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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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의 제34대 군주. 진 경공의 아들.
2. 생애
진 경공 14년(기원전 512년), 진 정공은 아버지 진 경공이 죽자 진나라의 군주 자리를 이었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중항인(中行寅)[1] 은 이 기회를 보아 조씨(趙氏)를 척살하고자 했다.[2]
진 정공 12년(기원전 500년), 진(晉)의 경인 조간자 조앙(趙簡子 趙鞅)은 가신 동안(董安)으로 하여금 태원(太原) 땅에 성을 쌓게 했고, 완성되자 진양이라 이름 붙였는데 대단히 견고하였다. 이후 이 진양성은 조씨 일가의 근거지가 된다.
진 정공 15년(기원전 497년), 조간자 조앙은 진의 정경이 되었는데, 동족인 조오를 감금했다가 살해한다.[3]
진 정공 19년(기원전 493년), 갈등 끝에 조앙은 병사를 거느리고 범씨(范氏)[4] 와 일전을 벌였다. 범씨, 그리고 범씨와 같은 편인 중항씨는 정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원군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맹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조씨의 군대가 싸움에서 이겼고 여기서 발린 범씨와 중항씨의 세력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7]"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상대부는 현을, 하대부는 군을 다스리게 할 것이다.[5]
선비들은 10만전으로 사례하고, 평민들은 상공업으로 이득을 보게 해줄 것이며, 노비들은 면천시키겠다."[6]
진 정공 30년(기원전 482년), 진 정공은 오왕 부차(吳王 夫差)와 위(衛)나라 황지에서 회맹하며 패자 자리를 다투었다.
부차가 말했다.
이에 진 정공이 대꾸했다."주나라 왕실 혈통으로 보면 내가 위다."[8]
결과적으로 당시 한참 기세를 높여 가던 부차가 회맹의 맹주로 추대되지만, 부차의 신하였던 월나라 군주 구천이 난을 일으켜 오 본국을 공격하는 바람에 부차는 군사들을 이끌고 급히 귀환한다. 그러나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월군에게 연전연패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자결하고 만다."희성을 쓰는 이들 중에서 내가 최고다."[9]
진 정공 37년(기원전 475년), 진 정공이 사망하였다.
[1] 일명 순인(荀寅), 원래는 순씨였지만 순씨가 두 집안으로 나뉜데다 종주(宗主)가 중군원수(中軍元帥)로 임명되면서 중항(中行, 즉 중군)씨로 개칭한다. 이때 분리된 다른 순씨가 바로 지씨(知氏), 훗날 조씨, 위씨, 한씨에게 협공당해 망하는 그 지씨다. 중항씨가 본가고, 지씨가 분가.[2] 진 정공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나라는 군주는 힘이 없고 실권을 육경이 쥐고 있었는데 중항씨는 그나마 개중에 순종적인 가문이었기 때문. 헌제가 동승에게 조조를 척살하게 한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쉽다.[3] 조씨 영토 중 따로 떨어져 있던 곳을 조오에게 맡겼는데 도리어 조오가 그 땅을 꿀꺽해버렸기 때문.[4] 구 사씨(士氏).[5] 군현제의 이치로 보면 상급 행정 구역인 군이 커야 맞지만, 춘추 시대에는 군이 현보다 작았다.[6] 이렇게 상을 주겠다고 공언한 것은 이 싸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7] 그 당시 6경으로는 중항씨(순씨), 범씨, 조씨, 위씨, 한씨, 지씨 가문이 있었고, 각 가문의 당주가 경 자리를 맡았는데, 순씨의 종주 순인과 범씨의 종주 범길사가 조앙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망명함으로써 4경으로 줄었다. 그리고 이 4경은 나중에 또 내전을 벌였고, 그 결과 가장 강한 지씨가 협공을 받아 멸망하고 남은 3경은 타협 끝에 각각 자신의 나라를 세워 독립한다.[8] 주나라의 시조는 주문왕 희창이고 그의 아버지는 계력인데 오는 계력의 큰형인 태백이 세우고 작은형 중옹이 뒤를 이은 나라이기 때문. 참고로 진의 초대 군주인 당숙 우는 계력의 증손이다.[9] 왕을 자처하고 있지만 기실 부차는 자작에 불과했던 데 반해 진 정공은 후작이었다. 게다가 진나라는 이미 오래도록 패권을 쥐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