에게 목숨 걸고 사직에 충성할 이유를 앗아갔다. 당장 본문에 원숭환과 관련된 조대수 등 인물들은 투항하려 했고,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제외하면 영원성을 포함한 다른 성들은 차례로 무너졌으며, 청군의 침입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명나라 장수들이 많아졌다고 이미 서술되어 있다. 원숭환 처형의 결과에 대해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비슷한 예를 추가하자면 스탈린대숙청이 있다. 소련 군부에서 숙청에 휘말려 유능한 인물들이 제거당해 전력이 약화된 것도 물론 있으나, 가장 큰 손실은 모든 소련군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닌 상관의 입만 바라보는 수동적인 기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고, 이는 독소전쟁 초기 패전의 원인이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투지란 매우 중요한데 충신이자 명장 원숭환의 죽음은 명군의 투지를 크게 약화시켰던 것이고 이는 명백히 명의 멸망 원인 중 하나이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하는 바람에 모문룡의 부하들인 공유덕과 경중명이 청에 투항하였고, 그로 인해 청의 적극적인 진출할 수 없도록 만든 가도의 수군 전력이 와해되었을 뿐 아니라 홍이포까지 넘어가서 산해관 방어선을 약화시키는 데 간접적으로 일조하였다는 비난은 더더욱 어이없는 주장인데 자세한 것은 모문룡 탭의 '원숭환 입장 옹호'에 서술되어 있다. 요점만 설명하면 우선 모문룡이 아예 전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처형당할 죄가 12개나 될 만큼 문제가 심각했고, 동맹국 조선을 약탈하며 조선과의 연계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의 군대는 정묘호란 때 아무런 역할도 못 하고 오히려 '''후금군 20여 명이 나타나자 달아날 정도로''' 군기가 해이했다. 물론 그의 수군이 수만 명이란 규모로 청이 중원을 향해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는 데 부담을 가질 정도였음은 사실이었기에 원숭환은 모문룡만 처형하고 그의 부하들, 심지어 '''모문룡의 아들에게도''' 지위를 보장해주고 급료를 인상하는 등 가도 수군 전력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다만 부하에게 감찰만 맡겨 연계를 강화했는데 그 연계가 원숭환이 처형되어 끊어져 2년 후에야 공유덕과 경중명이 투항한 것이다. 모문룡 패거리는 본래 별 볼일 없는 해적 집단이었는데 명에게 수전 능력을 고평가받아 오랫동안 넉넉한 대우를 받아오다 배은망덕하게 배신한 것인데, 그것이 원숭환 탓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원숭환 비판론자들은 원숭환 고평가가 청의 중국 지배 정당성 주장을 위한 정치적 논리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나 비판론 역시 정치적 논리에 뿌리를 둔다. 모택동은 자신이 국공내전 당시 게릴라전을 애용한 탓인지 몰라도 부분적으로나마 그런 역할을 수행한 모문룡을 꽤 고평가했는데 중국 어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사학계 또한 정치에 자유롭지 못한 이상 모문룡을 고평가하는 주장이 나올 수 밖에 없고[24] 결국 모문룡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면 그를 처형한 원숭환을 다소 폄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원숭환 비판론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모택동이나 현대 중국 사학계와는 달리 청은 원숭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입장이었다. 원숭환은 청의 건국자인 누르하치와 청의 근간을 마련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고, 어느 나라이든 역사를 기록할 때 자국에게 불리하거나 부끄러운 것은 최대한 누락하거나 두루뭉술하게 서술해 감추려 하는데 청은 두 패전 모두를 그대로 사서에 실었다. 명을 폄하해서 중국 지배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자신들의 건국 황제들의 패전 기록들을 이용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해보면 미국이나 인도 입장에서 영국의 식민지 시절 일어난 학살 등 비인간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조지 워싱턴이나 마하트마 간디가 개입되었다면 비록 그것이 자신들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할 훌륭한 근거가 될 것임에도, 세상에 크게 드러나는 것이 꺼려질 것이다.
원숭환과 옹호론과 비판론 모두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느 쪽이 정치적 논리가 적게 반영되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다.

10.2. 모문룡의 처형


전술했듯이 원숭환이 명장이 아니라는 주장은 궤변이고 모문룡이 문제가 많았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처형 과정은 오랫동안 큰 논란거리여서 원숭환을 호의적으로 평하는 청사에서도 '원숭환이 모문룡을 함부로 죽였다.'고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반면 원숭환으로서는 불가피했다고 보는 옹호론도 있는데 자세한 건 모문룡 항목 참조.

10.3. 성격


청나라 때 '석궤서'라는 사서에서 원숭환이 '조포'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급하고 포악함'이란 뜻이다. 앞서 말한 모문룡의 처형은 어느 정도 옹호의 여지가 있으나, 원숭환이 원칙을 무시한 행동을 해 온 전적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독선적이었음은 분명하다. 본문 상단에서 말한 것처럼 제멋대로 적정 탐색을 하고 온 적도 있고, 감군으로 있던 도중 군사들의 수가 안 맞자 독단적으로 군관을 처형하는 월권 행위를 했다가 손승종이 크게 화내자 엎드려 사죄했다는 기록도 있다.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다소 독선적인 면이 관찰되어 지위가 동등하거나 위인 사람들과 갈등이 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김용은 그의 소설 《벽혈검》에서 원숭환의 아들 원승지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뒤 침략하는 만청족과 부패한 명황실에 대항하는 모습을 그렸다. 물론 원승지는 창작 인물이다.
백발마녀전 명원천국이라는 영화에 나온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도 등장. 누르하치의 영원성 침공이 가시화되면서 4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금측에서는 새로 부임한 원숭환을 백면서생 취급하고 캐릭터 자체도 초상화와 같이 단아한 이미지로 그려지나, 직접 후금 진영을 정탐하고 영원성의 방비를 굳게 하며 다가올 누르하치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고자 동분서주한다.
남송의 명장 악비와 더불어 중국 사극의 단골로 나온다. 악비와 같이 다무너져가는 나라를 지탱하다 어이없이 반간계로 죽는것이 특징이다.
[1] element란 의미의 그 원소와 정확히 같은 한자를 쓴다.[2] 당시 문신도 군사를 지휘했다.[3] 예를들어 임진왜란 때 종군한 총병 유정은 무관이었고, 부총병 양호는 문관이었다.[4]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처럼 현대의 눈으로 보면 그다지 좋은 방침은 아니다. 원숭환이나 웅정필처럼 문관이었지만 성과가 나온 경우도 있지만, 사르후 전투의 판도 자체를 잘못 짜서 패배의 단초를 만든 양호 같은 인물도 나온다. 다만 양호는 임진왜란에서는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을 보여줬다.[5] 당시의 무관이라는 건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현대의 직업 장교와 달리 전문 교육 따위는 전혀 받지 않고 군에서 오래 생활했거나 개인적인 무력이 뛰어날 뿐인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글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문적으로 글을 읽어주거나 문서를 작성해 주는 문사들이 따라다녀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전근대 동양에서는 대국적인 안목을 갖춘 무관이 없을 경우 군사 부분에 소양을 가진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경우 송나라, 명나라가 특히 심한 편이었다. 반대로 정복국가인 원나라, 청나라의 경우는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또 동양이라고 해도 무사계급이 지배층이었던 일본이나 무관의 사회적 지위가 중국이나 고려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조선도 무관의 자질이 높은 편이라 문관이 무관을 지휘해 전쟁을 이끌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6] 사실 원숭환의 행동은 근무지 무단이탈 등으로 중형을 받을 수도 있는 사항이었지만, 당시 명나라는 상황이 말이 아니었고 원숭환의 행동도 적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기에 그냥 넘어갔다.[7] 특히 사르후 전투에서 많은 군마를 상실했고 명의 재정이 나빠서 대규모의 기병을 양성할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8]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30만 대군이라고 자칭했고 뒤의 기록에도 16만이라고 되어 있지만 당시 후금의 인구가 300만이며 동원 능력 등을 고려해보면 실제로는 10만 정도로 추정된다.[9] 그나마도 능지형이 아니고 자살로 죽을 수 있었던 건 천계제가 총애했던 덕분에 내려진 관대한 조치였다.[10] 발해 또한 일본이나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물자를 확보했고, 고구려도 초기에는 약탈 경제였다는 것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나마 고구려는 훗날 황해도, 평안도, 경기도 일부 등 한반도의 비옥한 영토를 차지해서 나름대로 자급을 이루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발해는 계속 교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11] 사실 설령 조선이 무역에 적극적이었더라도 현물경제인 당시 조선의 상업 수준을 고려하면 후금이 무역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임진왜란 때 명군 장수들이 자국과 달리 조선의 교통로와 화폐가 발달하지 않아 보급품 확보가 힘들다고 토로할 정도로 조선은 상업 수준이 낮았다. [12] 이때문에 청태종이 인조한테서 항복을 받고 나서 군대에 약탈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청군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13] 이전 문서에는 정묘호란이 모문룡과 그를 받아준 조선 조정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묘호란은 후금이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한 전쟁이다. 모문룡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일어났을 전쟁이다.[14] 정확하게 말하면 '''원숭환은 모문룡의 직속상관이 아니다.''' 원숭환은 1628년 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계주, 요주, 천진, 등주, 래주 등지의 변경지방에 군사 업무를 총 감독하는 지휘관 대행) 겸 병부상서 및 우부도어사로 임명되었지만, 모문룡(1624년 평요총병관 겸 좌도독으로 임명)은 병부소속도(명나라는 송나라의 군 통수정책을 이어받아 군정을 담당하는 병부와 중앙군 지휘부인 오군도독부를 완전히 분리했다.), 계료독사가 관할하는 지역에 있던 것도 아니였다.(조선땅인 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 그러나 이미 점령된 요동지역에 군민들이 모문룡 휘하에 있었던 것이기에 전혀 관련성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거기다가 독자적인 사법권까지 각자 가지고 있었기에 원숭환이 허가 없이 죽이는 것에는 사실 문제가 있었다.<원래는 요동경략 정도가 후금의 공격에 대한 방어와 점령된 실지 회복을 담당하였으나, 명 조정 내부의 혼란으로 인하여서 전선 상황이 악화되고, 거짓 공적을 내세우는 자들이 생기면서 해당 지역 담당관들의 지휘급이 쓸데없이 높아졌다.>[출처필요] [15] 천계제 시절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형성한 당파로, 엄(閹)은 환관이라는 뜻이다. 환관인 위충현이 만든 정파라서 엄당이라고 불리지만 주요 인사들은 환관이 아닌 조정 대신들이었다. 숭정제 즉위와 함께 세력이 약해지지만 그래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명나라 멸망하고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대항해서 마지막 싸움을 힘겹게 벌일 때도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16] 내부에 후금과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7] 이자성이나 이자성 이전의 두목 고영상이 도적이 된 것은 후금의 약탈보다 조금 이전이다.[18] 모문룡의 가족이 그가 보는 앞에서 나눠진 그의 살을 씹었다는 설도 있다.[19] 물을 건널 때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라는 건 전근대전에서 병가의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군사들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20] 1712년 동지사겸 사은사인 김창집의 아우 김창업이 자벽무관으로 형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이다. 수많은 연행 기행문 중에서도 발군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는 또 다른 읽는 재미가 있다.[21] 한국고전 종합DB 로 들어가 서명에서 연행록선집을 찾은 뒤 다시 연행일기 항목으로 들어가면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22] 영원성을 지나갈 때 짧게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가 역사에 밝지는 않은지 원숭환이나 기타 당시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앞뒤가 좀 맞지 않거나 과장되거나 하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냥 민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고 옮긴 듯.[23] 특히 한국에서는 거의 동시기 인물 중에 거의 똑같은 루트를 밟을 뻔 했다가 살아남은 뒤 최종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해 전설로 남은 인물이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와 겹쳐 보는 사람이 많다.[24] 대표적인 예로 중국에서는 오랜 세월 조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서 명나라 시절 연극에서 조조 역할을 하던 배우가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정도였으나,''' 모택동이 조조를 호평하자 갑자기 조조를 재평가한 사람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