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
1. 개요
화베이(Huáběi). 황하의 하류 ~ 중류를 중심으로 한 평야 지대. 과거에 보통 중원이라 하면 이 지역을 가리켰으며 4천 년 중국 역사 내내 정치적 중심지였다. 다만 그 영역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서 애매한데, 원래는 화이허 이북에 한족이 사는 지역을 칭하였으나 현재는 황하 이북으로 그 기준이 바뀌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처럼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다.
2. 화북 vs 화남
북중국과 남중국, 즉 화북과 화남은 회하(淮河, 중국 발음은 화이허와 비슷하다)가 그 경계였고 역사내내 화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애초에 중화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권역이 화북이며, 장강권역인 화남은 본래는 수풀이 우거진 밀림과 축축한 늪지대가 대부분이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오스트랄로이드 계통 민족들이 살고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다 통일제국 한나라가 이곳의 '오랑캐'들을 몰아내고 어느정도 개발을 해놓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장강변과 몇몇 거점도시에나 확실하게 통치력이 미쳤고 여전히 나머지 화남지역 대부분은 과장 좀 보태서 만리장성 이북의 몽골초원이나 다름없는 야만족의 땅,미지의 땅이었다. 이는 삼국시대 오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이는 삼국지에서 촉, 오가 합쳐도 위나라 군대에 못미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게르만족 대이동의 중국버전이라 할 수 있는 5호16국으로 인해 한족들이 북방 유목민에게 화북을 빼앗기고 대거 화남으로 이주하여 한족왕조를 이어간 남북조시대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후 천하통일을 이룩한 수나라 대운하의 건설, 결정적으로 남송시대를 거치며 양쯔강 유역의 경제력이 급상승해 요-금-원의 끊임없는 유목민 정복왕조 러쉬로 피폐해진 화북을 앞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두 지역 간에 군사적 대결이 발생할 경우 명나라 한 번을 제외하고는 늘 화북의 승리로 끝났다. 이유는 비록 화남이 경제력은 앞서도 인구면에서 최소 2배 이상으로 밀리기 때문에 [1] 쉽게 말하면, 식량창고 관리인들이 대저택과 싸운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연히 병력 동원면에서 화남이 화북지방의 국가들에게 군사력에서 밀릴 수밖에는 없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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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현대의 농지경작지 밀도에서도 드러나는데 세간의 인식과 달리 화북 쪽이 화남보다 농지밀도에서 압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지도에 경작지가 밭농사(갈색)와 논농사(청록색) 두가지 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인구부양력이 밀이나 보리보다 훨씬 높은 쌀생산은 절대다수가 화남에서 이루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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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인구 밀도, 상하이-남경 일대를 제외하면 화북지역의 인구밀도가 강남보다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필적할 만한 중국의 다른 지역은 사천성-중경시를 아우르는 넓은 사천분지 지역이나 푸젠성 극히 일부 지역, 대만성 서북부 지역, 홍콩에 인접한 광둥성 일부 지역(주강 삼각주)밖에 없다.
3. 화북 vs 화중 vs 화남(강남)
황허와 양쯔강 사이에 회수(淮水)를 중심으로 한 평야를 화중 지방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일명 중국의 노른자 땅이다. 허난성, 안후이성, 장쑤성, 산둥성이 포함되는데 다만 남북조나 금 vs 남송 처럼 전장이 되기도 하는 지역이었다. 이런 경우 화북은 하북과 동일시되어 황허 이북을 의미하게 된다.
4. 현대 중국의 6대 지방 중 하나
원래 화이허를 기준으로 이북을 화북으로 칭하였으나 화둥, 중난 지방이라는 개념이 추가되면서 황허 이북을 화북이라 칭하게 되었다.
베이징시, 톈진시, 허베이성, 산시성, 내몽골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1] 확실히 전근대에는 식량 생산량=인구이기에 생산량이 더 많은 화남이 화북보다 인구가 딸리는게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다만 화남의 쌀생산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결국 화학비료 발명 이전의 전근대인지라 황하문명의 고향이자 화남보다 훨씬 일찍 개발되어 수천년간 인구가 누적된 화북의 인구를 단시간에 따라잡는건 시대적 한계상으로 힘들었다. 게다가 그 엄청난 쌀생산량은 그대로 화남의 인구를 늘리는데 재투입된 것이 아니라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운송됐다. 애초에 대운하를 만들어 장강과 황하를 연결한 이유 자체가 화남의 생산물을 화북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화남은 화북을 위한 식량생산기지라 해도 할 수 있다. 즉 통일왕조 시대에 화남의 대단한 생산량은 도로 화북의 인구를 부양하고 늘리는데 쓰였다는 말이다.[2] 1161년 2차 금-남송 전쟁과 13세기 초에 일어난 금나라의 침공 때 남송이 제대로 이긴 적도 있었다. 다만 이 경우들은 금나라의 침공을 남송이 지형을 배경으로 막아낸 것... [3] 화남의 반청 성향 한족들이 화북의 만주족 및 친청 성향 한족들과 싸워 이긴 신해혁명이 있지 않냐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이는 친청 성향 한족들의 리더격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었던 화남의 혁명군에게 투항해버린 사례일뿐더러 청나라 멸망 이후 위안스카이가 청 황실에 이어 공화정마저 폐지하고 본인이 황제가 되면서 그 영향으로 중국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제대로 된 화남의 승리라고 보기 어렵다. 위안스카이가 황위에서 물러나 중국의 군주정이 완전히 폐지된 후에도 중화민국은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제대로 중국 전체를 장악하는 일이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