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방
1. 개요
중국공산당 내 하나의 비정식 계파(派系)로 장쩌민(江泽民) 집권 시 대부분 상하이시(上海市) 행정당국의 간부직으로부터 중앙정부(中央政府) 또는 공산당의 고위층으로 승진한 계파적 인상이 선명한 인사들의 그룹. 1989.6.4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톈안먼사건(天安門事件)인 6·4사건(六四事件)은 덩사오핑으로 하여금 진운과 리셴녠(李先念, 이선념)이 추천하는 장쩌민(江泽民)을 차선책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장쩌민(江泽民)은 원로들의 합의로 발탁되었으므로 독자적인 권력 행사와 권위의 확보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지식분자 출신인 장쩌민(江泽民)은 자연스럽게 측근에게 의지하며 상하이방이라는 파벌을 형성·이용하게 되었다.
현재 중공중앙정치국(中共中央政治局) 중에는 상하이방(上海幫)이 많은 상위(常委) 직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공총서기(中共總書記) 후진타오(胡錦濤)에 대해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하이방(上海幫)에 소속된 주요 인사로는 우방궈(吳邦國, 오방국), 자칭린(贾庆林, 가경림), 쩡칭훙(曾庆红, 증경홍), 황쥐(黃菊, 황국, 1938.9.28~2007.6.2), 리창춘(李長春, 이장춘), 우관정(吳官正, 오관정)이며 기타 인사로 류치(刘淇, 유기), 쩡페이옌(曾培炎, 증배염), 장더장(张德江, 장덕강), 저우융캉(周永康, 주영강), 류윈산(刘云山, 유운산), 후이량위(回良玉, 회랑옥), 화젠민(华建敏, 화건민), 천즈리(陈至立, 진지립), 천량위(陈良宇, 진량우) 등을 들 수 있다.
장쩌민(江澤民)의 퇴임에 따라 상하이방(上海幫)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하여 2006.9.24 상하이방의 주요 일원인 천량위(陈良宇)가 부패 문제로 물러났고 상하이방의 핵심인사인 황쥐(黃菊)가 2007년 6월 사망하였으며 17대(十七大) 폐막 후 중앙정치국(中央政治局)에서 쩡칭훙(曾庆红), 우관정(吳官正)도 탈락했다.
2. 구성
上海帮ㆍ上海幫, (영어)Shanghai clique.두이향위[12]
보스는 장쩌민이며 쩡칭훙이 사실상 그의 후계자다. 상하이방의 시작은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장쩌민 상하이시 당위서기가 일약 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 주석에 오르면서부터다. 장쩌민은 중국 제2의 도시 상하이를 책임진 시당서기로 베이징과는 달리 시위를 평화적으로 진정시키고 지역 언론과 당 조직을 확고하게 통제하면서 당내 보수파들의 눈에 들었다. 급진적 정치 개혁을 주장하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잇따라 숙청한 덩샤오핑은 보수파와의 협의를 통해서 장쩌민 총서기-리펑 총리-주룽지 부총리 트로이카 체제로 당 지도부를 개편한다.
장쩌민은 중앙 정계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당 총서기에 오르자 자신이 오래 근무했던 상하이 지역 인사들을 대거 중앙에 발탁해서 일약 상하이방을 형성한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보수파의 압력에서 벗어나 개혁개방 쪽으로 확실히 노선을 굳힌 장쩌민은 자신의 지역 기반인 상하이를 포함한 연안지대에 막대한 투자를 통해서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끌어냈다. 이 실적을 근거로 상하이 지역 인사들을 계속 중앙정부에 발탁해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장쩌민과 상하이방 집권 10년 동안 중국은 G2의 반열에까지 오른다. 이들의 기반은 상하이의 엄청난 경제력과 경제 개발의 노하우였다. 현재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상하이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문제는 장쩌민 한 명을 수장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점이다. 장쩌민이 중국 국가주석에서 물러나자 순식간에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장쩌민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안 내놓고 후진타오로부터 상하이방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없을 거라는 약속을 보장받고 나서야 물러날 정도였다. 즉 장쩌민의 지도력에 크게 의지하는 위태로운 세력이다. 그래도 중국 공산당 내부와 정계에 요직을 점하고 있는 상하이방의 남은 인원들이 태자당과 마지못해 손을 잡고 공청단을 견제하기로 하였다. 2013년 전국인민대표대회때 마지막 입김을 불어넣은 이후 빠르든 늦든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다.
이들의 특이사항으로는 장쩌민 한 명의 개인 사단이었다는 점 외에 철저한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꼽는다. 공청단보다도 더욱 능력을 중요시했으며, 이 때문에 세대 교체에 실패하였다. 이들은 젊은 유망주보다는 검증된 중년층을 더 중용하다 보니 젊은 유망주가 파고들 틈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공산당 내부에서도 상하이방하면 노인들이 많다고 여긴다. 실제로 상하이방의 중요 인물들은 대다수가 1930~40년대 출생이고, 가장 젊은 층이 1950년대 초반에 출생이다.
2013년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앞두고 태자당과 손을 잡을 것이란 분석이 있었다. 실제로 손을 잡고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을 밀어줘서 중국의 지도자로 만들고, 상하이방 사람들은 여전히 요직을 점한다. 하지만 이들도 더 젊은 세대들에게 바통을 넘겨주지 못 하면 길어봐야 30년 후에는 끝날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시진핑은 2022년까지는 중국의 실권자일 것이고, 그때면 상하이방이 다시 권력을 잡더라도 10년을 유지해줄 인재들이 없다.
2014년 12월 5일, 상하이방의 저우융캉이 체포되었다. 공산당의 당적도 박탈되었다.#
2015년 8월 24일, 장쩌민이 체포되었다고 파룬궁 계열의 언론인 대기원시보가 보도했으나 전승절(중국) 행사에 장쩌민이 나와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시진핑의 반부패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세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태이다.#
2016년 10월 후반 상하이방의 수장인 장쩌민이 가지고 있던 핵심 지위마저도 시진핑이 가져가 버리는 등 그야말로 시진핑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었다.
2017년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파벌 중에서 본진도 시진핑에게 신나게 털리는 등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약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주석으로 만들어버리는 등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던 옛모습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처절하게 몰락했다고 봐도 된다. 참고기사 거물은 아니었던 시진핑을 밀어주고 후진타오처럼 부려먹을 예정이었으나 야심가였던 시진핑이 이를 간파하고 역으로 털어버려 결국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되었다. 사실 후진타오와 시진핑 또한 집권 이전에는 상하이방으로 분류되기도 하던 인물들이었다. 둘 다 장쩌민이 역임했던, 상하이방 인맥들만이 역임 가능한 상하이시 당 서기 자리를 역임했다. 상하이방의 본진인 상하이시 당 서기 자리는 장쩌민과 상하이방의 득세 이후로 국가주석, 총서기로 진출하기위한 필수 코스였던 셈이다.
3. 코로나 19 바이러스 유출설
미국으로 도피해 중국의 비리를 폭로하고 있는 부동산 재벌 궈원구이(郭文貴)가 2020년 3월 6일,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67)이 진행하는 유튜브 생방송에 출연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위적으로 유출됐다”고 주장했다. “홍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죽이기 위해 중국 공산당 내 소수 고위층이 내린 결정”이라고.#
4. 관련 문서
[1] http://ko.wikipedia.org/wiki/류치[2] http://ko.wikipedia.org/wiki/우관정[3] http://ko.wikipedia.org/wiki/자칭린[4] http://ko.wikipedia.org/wiki/장더장[5] http://en.wikipedia.org/wiki/Zhou_Yongkang[6] http://ko.wikipedia.org/wiki/쩡칭훙[7] http://en.wikipedia.org/wiki/Zeng_Peiyan[8] http://en.wikipedia.org/wiki/Chen_Liangyu[9] http://en.wikipedia.org/wiki/Chen_Zhili[10] http://en.wikipedia.org/wiki/Hua_Jianmin[11] http://ko.wikipedia.org/후이량위[12] 참고로 영어명 기준 Shanghai Gang(...)이라는 모양 빠지는 이명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