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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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7대 국왕.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이다.
2. 생애
세종과 소헌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진평대군, 몇 년 후에는 함평대군이었으나 바로 며칠 뒤에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져서 10년 이상 진양대군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5] 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대군호를 4개나 거쳤는데 이렇게 3번이나 바꾼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형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계유정난을 일으켜 섭정을 맡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인물들을 한명회로 하여금 살생부를 만들어 죽이고 대권을 잡았다. 동복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은 유배를 보내 사사하였고 단종으로부터 선위[6] 를 받아 즉위하였다.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 왕위가 위태로웠는데 조카인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냈다가 살해했다. 13년 동안 재위하다가 병으로 차남 예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지 하루만에 사망하였다.
3. 인물
3.1. 패륜/학살 행위
이 점에서도 같은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와 많이 비교된다.[7][8]
3.1.1. 문종 관련
먼저 형제 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에게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다. 우선 계유정난 때 병조판서 민신을 살해하는데, 이때 살해 당하는 장소가 문종의 무덤인 현릉 비석소[9] 였다. 말이 비석소지 비석소를 보통 무덤 근처에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면, 형의 무덤에서 사람을 죽여버린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인 모욕급 행동이고,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저주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또한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의 친정 일가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문종의 왕릉)에서 파헤쳐 서인(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형인 '''문종과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 데다, 애꿏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짓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이것 때문에 세조가 너무나도 잘난 엄친아 형 문종에게 어릴 적부터 심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으로 이장해버렸다.[10]
3.1.2. 찬탈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책임
게다가 세조는 '''친동복동생(안평대군, 금성대군)까지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 과정, 사육신, 그리고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모의와 관련해서, 세조의 찬탈 행위를 방해 혹은 반대했다는 이유와 단종을 복위시키고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것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왕족이나 비빈은 물론, 신하까지 포함해 엄청난 수를 학살해서 지배층의 시스템을 박살 낸 것은 비판되어야 한다. 더욱이 태종조차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만든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동생 둘의 목숨을 빼앗아버렸다.
자기 기준에서 계유정난때 처리한 '역적'이나 '역모'[11] 가 있었다고 해도 단종은 정통성이 높았으며 오히려 단종을 살해하고 죄없는 왕족이나 비빈, 신하들을 학살해서 지배층의 시스템을 박살낸 인간 백정 따위가 과연 임금의 자격, 아니 사람의 자격이 있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12] 어떻게 이런 인간이 그 세종대왕의 아들인지 저절로 의심하게 될 수 밖에 없는 부분. 그리고 명신인 황보인과 김종서와 대신들을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살해했는데 황보인은 자신이 수령이 있을때 고을에 가뭄이 들자 구휼을 했어도 부족하자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자 며칠 단식하여 기우제를 지내 하늘이 감동해서인지 비가 쏟아져 가뭄이 해갈됐다는 일화가 남길 정도와 그가 억울하게 죽자 여종이 목숨걸고 손자를 구했다는 인망이 높은 명재상중 하나이다.
김종서 또한 청렴결백하고 흠잡을 이유가 없고[13] 북방 개척과 뛰어난 행정능력 고려사 편찬까지 한 아버지 세종이 신임하던 명신들 중 하나이다. 정분 또한 두 사람에 비해 행정능력은 딸리지만 토목사업이나 건축에는 업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을 설계한 공도 있었다. 이러한 명망높은 대신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죽여댔으니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 형 문종도 저승에서 세조가 한 행동을 보면 대노할 정도이고 백성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막장이다.
3.1.3. 서모 살해와 폐서인
이복 동생들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리는 잔학한 면모도 있었고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던 것을 막으려하자 그녀 또한 죽여버렸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잘 아는 대로 친조카인 단종까지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세조인데,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고 벌였다. 성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친동생이자 세조의 조부모님들인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막내 아들인데, 다른 형제들과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막둥이라서 그런지 태종과 원경왕후도 끔찍히 귀여워해서 결혼 후에도 궁궐에서 끼고 살았을 정도다. 병약해서 14살에 죽고 말았는데 죽을 즈음에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이 동생을 살리려고 어의들과 함께 의서를 연구하고 곁에서 밤낮으로 간호할 정도로 세종대왕도 몹시 아꼈던 동생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 안평대군을 자식없이 죽은 동생의 양자로 보낼 정도였는데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성녕대군의 장례식 때 양녕대군은 활 쏘기를 하고 술마시고 놀았고, 참고 참던 아버지 태종조차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했는데, 이 양녕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했다.[14]
한마디로 친족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 없이 태종조차 하길 꺼린 일을 예사로 해댄[15]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서모, 이복 형제에 더해서 동복 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 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16]
3.1.4. 단종 처형 의혹
그리고 세조가 가장 까이는 부분은 단종 관련 문제이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사육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발각되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하다 못해 암군이라고 자주 까이는 인조조차도 전왕 광해군을 죽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데에서 그쳤는데[17] 세조는 친조카를 사사해서 목숨을 거둬놓고 시체 수습도 안하고 방치하는 짓을 저질렀다.[18] 하지만 정작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씨알도 안 먹힐 역사 조작까지 대놓고 해놨다. 훗날 중종 때 노산군(단종)의 묘소 정비를 시작하면서 단종의 최후에 대한 전모가 드러났다. 연산군 시대의 유학자 음애 이자는 음애잡기에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버리는 글을 적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단종을 시해한 뒤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 파 버리는 짓도 벌였다. 바로 '''적장자 단종을 살아있을 때는 문종의 서자로 만들어 버린 뒤 사후에는 서자 아래인 사생아로까지 격하시킨 것.'''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삼촌으로 어린 주성왕을 보필했던 주공단에 비유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보였다. 주공단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당장 칼을 뽑아 달려들었을 듯.[19][20]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가리지 않고 죽인 전적도 있다. 단종의 장인인,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는 단종 복위 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친구'''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큰 건데 송현수 입장에선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날벼락 맞은 격이다.
3.1.5. 태종과의 비교
다른 왕과 비교하자면, 태종은 자기 이복형제는 죽였으나 동복형제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음에도 살려 주었고, 동복형제, 이복형제를 죽인 광해군도 자의는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계모는 죽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연산군마저도 자신의 이복형제를 살려 주었건만, 이 인간은 자신의 서모인 혜빈 양씨, 동복 형제, 이복형제인 영풍군, 자기가 보필해야 마땅한 임금인 조카를 비롯해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일족들을 싸그리 죽여버렸다.
태종이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한 건 맞지만, 단순히 그녀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이장한 건 아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도성 안에 왕실의 묘를 쓸 수 없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묘를 만들 때 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태종 입장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가 신덕왕후의 배겟머리 송사로 인한 잘못된 세자책봉 문제였기에 이방원 입장에서는 명분수립을 위해 그녀를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으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제대로 예우하지 않는 것에 그쳤을 뿐, 묘를 이장한 것도 후궁격으로 완전히 격하시킨 것도 아버지 사후에야 했다. 그리고 형인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 위해 조사의를 시켜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나마 태종을 싫어하던 이들까지 모두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게 했다. 비속 살해 역시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전제하에서는 명백한 패륜이었다. 한마디로 중국의 사마의나 사마사와 사마소와 사마염의 정권 찬탈의 나쁜점을 물려 받았다. 명분도 없는 쿠테타를 일으키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마의와[21]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황제를 폐위한 사마사와 현황제가 맘에 안들고 자기를 죽인다고 백주대낯에 시해하고 그 책임을 부하한테 전가한 사마소와 황제를 협박해 황좌를 찬탈하였지만 명분없는 권력 찬탈과 귀족이나 공신들을 오냐오냐하여 멸망의 씨앗을 남긴 사마염과 매우 흡사하다...
즉 세조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존재는 송두리째 뽑아버린다는 방침 때문이라 단 한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하게 말살을 해버린 것이다.
3.1.6. 원천석 관련 일화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못해 만나러 왔다. 이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시켜 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를 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다 남아 있을까.
3.2. 취약한 공신 관리
'''사실 세조가 실질적으로 욕먹는 이유는 공신인 부하관리 문제이다.''' 세조 본인이 사치나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기록은 없지만 사실 왕 자신부터가 비자금이 두둑했던 만큼 사치나 부정부패를 저지를 이유가 없긴 하다. 다만 세조 자신이 상당히 금욕적인 왕인 건 맞다. 보통 해외의 왕들은 아무리 금욕적인 왕이거나 그런 걸 요구받는 왕들조차 여자를 밝히는 것에는 아무 제약을 받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역사, 즉 조선시대의 왕들과 특히나 세조는 후궁도 매우 적으며[22]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알려진 자식도 딱 2명 뿐이다. 그리고 진짜로 검소한 왕이긴 했다. 술자리가 잦긴 했지만 그래도 흥청망청 하는 건 아니고 직장인들처럼 회식 끝나고 술자리 회식 한번 하는 수준이었을지도. 만일 흥청망청 해댔다면 당연히 후대 기록에서 그게 남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생활의 검소함과는 달리 씀씀이는 결코 검소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가장 문제가 심각한것이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한 것.''' 이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대 지나고나면 회수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실제로 회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세조의 공신들은 조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부패가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명회 같이 비리를 저지른 놈은 관두고 홍윤성같은 조선 희대 사이코패스 인간 백정[23][24] 도 전혀 처벌하지 않았다.[25] 덕분에 세조 11년(1465년)에는 관찰사 김진지가 좌의정(구치관) 이외의 '''모든 당상관(3품 이상)들에게 싸그리 뇌물을 돌리고 받았다''' 걸리는 초대형 비리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도 세조는 준 놈인 김진지만 처벌허고 받은 놈들은 처벌하지 않는 등 공신을 관리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홍윤성 같은 경우 세조시절 '''평안도 군량미 30만석을 혼자서 다 횡령'''하는 미친짓을 벌였는데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다만 이건 세조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 아래에서 나오듯 계유정난은 조선 시대의 성공한 정변들 중 '''명분의 정당성이 가장 빈약한 정변'''이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조의제문 그리고 후대의 김종서와 단종에 대한 동정적인 평가에서 볼 수 있듯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며 아예 이징옥의 난을 시작으로 단종복위운동같이 세조의 찬탈에 반기를 시도가 계속 벌어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말년에는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 참고로 세조시절 처음으로 등용된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세조의 계유정난 소식을 듣자말자 극도로 분노하여 곧바로 조의제문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림들에게도 세조의 정변은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속에서 세조는 공신 집단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들과 자신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신 집단의 우두머리격인 한명회를 쳐낸다? 아무리 세조가 술자리에서 터프한 모습을 보이며 공신들을 쥐락펴락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건 술자리에서 끝나는 일이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온다면 당장 '''세조의 권좌부터 불안해진다.''' 따라서 홍윤성도 양정처럼 대놓고 왕좌를 건드리는 선만 넘지 않으면 넘어가주는 게 공신 집단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유리한 것이다. 실제로 세조가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구체적인 압박을 가한 것은 이시애의 난 진행 과정에서 새로운 공신집단을 양성하려 할 때였다. 사실 기록에서 그들과의 계속된 인생관계를 본다면 세조는 딱히 한명회나 홍윤성을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견제를 하고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나 싶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던지 남이나 구성군 같은 신공신들로 한명회나 신숙주, 권람 같은 구공신들을 견제할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하였고 그탓에 입지가 더 더욱 강화된 구공신들이 권신들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 할 정도로 너무 커져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성종 즉위 이후부터 시작된 '''원상(院相)'''은 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부터 1476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서''' 왕권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원상(院相)
결과적으로 '''세조와 공신들의 대결은 공신들이 성종시절까지에도 상당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공신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과는 굉장히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이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은 세조가 남긴 권신집단들이 자신의 증손자대까지에도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찌되었든 세조의 이런 취약한 공신 관리는 핵심 공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외척 세력들과 공신 세력들의 힘을 최대한 억눌러서 모조리 토사구팽시키고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으로서 태종과 세조의 반정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가 되게 된다.
3.3. 가족
어린 조카인 단종과 안평대군 등 동복동생마저도 경쟁자로 보고 제거했던 패륜 행각에 비해, 본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잘해줬거나 가까웠던 가족들에게는 의외로 잘해줬던 것 같다. 우선 친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겐 매우 극진히 효를 다하였다.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수양대군의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 [26]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세조는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데,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 5남들[27] 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신빈의 장남 계양군, 4남 익현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 외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신빈의 아들들을 극진히 대해줬다.[28] 신빈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
대단한 애처가이기도 했다. 위에 기술했듯 후궁도 둘뿐이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도 "우리 집사람이 말야..."라면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다.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워낙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리기도 했다.[29]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하면서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어떻게 보면 이것만이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여러모로 자신과 상향되는 식으로 대비되는 할아버지인 태종과 비교해서 떳떳하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유일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30]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나름 좋은 아버지였다. 세조의 적장자 의경세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는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 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31][32] 이 점에서는 후손인 영조와도 대조적이다.[33]
3.4. 찬탈의 업보?
3.4.1. 자식의 요절
한편, 문종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식복이 없었는데, 장남 의경세자는 세조가 즉위한지 3년 만에 요절했고, 차남 예종은 즉위 13개월 만에 죽었는데 둘 다 20세를 못 넘기고 모두 요절했다. 장녀인 의숙공주는 향년 35세로 '''그나마''' 남자 형제들에 비하면 오래 살았지만 자식을 두지 못했다. 야사에 존재하는 맏딸 이세희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것. 그리고 손자들도 그리 오래 살지 못했는데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과 성종은 모두 30대에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증손자인 연산군도 폐위당해 30살에 비참하게 병사한다. 그나마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장수했으나 금치산자에 가까울 정도로 바보로 살다가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34] 이후 다른 증손자인 중종은 단종의 장례를 치르어 준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장수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35] 고손자인 인종은 30대에 자식도 못 남기고 요절했고 다른 고손자인 명종은 10대 일때 순회세자라는 아들을 남겼지만 순회세자가 어릴 때 자식도 못 남겨보고 죽어버렸고 이후 명종은 후손이 더 이상 없는 상태에서 30대일때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배다른 조카인 선조한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
게다가 세조 본인의 직계 혈통에만 업보가 적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후술할 내용처럼 방계 혈통 및 세조의 총애를 받은 신하들(특히 계유정난에 가담한 이들) 그리고 세조와 관련된 문화재조차 그 업보가 고스란히 이어졌다.
3.4.2. 방계 자손 및 총애하던 신하들의 몰락
계유정난 당시 자신의 둘째형인 세조의 편을 들었으며 세조가 죽을 때까지 세조를 보좌했던 동생 임영대군은 자신의 아들인 구성군이 다른 구 공신의 견제로 인해 폐서인이 되어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고, 훗날 자신의 9대손인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그로 인해 임영대군의 직계 혈통은 졸지에 역적을 배출한 집안으로 전락하였다. 이인좌의 아내 윤자정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이인좌와 윤자정의 자식들이 유배된 건 덤.
임영대군처럼 계유정난 당시 세조의 편을 들었던 영응대군은 33세에 요절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한명회는 자신의 딸인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36] , 그리고 장순왕후의 유일한 아들 인성대군이 요절[37] 하는 바람에 대대로 외척이 되지 못했고,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정희왕후에게 한 말이 성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대간의 탄핵으로 인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일반 신하로 전락했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생긴 압구정동 사건[38] 으로 직첩이 무효화되는 수모까지 당했을 뿐더러 죽은 후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했다. 한명회의 적장손인 한경기는 여자를 기피하여 평생을 독신으로 산 탓에 결국 봉사손을 들이게 되었다.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에 가담한 권람은 자신의 사위인 남이가 후술할 내용대로 역적이 되는 바람에 자신의 딸과 남이 사이에서 생겨난 자손들이 순조 18년인 1818년에 남이가 복권될 때까지 역적의 자손으로 전락했다.[39]
마찬가지로 계유정난에 가담했으며 황보인과 김종서를 제거하는 데 두루 공을 세웠던 양정은 훗날 세조에게 살아서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종용했다가 그로 인해 세조가 격분하는 바람에 국왕 모독죄로 참수형에 쳐해지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세조 즉위 후 공신이 된 걸로 모자라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계속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홍윤성은 자식을 남기지 못하여 본인의 직계혈통이 단절되었을 뿐더러, 본인의 썩어빠진 인간성 탓인지 자신이 속한 회인 홍씨 가문에서 자신의 봉사손이 되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았던 애첩마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무덤을 방치, 먹튀하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무덤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지금까지 계속 방치되는 중이다. '''현대에 홍윤성 본인의 무덤이 향토 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유정난에 가담하되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에서 전권을 장악한 세조를 정치적으로 지원하여 1등 공신이 되었던 정인지는 갑자사화 때 자신 뿐만 아니라 아내의 묘까지 석물이 철거되고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시신이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증손녀 1명을 제외한 나머지 후손들이 모두 죽어서 손자 대에서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을 뿐더러, 본인의 증손녀가 덕흥대원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며 고생하다가 암군으로 전락하여 현재까지도 신나게 까이고 있다.
계유정난에 가담했으며 사후에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한 또다른 인물로 정창손이 있다.
계유정난에 직접 가담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했지만 마찬가지로 세조의 충신이 되었던 신숙주의 경우 둘째 아들인 신면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여 결국 아버지인 신숙주보다 먼저 죽었으며[40] , 넷째 아들인 신정은 비록 아버지보다 나중에 죽었지만 워낙 탐욕스러워서 자신의 형제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남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왕의 옥새까지 위조하다가 걸려 비참하게 죽었다.[41] 오죽하면 아버지인 신숙주조차 집안 말아먹을 놈이라고 우려했을 정도.[42]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거사에 동참하려 했으나 이내 사육신을 배신하여 몰락시키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질은 자신의 후손인 김자점이 병자호란 때 치명적인 군사적 실책을 저질러 세조의 후손인 인조[43] 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을 뿐더러, 인조 사후 김자점이 조선을 청나라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를 저지르려 하다가 결국 효종에 의해 김자점이 처형되었으며, 김질의 다른 후손들도 김자점 때문에 졸지에 역적 가문의 일원이 되면서 비참하게 몰락하였다.
그리고 상술한 갑자사화를 기점으로 훈구파 중 정난공신파는 완전히 몰락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을 정난공신 또는 구 공신이라고 부르는데, 연산군에 의해 정난공신 집안이 대거 멸족되면서 연산군은 의도치 않게 단종의 원수를 갚은 격이 되었다.
비록 본인은 계유정난과 무관하지만 계유정난에 가담한 권람의 사위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의 경우 세조 사후 예종 때 병조 판서에서 해임되었으며 그로 인해 삐진 나머지 유자광에게 반역에 가까운 언변을 내뱉었다가 결국 유자광의 고발로 인해 거열형에 처해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3.4.3. 세조와 관련된 문화재들의 비참한 상황
세조의 왕명으로 세워졌던 원각사는 연산군에 의해 기방이 되어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가 이후 중종 때 아예 철거되었다. 홀로 남은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데다가 산성비로 인한 부식 문제 때문에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세조를 마을신으로 모셨던 사당인 신수동 복개당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 세조와 관련된 설화로 유명한 보은 속리 정이품송은 1993년에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진 이후부터 급격하게 나무의 생기가 쇠락하였다.
3.4.4. 관련 설화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설화지만 조선 왕들의 장자들 중에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과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 왕들의 장자들은 모두 세조 때문에 수난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설화도 있다. 세종의 장자 문종은 세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고 문종의 장자 단종은 세조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이러한 세조의 패륜 행위 때문에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는 세조의 아들이라서 세조가 지은 죄 때문에 업보를 받아서 일찍 요절했다는 얘기가 있고 의경세자가 요절한 다음에 일어난 왕의 장자들의 수난 또한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후손이니까 세조가 지은 죄에 대한 업보를 받아서 수난을 겪은 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44]
3.4.5. 당시 백성들의 인식
당시 백성들은 어린 나이에 시해당한 단종에 대한 연민과 계유정난(세조의 반정) 공신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세조를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계유정난의 공신 중에는 권력을 이용한 재산강탈이나 기타 만행을 서슴지 않는 자가 더러 있었고, 홍윤성과 같은 살인마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사회 전반에는 세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더니 그 자리에 욕창이 생겼다는 것과, 단종이 죽자 분노한 현덕왕후의 귀신이 의경세자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있다.(실제로 의경세자는 단종 이전에 사망한다.)
그 외에도 의경세자의 죽음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어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소문이 나도는 등 세조 치세 동안 달갑지 않은 소문이 쌓여만 갔다. 해당 소문의 경우 세조가 현덕왕후의 시신을 능에서 파내어 물난리가 나는 곳에 이장해 버렸던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3.4.6. 성종 시기의 영향
세조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은 수십년 뒤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낸다. 성종때 사관인 김일손이 위에서 언급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닷가에 버렸다', '세조 자신의 아들인 덕종의 후궁 권 귀인을 세조가 찝적댔다', '사육신의 난 직후 세조가 신숙주를 통해 사육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역으로 면박을 줬다'는 소문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아울러 김일손은 세조실록의 공식기록엔 '단종은 자결했고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러줬다'고 조작해놨지만 중종 때까지는 소문이어야 했던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 후 짐승이 뜯어먹게 방치했고 이후 어느 사람(고을향리 엄흥도)이 몰래 묻어 주었다.'라는 기록까지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성종실록 집필과정에서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일손의 스승이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무오사화라는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버렸다. 다만 이는 김일손의 병크로 무오사화를 보면 알겠지만 명백한 김일손의 잘못이다.
정통성이 있었던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 때문에, 이후 조선은 '반정'이라는 이름 하에 끊임없이 왕위 찬탈에 시달렸고, 수많은 왕족들이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게다가 두 번은 성공했다. 물론 첫 번째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막장이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반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러 실책으로 도덕적이지는 않은 임금이긴 했다. 하지만 세조는 유교를 기반으로 하던 조선의 기반을 뿌리째 뒤집어 놓았다는 평을 피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무오사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세조에게 있기도 했고.
3.4.7. 불교 관련
다만 불교 쪽에서는 숭불 정책 때문인지 세조에게 긍정적인 야사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등에 종기가 난 세조가 온천을 찾아가 어떤 동자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한 후 동자에게 "내가 왕이니 등을 밀어줬다는 것을 비밀로 해라."라고 하니 그 동자도 "당신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줬다고 알리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해 사라져버렸고 깜짝 놀란 세조가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겨 상원사에 맡겼다던지, 불당에 절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자객을 알려줘서 그 보답으로 상원사에 양묘전을 내렸다던지, 속리산 법주사로 갈 때 가마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다 준 소나무가 기특하다며 '''정2품'''의 품계를 내려줬다던지 하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 야사도 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의 야사들이 보여주는 세조의 나쁜 면모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세조의 후원을 받는 불교로서는 이런 인식을 좋든 싫든 널리 퍼뜨려야만 했을 것이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은 이 설화들이 세조와 한명회의 사주를 받고 연출한 프로파간다라는 설정으로 만들어졌다.
또다른 야사에서는 라이벌 김종서와 엮어서 '''(현덕왕후의 저주로 생긴)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갔더니 거기의 아낙네가 사실 아버지를 비난하다 궁을 떠나버린 세조의 딸이었던데다 그 남편이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김종서의 손자였더라"''' 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야사의 끝에 따르면 세조는 그 사실을 알고 너그러워져서 자신이 죽인 김종서에 대한 속죄 같은 의미로 그 김종서의 손자를 정식으로 부마로 맞으려고 했지만, 딸 부부는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이 야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주의 남자다.
3.4.8. 기타
어쨌든, 많은 야사에 등장하는 임금이기도 한데 그 야사의 대부분이 그의 왕위찬탈과 그로써 비롯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위의 문수보살 이야기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내용도 조금 남아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의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를 다룬 내용이며, 그 중에는 정축지변 전설처럼 그의 추악한 인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그나마도 고양이 일화도 보면 "왜 자객이 세조를 암살하려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일단 세조 개인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있다는 반증이 되어버린다. 원인은 조선의 대부분의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들이 권력 쟁취를 이유로 하는데 비해 자객이 직접 세조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대목과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부분을 보면 자객은 결코 권력욕으로 세조를 죽이려던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럼 권력욕이 아니라면 실패하면 사지가 뜯겨 죽을 일을 왜 하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걸 씹어먹을 정도로 세조를 증오하기 때문.
3.5. 종합
3.5.1. 서론
조카와 형을 저버린 것에 앞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조선 전기의 번영에 암운을 드리웠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세조의 정치력은 유능했고 국정도 준수히 다스렸기에 세조가 암군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 이야기가 오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법제를 정비하고 체제를 확립한 것과 더불어 여러가지 치적들도 상당하기에 세조를 무조건 암군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후세에 각종 폐단을 야기시킨 세조를 명군이라고 볼 수도 없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여 태생부터 정치적 정당성이 결여되었으며, 공과가 분명하여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점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와도 유사한 부분이다. 실제로도 세조와 박정희를 비교 분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3.5.2. 공신 권력의 비대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으로 인해 훗날 훈구파라고 명명되는 공신 집단을 창출한 것이나 집현전을 폐지하여 건전한 관학파를 양성하는 인재 집합소를 스스로 없애버린 점이 당대에는 자신의 멋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 집현전이 활성화 된 것은 어디까지나 세종 시절 한정으로 문종 대만 되어도 활력이 떨어졌다지만, 그렇다고 이걸 아주 없애버린다? 성종 대에 사실상 집현전의 부활 개념으로 설치한 홍문관이 결국 언론 삼사 중 하나로 머문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관학파 육성이란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세종 대에 육성된 인재들을 세조가 대거 도륙냄으로써 인재풀을 일거에 박살내버렸고, 결국 이것이 그나마 있는 능력있는 공신들을 숙청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된다.[45]
만약 훈구파가 한명회가 딸들의 요절로 인해 대대로 외척이 되지 못한 일, 갑자사화로 인한 정난공신파의 몰락, 사림파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일 같이 실제로 자신들이 휘말렸던 격변을 하나도 경험하지 않고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언젠가 모종의 이유로 같은 훈구파끼리의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구 공신과 신 공신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닫거나 어느 훈구파 가문의 공신전 상속 과정에서 어떤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 그 가문 내에서 공신전 상속권을 두고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등)[46]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이 마치 일본의 전국시대처럼 군주가 폐위되는 일만 없을 뿐 군주의 권력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훈구파에 속한 가문들이 사실상 군벌화되어 서로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상술한 것처럼 세조가 공신전을 남발하고 그 공신전이 중세 유럽 영주나 일본 다이묘의 영지와도 비슷한 성격으로 변질되었으니, 훈구파가 앞서 말한 격변을 하나도 겪지 않고 실제 역사보다 더 오래 승승장구했다면 훈구파가 충분히 군벌화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3.5.3. 성종 시기
그리고 결국 손자 성종 대에 훈구 세력의 건재와 사림의 정계 진출로 인해서 도리어 왕권을 약화시킨 격이 되고 말았다. 특히, 관학의 훈구화가 진행된 것은 공신을 주로 등용했던 세조 때라는 견해도 있다. 왕권 강화를 찬탈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오히려 세조 스스로가 결국에는 카리스마가 없는 후대 왕권을 약화시킨 것이다. 또 할아버지 태종은 숱한 대간들의 공격을 받으며 불같이 화를 낸 적도 더러 있었으나 사냥 나갈 때조차 그들을 동행하며 언론 활동을 '''권장'''한데 반해, 세조는 대간들의 언론 활동을 '''탄압'''해서 유교 정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점도 세조의 평가를 크게 떨어뜨린다.
이 왕권 약화가 두드러지는 대표적 예가 성종의 즉위인데, 원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이 있음에도 성종이 즉위한 것은 그가 권신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명백한 왕위계승자인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차기 왕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권신에게 휘둘린 것이다. 한마디로 권신의 뜻에 따라 다음 왕이 바뀌는 이상한 사태가 생겨버린 것이다.[47] 세조 본인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라는 사례와 이러한 왕권 추락의 세태로 초래된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이후 대부분의 조선의 왕들은 대체적으로 백성들을 돌보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 보전 및 일신의 안위만을 살피는 경향이 강해졌다.
3.5.4. 군사적 실책
또한, 군사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군사 면에서 실책 역시 벌이고 마는데 형 문종이 화차를 개발하는 등의 조선 전기까지의 무기 체계 발전을 약화시킨 것도 바로 세조다. 총통위의 폐지로 화포 개발이 약화된 것은 물론 세조 때 조선군의 인사 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운용이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조선군의 화력 뿐만 아니라 백병전 능력까지 떨어뜨려 버린 셈이다. 다만 화력은 당대 여러 기록들이나 군사 무기 분야 편제를 봐서 당시까지는 그렇게까진 멸시되진 않은 듯 하다. 그러나 백병전 능력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근접 전투 기술 자체가 거의 실전되어버리고 명군이 주력이 되어야 했다.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48]
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거기다가 세조는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급을 날려버리는 실책도 저질렀다.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던 갑사가 부사관과 비슷한 군 계급이었는데 세조가 오위 도총부를 만들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사실상 없게 되었다. 말단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할 부사관이 없으니 전투 시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되는 건 당연하다. 초급 군관이 있지만[49] 무관을 많이 뽑지 않다보니 말단 부대를 다 통제하기엔 수가 부족했다. 부사관이 군대의 허리나 마찬가지인 점을 고려하면 조선군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당장 해외의 라인 배틀 영화와 한국의 조선 시대 배경 영화를 비교해보면 외국 영화는 장군은 뒷편에 앉아서 지휘를 하고 북소리나 신호를 받은 부사관들이 2차적으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조선군은 장군이 최일선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과장이 좀 많이 보태졌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총탄에 맞은 이유도 쓰러진 하급 무관을 대신해서 북을 치다가 맞았다는 설이 괜히 받아들여지고 있는게 아니다.
3.5.5. 보법 관련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법이다. 이전에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50] 가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각 가구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었다. 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다가 1명당 2정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 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는 있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이전에는 가계 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 부담이, 세조의 보법 이후로는 일률적으로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데다 이전보다 부담 자체도 커져서 보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되어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졌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고려 시대에 비유해 보면 군인에게 지급되는 군인전이 복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군역의 폐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보법을 계기로 군인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점에서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층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3.5.6. 군사적 실책에 대한 보충
다만 세조 시절은 조선의 군사들 중 '''활을 잘 쏘는 병졸이 무려 30만'''이나 되었던데다가 '''정예는 10만'''에 '''용맹한 군사는 3만'''[51] 이라고 양성지가 말하는 기록이 있어서 세조 시절은 조선의 국력이 가장 강할때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선대 왕인 태종 ~ 문종때 역시 조선의 국력이 가장 강할때였으며 '''태종 ~ 문종 때 역시 군사가 30만 이상'''이었는데다가 또한 세조 때 조선의 국력이 강할 수 있었던 것도 선대 왕들의 군사적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52] 거기다가 양성지가 말했던 저 기록이 사실은 세조의 궁기병 위주의 국방정책을 비판하기위해 세조를 돌려 까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는데다가 훗날 조선군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상당수를 세조의 군제 개악이 제공했으므로 세조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세조 역시도 지금 군적에 올라온 병력은 무려 40만이 넘는데 그 중 쓸만한 병사는 채 10만도 되지 않는다며 본인 스스로도 답답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3.5.7. 총평
총평하자면, 나름의 능력이나 업적은 있지만 자신이 찬탈 과정 속에서 단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같은 주요 왕족들을 목숨을 잃게 하는 개인적인 패륜 행각을 저지른 것뿐 아니라 반대되는 왕족들은 물론, 비빈들과 신하들까지 학살하는 전형적인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는 등 전형적인 폭군의 행적을 보였으며, 자신에 대한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귀에 거슬리는 쓴소리를 싫어했다. 다행스럽게도 신하들은 세종이 키워온 유능한 인재였기 때문에 조선이 난세로 가는 길을 막았으며, 성종 시기때는 세종 시기 못지않게 조선의 번영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폭정과 이후 왕들의 실정때문에 '''직접 선대 왕이 남겨놓은 업적을 죄다 개판으로 망쳐놓아 훗날 조선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찬탈자라는 오명과 함께 임금으로서의 그의 평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3.5.8. 군사정권 미화 용도
'오명을 감수한 구국의 결단자'란 식의 평가는 세조 즉위 이후 김동인의 대수양 같은 평가의 흔적이긴 한데, 쿠데타 미화를 위해 군사정권기에 연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사실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게 사실이라 민주화 이후에도 세조 미화 사극이 종종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53] 이 실록들은 편찬 주체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실록이다. 이는 '덮어놓고 그냥 믿지 말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정황은 없는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른 기록과 정황증거들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록의 기록은 한 기록만 뚝 떼어놓고 봐서는 안 되고 다른 관련 기사들과 함께 비교 분석하면서 읽어야 한다.
3.5.9. 정통성 문제
특히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이 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 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 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 역모 → 숙청' 루트일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54]
심지어는 '''사관이 있었을 리가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록을 배제하면 남는 기록이 없으므로 역사 인물 세조의 평가는 근거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다음은 '''추측과 예상''' 등이 이를 메워야하는 지난한 과정. 이걸 메우는 과정에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다면 흔히 동원되는 것이 야사나 소설 등의 또 다른 편견들이다.
3.5.10. 성격
한편으로는 세조의 성격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데 바로 단종 실록의 계유정난 부분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5.18 당시의 전두환이 빗댔을 정도인데 단종실록을 100% 신뢰하고 세조의 행적을 보자면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에 맞추기 위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도 해댔다.[55] 일개 개인의 추측이지만 스스로 과시욕이나 허영심 혹은 영웅주의적인 사고관이 있지 않았을까 추론할 수 있다.
간단히 꼬집어 보면 세조의 집권과정은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시대를 스스로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마치 자신이 문제를 해결한 영웅인 양 떠들어댄 것이다. 만일 어린 임금 그 자체가 문제라면 세조 다음 다음의 성종도 문제가 있는 시대고 그 외에도 보면[56] 명종, 순조, 헌종, 고종[57] 등이 있었다.
단종은 그대로 쿠데타 없이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으면 할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정치를 했을 인물이었다. 또한 어린 임금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수렴청정할 사람이 없는 문제도 내세울 수 없는 게 그렇다면 '''세조가 실권을 장악하고 왕위는 노리지 않는 선에서 그쳐야 했다. 여기에 단종이 성인이 되면 물러나야 했는건 덤.''' 어찌 보면 스스로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세종 시절부터 은근히 야심을 보였으니... 문제는 시대는 그런 걸 원하는 시대도 아닌데 우격다짐으로 해버린 것. 그 결과 원하는 왕위를 얻긴 했지만 후세의 비난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 비슷한 사람들
일단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등장하는 항우가 있다. 항우는 황제가 되기 위해 조카인 의제를 살해했는데, 조카까지 살해하면서 황제에 올랐음에도 정치력이 엉망이라 유방에게 패배하고 자살해버린다.
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악한 숙부'의 대표적인 임금으로 유명세가 높지만 그의 선배격으로 신라 헌덕왕이 있다. 이 쪽은 더한게 크게 뚜렷한 업적도 없고 자연 재해와 기근에 속수무책이었을 뿐더러 그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상황에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는 막장 행각을 벌였다. 근친살해 빼면 세조의 완벽한 하위호환.
그리고 고려의 숙종이 있다. 고려의 숙종과 비슷한 점이 특히 많다. '''수명도 52세'''였고, 후계자가 둘 다 '''예종'''이다.[58] 또한 이웃 명나라의 영락제와도 상당한 유사한 면목을 보여주는 인물. 영락제가 환관을 중용해서 폐단이 커졌다면, 세조는 공신을 중용해서 폐단이 커졌다. 세조에게는 그를 '나으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성삼문이 있었고 영락제에게는 '연적찬위'[59] 라는 말을 남긴 방효유가 있었다는 것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나름 명나라의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업적이 많았던 영락제와 달리 세조는 오히려 그것에 도움이 안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평가가 더욱 내려간다. 게다가 영락제는 명나라 전성기의 군주였으니. 더군다나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가 명나라의 번왕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자 이를 명분삼아 쿠데타를 일으킨 거라 쿠데타 명분에 있어서는 세조보다 훨씬 충분했다.
조선의 세조가 당태종을 존경했지만 인물 관리 면에서 많이 다르다. 당태종은 능력이 좋으면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일지라도 살려줬지만 세조 치하에서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세종대왕때의 브레인'''들은 거의 다 제거돼 정인지, 신숙주, 양성지 등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당태종과 세조의 정통성과 쿠데타의 명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무문의 변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세민은 이민족 정벌과 국가 안정화 과정에서 쌓은 수많은 공으로 인해 태자 이건성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의 정적이 되었으며, 태자 이건성 역시 넷째 동생 이원길과 연합하여 이세민을 정치적으로 마구 몰아붙였다. 게다가 이원길은 실질적으로 이세민을 암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세민 역시 형을 치고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명분이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이세민은 당태종으로 즉위한 후에도 반대파까지 흡수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는 당시 단종이 왕실 최고 어른이라는 뒷배경만 없었을 뿐 고명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정치를 잘 해 나갔으며, 문제시 되던 황표정치 역시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쯤에는 단종이 성년이 가까워왔기 때문에 사라진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권력에 눈이 먼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연합하여 단종을 끌어내리려 했다는 명분은 당시 안평대군의 나이나 정치적 식견 등을 생각해보면 권력에 눈이 멀었다는 대신들이 할 만한 짓이 절대 아니었다. 즉, 자신을 먼저 위협해오고 실제로 암살시도까지 해오는 정적을 제거한다는 명분과 뛰어난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던 당태종은 반대파라도 자신이 원하면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지만, 쿠데타의 정통성조차도 부족하고 스스로 내 건 명분조차도 억지에 불과했던 세조는 쿠데타 성공 후에도 왕권이 불안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계유정난으로 아버지인 세조가 즉위하면서 형성된 구 공신과 이시애의 난 이후에 형성된 신 공신을 견제하고 당시 지지부진해질 수 있었던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강행하는 등 나름 왕으로서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매국행위를 일체 저지르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리처드 3세의 경우 형 에드워드 4세가 죽은 후, 아직 어렸던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호국관)이 되었으나, 조카들을 사생아로 몰고 런던탑에 가두어 죽이고 찬탈. 시기도 유사하다. 1452년 10월 2일 생. 쿠데타의 명분이 부족했던 점도 세조와 비슷하다.
흔히, 라이온 킹의 스카에 비유되기도 한다. 또한 먼치킨 아버지에 재능이 있는 형제들이 있었던 점, 신하들 함부로 대하는 거나, 우애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낸 인물이라거나, 나름대로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자뻑이 꽤 심했다는 점 등에서 여러 가지로 삼국지의 조비와도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묘호'''까지도 똑같다.[60]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마에고르 1세와도 비슷한데 마찬가지로 먼치킨 국왕의 차남이었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뒤 끝내는 죽였으며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이 비슷하다.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하였다는 점에서는 대한민국의 5대 ~ 9대 대통령인 박정희와 11대 ~ 12대 대통령인 전두환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5. 태종과의 비교
세조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과 정말 많이 닮았다. 자신의 반대파의 거두를 죽이고, 혈육들은 죽이고 전대 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에도 능통한 능력자란 점이고 강력한 왕권확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조는 태종의 격세유전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능력은 대폭 너프되고 폭력성과 잔혹성만 잔뜩 버프된, 태종의 열화판'''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5.1. 쿠데타의 명분의 차이
우선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항거한 이유는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다. 조선 왕국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후계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통성임에도 태조 이성계는 '''정실부인 소생들인''' 태종의 첫째 형인 진안대군도 둘째형 정종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막내 아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린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도 유일한 적통이라는 식의 정통성이 있다면 이 책봉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이복형들도 정실 부인의 소생들(적통)이라 이방석은 유교 왕국 조선에서 보더라도 태종의 두번째 정실인 신덕왕후의 차남이라 정통성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고 태조 이성계의 일방적인 독단으로 세자에 책봉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가졌던 이방원이 크게 반발한 것.
반면 세조는 나이는 어리나 정당하고도 확고한 왕위 계승 자격[61] 을 가진 조카 단종을 강압적으로 몰아내고 개인의 욕망 만으로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전혀 없는 찬탈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세조 사후 시간이 흘러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에 즉위한 후에도 세조의 찬탈에 대해 조선에서 계속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거기에 태종은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벌였던 동복형제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편법까지 동원하였고, 숙청한 정적 정도전도 정도전의 자녀와 아우들도 살려주고 나중에 벼슬길도 다시 열어주는 관대함을 보였지만, 세조는 동복형제부터 본보기로 죽였으며 이미 죽은 형의 묘까지 능욕했다. 똑같은 패륜이라고 보더라도,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
시중에 발간된 어떤 책에서는 태종과 비교하며 수양을 변호하기도 하지만(마치 수양이 억울하다는 듯이 "누가하면 결단이고 누가 하면 패륜이야!" 하고 눈물을 흘리는 삽화까지 첨가하면서) 애시당초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의 정통성의 유무부터, 권력을 잡은 이후의 행보까지 도저히 태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패륜과 무능의 극치를 보인다.[62] 심지어 그 책에서는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양은 양위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단종이 지레 겁먹어서 양위를 했다고 하는 말까지 하며 수양을 변호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양위 이전에 수양이 여러 관직을 독식하여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금성대군, 혜빈 양씨를 유배 보내는 등 “네가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미 권력을 다 빼앗은 다음에도 계속 이와 같은 압박을 하면서 양위 받을 생각은 없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는, 다른 선위의 예와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해 보아도, 태조가 양위를 받는 부분과 비교해 보면, 태조는 3일 동안 왕위를 사양한 반면[63] , 수양은 거의 덥썩 받는 수준으로 당일 바로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두마디 사양이야 하고 있지만, 이 상황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는 한, 수양이 왕위를 받을 마음이 정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5.2. 왕으로서의 그릇의 차이
태종은 이후 왕이 되면서도 조선의 기반을 단단히 쌓는데 밑거름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우선 왕권 강화를 위해 자기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권력 남용이 발생하자 민씨 가문을 싸그리 쓸어버렸고, 세종이 즉위하자 아무 죄 없는 세종의 장인 심온까지도 누명을 씌워 숙청할 정도였다. 물론 이는 도덕적으로는 큰 비판을 받아도 할 말 없지만, 후에 세종과 문종이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 큰 이바지가 된다. 하지만 세조는 한명회와 사돈까지 맺어가며 공신들을 방치하고 큰 권력을 줘서 훗날 후대에 훈구 세력이 형성이 되어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종은 대신들의 횡포와 부패를 견제할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관을 싫어함에도 사관의 권한을 인정하고 대신들이 사관을 압박하는 것을 막아준 임금이 바로 태종이다'''. '(태종 본인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걸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발언을 그대로 사관이 실록에 남긴 유명한 사례도 바로 태종 시기의 일이다.[64] 반면 '''사관의 활동이 가장 위축된 시기가 바로 세조'''이다. 찬탈 이후 조선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 전혀 없었을을 알 수 있다. 세조만 눈치 보면 나머진 꺼릴게 없었던 훈구파 권신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조 사후 예종을 거쳐 성종조차도 왕위 서열에서 밑이었음에도 장인어른이 한명회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신들의 인사 정책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태종은 공신들을 숙청하는데 공신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미풍양속에 해를 끼치거나 국법을 어겼을 때 쫓아내거나 벌을 주거나 신상필벌을 철저히 하였다.[65] 그래서 아들과 손자인 세종과 문종에게 강력한 왕권을 부여할 수 있었고 공신들도 함부로 전횡을 부릴 수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이 죄를 범하였어도 홍윤성의 예를 보듯, 너무 오냐오냐하게 관대하여 신상필벌을 흐지부지하게 하여 그들의 전횡을 묵과하여 백성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다. 손자인 성종과 증손자인 연산군에게 나쁜 유산을 남겨 훈구의 성립과 왕권약화라는 부작용이 생겼다.
태종은 왕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반면 세조는 전혀 그런 모습도 없었고 아예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정책적으로도 위에서 설명하였듯 선대의 업적을 큰 비전 없이 다 없애버리는 등 장기적 안목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기도 한다. 세조의 잘못들이 그 즉시 크게 문제가 터지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어 여러왕을 거치며 오랜 기간을 지나는 동안 그게 크게 악화된다는 것. 조선 전기 암운의 근원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
아무튼 비슷하게 잔혹한 숙청을 통해 집권하였음에도 이러한 이유로 태종은 폭군 논란이 없는 반면 세조는 이에 대하여 의견이 갈린다.
6. 평가
나름대로 조선 초기 때 치적을 세웠다는 평가도 있지만 끝내 그의 냉혹하고 패륜적인 모습 및 정치적인 과오와 실책들 때문에 고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공신들 대부분을 숙청하여 후대에도 강한 왕권을 지속적으로 물려준 할아버지 태종과 달리 공신들과 훈구파를 너무 비대하게 키워 공신들을 권신 집단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로 인해 후대에 왕권 약화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크게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부민고소금지법의 폐지 등 업적이 일부 있기도 하다. 물론 전폐 같은 완전히 실패한 정책들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한명회의 살생부 작성에 따라 척살한 후 조카 단종에게서 사실상 권력을 빼앗고 이후 '양위'(사실상 찬탈[66] )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도 모자라 단종 복위를 노리던 사육신과 친동생 안평대군, 친동생 금성대군 등을 피도 눈물도 없이 사사하고 마지막에는 조카 단종마저 제거한 냉혈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1468년 지병으로 앓던 악성 피부병(한센병) 때문에 향년 52세에 병사했는데 조카나 형수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조선 왕조의 기반 틀을 마무리한 군주. 평가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폭군, 패륜아에서 왕권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라는 평가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폭군 꼬리표를 떼려면 치세나 업적이 저런 행적을 무마할 정도로 출중해야 하는데 세조의 치세는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훌륭했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재평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실 정통성은 조카였던 단종이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여서 그렇지, 세조 역시 단종만큼은 아니어도 정통성은 충분했으나[67] 정통성을 쿠데타로 다 날려먹은 왕이다.[68] 그런 단종을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세조의 정통성에 대한 평가
- 태종은 무인정사로 태조를 몰아내고 즉위했지만 형제들 중 가장 공로가 컸기에 명분이 충분했다.
무인정사의 명분이 장자계승이었기 때문에 공로만으로 명분이 충분치 않았다. 정종이 적자를 보지 못했고 회안대군이 섣불리 나서 정통성을 잃었기에 별 문제 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 성종은 친형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자 제안대군을 제치고 예종의 뒤를 이었지만 정희왕후가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또한 제안대군은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함으로써 왕위와 멀어졌고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여 정통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세조의 적장손이자 덕종의 적장자 월산대군의 정통성은 성종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희왕후의 지명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정통성 문제는 두고두고 성종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에 성종은 세종과 두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전례대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배척하거나 귀양보내고 그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을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아끼고 잘 대해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 정통성 문제도 점차 누그러지게 되었다.[69]
- 세조는 장자계승은 어겼지만 적자이자 차남이기 때문에 넘어갈 만하다. 적자>서자, 장자>차자>...라는, 즉 적장자와 그 자손 부재 시 적자이자 차남인 게 정통성으로 작용한다는 것 자체가 장자계승의 논리이다. 단종을 명분 없이 내쳐 장자계승을 어겼지만 장자계승을 통해 명분을 얻었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다.
- 인조는 반정으로 공을 세워 즉위하였지만 선조의 서자이자 다섯째 정원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장자, 적자계승을 모두 어겼기 때문에 조선 왕 중 가장 정통성이 부족하다. 또한 선조의 양자로 즉위해 놓고선 친부를 원종으로 추존해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인조의 정통성이 저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이후 왕들이 전부 인조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쿠데타의 명분도 세조에 비해 훨씬 충분했다. 정원군의 동복형 의안군과 신성군은 후사 없이 선조 치세에 요절했고 영창대군은 광해군에게 살해당했다. 게다가 신성군은 세자 후보이기도 했었고 반정 당시 인조의 공로와 명분이 확실했기에 정원군의 혈통이 인조에게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고 명의 책봉을 받은 이후 인조의 정통성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한다는 것은 선조-원종-인조의 대통을 이음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고 추존할 명분이 취약해 크게 비난받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통성을 내치는 짓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후대의 사림파들의 평가로는 세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정통성의 문제는 세조 본인에게도 문제였겠지만, 이후의 국왕들에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으면서 조선의 왕권을 취약하게 만들고 신권이 폭주하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점이 꽤 두드러지는게 현대의 평가로, 재미있는 점은 정권이나 정파에 따라서 세조를 보는 관점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보면 세조와 비슷한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 5.16 군사쿠데타, 12.12 군사 반란 등으로 집권한 정권이 있던 시절엔 잔혹한 숙청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권신들로부터 조선의 왕실을 지켜낸 필요악적인 존재라는 평가를 장기간 받기도 했'''었'''다.
똑같이 쿠데타(반정)로 왕이 됐으며 자기 아들을 독살했던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은 인조는 왜 군사정권이 미화하지 않았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인조의 경우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이라는 최악의 흑역사 때문에 군사정권조차도 차마 미화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70] 외세에게 허무하게 굴복한 왕을 롤모델로 삼는 건 합법적으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쿠데타의 명분은 세조보다 인조가 훨씬 충분했다는 거지만... 그리고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 대다수가 계유정난을 정당화하면서 정작 세조의 진짜 업적들을 다루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설령 다루더라도 내레이션으로 때우는 등 매우 짧고 간략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쩌면 군사정권의 세조 미화가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남긴 진짜 업적들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계유정난 자체를 세조의 최대 업적으로 여기는 식이었기에 세조를 미화한 사극들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허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 이후부턴 반대로 평가가 꽤 박해지기 시작했는데,[71] 조금씩 그의 정변에 명분 없다는 인식이 많이 퍼지기 시작하며 정변 관련 "구국의 결단"과 같은 이미지는 많이 사라진 편이었지만 90년대까지는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세조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은 건 아니었으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2000년대부터는 세조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많이 퍼졌다. 더욱이 2010년대 들어서는 정변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능력적인 부분에서도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는 평가가 대중들에게 많이 퍼졌다.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아예 '군사 정권에 의해 거품만 잔뜩 낀, 정통성 없고 업적, 인간성도 제로인 암군' 정도로 급격히 격하되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 군사정권시절 고평가의 반발로 과도하게 까이는 감도 있지만 그래도 이전에는 "잔혹한 숙청과 그에 대한 정당성" 정도의 인식에 사람들이 머물렀던 반면 현재는 좀 더 복합적으로 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의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은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72] 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선 차장자인 형 이방과를 왕으로 앉힌 후에 정당한 세자책봉을 통해 집권하면서[73] 집권의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단종의 문제는 어렸다는 것[74] 과 가장 완벽한 후견인이 돼 줄 수 있는 대비나 왕대비가 따로 없었다는 것[75] 이다. 김종서, 황보인 등이 후원자가 돼 주긴 했지만 왕실의 큰어른인 대비나 대왕대비에 비하자면... 세조는 김종서가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는데[76] ,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나 왕대비를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쉽게도 종친들, 단종의 큰할아버지인 양녕대군까지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바람에 뭉그러지고 말았지만... 사실 대비가 존재하였다면 양녕대군 따위가 설칠 일이 아니였으나,[77] 단종의 생모는 단종을 낳고 사망했고, 조모인 소헌왕후가 사망하고 몇해 지나지 않아서 세종이 붕어하였는데, 아비가 왕비를 세우지도 않고 사망하면서 양녕대군, 수양대군이 설칠 수 있었다. 대비가 있어서 대리청정을 하였다면 수양대군이 간신 척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리청정할 사람이 없어서 대신들과 종친들이 정사를 농단하였는데, 이를 제어할 군주는 연소하여 조절할 수 없었다.
7. 세조의 능
[78]
세조의 묘인 광릉은 '''우리나라 최초의 회곽묘'''로 한국 묘제사 및 고고학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조의 능제 형식은 이후 민간으로 퍼지면서 안정나씨 묘 출토 편지,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이응태 묘 출토 편지 등 다양한 한국의 부장 문화재가 땅 밑에서 썩지 않고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79] 자세한 내용은 광릉 문서 참조.
8. 어진
9. 어필
10. 가계
- 왕비: 정희왕후 윤씨
- 후궁: 근빈 박씨
- 아들: 덕원군(1449년 3월 6일 ~ 1498년 7월 22일)
- 아들: 창원군(1458년 ~ 1484년 8월 16일)
- 후궁: 소용 박덕중(朴德中)- 폐출
- 아들: 이아지(1459년 ~ 1465년 9월 5일)[81]
11. 대중매체에서
12. 기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낙마도 굉장히 많이 한 왕이란다. # 웃긴 건 낙마할 때마다 바로 벌떡 일어나 아픔을 참고 멀쩡한 척 말을 집어탔다. 사실 낙마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잘못해서 목이 부러지면 죽을 수도 있고[82] , 운이 좋아 크게 안 다쳐도 삐거나 멍들 각오는 해야 하는 터라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건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의 스승이었던 이수 같은 경우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즉 당시 낙마는 현대의 자동차 교통사고와 같은 큰 사고였다. 이외에도 날조, 과장된 측면이 있긴 한데 자기과시의 사례가 몇 가지 기록되어있다.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세조를 직접 '폐하'라 호칭하며 조공 서한을 보내는 등 당대 일본과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에 성종 시절에도 일본에서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러준 것을 보면 세조 시절부터 형성된 우호적인 양국 관계가 세조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이번 길에 세조가 그 용맹을 보이려고 일부러 노둔한 말을 타고는 노루를 쫓다가 그 말이 수십번을 넘어졌으나 문득 말에서 빠져나와 우뚝 서곤 하였다.
날씨가 차고 비가 온 뒤에 큰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모두 저고리 세 겹에 가죽옷을 껴입고 귀를 가리고 짐승의 털로 만든 두툼한 요를 뒤집어쓰고서도 오히려 추워서 떨었는데 세조만이 홀로 한 겹의 옷을 입고 팔뚝을 걷고 있어도 손이 불덩이처럼 따뜻하므로 보는 자들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여겼다.
세종이 또 평강에서 강무할 때, 세조가 화살 16발로 16마리의 사슴을 죽였는데, 화살 깃의 피가 바람에 뿌리어 옷이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인 이원기, 김감 등이 이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다시 태조를 뵙는 것 같습니다." 하였고, 세종과 문종도 항상 이를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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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빈청(賓廳)에서는 묘호로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셋을 추천했으나, 아들인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표현해야 한다며 세조를 강하게 제안했고, 결국 이대로 정해졌다.[2] 그레고리력 환산 시 11월 11일.[3] 본래는 아들 예종이 능호를 '''태릉(泰陵)'''으로 정하길 원했으나, 신숙주가 태릉은 암군이었던(다만 당 현종은 루이 14세와 건륭제처럼 재위 초반에는 명군이었지만 훗날 암군으로 변해버린 케이스였다.) 당 현종의 능호와 같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광릉(光陵)'으로 정해진 것. 결국 태릉은 알다시피 훗날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의 능호로 정해진다.[4] 현존하고 있는 조선왕의 친필 수결 7종(태조, 태종, 세조, 정조, 순조, 고종) 중 하나.#, ##[5] '수양'은 황해도(북한 황해북도) 해주시의 옛 이름이며 이에 해주의 진산(鎭山) 이름도 '수양산'(높이 899m)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 명칭이 제일 익숙하다.[6] 말이 양위, 선위지만 단종이 어린나이에 그런 참극으로 자기 보호하는 사람들이 썰려 나가는 거 보고 겁이 지러서 "더이상 왕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공포심이 컸기 때문에 당시 사육신 입장에선 선위가 아니라 왕위를 찬탈한걸로 인식했을 것이다. [7] 다만 할아버지 태종은 인간성에서는 욕을 많이 먹었어도 '''정치는 엄청 잘했다.''' 또한 손자인 세조와는 달리 '''집권 과정이 명분으로도 꿀리지 않았다.''' 그 욕먹는 인간성조차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집권한 지도자 치고는 웬만한 전근대 군주들과 비교해봐도 역대급 대인배 면모도 많았다. 심지어 그것이 세조처럼 (주로) 공신 한정만이 아니란 것. 숙청과 제거의 대상이 철저하게 자기 생존&대업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 한정이였고 그 처분도 매우 관대했었던 데다가 그 외에는 백성들을 아주 잘 보살핀 임금이 태종이다. 숙청들이 사실상 불가피한 필요악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폭군은 커녕 오히려 그 아들과 견줄수 있는 역대급 성군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인물이 태종이다.[8] 사실 역사서에서의 평가 자체가 당대 관료층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기에 백성들의 관점에서 태종은 성군이라 볼 여지도 많은 편. 실제로도 태종은 백성들에게는 의외로(?) 대인배라 말해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너그러운 면모를 보였고 민생에도 여러모로 신경을 썼던 임금이었다.[9] 비석을 관리하는 곳[10] 이를 두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일찍 죽었기에 사실과 맞지 않는다.[11] 다른 사람 기준에서는 복위 운동[12]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신하들과 세조의 찬탈과정에서 살해 당한 왕족과 비빈들, 복위 운동을 계획한 사람들에게도 죄는 없다. 죄는 수양대군과 그 일파에게 있었을 뿐이다.[13] 세조를 비롯한 공신 세력들은 김종서의 행렬에 많은 사람이 모인거나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이 특진을 한 걸 꼬투리 잡긴 했지만 '''당시엔 흔한 일이었고''' 그 외에 치부 사실이 없다. 최대한 지어내서라도 흠을 만들려고 했을텐데 없다는건 '''정말로 김종서가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려 치부나 부정부패는 공신들이 훨씬 더 심했다. 행렬에 사람이 많고 아들들이 특진한 거는 애교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14] 양녕대군의 인성이 워낙 막장급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 역시 세조처럼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유형이어서 그랬을거라는 의견이 있다. 아니면 수양대군의 처신에 대한 그 자신의 불만/옹호 이전에 수양대군이 반정 성공 후 거슬리는 놈들은 친족도 포함해서 싹 잡아죽이고 있었으니,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 제대로 살아남으려면 수양대군의 편에 붙어야한다고 생각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일수도 있다.[15] 그 태종조차 철저한 정치적 목적이 없는 살육은 피했다.[16] 아마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왕인만큼, 세조 입장에서도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빌미를 잡을법한 인물들이나 정통한 왕이었던 단종의 편에 붙을 것 같은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보이는 인간들은 싹 다 죽여야 안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것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왕좌를 얻어낸 인물들'''은 이런 이유를 지니고 숙청질을 정치 초기에 벌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17] 사실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자신의 가족이 풍비박산 났던지라 개인적인 원한이 컸다. 물론 인조가 자비로워서 안 죽인 게 아니라 죽일 명분이 없어서 못 죽인 것. 달리 말한다면 '''친척이자 군주라는 것이 컸기에 인조는 아예 자신의 원수이기까지 했던 광해군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니 세조의 막장성을 부각시켜주는 사례라고 볼수 있다.[18] 그나마 방치되어있던 단종의 시신은 엄흥도라는 인물이 몰래 수습해 장례를 치뤄줬다.[19] 물론 주공단 시절을 보면 주공단이 왕위를 노리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주공단과 세조를 동급으로 보는 건 주공단 입장에서는 명예훼손이나 다름없다. 암만 그래도 쥐고 있던 권력을 제 손으로 원래 가야 할 사람 손으로 보내버리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닐 테니까.[20] 오히려 주공단을 닮았던 사람은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다. 이 둘은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21] 사마의에게 타당한 명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2] 그 후궁들도 신하들이 '왕실의 장래를 위해서'라고 고집을 부려서 받아준 것이다.[23] 홍윤성은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투덜댄 삼촌을 때려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라서 같은 훈구파 신하들 끼리도 '살인마 정승'이라고 야사에 기록하였다.[24] 실록에서도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홍윤성의 고향에서 축하 선물로 노비 2명을 보냈는데, 노비가 튼실치 않다며 노비들을 고른 나계문을 때려팼고 그것도 모자라 나계문이 자기 땅에 심어 가꿔놓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는데 급기야는 홍윤성의 종의 남편인 김돌산이 나계문을 패 죽여버리기까지 했다.[25] 물론 태종과 세종도 일부 측근의 비리를 봐주긴 했지만,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수준은 모조리 칼 같이 숙청했고 세종은 일단 전모를 모조리 밝혀서 잡을 놈 잡은 후 유능한 놈만 봐주고 정말 노비처럼 부려먹었다.(그리고 정말로 능력이 있던 이들은 맞았다. 황희는 부패관료지만 명재상임에는 두말할것 없었고 조말생은 뇌물받은 걸로 사형당할 뻔하기까지 했지만 행정관료로는 탁월했고 박연은 여러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당대에 음악에 대해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반면에 세조는 비리를 제대로 밝힌 것도 아니고 대국적으로 정치적 관용을 베푼 것도 아니었다.[26] 친정이 시아버지인 태종에 의해 작살나고 자식들 중 몇명이 먼저 사망하는 등, 소헌왕후의 불운한 면모를 보면 자상한 남편과 잘 자란 아들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텐데 그들끼리 물고 뜯고 난리를 쳐댔으니.[27] 1남 2녀가 더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했다.[28] 신빈 김씨의 차남 의창군이 자신을 지지했지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어도 불문에 부치고, 3남 밀성군이 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중용하는 등, 신빈 김씨에 대한 예우와 배려가 각별하였다.[29] 심지어 이후엔 성종 초반기에 국상 때 말썽이 생긴 자신의 인척이기도 한 윤호(정현왕후의 아버지)를 벌주기도 했다.[30] 태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태종은 세조와 비교해서 본처인 원경왕후 외에도 후궁들이 꽤 많았고, 여자 문제로 원경왕후와 엄청나게 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세조의 아버지인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태종의 경우 외척 견제의 목적이라는 얘기도 있고 세종의 경우엔 태종의 권고도 있었다.[31] 이것도 할아버지 태종이랑 닮았다.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린 양녕대군이 어느정도 참았다든가, 효령대군이 친불교 성향이었지만 그냥 넘어갔다든가, 충녕대군(훗날의 세종대왕)이 취미생활을 하고 싶은 대로 해주었던 것 등등.[32] 참고로 둘째 아들인 예종은 아버지인 세조를 많이 닮아서인지 즉위 초창기부터 대신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대신들이 "이건 부전자전도 아니고 숫제 세조대왕II구만"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33] 만약 세조가 형제들과 조카들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매우 냉혹했던 패륜의 끝판왕이었다면 세조의 인간성에 대한 평가는 실제 역사보다 더욱 박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영조와 비교하기에는 영조는 자식에게는 폭군이었지만 백성들에겐 성군이었다. 탕평책으로 신료들 관리를 잘한 점에서 세조에게 비교하기는 애매하다. 차라리 권력획득에 명분은 있었지만 정치도 제대로 못하고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에게 냉혹하고 잔인했던 암군인 인조와 비교하는 게 낫지.[34] 다만 진짜 바보인지는 성종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년 간의 논쟁거리이다. 왜냐면 그렇게 바보라는 사람이 희한하게 예의에는 정통해서 사관의 기록엔 예를 갖추는데는 틀린게 없어서 "저 인간 그냥 바보 흉내 내는 거 아닌가?"라는 말이 돌았다고 할 정도. 정말로 바보였다면 서번트 증후군 같은, 특정 분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재능이 발현되는 증상의 지적장애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35] 57세로 죽었는데 건국이래 중종보다 더 오래 산 왕은 태조, 정종, 광해군, 숙종, 영조, 고종 6명 뿐이었다. 선조도 57세라 타이 기록. 참고로 세조는 52세 중중 바로 아래는 태종으로 56세였다.[36] 자식 없이 요절했다.[37] 인성대군은 겨우 3살의 나이에 사망했다.[38] 한명회가 중국 사신을 자신의 별장인 압구정에서 접대할 것을 청하자 "중국 사신이 거기가 좋다고 하면 개나 소나 거기로 가서 백성들에게 민폐가 될 걸 왜 모르냐? 그리고 정자에서 술먹고 노는 게 아름다운 일이냐?"라고 성종이 꾸짖자 다른 곳으로 접대 장소를 옮긴 다음에 항의 표시로 "사실 아내가 아파서 전 안 갈랍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지난번엔 안 간다고 안했는데 저거 전하께 개기는 겁니다."라고 탄핵했고 성종도 "언젠 아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굳이 명나라 가더니, 이번엔 별로 안 아픈데도 안 간다고? 속셈이 훤하다!" 라고 직첩을 거두어버린다. 몇 달만에 돌려주긴 했지만.[39] 그나마 복권 자체가 이때 남이의 방계후손이었던 남공철이 건의한 덕이었다.[40] 신숙주의 아들들 중에서 제일 나은 인물이었다. 이렇게 좋은 아들을 잃었다는 점에서 신숙주는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41] 왕의 옥새를 함부로 건드리거나 위조를 하는 행동은 십악대죄 중 하나에 들어가며, 걸리면 당연히 참형이다.[42] 게다가 야사에 따르면 신숙주가 술에 취해 세조의 팔을 꺾어버려 세조의 노여움을 샀다가 한명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면 세조는 아끼던 충신한테 봉변을 당한 셈이고 신숙주는 졸지에 역신으로 전락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셈이니 두 사람이 동시에 업보를 치른 거라고 볼 수 있다.[43] 여담이지만 인조 또한 세조처럼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다. 차이점이라면 논란이 있기는 해도 계유정난에 비해 나름 명분은 있었다는 것.[44]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조선 전체를 통틀어 제대로 왕 노릇한 적장자는 숙종뿐이다. 다른 적장자들은 모두 요절하거나, 폐위당하거나, 아예 자신의 대에서 나라가 망하는 등,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제대로 왕노릇한 숙종조차도 46년이나 왕위에 있었음에도 현재에는 업적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의 부인들만 사람들이 기억한다. 참고로 숙종은 60살을 앞두고 죽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숙종도 중종처럼 단종에 대해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 왕이다. 숙종 이전까지 노산군이라고만 불렸던 단종에게 노산대군이라고 추존한데 이어 아예 단종이라는 정식 묘호까지 주었기 때문.[45] 공신들 중에 대표적으로 신숙주, 정인지 등을 보면 답 나온다. 그러나 다른 공신들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홍윤성 같이 같은 정난공신들의 입장에서 봐도 답이 없는 극단적인 케이스는 반드시 숙청당해야 했다. 세조가 홍윤성을 감싸준 것은 같은 패륜아로서의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너무나도 막나가는 행보였다. 그 점을 감안하면,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과 여진족 토벌 전쟁에서 자신과 함께 참전한 신숙주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군사를 이끌었다가 오히려 여진족에게 역관광을 당한 것 그리고 훗날 세조에게 생전퇴위를 요구한 것을 제외하면 홍윤성에 비해 나름대로 선을 지킬 줄 알았던 양정이 세조에 의해 가차없이 참수형에 처해진 게 더더욱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세조 입장에서 보면 홍윤성을 숙청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두에게 욕먹는 홍윤성은 왕에게 절대충성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세조에게는 너무나도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이다.[46] 물론 훈구파에게 고려시대의 호족들과 같은 사병#s-2이 없다는 점이 걸리겠지만, 애초에 중앙집권국가도 모종의 이유로 불안한 상황이 되면 관군이 아닌 무장단체가 힘을 얻기 마련이다.[47] 다만 개국이후 일어난 수 많은 정변들로 인해 누가 잇든 불안할 건 변함없으니 차라리 든든한 후견인을 지닌 인물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이를 성종이 보위를 이은 이유로 표현했다.[48] 계유정난[49] 현대의 소대장이라 할 수 있는 기총이나 중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초관이다.[50]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51]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11002_003 [52] 문종 때 3군의 12사를 5사로 개편하면서 병력이 증강되었다.[53] 정하연 작가가 대표적. 세조 미화가 나오는 사극 자체는 현재까지 장영실이 마지막이지만 해당 드라마는 마지막회 후반부에서 잠깐 세조가 미화되었기 때문에, 여러 에피소드에 걸쳐 세조가 미화된 사극으로는 정하연 작가의 인수대비가 미자막이다.[54] 물론 이러한 실록을 칼을 든 채로 대놓고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세조 본인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흔드는 행위이므로 눈에 띄게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목에 칼 들이대면 장사없다는 사실만 명심해두자.[55] 일개 종이 황보인, 김종서 등이 단종을 몰아내고 안평대군을 옹위할 계획을 다 알고 있다든가 중앙정계를 꽉 잡은 황보인, 김종서가 함경도에서 무기를 실어와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든가 이 두가지 일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전자는 어떻게 종이 계획을 다 알았는지는 고사하고 그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깠고 후자는 작가 멘트고 "걍 가까운 한양 무기를 쓰면 되는 거 아님?" 이라고 깠다.[56] 15세 이전 즉위를 기준으로 한다.[57] 오히려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와 단종과는 정반대로, 실권자가 군주보다 더 좋은 평가를 듣고 있는 사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의 요구들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의 정계 복귀였는데, 계유정난 이후 조선 백성들이 단종을 동정하고 세조를 인간 쓰레기로 여기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과는 대조적이다.[58] 하지만 고려의 숙종이 처한 상황을 오면 오히려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에 더 비슷해 보인다. 왜냐하면 고려 숙종은 조선 세조와는 달리 '''명분으로도 그다지 꿀리지 않았기 때문.'''[59] 연나라 적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뜻이다. 성삼문은 그나마 나으리라 하여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방효유는 아예 역적 취급을 했다. 죽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영락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숙청 범위를 갖고까지, 방효유를 죽인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다면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60] 그런데 조비의 묘호는 2개이다. 고조와 세조. 진수의 삼국지는 고조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세조라는 묘호로 기록되어 있다.[61] 세종 - 문종 - 단종 라인은 왕위 계승 서열 순도 100%를 자랑한다. 여기에 단종 본인은 문종의 장남으로서 원손 - 세손 - 세자를 거쳐 국왕이 되었다. 나이가 어렸으며 어린 왕을 지켜줄 세력이나 왕실 웃어른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을 뿐이다.[62] 세조가 동복동생들을 비롯한 친족들까지 싸그리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편에 선 것이 확실한 공신들을 제외하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통성 자체에서 한참 밀리는데다가 또 본인의 정치력 또한 뛰어난 편이 아니다보니 태종처럼 친족들을 살려두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불안했던 것. 반면, 태종은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은 죽였지만, 동복형인 회안대군을 비롯한 정도전의 자손은 살려주었는데 이는 쿠데타의 명분도 충분하거니와 당시 기득권층의 지지가 태종에게 있었으며, 태종 본인 또한 뛰어난 정치력으로 이들이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결여된 정통성 + 집권층의 지지 결여 + 본인의 부족한 정치력' 의 3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세조는 조금이라도 역모가 의심되거나 연관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모조리 죽일 수밖에 없었다.[63] 아무리 왕위 욕심이 있더라도 보통은 3일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충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권좌를 욕심내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준다는 것은 사대부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64] 물론 태종이라고 사관을 핍박 안 한건 아니라서 예를 들면 저 기록을 남긴 사관을 유배보내기도 했지만 그 기록을 남긴 것도 그 유배된 사관이었을 정도로 사관들의 활동은 활발했다.[65] 다만 유독 하륜만은 예외적으로 실언을 하거나 부정축재를 해도 경고로 그치거나 봐줬다. 아마 자신이 집권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이가 많아서 아들대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66] 수족들이 하나둘 잘려나가고 이를 버티지 못한 단종이 겁을 먹고 결국 양위 선언을 하자마자 세조는 하루만에 즉위하는데 복잡한 의례 절차를 생각하면 이전부터 즉위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셈. 평소에도 자뻑끼가 좀 있던 수양대군은 예의상 하는 거절도 딱히 안하고 양위를 덥석 받은 걸로 묘사된다.[67] 실제 역사와 달리 단종이 천수를 누리더라도 단종이 평생 아들을 얻지 못했다면 결국 세조의 직계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실제 역사와 달리 세조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있어 정통성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68] 단종은 적장자이자 왕세자였던 문종의 적장자로 태어났고 할아버지 세종 때 원손과 세손 작위를 받았으며 그 다음에는 왕세자를 거쳐 왕이 된 케이스로 숙부 세조보다는 정통성이 크게 뛰어나고 충분하다 못해 정통성이 넘치는 케이스다.[69] 사실 신하와 백성들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성군이 되는 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70] 반면에 세조는 외치에서 그 명나라 사절에게 뻗대고 이만주 죽이고 하는 등 인조 따위와는 격을 달리했다. 다만 내치의 경우 이전 서술에서 뚜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한 것과 달리 상술한 내용 때문에 마냥 좋게 보기는 힘들다.[71]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아예 세조의 별명을 '쿠데타 리'라고 붙여놓았다.[72] 이걸 병크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개국에 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멀쩡히 첫 부인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이 여럿 있었다. 설사 장남이 없었다고 해도 차남을 세자로 책봉했어야 했는데 그 대신 둘째 부인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 그나마도 둘째 부인의 장남도 아닌 그 둘째 부인의 차남에게 넘기려고 한거니 반발이 없을 수가 없다.[73] 이방과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형제승계의 명분이 충분했고, 셋째형 이방의와 넷째형 이방간이 모두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방원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면서 형제들 중 막내라는 입지상의 문제도 해결했다. 특히 이방간은 하필이면 먼저 무력을 행사했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의 분노를 사면서 이방원의 집권에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다.[74] 다만 그렇게까지 어리다고 보기도 어렵다. 즉위 당시 나이는 고작 만 10세로 정말 어린 게 맞았지만, 폐위될 당시는 14세 생일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75] 사실 이게 치명적이었다. 어린 왕을 보살필 대비나 왕대비가 없었기에 왕실에서 고립되고 신하들이 전횡하기 좋았다. 성종도 단종 못지않게 어린 만 12세에 즉위했지만, 대왕대비(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무사히 장성했다.[76] 세조를 옹립한 측에서는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을 까야 했기에 어떻게든 흠결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들에 대한 비방은 기껏해야 '김종서가 길을 나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김종서 등의 친인척들이 고속 승진을 했다.' 정도인데, 그 당시에는 이 정도 일은 흔했다... 외려 세조를 옹립한 측이 기록만으로도 김종서 등이 "니가 할 소리냐" 라고 입닥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심했다.[77] 양녕대군은 왕실의 가장 큰어른이니 행실이 엉망인 것과는 달리 영향력은 컸지만 대비는 대군 따위와는 레벨이 다르다.[78] 썸네일의 미라는 세조의 것이 아니다. 조선 왕릉들은 두 기를 제외하고 발굴된 적이 없다.[79] 최초의 회곽묘인 만큼 세조 또한 수많은 국보급 왕실 부장품 및 서적과 함께 땅 밑에서 온전히 미라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조선 왕릉을 파헤칠 순 없는 노릇이지만...[80] 야사〈금계필담〉에서는 세조의 장녀를 의령공주로, 그 이름을 이세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존여부 자체가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실록의 세종 28년(1446년) 기록에 "수양대군은 윤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고 있다" 라고 한 부분이 있다.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면 1446년 세조의 슬하에는 의경세자와 이름 미상의 딸, 의숙공주만이 있었고, 예종은 출생 전이었다.[81] 2경(更)에 아지(阿只) 가 졸(卒)하니, 예조(禮曹)에서 상장(喪葬)의 의식(儀式)을 의논하여서 아뢰었다. 아지(阿只)는 곧 후궁(後宮) 박소용(朴昭容)이 낳은 아들의 이름인데, 2경(更)에 졸(卒)하니, 나이가 5세였다. - 《세조실록》, 세조 9년 11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82] 만약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런 일을 당했다면 계유정난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