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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乔石·喬石(교석) / Qiáo Shí (1924년 12월 ~ 2015년 6월 ) (향년 92세)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3세대 정치인이었다. 본명은 장즈퉁(蒋志彤)이며 고향은 절강성. 즉 상해 근방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의 일가이며, 그래서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에서 국제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다. 강택민의 유력한 경쟁자였으나 1998년 강택민에게 밀려 정계를 은퇴했다.
2. 일생
1940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혁명운동을 위해 본명대신 가명인 차오스를 사용하게 된다. 이후 상하이 퉁지대학에서 공부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철공소에서 일했다. 1963년부터 중앙에 발탁되어 외교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여 당의 고위직에 진입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장개석의 일가인데다가 더욱이 가명인 "차오스 qiaoshi"와 장의 이름이 "제스 jieshi"도 발음이 유사했기 때문에 숨은 장개석 숭배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심한 박해를 받았다. 차오스의 자식들은 그리하여 아버지 성인 장이 아니라 어머니 성인 리(李)를 사용할 정도. 그럼에도 운좋게 숙청에서 돌아와 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1985년부터는 정보기관을 맡아 당의 중앙방첩위원회(中央保密委员会)[1] 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국무원의 부총리가 되었고, 공안부를 맡았다. 그리하여 구시대적 법률집행을 근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당직으로도 계속 승진하여 당정치국의 상무위원이 되고,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총서기를 역임하였다.
1960년대부터 중앙의 요직을 거쳤기 때문에 1989년까지 상해 지역에 처박혀 있다가 천안문 사태 이후에야 등소평에게 중앙으로 발탁되었고, 대권을 손에 쥔 강택민의 강력한 경쟁자로 평가받았다. 특히 등소평은 1992년 남순강화에서 차오스와 중국 개방의 미래를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택민은 예상보다 훨신 정치력이 뛰어났다. 그는 차오스를 고립시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을 막았다. 차오스는 강택민과 비슷한 상하이 출신이지만 장쩌민의 계파인 상하이방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3년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리에 올라서면서 당시 장쩌민 체제에 또다른 경쟁자로 부상하였는데 나이가 많은지라 1998년 74세가 되면서 차오스는 등소평이 마련한 정년에 걸려 은퇴수순을 밟았다. (장쩌민보다 두 살이 많다.) 서방에서는 차오스가 파룬궁 탄압에 반대했다는 이유를 들어 은근히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도 서방의 일방적인 평가라서 실제 본인의 성향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차오스는 상당기간 방첩-공안기관에서 일했고 이런 기관의 성향상, 차오스 본인이 리버럴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좀 무리한 평가이다.
2015년 6월 14일 향년 92세로 타계했다.
[1] 保密은 보밀이라고 읽어야 하나 방첩으로 번역하는게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