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라굽타 마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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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본명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andragupta-Maurya). 재위 기원전 324~298년. 한역 불경인 잡아함경 권23의 아육왕경에는 '''전나라급다(旃那羅笈多)'''라고 음역되어 있으며, 한역하면 월호(月護)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정복군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서북인도에 침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만난 적이 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정복과 통일국가 건설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고 추측된다.
재상이며, 스승인 카우틸리야(Kautilya 혹은 Canakya)는 외교력과 전략 면에서 찬드라굽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불교 기록에 다르면, 찬드라굽타는 본래 북인도 핍팔리바나(Pipphalivana) 지방을 지배하는 크샤트리야 계급의 모이리야(Moirya) 가문에 속하였다. 이 가문은 석가모니 시대부터 이름이 알려진 명문이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수드라 계급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마우리야(Maurya)라는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 어린 시절
로마의 유스티누스가 역사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주장하기를 그는 난다인 왕의 비위를 거슬렀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평민이라고 주장하는데[1]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온 후 달아나다 안전한 밀림에서 쓰러졌다.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자는 동안 사자가 와서[2] 얼굴의 땀을 핥아주었고 잠이 깨자 자신이 왕이 될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
3. 치세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5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군대가 인도에 침입한 것에 대하여 민족 저항 의식을 일으켜 이를 이용해서 그리스 세력권이었던 펀자브 지방과 서북인도를 정복하였다.
외교와 전략으로 마가다 국 난다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 공격을 가하여 다나난다(Danananda) 왕을 죽이고 마가다의 수도 파탈라푸드라를 점령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로 삼았다.
찬드라굽타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각지를 정복하였다. 마우리야 왕조의 통치는 북으로 히말라야 산맥, 서로는 인더스 강 유역의 아프가니스탄과 발루치스탄, 동으로는 벵갈의 브라흐만푸트라 강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북인도를 완전히 통일하였으나 데칸 고원 이남의 케랄라, 타밀 나두 지역에는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가운데 하나인 셀레우코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를 세우고, 305년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회복하러 인도를 재침공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에게 격퇴되었고, 평화조약을 맺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을 맺으러 사신으로 온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는 인도 견문록을 남겼다.
4. 여담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이지만, 손자 아소카 왕이 너무 유명해서 그런지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처지는 편이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전쟁 방식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기 힘든데 대다수의 추측은 주로 게릴라 전술이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망치와 모루 전술 등을 습득해서 싸웠을거라고 추측한다.
문명 6에서 간디와 함께 인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임페라토르: 롬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군주로 등장하며, 아들 빈두사라, 손자 아소카도 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