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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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차금봉(車今奉)
생몰
1898년 12월 8일 ~ 1929년 3월 10일
출생지
경성부 화천동
사망지
서대문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차금봉은 1889년 서울 화천동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 미동공립보통학교[1]를 졸업하고 서울역 철도기관의 화부 견습공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서울역 노동자들을 선동해 파업을 계획하다가 해고되었다. 이후 용산철도공장, 정미공장, 마차부를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선동한 그는 3월 27일 서울역 앞에서 '노동대회', '조선독립'이라는 큰 깃발을 앞세워 천도국 노동자 800명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차금봉은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노동자들을 이 이론에 따라 해방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동년 3월 김명식, 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 운동을 벌였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차금봉은 노동공제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조선노동공제회에 대하여', '현하의 조선사회' 등의 강연을 했다. 그는 반 인텔리 투쟁을 이끌었고, 공산주의자 정재달에게 테러를 가했다.
그러나 윤덕병 등은 차금봉이 인텔리 타도를 외치며 같은 공산주의자를 공격하는 것에 반발해, 1922년 10월 노동공제회 해체를 선언하고 노동연맹회를 창립했다. 이후 노동공제회는 노동연맹회와 대립하면서 1924년 노동총동맹에 합류할 때까지 존재했다. 차금봉은 1923년 전반까지 조선금물직공조합, 경성신문배달조합이 창립되는 것을 지도했으며, 1923년 7월 서울에서 유기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했고, 9월 서울계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조선노농대회의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1924년 4월 18일, 차금봉은 노농총동맹 창립대회 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5월에 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각지의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했다. 노농총동맹의 강령은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과 투쟁하며", "노동자 계급의 복리를 증진하고 경제적 향상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들이 공산혁명을 꾀한다고 판단하고 노농총동맹의 활동을 모두 봉쇄했으며 강연회마저도 열지 못하게 했다.
노농총동맹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합법투쟁을 조직하려 했지만, 차금봉이 이끄는 서울계와 북풍회, 그리고 회요회계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운영에 차질을 빛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차금봉은 "이런 난국을 해결하려면 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시키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분리운동을 주도한 끝에 1927년 9월 성사시켰다. 그 후 그는 노동총동맹 위원으로서 적지 않은 파업을 지도하거나 지원했다.
1927년 11월 밀양 양화직공 동맹파업이 벌어지자, 차금봉은 이를 지지하는 격문을 보냈다가 파업을 선동하고 확대시킨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속되었다. 그리고 1928년 3월에 신간회 경성지부 설립을 주도해 설립대회에서 간사가 되었으며, 신간회 전국대회 출석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신민배달총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또한 그는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와 경기도 책임자를 함께 맡았으며,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테제' 등을 마련하여 자신의 혁명노선을 분명히 했다.
1928년 7월, 차금봉은 이듬해 3월 1일에 3.1 운동 기념 투쟁을 벌이기로 하고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지시해 선전전단 20만장을 도쿄의 동성사에서 인쇄했다. 그러나 우송 도중 서울우편국에서 발각되고 말았고, 일본 경찰은 수사 끝에 제4차 조선공산당 조직을 파괴했다. 차금봉은 일본으로 피신했지만 도쿄에서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된 뒤 심한 고문을 받다가 결국 1929년 3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차금봉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