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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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衞[4]
중국 주나라(서주) 때 건국된 국가이다.
2. 역사
2.1. 서주
상나라 멸망시 태공망 여상(제나라의 시조), 소공 석(연나라의 시조) 등은 아예 상을 없애려고 했으나 무왕의 아우 주공 단(노나라의 시조)의 제안에 따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상에 봉한다. 이와 아울러 그 주변에 관나라, 채나라, 곽나라를 세우고 각각 무왕의 아우들이었던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봉했다.
이들의 목적은 무경을 감시하는 것이었기에 삼감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무왕 사후 섭정을 맡은 주공 단의 찬탈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삼감의 난'을 일으켰으나 주공 단은 이들을 3년 만에 진압하여 주모자였던 무경과 관숙 선을 죽이고 채숙 도는 유배, 곽숙 처는 삭탈 관직에 처했다. 이 때 상나라 수도 일대의 이름을 은에서 위로 바꾸고 강숙 봉(문왕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을 봉했다. 수도는 조가였다가 초구, 마지막에는 복양으로 옮겼다. 국성은 희씨이다. 은나라 제사는 주왕의 큰형이었던 미자 계(啓)[5] 를 세워 송나라(宋)에 봉했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올랐고 기원전 771년 견융이 서주의 수도 호경을 침공했을 때 무공이 진(晉), 진(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의 시호를 썼다. 이때 무공은 주 왕실의 사도를 겸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2.2. 춘추시대
이때만 해도 정나라(鄭), 송(宋)와 함께 큰 세력이었지만 후에 제나라(齊), 진나라(晉), 송나라(宋), 노나라(魯) 등의 압박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공자들 간의 자리 다툼으로 쇠퇴했는데[6] 장공이 죽은 후 장공의 서자 주우가 자신의 이복 동생 환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충신 석작 등의 수습[7] 으로 환공의 또 다른 이복 동생 선공을 세워서 내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공은 색골이라서 자신의 계모였던 위 장공의 첩 이강을 범하고 아들 급자(急子)를 낳았다.[8] 또 급자에게 시집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제나라 희공의 딸 선강을 스틸하고 수(壽)와 삭(朔)이라는 아들을 낳고 선강을 총애하자 선강과 삭은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도 수를 태자로 삼기 위해 원래 태자였던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선공은 급자를 다른 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리 도적들을 매수해 사신이라는 표시를 보면 죽이라고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수가 급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신의 상징인 백모(白毛)[9] 를 가지고 먼저 떠났고 수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알고 통곡한 급자는 스스로 자신이 목표라는 것을 도적들에게 밝혔고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선공은 화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수의 동복 동생인 삭이 뒤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혜공은 사악해서 평소 급자와 수를 모함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10] 이에 급자의 동생 검모는 우공자 직 등의 협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혜공의 외숙부뻘이었던 제나라 양공은 그를 지원해 검모를 몰아내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은 돌아와 우공자 직 등은 죽였지만 정작 검모는 주나라로 추방시키는 걸로 끝냈는데 그가 주왕의 부마였기 때문이었다.
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이 즉위하니 그가 의공이다. 의공은 학덕후질을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본인도 적족의 침공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의공의 신하 굉연(宏演)이 시신이나마 수습했으나, 칼로 엄청 썰려서 간(肝) 외에는 고깃 덩어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굉연은 그 간을 향해 절을 한 뒤, 주공의 시신을 장사지낼 관과 기구가 없으나, 자신의 몸으로 관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배를 가른 다음 자신의 배 안에 간을 넣고 목숨을 끊었다. 이를 두고 부복납간(剖腹納肝)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라가 멸망할 뻔 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했고 수도를 폐허가 된 조가에서 초구로 옮겼다. 의공의 아들 개방은 제나라로 망명해서 나중에 제나라 간신이 되어 역아, 수조와 함께 환공을 악의 길로 빠뜨리고 뒤를 이은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소공을 즉위시키는 등 제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위나라 입장을 보면 문제는 개방이 이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혜공의 후대가 남아 있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혜공과 정신나간 의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비운의 태자였던 급자의 후손을 찾았지만 급자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수의 아들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검모의 동생 소백 석의 장남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11] 하지만 대공은 몸이 약해 곧 죽었고 그의 아우 훼를 세우니 그가 문공이다. 문공은 우수한 임금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진력했고 이렇게 위나라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문화는 흥성하였지만 문공이 진(晉)나라 떠돌이 공자 중이를 푸대접했다가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군주가 되자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계속 몰락했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강국인 진(秦), 위(魏) 사이에 끼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위나라 출공과 장공(이름은 괴외) 부자(장공이 출공의 아버지)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괴외가 세자 시절 어머니 남자(南子)(...)[12] 가 음탕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자 죽이려고 하다가 뽀록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괴외의 아버지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출공이 임금이 되었으나, 괴외가 다시 돌아와서 출공을 몰아내고 장공이 되었다. 그러나 장공이 쫓겨나고 진나라와 제나라의 입김을 받아 공자 반사와 공자 기라는 위나라 공족들이 차례로 임금이 됐다 쫓겨나는 혼란이 반복되었다. 겨우 위나라 내부의 움직임으로 출공이 복위하여 안정되나 싶더니 출공이 자기를 불러다 임금으로 삼은 신하를 쫓아냈다가 역관광을 당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2.3. 전국시대
위(魏)의 압박으로 위(衛)나라 성후는 스스로 칭호를 공에서 후로 한단계 낮췄다. 그러나 위(魏)나라는 마음대로 성후를 폐위시켜 버리고 그의 신하였던 자남 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13] 을 군주로 세웠으니 그가 평후이다.
그 후에는 평후의 아들 사군 때는 작위가 아예 군(君)[14] 으로 떨어지면서 완전히 위(魏)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기원전 252년 이런 조치가 위(魏)나라에 의해 실행됨으로 위(衛)나라는 여기서 사실상 독립국으로서는 반쯤은 망한 상태였다.
전국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위(魏)가 진(秦)에 관광당하기 시작하면서 위(衛)는 야왕(野王)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고을 하나로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사기 춘신군열전을 보면 '진(秦)이 위(衛)를 야왕으로 옮겼다(秦徙衛野王)는 기술이 나온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다른 나라들은 멸망시킨 뒤에 왕이나 그 외 제후들을 평민으로 만든 반면 위(衛)만큼은 멸망시킨 뒤에도 야왕으로 옮겨서 '''작위를 그대로 놔뒀다.'''아마도 주나라의 대를 잇는다는 의미로[15] 남겨 둔 듯하다.[16] 아무튼 그래서 중국을 통일하고 군현제라는 강력한 중앙 집중 정책을 폈던 진(秦)나라에서 위(衛)나라가 유일하게 봉건제가 남아서 존속해 있었다고 하지만, 이때의 위(衛)는 더 이상 자주적인 나라라고 볼 수 없고, 진나라의 속국 정도에 불과하였다.
2.4. 초한쟁패기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가 기원전 209년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평민으로 만들어 위군이란 직함도 사라졌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난 때가 기원전 209년 '''7월'''인데, 위군 각이 폐위된 때는 기원전 209년 '''9월'''이다. 참고로, 같은 달에 항량과 유방이 처음 일어났다. 이 시점에서 다시 일어난 나라(그 나라의 임금을 칭한 자가 있는 나라, 장초 제외)는 조, 제, 연, 위(魏) 그리고 사실상 초(항량)까지 있으니 6국이 사실상 부활한 상태로 진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마도 주나라의 후손이니 6국 반란이랑 더불어 정통성을 내세우는 자가 이용할지도 몰라 없앤 듯하다.
위만은 이 나라와는 무관하다.
3. 역대 군주
위(衛)나라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폐위된 군주는 시호가 없이 이름만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군주도 있다.
- 1. 강숙(康叔) 봉(封) 기원전 1040년? - ? : 주문왕의 9남이자 무왕(주)의 동복 동생으로 옛 상나라 지역에 봉했다.
- 2. 강백(康伯) 모(牟)
- 3. 고백(考伯)
- 4. 사백(嗣伯)
- 5. 첩백(疌伯) 또는 지백(摯伯)
- 6. 정백(靖伯)
- 7. 정백(貞伯) 또는 기백(箕伯) ? - 기원전 867년
- 8. 경후(頃侯) 기원전 866년 - 기원전 855년 - 건국 때부터 백작이었지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작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당나라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강고》에 강숙을 “맹후”라 부른 구절을 들어 원래 강숙은 후작이었고 또 제후의 맏이로서 '방백'이었기 때문에 이후 강숙의 후예들이 '백'을 칭한 것은 '방백'의 의미며 사기에 경후 때에 뇌물을 바쳐 후작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방백의 권위를 잃어 보통의 제후와 같은 칭호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 9. 희후(釐侯) 기원전 854년 - 기원전 813년
- 10. 공백(共伯) 여(餘) 기원전 813년
- 11. 무공(武公) 화(和)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 12. 장공(莊公) 양(揚)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35년
- 13. 환공(桓公) 완(完) 기원전 734년 - 기원전 719년
- 14. 주우(州吁)(폐위) 기원전 719년
- 15. 선공(宣公) 진(晉) 기원전 718년 - 기원전 700년
- 16. 혜공(惠公) 삭(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또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7년
- 17. 검모(黔牟)(폐위)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8년 또는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7년
- 18. 혜공(복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또는 기원전 686년 - 기원전 669년
- 19. 의공(懿公) 적(赤)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학덕후로 나라를 말아먹었다. 침략한 적인들에게 살해되었으며, 부복납간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 20. 대공(戴公) 신(申) 기원전 660년
- 21. 문공(文公) 훼(燬)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35년
- 22. 성공(成公) 정(鄭)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00년
- 23. 하(瑕)(폐위) 기원전 631년 ~ 기원전 630년
- 24 성공(복위) 기원전 630년 ~ 기원전 600년
- 25. 목공(穆公) 속(速)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89년
- 26. 정공(定公) 장(臧) 기원전 588년 - 기원전 577년
- 27. 헌공(獻公) 간(衎)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 주색 잡기와 사냥만 밝히다가 반란이 일어나 폐위되었다. 사실 죽일 수도 있었으나, 호위 무사 공손정이 당시 최고의 활잡이인데다가 추격하는 장수 유공차가 그의 제자라서 화살촉을 빼고 빈 화살만 쏘면서 놔주는 바람에 망명에 성공하였다.
- 28. 상공(殤公) 추(秋) 기원전 558년 - 기원전 547년 : 헌공 축출 후 귀족들이 내세운 임금으로 위 헌공 복위 때 폐위되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불쌍했는지 그래도 시호는 줬다. 단지 그 시호가 일찍 죽을 상 자여서 그렇지(...)
- 29. 헌공(복위)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 30. 양공(襄公) 악(惡)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35년
- 31. 영공(靈公) 원(元) 기원전 534년 - 기원전 493년 : 보통 영이라는 시호는 사형을 당하거나 폐위된 군주에게 주로 주어지나, 평범한 폭군이 영을 시호로 받는 일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런 예이다.
- 32. 출공(出公) 첩(輒)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80년
- 33. 장공(莊公) 괴외(蒯聵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8년
- 34. 반사(斑師)(폐위) 기원전 478년
- 35. 기(起)(폐위) 기원전 477년
- 36. 출공(복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70년 또는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56년
- 37. 도공(悼公) 검(黔)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65년 또는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1년
- 38. 경공(敬公) 불(弗) 기원전 464년 - 기원전 432년 또는 기원전 450년 - 기원전 432년
- 39. 소공(昭公) 또는 소공(橈公) 규(糾)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6년
- 40. 회공(懷公) 미(亹)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 41. 신공(愼公) 퇴(頹)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83년 또는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 42. 성공(聲公) 또는 성공(聖公) 훈(訓) 기원전 382년 - 기원전 372년 또는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 43. 성후(成侯) 속(速) 기원전 371년 - 기원전 343년 또는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국력이 미약해져 공이라 칭한 것을 후라고 칭한다. 최후의 위씨(衛氏) 군주.
- 44. 평후(平侯) 경(勁)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35년 또는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5년: 최초의 자남씨(子南氏) 군주.
- 45. 사군(嗣君) 또는 효양후(孝襄侯) 기원전 334년 - 기원전 293년 또는 기원전 324년 - 기원전 283년 : 국력이 바닥을 기다 못해 지하까지 뚫어 아예 군으로 깎아 내린다.
- 46. 회군(懷君)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54년 또는 기원전 282년 - 기원전 253년
- 47. 원군(元君)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41년 또는 기원전 253년 - 기원전 230년
- 48. 각(角)(폐위)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09년 또는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09년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t-s/. 현대 발음은 Wèi.[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위나라 희성은 위씨(衞氏)였다가 자남씨(子南氏)로 바뀐다.[3]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4] 간체: 卫. 참고로 현대 한국어와 현대 표준중국어(관화)로는 위(衛)와 위(魏)의 발음이 구분되지 않지만, 광동어(Wai6와 Ngai6), 일본어(えい/Ei와 ぎ/Gi), 베트남어(Vệ와 Ngụy)로는 구분된다. 그 외 표기로 衞. 한자에는 이체자(異體字)가 굉장히 많다. 문헌을 뒤져보면 이것 말고도 다른 이체자들이 많이 존재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구자체를 쓰던 시절에 衞가 국가 표준이었다. Wey라고도 쓰는데 현대 표준 중국어에서 성조까지 똑같아 한어 병음으로는 도무지 구분할 방법이 없는 위(魏)와 위(衛)를 구분하기 위해, 종종 위(魏)를 Wei로 쓰고, 위(衛)를 Wey로 적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어 병음으로 제대로 적을 때는 둘 다 Wèi라고 적는 게 맞지만 영어 등에서 한자 병기 없이 표기할 때는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Wey는 국어라마자라는 표준중국어(관화)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한어 병음 Wèi에 대응되는 철자이다. 아마 위(魏)는 중국사에서 자주 나타나 자주 표기되므로 표준적인 Wei로 쓰고, 위(衛)는 춘추 시대에만 끗발 날렸고 전국 시대에는 소국이었으며 이후에는 아예 왕조명으로 쓰이지 않아 표기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일반적으로 안 쓰는 표기인 Wey로 쓰게 된 듯하다. 다만 춘추 전국 시대 이후 시대의 왕조에서 왕족이나 기타 공신들에게 명목상 분봉하는 영지 이름이 위(衛)나라일 경우에는 Wey로 안 적고 Wei로 적는 경우가 많다.[5] 사기에서는 '개(開)'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한경제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라 우왕의 아들 계, 노나라 민공 노민공도 이름을 '개'라고 기록했으며 전국시대 직전 위(魏), 조나라, 한나라 삼국이 지백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장맹담(張孟談)은 장맹동(同)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이 사마담(司馬談)이었기 때문이었다.[6] 사실 무공도 자신의 형 공백을 죽이고 즉위했다.[7] 석작은 주우를 죽이고, 주우가 군주가 되는 데 공을 세운 아들 석후도 죽였는데, 이것은 '대의(나라)를 위해 친족도 죽인다'라는 뜻의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유래가 되었다.[8] 참고로 얼마나 급하게 낳았는지 이름이 급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9] 얼룩소의 꼬리털로 만든다.[10] 위 선공의 재위 기간 19년을 고려해 보면 선공이 즉위한 후에 태어난 혜공은 즉위했을 때 미처 20세도 되지 못했다. 즉 10대에 이미 형들을 헐뜯고 다닌 것.[11] 소백은 제 양공의 주선 하에 계모였던 선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보았다.[12] 남자(男子)가 아니다! 남자는 송나라 공녀로 '자'는 성을 의미한다. 남은 시호이며 결국 자성이다.[13] 조상 공자 영은 영공의 서자로 문공의 7세손이다. 위에서 장공이 달아나 위나라에 세자가 없을 때 위 영공과 남자에게서 모두 영공의 뒤를 이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받지 않고 출공을 세우도록 권하고 자신은 고사했다.[14] 원칙적으로 오등작은 국(國: 제후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것인 데 반해, 군(君)의 경우 가(家: '국'에 소속된 대부의 봉토)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작위 중 최고위이다. 따라서 위나라 군주의 칭호가 '군'이 됐다는 것은 '국' 취급을 못 받고, '국' 내부에 있는 '가'에 준하는 취급을 받게 됐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위나라를 위가(衛家)라고 불렀다는 건 아니고 대우가 가처럼 됐다는 뜻이다. 다만 이전에도 문헌에서 위군(衛君)으로 쓰는 경우들이 있긴 했다. 예를 들어 《논어》의 〈자로〉 3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위군(衛君)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군(君) 자는 위나라 군주의 작위가 '군'이라는 게 아니고(당시에는 '공'이 정식 칭호였음) 일반적인 의미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었다. 근데 사군의 시대에는 위나라 '임금'의 작위가 정말로 '군'이 된 것이다. 당시 자로나 《논어》의 편집자는 당시 끗발날리던 위군('衛君)'이 훗날 그대로 정식 칭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을 것이다.[15] 상나라도 망한 후 왕족을 송나라에 봉한 바가 있으므로 그를 따른 듯하다.[16] 위나라가 진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이래로 진나라 정계에 위나라 사람들이 진출하는 등 얼마 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가 통일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세운 상앙도 위나라 출신이고, 결정적으로 통일 당시 진나라의 권신이자 진 시황의 생부로 의심 받아 온 여불위도 위나라 출신이다. 어쩌면 이런 사정들이 위나라 존속에 뭔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