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근
1. 진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상근(吳相根)
오상근은 1923년 10월 1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1세 때인 1943년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 계림의 아라시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양자강 유역의 무창, 한구, 장사 등지의 전선을 전전하다 호남성의 수동장 지구에 주둔했다. 그러던 중 인근에 한국광복군이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는 1944년 1월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했다.
이후 충칭으로 향하면서 중국인으로부터 일본군 첩자로 오해받아 감옥에 갇히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마침내 충칭에 도착한 뒤 토쿄대에 배치되어 지청천, 김구, 엄항섭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국내 진공 작전에 가담해 국내 투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 조국으로 귀환한 그는 정부로부터 육군사관학교로 보내 군인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임시정부 소속이라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좌익으로 몰려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2013년 8월 30일 진천자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진천군청과 진천군 내 중,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성균관 유도회 진천군지부장, 진천신협 이사장을 거쳐 광복회 충북도지부장을 역임했다. 2005년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후 대외 활동을 중단했지만,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고향으로 돌아와 공직생활을 했지만 광복군이었다는 이유로 늘 감시를 당했어. 출장을 갈 때도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거든. 그나마 1990년대 들어 독립유공자법이 만들어지면서 대우를 받게 됐지. 아직도 고통 받는 애국자 후손이 많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 바쳐 죽은 사람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 그런데도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돼 동족의 피를 말리고 고통을 준 사람들이 큰소리치며 사는 걸 보면 안타까워.”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상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2. 진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상근(吳尙根)
오상근은 충청북도 진천군 사람이다. 그는 1909년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대 기독교 장로교의 조사(助事)로 있으면서 3.1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여 1919년 2월 20일 서울에 소재한 함태영의 집에서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현순 등과 함께 기독교 중심의 3.1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기독교 대표 이승훈과 천도교 대표 최린 사이에 합의된 날인 2월 21일 밤에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합을 승인하는 장로교측 대표와 감리교측 대표의 회의에 장로교측 대표의 임원으로 참석하여 연합을 승인하고 기독교측의 지역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이후 1920년 6월 28일 서울에서 장덕수, 장도빈, 안확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 연합기성회를 발기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오상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보령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상근
오상근은 1883년 10월 8일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4일 정수길,김천봉(金千鳳),서몽조(徐夢祚),임천근(林千根) 등과 함께 선장시장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3월 4일 당일 선장시장에서, 그는 정수길,임천근,서몽조와 함께 시위 군중에게 만세시위를 독려했다. 그리고 김천봉은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오상근은 정수길,서몽조,임천근과 함께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여 선장면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재소 앞에 이르자, 오상근 등은 주재소로 침입하여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오상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