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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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22 代》'''
'''祐王 13年~
端宗 1年'''

'''제22대'''
'''1451.10.27~
1453.10.10'''








'''성명'''
황보인(皇甫 仁)
'''본관'''
영천 황보씨
'''출생'''
1387년
'''사망'''
1453년 11월 10일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자'''
사겸(四兼)·춘경(春卿)
'''호'''
지봉(芝峰)
'''시호'''
충정(忠定)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영천(永川). 성이 황에 이름이 보인이 아니고, 황보 씨에 이름은 인이다.
1414년(태종 14)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는 북도 체찰사로서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세종 때에는 고명대신이 되어서 김종서, 정분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문종의 고명을 받아서 단종을 보필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했었기 때문에 고명대신이 없다. 황희의 후임이었던 하연이 퇴임하자 뒤를 이어서 영의정에 올랐다.
한명회가 젊은 시절 황보인은 한명회가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보고 자기 딸을 한명회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한명회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한명회의 종조부 참판 한상덕이 황보인은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니 혼례를 받아들여 부귀를 얻으라고 했으나 한명회는 "처가의 권세에 힘입어 부귀 영화를 바라겠습니까. 이는 저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며 거절한 것이다. 만일 한명회가 황보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한명회는 단종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했을 것이다.
항상 선왕의 유지를 받들려 노력하였고 권력에는 전혀 욕심을 품지 않았고 강직하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자애로워 자신보다 낮은 이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다른 이들의 호감을 많이 샀는데 일례로 계유정난에 휘말려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그 집 여종인 단량이 황보인의 손자[1]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경상북도 포항시 연일현까지 피신하여 평생 숨어 키움으로써 가문의 대를 잇게 되며 이 때문인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있다.
눈치가 빨라 수양대군의 야심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길 힘이 없어 향년 67세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당시의 영의정은 실권이 별로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계유정난이 벌어지기 전까지 안평대군 파가 수양대군 파를 압도하고 있었던 점, 태종이 심온을 사사한 이후 반세기 동안 정승이 참살당하거나 역모죄로 처형되는 일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수양대군에게 허를 찔렸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수백 년이 지난 후 숙종이 다시 벼슬을 올리고 영조가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명회가 이 사람의 사위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황보인이 한명회를 한 번 보고는 '국사'(國士)라고 생각을 해서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도 아닌 한명회의 묘지 비석에서 출토된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은 낮다.
똑같이 단종을 보필하다 살해된 김종서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김종서는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데 비해 이쪽은 그런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6진으로 잘 알려진 김종서는 물론이고 인지도가 낮은 정분도 숭례문과 해미 읍성을 비롯해 각종 저수지와 제방을 건설하는 등의 행적을 남긴 반면 황보인은 딱히 눈 여겨볼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는데 인근이 황보씨의 선산인 듯. 곳곳에 산재한 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크다.

[1] 황보인의 차남 황보흠(皇甫欽)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