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절공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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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車文節公遺事. 고려말의 유학자이자 충신으로 알려진 차원부(車原頫)의 문적을 조선의 7대왕인 세조가 모으고 이를 1851년(철종 2년)에 간행한 책. 총 2권 1책이며, 현재 차문절공유사 목판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암설원록(雪巖雪寃錄)이라고도 부른다.
고려말의 유학자이자 화가로, 특히 매화를 잘 그려 수많은 매화 그림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 1320~1398)가 고려의 멸망 및 조선의 개국에 대하여 자신의 공신지위 사퇴라는 행위로 소극적인 불만을 알리다가 이를 건방지게 여긴 당시 이방원(훗날 태종)의 명에 의해 송원(松原) 거리에서 자신 및 일가족 80여명 전원이 맞아죽고 관련 작품들도 기록말살형급으로 모조리 소각당했다.
훗날 조선의 4대왕인 세종이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본 후 다른 어리석고 불순한 고려추종 반동인들은 몰라도 차원부만은 억울하게 죽은 면이 있다고 보고 황보인(皇甫仁)에게 명을 내려 그의 신원을 회복하게 하고 시중으로 추증,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하게 하면서 처음으로 복권이 이루어졌다.
이후 조선의 7대왕이 된 세조는 과거 아버지 세종이 복권시켰던 고려시대 충신 차원부라는 인물이 당시 수많은 작품을 남겼던 유명 예술가 및 화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전국에서 찾아본 결과 태종의 손에 의해 이미 그가 자랑하던 매화 그림 및 기타 회화 작품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었다. 하다못해 그가 남긴 일반 문적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모조리 모으게 했으나 이것마저 결국 찾아낸 건 죽기 직전 쓴 유고시 2편 및 기타 작품들을 합쳐 총 10여편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고려 충신이라는 인물의 작품이 고작 이것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아쉬워했지만 결국 이 몇편의 작품들에 후대의 인물들이 차원부의 행적을 예찬하여 지은 글들을 추가하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세조가 차원부의 작품을 모아놓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지속적으로 책이 간행되어 왔다.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 평산에서 간행된 것이 남아있는 기록 중 최초의 것이고, 이후 1768년(영조 44)에 경상도 김천에서, 1781년(정조 5)에 황해도 서흥에서, 1791년(정조 15)에 운각에서 각각 책이 간행되어 왔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851년(철종 2)에 차석주가 편찬한 것이다.
상권은 유고로 시 2수, 설원록(雪寃錄)에 관계된 제공성씨 1편이 있고, 다음에 설원록으로 1455년(세조 1) 하위지(河緯地)가 쓴 서문 1편, 기(記) 1편, 응제시 61수, 끝에 최현(崔睍)의 발문 1편이 실려 있다. 이 중 차문부가 직접 쓴 것은 유고시 2수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권은 세계도·기실(紀實) 각 1편, 부록으로 행장·사실(事實) 각 1편, 추술집록(追述輯錄) 20수, 축문·상량문·봉안제문·상향축문(常享祝文)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후대의 사람들이 차문부를 위해 지은 제사 축문, 제문, 추술록, 행장 등이다.
이 중 설원록은, 차문부가 고려말의 유신(遺臣)으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한 뒤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태종의 군대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뒤에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서 세조가 신원(伸寃)시켜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응제시는 세조의 명에 의하여 신하들이 문절공의 행적을 예찬하여 지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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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車文節公遺事. 고려말의 유학자이자 충신으로 알려진 차원부(車原頫)의 문적을 조선의 7대왕인 세조가 모으고 이를 1851년(철종 2년)에 간행한 책. 총 2권 1책이며, 현재 차문절공유사 목판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설암설원록(雪巖雪寃錄)이라고도 부른다.
고려말의 유학자이자 화가로, 특히 매화를 잘 그려 수많은 매화 그림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 1320~1398)가 고려의 멸망 및 조선의 개국에 대하여 자신의 공신지위 사퇴라는 행위로 소극적인 불만을 알리다가 이를 건방지게 여긴 당시 이방원(훗날 태종)의 명에 의해 송원(松原) 거리에서 자신 및 일가족 80여명 전원이 맞아죽고 관련 작품들도 기록말살형급으로 모조리 소각당했다.
훗날 조선의 4대왕인 세종이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본 후 다른 어리석고 불순한 고려추종 반동인들은 몰라도 차원부만은 억울하게 죽은 면이 있다고 보고 황보인(皇甫仁)에게 명을 내려 그의 신원을 회복하게 하고 시중으로 추증,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하게 하면서 처음으로 복권이 이루어졌다.
이후 조선의 7대왕이 된 세조는 과거 아버지 세종이 복권시켰던 고려시대 충신 차원부라는 인물이 당시 수많은 작품을 남겼던 유명 예술가 및 화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전국에서 찾아본 결과 태종의 손에 의해 이미 그가 자랑하던 매화 그림 및 기타 회화 작품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었다. 하다못해 그가 남긴 일반 문적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모조리 모으게 했으나 이것마저 결국 찾아낸 건 죽기 직전 쓴 유고시 2편 및 기타 작품들을 합쳐 총 10여편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고려 충신이라는 인물의 작품이 고작 이것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아쉬워했지만 결국 이 몇편의 작품들에 후대의 인물들이 차원부의 행적을 예찬하여 지은 글들을 추가하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세조가 차원부의 작품을 모아놓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지속적으로 책이 간행되어 왔다.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 평산에서 간행된 것이 남아있는 기록 중 최초의 것이고, 이후 1768년(영조 44)에 경상도 김천에서, 1781년(정조 5)에 황해도 서흥에서, 1791년(정조 15)에 운각에서 각각 책이 간행되어 왔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851년(철종 2)에 차석주가 편찬한 것이다.
상권은 유고로 시 2수, 설원록(雪寃錄)에 관계된 제공성씨 1편이 있고, 다음에 설원록으로 1455년(세조 1) 하위지(河緯地)가 쓴 서문 1편, 기(記) 1편, 응제시 61수, 끝에 최현(崔睍)의 발문 1편이 실려 있다. 이 중 차문부가 직접 쓴 것은 유고시 2수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권은 세계도·기실(紀實) 각 1편, 부록으로 행장·사실(事實) 각 1편, 추술집록(追述輯錄) 20수, 축문·상량문·봉안제문·상향축문(常享祝文)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후대의 사람들이 차문부를 위해 지은 제사 축문, 제문, 추술록, 행장 등이다.
이 중 설원록은, 차문부가 고려말의 유신(遺臣)으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한 뒤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태종의 군대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뒤에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서 세조가 신원(伸寃)시켜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응제시는 세조의 명에 의하여 신하들이 문절공의 행적을 예찬하여 지은 글이다.
3. 바깥고리
4.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인 차원부(1320~1407)의 유문(遺文)과 관련 기록을 <차문절공유사>라는 이름으로 엮어 1791년에 새긴 목판 53판이다. 중앙기관인 운각(芸閣)관 관련되고 빠진 것이 없이 전체가 보존되어 오고 있어 인쇄사적으로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