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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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1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존속했던 서아시아 일대의 헬레니즘 계열 제국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중의 하나였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창건하였다. 수도인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시리아 일대에 핵심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시리아 왕국'''이라고도 한다.
헬레니즘 제국의 소아시아, 시리아, 페르시아 영토를 거의 모두 차지했으나 이집트의 경쟁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자주 시리아 전쟁을 벌여 국력을 소모하였고, 각지에서 반란과 독립이 빈발하여 영토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서쪽에서는 로마, 동쪽에서는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에게 영토를 빼앗겨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시리아에 국한된 소국으로 전락하였고,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하여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로 편입되었다.
2. 역사
2.1. 불안한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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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직후의 영역으로 안티고노스 왕조(분홍색)를 나누기 이전
셀레우코스 1세의 왕국 건설 과정은 디아도코이 항목을 참고.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4] 가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한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는 수도를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에서 오론테스 강변의 안티오키아로 옮겼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와 전쟁을 벌였다. 양국은 그 후로도 접경지대인 코엘레-시리아[5] , 페니키아, 유대 등을 놓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이를 시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왕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에 켈트인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오기도 했다.[6]
이처럼 셀레우코스 왕조의 주의가 서방에 쏠려 있는 틈을 타 멀리 떨어진 동방 영토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가 사망한 틈을 타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디오도토스가 왕위를 칭하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파르티아의 사트라프인 안드라고라스가 뒤를 이었다. 수년 후 파르니족의 수장 아르사케스가 파르티아를 침공, 장악하여 아르사케스 왕조를 세움으로써 이 둘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세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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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기원전200년경)그리스와 아나톨리아로 확장하기 이전,이때 파르티아가 떨어져 나온 것이 확인된다.
안티오코스 2세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가 왕위를 계승한 후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여 한때나마 바빌론까지 몰리기도 했으며,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라오디케 1세와 아나톨리아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휴전 협정을 맺고,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끝내 토벌에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폰토스,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페르가몬이 독립하고 셀레우코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가 재위 3년 만에 피살당하면서 권신 헤르미아스가 정권을 잡자 이에 반발한 아카이오스, 몰론, 알렉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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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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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확장(진한 파랑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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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에게 크게 패한 후
셀레우코스 3세가 죽자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안티오코스는 권신 헤르미아스,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인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방이 안정되자 아나톨리아의 아카이오스까지 토벌하면서 내전을 종식했다.
이렇듯 안티오코스는 대왕(메가스)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비록 재위 초창기에 벌어진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와의 전쟁에서는 어이없는 실수[7] 를 저지르며(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 패배했지만, 승리한 프톨레마이오스 측의 피해도 컸으므로 별다른 영토 손실 없이 휴전이 이루어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안티오코스 3세는 곧 개혁에 착수했다.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있던 관제를 개혁하여 문무관의 대립을 없앴으며,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추진되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제도를 혼합하여 제국의 실정에 맞게 만든 개혁을 완수하였다. 이 개혁으로 스트라테고이(장군;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와 유사한 제도)라고 불리우는 지방 총독들이 문무관을 통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 안티오키아만으로는 광활한 제국령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리디아의 사르디스와 메소포타미아 셀레우케이아에 각각 행정 관청을 두어 각각 서방/동방을 관장하게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동방의 문화보다 중시하였기 때문에 토착 세력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한편 군주 숭배 사상을 확립하였다.
개혁을 마친 안티오코스 3세는 10년에 걸친 대규모 동방 원정을 단행했다. 안티오코스의 아나바시스라고도 하는 이 원정을 통해 아르메니아를 멸망시키고[8]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복종을 받아냈다.[9] 나아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근방인 파로파미사다이의 인도계 군주와도 외교관계를 정립하고 코끼리도 많이 받은 그는 당당하게 시리아로 개선하였다. 시리아로 돌아온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것을 알고, 기원전 198년 파니온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어[10] 라피아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고 팔레스타인을 차지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공격하기 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두었는데, 마침 필리포스 5세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자 이를 구실로 그리스 본토까지 넘보게 된다. 마침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한니발 바르카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망명해 왔고, 이에 고무된 안티오코스 3세는 대군을 일으켜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다. 하지만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러 간 선발대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오히려 로마 측의 역공을 당하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지휘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7만에 달하는 대군이 패배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마그네시아의 패전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안 그래도 한정되어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사적 자산이 완전히 뿌리뽑혔으며,[11] 타우로스 산맥 서쪽 아나톨리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거기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방 약탈 원정[12] 을 떠나다가 기원전 187년에 암살당했다. 형식적으로 복종하던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군사력의 몰락을 확인하고 다시 활개치기 시작하였다.
2.3. 쇠퇴와 재부흥
아버지를 잘못 만나 빚쟁이가 된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재위: 기원전 187-175)는 긴축정책을 펼치며 배상금 갚기에 허리가 휘어지다 암살당했다. 다음 왕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4세의 동생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배상금을 전부 갚은 뒤 , 기울어 가는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같이 기울어 가던 옛 라이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갈구기 시작했다. 이 갈굼이 의외로 성과가 있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밀어붙이는 기염을 토했지만, 로마의 개입으로 결국 물러나야만 했다.[13]
이후는 안티오코스 4세 문서 참조
2.4. 몰락
안티오코스 4세의 급사로 인해 안티오코스 5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고작 2년만에 살해당하며 시작된 내전은 수십년간 지속되며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
기원전 146년에 데메트리오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며 내전이 종식되는 듯 했지만 파르티아 정벌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포로로 잡혀가며 왕조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러는 사이 유대는 자치권을 부여받아 하스몬 왕조로 독립 왕조를 세웠고, 동방에서 세력을 키운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주요 지역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을 점령하는 등 왕조의 영역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기원전 138년에 내전을 끝내고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7세는 쓰러져가는 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우선 하스몬 왕조를 다시 셀레우코스의 영향력 아래에 넣었다. 이후 그동안 상실한 메소포타미아, 메디아, 페르시아 등의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원정을 실시해 파르티아를 침공한다. 원정 초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탈환했고, 곧이어 메디아도 탈환하는 등 많은 영토들을 탈환에 성공하며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지만 이후 엑바타나에서 파르티아의 기습을 받아 안티오코스 7세가 전사하면서 마지막 제국 재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2.5.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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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청록색이 셀레우코스 왕조.
기원전 89년의 지도이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의 땅은 사실 기원전 2세기 말에 저 정도 수준이 됐다. 위의 지도와 비교해보자. '''약 150년 만에 영토가 20분의 1 이하로 쪼그라든 셈이다'''.
안티오코스 7세의 몰락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안티오키아와 그 근처의 시리아 지역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고, 내전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막장 상황이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상태에서도 장장 수십 년 동안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었으니, 다름이 아니라 주변의 거대 세력들이 이를 완충 지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는 동쪽에서 쳐들어온 유목민들과 싸우는 한편 넓어진 제국의 세력을 굳히느라 여념이 없었고, 로마는 한창 폰토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땅과 돈만 많았다뿐이지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상태인 데다, 그 권력 투쟁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비해 나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중흥 이후 상황이 더 나았던 이집튼 종종 셀레우코스 내전에 개입해 참칭자를 왕으로 세우고, 다시 그를 적통인 군주를 지원해 갈아치우는 형식을 반복하며 그렇지 않아도 쇠퇴해가는 경쟁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마침 만만한 먹잇감을 찾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시리아로 눈을 돌리게 된다. 망해 가는 나라들이 늘 그렇듯이 정신 못 차리고 자기들끼리 싸우던 셀레우코스 왕가의 경쟁자들 중 하나가 급기야 외부 세력인 티그라네스 2세에게 헬프를 쳤고, 옳다구나 하고 달려온 티그라네스 2세는 기원전 83년 아예 자신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이라고 선포해 버렸다. 이로써 셀레우코스 왕조는 멸망 직전까지 왔다.
다만, 로마의 루쿨루스가 티그라네스 2세의 장인인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를 연속으로 관광보내면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아르메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셀레우코스 왕가는 자기들끼리 내전을 거듭했고, 로마는 셀레우코스를 그냥 두려고 했으나 결국 더이상 이런 잉여들에게 시리아를 맡겨 뒀다간 위험하겠다고 판단한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했다. 비슷한 시기 로마에 편입된 폰토스, 아르메니아, 유대 등은 속국으로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졌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아예 없어지고 로마의 직할 속주로 편입되어 버렸다.
3. 정치
국왕은 스스로 페르시아의 왕중왕 · 그리스의 대왕 · 신왕을 칭하여 자신이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의 군주이며 신성한 존재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국왕은 자유와 민권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에게 이 칭호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제국의 군주들은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고 측근과 관료, 장군들과 함께 국가를 통치했다. 그리고 법적 분쟁 해결과 왕령지 관리, 화폐 발행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지역 공동체와 도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민심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지역의 세금을 면제해주거나 감세하는 조치를 취했다. 토착신과 그리스 신들에 대해 경배하고 제례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했으며 그리스 종교와 토착 종교를 따지지 않고 각지의 신전과 종교 단체를 후원했다.[14] 군주들은 제국에 헬레니즘 문화와 철학, 종교를 전파했으며 페르시아어를 익히고 토착 문화를 관대하게 수용해서 동 · 서양의 문화적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이들은 이러한 의무를 등한시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바르바로이에 대한 거부감만큼이나 오리엔트식 전제 왕권에 대한 거부감도 강했던 반면,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세습적인 전제 왕권이라는 개념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15]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장군이 군사들에게 "왕을 치러 간다"는 사실을 숨겼다가, 군사들이 사실을 알게 되자 단체로 항명해버려서 반란이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왕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신, 구원자, 혹은 특정 신의 현신이라고 주장했는데,[16] 이러한 군주 숭배 사상은 안티오코스 2세 때 기반이 닦이고 안티오코스 3세 때 확립된다.[17]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들 중에는 암살당하거나 군사 반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이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제국은 왕위 승계가 벌어질 때마다 왕위 계승을 놓고 내전이 벌어져 국력이 약화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치세까지는 그런데로 내전의 상처를 잘 이겨내고 패권을 유지했지만, 안티오코스 4세가 급사한 뒤부터 벌어진 내전과 이 틈을 노린 외세의 침공에는 견디지 못하고 쇠퇴하고 만다.
그리스 본토는 정치 상황이 혼란스럽고 임금이 크게 하락하는 등, 일반 민중들에게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아시아로 인생역전을 노리며 몰려들었다. 가진 것 없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제국 전체의 통치권과 군대를 가진 군주의 호의를 입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왕의 눈에 든 이는 왕의 "친구", 즉 "필로이"가 되었으며, 이런 '친구'들은 왕의 개인적인 측근인 동시에 왕국의 지배 계층이었다.[18]
왕의 친구들은 필요에 따라 중앙 정부와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업무를 수행하고 군주에게 여러 가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필로이 중에서 일부는 출신 도시와 유력 가문들과의 연줄을 가지고 있어서 군주는 이들을 통해 지방 도시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의 친구들은 군주에게 매우 유용한 존재였지만, 왕위 계승시에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선왕의 필로이들과 측근들을 총독과 주요 관직에 임명해 통치권을 확립하려는 현왕, 이런 현왕의 정책을 부추기고 출세하려는 필로이들간의 이해가 충돌해서 음모와 반란이 일어나고[19] 자기들끼리 지연 · 혈연으로 나뉘어 파벌 다툼을 벌이거나, 충언을 빙자해서 자신과 자기 지역에 이익이 되는 일을 제안하거나, 그리스인 왕비와 페르시아인 후궁의 자식들을 놓고 후계자 분쟁을 벌이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20]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쓴 로마사 4권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국은 한 마디로 말해 중세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했다고 한다. 즉, 겉으로 보면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인 듯하지만, 사실 내부 사정을 놓고 보면, 수많은 도시 국가나 영방 국가들로 분열되어 그 응집력과 단결력이 허약한 나라라는 것이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겉으로는 헬레스폰토스에서 인도에까지 지배하는 왕중왕이라고 과시했지만, 사실 그 내구력은 형편없었다는 것이 몸젠의 해석이다. 그렇기에 단단한 응집력으로 무장한 로마가 부각되자, 셀레우코스 왕국은 그 흐름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거대한 영토를 지닌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그네시아 전투 한 번의 패전으로 계속 쇠퇴일로를 걷다가 힘없이 무너진 것에 반해, 로마는 칸나이 전투나 아라우시오 전투 등 수많은 패전을 겪었어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패전을 곧바로 만회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보다 훨씬 오랫동안 강건히 존속한 사실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견해다.
그러나 상술된 견해는 100년 전의 몸젠이 피력한 것으로서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많이 이뤄진 현재에 와서는 설득력을 상당히 많이 잃어버린 학설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에도 중동에서 계속 패권을 유지했으며 파르티아나 박트리아, 아르메니아 등의 국가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내전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지 못했다. 안티오코스 3세 사후에 즉위한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의 노력으로 제국은 다시 중흥을 맞이했으며 안티오코스 4세의 정책과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은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난 팔레스티나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제국이 정말 쇠퇴하게 된 것은 안티오코스 4세가 전염병으로 급사하면서 일어난 내전이 끝도 없이 일어나 국력을 박살낸 것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안티오코스 7세의 파르티아 격퇴와 중흥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제국은 마지막 희망을 잃고 몰락했다.
4. 지방 행정 / 법 제도
라이벌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를 중심으로 제국을 운영했다. 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바르바로이와 외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대단했으며, 토착 피지배층과 공감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어서 항상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제국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고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토착 엘리트들을 통치의 하부 구조로 적극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 결과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들의 직접적인 통제력은 헬레니즘 문화 시설과 수비대가 있는 도시 지역에 한정되었고, 그 외의 지역은 마을 촌장이나 부족장, 지방 귀족들을 통해 간접 지배했다. 심지어 토착 세력이 강한 곳, 예컨대 파르스 등지에서는 아예 속국과 비슷한 왕조 체제가 자리 잡기도 했다.[21]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망과 정부 조직이 계속 유지되었고 페르시아인 관료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페르시아인 지방관, 부족장, 왕족들도 충성과 봉사를 대가로 그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산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 제국은 대제의 정책을 그대로 실시해 페르시아 제국의 제도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 그리스의 제도를 이식해서 행정 체제를 세웠다. 그래서 행정면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의 조세 및 지방 행정 제도를 많이 답습한 편이었다.그리고 제국 정부는 국토를 페르시아의 거대한 지방 행정 단위인 '사트라피'로 분할하고 각 지방에 사트라프를 파견했다. 사트라프는 속주를 관할하는 총독으로서 징세권과 군사권을 행사하고 평소에는 행정 처리·병력 양성·평화 유지 업무를 수행했으며 휘하의 군관과 행정관, 재무관과 법관들이 사트라프를 보좌했다.
거대한 제국을 안티오키아 한 곳에서 통제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뿐더러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제국은 서방에는 사르디스, 동방에는 셀레우키아를 중심지로 삼아 각각 동·서방의 영토를 관할하고 행정력을 보조했다. 특히 셀레우키아는 동방의 각 지역과 대도시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동방에는 엑바타나, 헤카톰필로스, 라가이와 같은 대도시에 왕실 조폐소와 궁전을 건설하고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을 계승해서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동방 지역에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 '아파메아'들을 건설하고 곳곳에 군사 식민지를 조성했다. 이러한 신도시 건설을 통해 제국 정부는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고 통치력을 강화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지역을 개발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다만, 이러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통치력은 상술했듯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군사 요충지와 대도시, 주요 육상 교통로가 있는 지역에서만 강할 뿐이었다.
사트라프가 총괄하는 '사트라피' 지방에는 하위 행정 단위로 히파르코스(Υπάρχος)가 담당하는 Υπαρχία, 에파르코스(Έπαρχος)가 담당하는 ἐπαρχία를 설치해서 지역을 관리했으며 도시보다 규모가 작은 향촌 지역은 행정력이 약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고 세금 할당량을 부과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향촌 지역은 촌장(Komarchos)과 유력자들이 다스렸고, 주민들이 마을 집회와 읍 집회 같은 민회를 결성해서 현안들을 처리하고 결의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군관인 천부장이 세금을 걷은 사례가 있기에 천부장들이 지역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민족 공동체(πολίτευμα)는 부족장(Etnarchos)이나 귀족들이 통치하거나 공동체에서 결성한 위원회가 관리했다.
추가적으로 이란 고원이나 다른 동방 지역에 관한 사료는 없어서 연구가 어려우며, 사료가 남아 있는 서방 지역에서도 지역마다 체제나 제도를 달리 적용했기 때문에 섣불리 셀레우코스 제국의 체제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법 제도는 그리스 법과 페르시아 법을 함께 쓰는 이중 체제였다.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리스 법을 적용하고 그리스인 법관이 사건을 심리하게 했으며 반대로 페르시아인들과 다른 동방인들에게는 지역 관습법과 페르시아 법을 적용하고 모든 법적 분쟁과 사건은 지역 위원회에서 처리하게 했다. 대체로 지방과 향촌 지역은 페르시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의 법이 그대로 작동했으며 도시 지역은 그리스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 법을 많이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은 그리스 민법을 적용하고 그리스인 법관이 심리하게 해서 민족 간의 갈등이 벌어지면 그리스인이 좀 더 유리한 구조였다. 그리고 헬레니즘화가 이뤄짐에 따라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일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끼리의 계약이나 법적 분쟁을 그리스의 법으로 처리하는 일도 생겨났다.
4.1.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도시들은 '폴리스' 지위를 받은 주요 대도시와 헬레니즘 제국들이 새로이 건설한 그리스계 신도시, 고대부터 존속한 토착 도시와 동맹 도시로 분류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제국의 모든 도시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과 토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22] 그리스 도시들은 민주적으로 행정관과 민회를 구성해서 도시의 현안을 처리했으며 민회는 인구 부족에 고심하는 국왕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신도시에 이주민을 보내주거나 소아시와 페르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르테미스를 위한 기념 제전에 참여하는 등, 이 시기에도 매우 능동적이고 잘 운영되었다. 그리고 국왕은 도시와 이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토지와 노예를 하사해 세금을 걷고 군대를 유지했으며 이를 이용해서 경제 활동을 촉진하고 더 많은 세수를 얻으려 했다.[23] 이러한 토지 하사는 정치 · 군사적 목적보다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크게 작용했다.
'폴리스' 지위를 얻은 대도시들은 정치적인 위상이 높았고 폭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경제적으로는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크게 발달해서 지역 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당시에는 자유와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한 화폐 발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폴리스에는 상당한 숫자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거주했지만, 토착민 인구도 많은 편이어서 제국 정부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페르시아인들에게 다른 민족들보다 더 높은 지위와 정치 조직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서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폴리스들은 국왕으로부터 면세나 감세 혜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에게 폴리스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많은 수의 도시들이 자기 도시의 명예를 드높이고 경제적 혜택 부여와 정치적 위상 강화를 위해 폴리스로의 승격을 소망했다. 추가로, 동맹 도시들도 국왕으로부터 화폐 발행권과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 받았다.
지방 행정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그리스계 신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세운 '알렉산드리아'들과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들이 세운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 '아파메아'와 같은 도시들과 군인과 퇴역병의 정착지가 발전한 것들이었다.[24]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들은 아나톨리아와 코엘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집중되어 있으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도 일부 건설되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가 페르시아 서부와 중부에 세운 신도시들은 헬레니즘 문화와 시민권 제도, 그리스 법 제도와 종교에 기초한 체제를 이루었고 제국 동방 지역의 경제 · 문화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러한 신도시의 시민들은 사회적 권리를 부여받고 각종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제국 정부는 신도시들을 발전시켜서 통치력을 강화하고 경제 성장을 도모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로부터 이주민들을 끌어들이고 군인과 퇴역병들을 정착시켰으며 지원금과 토지, 노예를 지급했다. 이러한 정책은 성공적이었으나, 통치력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제국 정부는 비그리스계 토착 도시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하고 전통과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허용했다. 토착 도시들은 관습법과 페르시아 법을 집행하고 계약을 체결했으며 토착 종교 시설의 재건과 확장, 자체적인 토지 소유도 가능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의 헬레니즘화 정책으로 인해 토착 도시에도 그리스인 공동체가 생겨나고 그리스풍의 체육관, 극장, 신전, 학교들이 건설되는 등, 그리스와 동방의 공존이 이뤄졌다.[25]
셀레우코스 제국의 도시와 도시 정책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국왕이 도시에 부여한 자치권은 제한적이었고 폴리스가 아닌 도시는 그리스인이나 토착민 총독의 감시를 받았다. 그리스계 도시의 민회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위상을 잃어버려서 군주의 개입에 무력하고 총독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토착 도시들을 차별해서 이들이 제국에 헌신한 것에 대해서 정치적 · 경제적인 보답을 해준다거나 그리스 도시만큼의 정치적 위상을 부여해주지는 않았다. 이러한 차별은 제국에 협력한 토착민 상류층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고 토착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등, 장기적으로 제국에게 불안 요소가 되었다.
5. 세금 제도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그 후계자들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그 땅을 관리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전에 동방을 통치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세금 제도와 재정 운용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재원을 확보하고 영토를 관리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은 어느 정도의 변화도 일으켰다. 통치의 기반인 군사력과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이전에는 현물로 걷던 조세를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인민들로부터 화폐를 징수했다.[26] 그리고 여러 가지 부가세를 제정하고 통제 경제 체제를 구축해서 국가 경제를 강하게 통제했다.
제국 정부의 주요 세입은 은광을 비롯한 광산들이 많았던 소아시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동방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들, 토지가 비옥하고 수확량이 풍족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징수하는 세금이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샤트라피와 관료에게 지급하는 급료, 자문회 유지 비용, 신전과 도시에게 주는 기부금, 도시 건설과 이주민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정을 지출했으나 전체 지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군비였다. 제국은 평소에도 전체 재정의 50% 이상을 군비로 지출하고 전시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소모했다. 추측컨대,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서 전쟁이 잦았던 만큼, 군비로 인한 재정 지출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에 파견된 샤트라프는 군주에게 공물과 세금 징수 현황을 보고하고 징수한 현물과 화폐를 저장했으며 샤트라프 휘하의 재무 관료들은 속주의 재정과 각 지방에 산재한 왕령지 관리를 담당했다. 그리고 제국은 관료와 군인들에게 화폐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했다. 이러한 샤트라피 재정 제도와 급료 · 수조권 지급 제도는 비록 완전한 수준은 아니지만, 제국이 페르시아의 제도를 어느 정도 계승한 것이었다.
정부와는 별도로 재정을 꾸려나갔던 왕실은 왕령지의 농장과 삼림, 광산에서 보내오는 연공과 물자로 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왕실은 배상금 청구와 전리품 확보, 왕령지 매매, 특별세 징수, 도시에 특허장을 부여하고 돈을 받는 등의 방식을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왕실의 수입은 연공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러한 방식으로 얻는 돈은 임시 수입에 지나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은 토지세였다. 제국 정부는 모든 토지의 농업 · 목축 생산력을 평가해 할당량을 정하고 왕령지와 신전, 도시와 마을, 지역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 단위로 세금을 부과했다. 제국은 영토가 넓어서 각 지역별로 수확량과 생산품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에 관료들은 이러한 차이를 고려해서 세금을 할당하고 징수는 지방 관료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가축 보유량에 맞춰서 유목민과 가축을 가진 인민들에게 목축세를 징수하고 왕령지에 소속된 목초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용료를 걷었다. 일정 연령이 된 남성에게는 인두세를 부과하고 기술자 계급에 대해서는 공방의 기술자 숫자에 맞춰 인두세를 걷었다. 그리고 포로와 노예 노동을 쓰긴 했지만, 자유민들에게 부역을 부과해서 운하와 수로를 수리하고 도로망을 보수하는 등의 공공 사업도 진행했다.
제국 정부는 상공업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세금을 징수했다. 각 지방과 하천을 통과하는 상품, 항구에 입항한 선박, 도시에 들어오는 상품에 통과세와 관세를 징수하고 소금과 목재, 금속, 사치품 등의 재화에 간접세를 매겼다. 그리고 도시에서 상품을 매매할 때는 상품세, 각종 상거래와 노예 등록, 부동산 거래를 할 때는 상업세를 징수했다.[27] 그밖에도 신자들과 부유층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는 신전들에는 신전세, 군주가 도시를 방문하면 그 도시의 인민과 지배층, 통치자에게서 접대세를 징수해서 체재 비용을 충당했다.
관료 숫자가 부족하고 관료제가 미성숙해서 확실하게 전체 지역을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제국의 인구는 1천만 ~ 3천만 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적당히 걷어도 상당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대한 제국의 수많은 지방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세금은 극도로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했다. 그래서 세금 제도의 운영과 관리는 정부에게 비정상적으로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군주들은 관리를 포기하고 적당히 징수하거나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기적인 감세와 면세 조치를 취해서 스스로 부담을 '줄였다.'[28] 그리고 군주들이 조세 금납화를 밀어붙이긴 했지마는 도시의 영향권 밖에 위치한 향촌 지역들은 물물교환과 현물세 납부가 일반적이었다.
6. 경제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인도까지 이르는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한 덕분에 헬레니즘 시대에는 인더스강에서 나일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교역권이 형성되고 페르시아 제국이 저장해두던 막대한 귀금속이 시장에 풀려서 물가가 상승하고 투자와 투기 행위가 늘어났다. 그리고 화폐 경제가 중동 전체에서 일반화되고 공공 은행들이 당대의 대표적인 신용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투기 · 매점매석 · 과열 경쟁 · 대기업 경영 · 보험과 광고의 성장과 같은 새로운 산업과 다양한 상업 활동들이 성행했다.
제국 정부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자들에게 편의 시설을 제공했다. 항만 시설을 개수하고 해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전함을 파견했으며, 도로를 개설하고 운하를 건설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마을과 도시에 국영 공장과 점포를 세워서 재정 수익을 늘렸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생산·교역·재정 체계가 성장하고 국가가 경제계의 큰 손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헬레니즘 시대의 번영에는 대도시의 성장이 영향을 미쳤다.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상공업이 성장하고 정부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자영농들이 소작농이나 예속농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29]
상술했듯이 헬레니즘 시대는 번영했으나, 번영은 주로 지배자, 상층 계급, 상인들에만 누렸을 뿐,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에게까지 그 이익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3세기 아테네에서는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50% 이하로 떨어지고 생활비가 크게 상승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는 실업 문제가 심각해서 정부가 수많은 빈민들에게 곡물을 무상으로 배급해야 했다. 이로 인해 헬레니즘 세계에서 노예제는 쇠퇴했다. 이러한 현상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임금이 크게 하락해서 자유민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노예를 구입하는 것보다 더 저렴해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제국 경제의 근간은 농업이었다. 강수량이 충분한 지중해 일대와 구릉 지역은 건지 농업, 강수량이 부족한 지역은 관개 농업 중심이었고,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 옥수스 강 일대는 운하와 강의 수로를,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지하수로망인 카나트 제도를 운용했다. 목축업은 제국 전체에서 이뤄졌지만, 국경 지역과 제국 내부의 유목민들이 목축업의 핵심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토지 소유가 집중되고 농업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군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왕령지로 만들고 측근들에게 하사하거나 소작농에게 임대했다. 왕령지를 경작할 의무를 맡은 헬레니즘 시대의 소작농들은 추수 이전까지는 경작지를 떠나지 못하고 국왕이나 지주가 지대로 받은 곡식을 시장에서 최고가로 판매할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곡식을 처분해서도 안 되었다. 소작농 중 일부가 파업을 일으키거나 탈출을 시도하면, 그들은 모두 세습적인 예속농이 되어 토지에 결박당했다. 독립적인 소농들 중에 상당수는 지주들과의 경쟁에 밀려 빚을 졌고, 빚을 갚지 못하면 예속농으로 전락했다.
상공업은 도시와 도시 근교, 향촌 지역에서의 식료품, 생필품, 각종 수공업 제품 거래가 주를 이뤘으며 사치품을 사고 파는 원격지 무역도 발달했다. 원격지 무역은 향신료와 상아, 값비싼 원목과 석재, 비단 등등의 사치품들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 인도, 중앙아시아 등등 여러 지역과 교역을 진행했다.[30] 그리고 해상 무역은 운임이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해서 활발하게 이뤄진 반면, 육상 무역은 운임이 비싸다보니 원격지 무역은 해도 제국 내부에서 각 지역들끼리 교역하는 것은 미진했다. 도시에서는 상설 시장은 농촌 지역에서 열리고 화폐로 재화를 교환했다.
통치의 기반인 군대에게 급료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제국은 세금을 계속 화폐로 걷어야 했고, 그래서 화폐는 제국 경제의 핵심이었다. 초창기 제국에서 유통하던 화폐는 대제의 장군들이 페르시아 왕중왕들의 재보를 획득한 것을 대제가 직접 화폐로 주조하거나 대제 사후에 주조된 것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주로 은화를 발행하고 금화는 아주 적은 양을 발행했는데, 이전에 발행한 화폐일지라도 회수하지 않고 자유로이 통용시켰다.[31] 그리고 타국에서 주조한 화폐와 아테네와 같은 다른 국가에서 주조한 표준 화폐도 허용했다.
통화 발행은 평시나 전시에 재정을 마련할 때나 화폐가 부족해서 금고가 충분치 않을 때 시행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은화 함량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서 BC 164년까지 50%로 상승했다. 그러나 경쟁국과의 전쟁과 영토 상실로 인해서 함량이 낮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져서 지속적으로 가치가 떨어졌다. 이 때문에 타국에서 발행한 고순도의 중량 화폐들이 제국에서 축장되는 현상이 벌어졌지만, 경쟁국의 왕들은 자국의 통화를 수출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모략을 쓰지는 않았다. 그들은 경쟁국의 화폐를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화폐로 재주조해서 선전용으로 쓰기만 했다.
7. 군사
소수의 지배 엘리트가 인종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다수의 토착민들을[32] 지배하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군사적 위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국왕의 권위는 군사적인 업적과 군 지휘력에서 나왔다. 그래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각지에 신도시와 군사 식민지를 건설해서 통치와 문화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대표적인 군사 식민지가 퇴역병 정착지로 시작한 시리아 남부의 두라-에우포로스이다.
제국은 이런 도시에 용병과 이주민, 퇴역병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키고 이들에게 토지나 경제적 특권, 수조권을 주는 대가로 이들을 전시에 동원하고 군역을 세습하는 의무를 부과했는데, 이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또는,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부르며 이들은 제국 군사력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에서 오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마그네시아 전투 같은 군사적 실패로 인력이 줄어들고 그리스 인구가 많은 아시아 지역을 상실해 제국의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시아 출신들도 클레루코이로 선발했으나, 장교나 정예 부대 자리는 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독점하였다.[33]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 장비나 편제는 거의 대부분 알렉산드로스 시절 마케도니아의 것을 답습하였으나, 비슷한 마케도니아식 군대를 가진 다른 디아도코이 국가들과의 전쟁 때문에 군대를 더욱 중장화되었다. 페제타이로이들이 사용하는 사리사의 길이를 늘리고 더 큰 방패를 사용하거나, 헤타이로이들의 방패나 다리 보호대, 마갑 같은 장비들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경무장 투창병이었던 펠타스트들도 펠타 대신에 더 큰 방패인 투레오스를 사용하고 갑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이를 투레오포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체인메일을 도입하고 로마군의 군제를 일부 도입했다. 사람들은 사슬 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보고 흉갑을 입었다 하여 토라키타이라고 불렀고, 큰 방패와 사슬 갑옷, 칼을 쓰는 모습이 로마 군단병과 닮았다고 해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로마화"되었다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000명 정도의 병사(아기라스피데스)만이 로마식의 조직으로 재편되고 무구를 지급 받았을 뿐이며,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주축은 페제타이로이였다.[34]
셀레우코스 제국은 팔랑크스 특유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부족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페르시아 · 카르마니아 · 뮈시아 · 메디아 · 아라비아에서 기병대와 궁병대, 경보병대를 비롯한 많은 보조군을 데려왔다.[35] 이 동방인 군대는 봉신군 · 동맹군 · 용병 · 징집병 · 상비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했으며 다헤족과 같은 이란계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자체적으로 그리스인들을 훈련시켜서 궁기병 전력을 갖추기도 했다.
제국은 이란 고원과 스텝의 유목민들과 접촉한 뒤부터 그들의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했으며 직접적인 도입 계기는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으로 추측된다. 또한 셀레우코스 1세가 찬드라굽타로부터 코끼리 500마리[36] 를 받은 뒤부터 전투 코끼리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코끼리에게 갑옷을 입히고 상교를 올려 무장을 강화하고 코끼리 호위용 부대를 따로 조직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경쟁 상대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왕국이 인도에서 코끼리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코끼리 수입 봉쇄 조치를 취해 이집트가 군사력을 강화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코끼리 수입처를 아프리카로 바꾸어야 했고, 시리아 전쟁에서 덩치가 작은 북아프리카 코끼리들이 덩치 큰 인도 코끼리에게 겁을 먹어 도망치는 바람에 전투에서 고전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어야 했다. 추가적으로 제국은 낫전차를 실전에 투입했으나, 페르시아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효용성은 별로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들을 묘사한 삽화들링크
8. 사회/문화
초창기 셀레우코스 왕조는 특히 헬레니즘 문화의 전파에 정력을 쏟았는데, 이는 특히 도시 건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신도시를 건설한 경우도 있었고, 원래 있던 마을을 크게 확장하여 도시를 조성하기도 했으며 원래 있던 도시를 이름만 그리스 식으로 바꾸기도 하였다.[37] 이런 식으로 여러 곳에 거점 도시들을 만들고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을 정착시켜 헬라스식 문화를 뿌리내리는 동시에 헬레니즘화된 토착민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또한 토착 엘리트들에게 헬레니즘 양식의 옷들을 하사하고 그리스식 이름을 주는 등 문화적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왕조 초창기에만 이루어졌다. 우선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양강 체제가 이루어지면서 둘이 박터지게 싸우느라 왕들이 도시 건설을 할 상황이 못 되었다. 게다가 사방에서 적이 쳐들어와 영토가 시시각각 축소되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본토도 인구가 많이 유출되어 더이상 뽑아낼 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신도시 건설은 급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 영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화를 통한 헬레니즘 정책은 다른 곳에서는 점차 사라져 갔지만, 그 대신 박트리아 왕국이 바톤을 넘겨받아 헬레니즘 문화를 상당히 융성하게 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사회나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신라 시대 불상과 인도의 간다라 불상을 비교하며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박트리아 왕국의 영향이다. 또한 왕조의 중심지였던 시리아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헬레니즘이 확고한 대세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이후 고대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을 거쳐 이슬람 시대까지 시리아 및 지중해 연안 지대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마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마그네시아에서 꺾을 때가 아이러니하게 셀레우코스 왕조의 절정기였고 그 중심에는 대왕이라 불리는 안티오코스 3세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중에 가장 국력도 강했던 나라였던지라 로마가 제정으로 변모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의례를 많이 본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까지도 비슷한 의례가 전해졌다고 한다.
9.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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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이네 그리스어로 쉬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시리아의 왕이라고 불렸다.[2] 아르케 셀레우케이아 [3] 셀레우키아 임페리오[4] 니카토르 승리자, 전승왕 니케 생각하면 된다.[5] Coele-Syria, 현재의 다마스쿠스 근처 지역을 가리킨다.[6] 이는 단순한 공격이나 약탈이 아니라 대규모 이주 수준으로, 여러 켈트 부족들이 아나톨리아 중앙의 갈라티아 지역에 정착하여 자기네 땅으로 삼았다. 이들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는데, 말 그대로 동부 지중해의 거의 모든 전투에 참여했다. 심지어 일부는 악티움 해전까지 참여했다고 한다.[7] 이집트 섭정 소시비오스의 거짓 항복에 낚인 것 & 전투에서의 삽질[8] 이때 예르반두니 왕조(Երվանդունիներ)가 패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에 충성하는 아르타쉐스라는 아르메니아인이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0여 년 후 아르탁시아가 반란을 일으켜 아르탁시아 왕조(Արտաշեսյան)를 세워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배권을 상실했다.[9] 파르티아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박트리아 군대 역시 초전에 무찔렀으나, 파르티아 왕가는 도망갔고, 박트리아는 수도 박트라에 틀어박혔으므로 수년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파르티아는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안티오코스에게 복종하기로 하고, 박트리아는 종주권을 인정받고 왕족 통혼을 했다.[10] 이때 기병 전투에서 카타프락토이의 활용이 대성공을 거뒀고,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헤타이로이도 중무장화된다.[11]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1만 6천 명이 궤멸되었으며, 전투 코끼리 부대도 완전히 해체되었다.[12] 말 그대로 신전을 털어버렸다.[13] 이때 안티오코스 4세와 로마 사신의 회견 과정이 안습인데 물러나라는 로마 사절의 요구에 안티오코스 4세가 신하들과 이야기 좀 해보겠다더니 로마 사절이 대뜸 그 자리에서 안티오코스 4세 주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 선에서 나오면 로마랑 전쟁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자 안티오코스 4세는 몇 번 사정하다가 결국 사신이 그 선을 다 그리기 전에 즉시 철수해 버렸다고 한다. 일국의 왕에게 너무 잔인했다고 로마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14] 군주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신들에게 제물을 헌납해 토착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는 스스로 페르시아의 전통을 따른 왕임을 내세우고 지구라트를 유지·관리했으며 신년 축제인 아키투 의례에 참여했다.[15] 알렉산드로스 대제 치세에는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이 왕을 자신들의 대표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이들에게 전제 왕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식 예법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그의 장군들이 반발한 것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절을 하는 행위를 오로지 신에게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식으로 인간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16] 시조 셀레우코스 1세는 자신이 아폴론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증거로 닻의 형상(보통 셀레우코스 왕조가 등장하는 게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문장으로 등장)을 한 모반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했다.[17] 경쟁 세력인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왕조의 창건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신적 존재로 만드는 군주 숭배 사상을 정책적으로 퍼뜨리고 고대 이집트 왕조의 파라오들처럼 근친 결혼을 해서 이집트인들의 민심을 얻으려 했다.[18] 이들은 '친구' - '영예로운 친구' - '최고의 친구' - '최고의 영예로운 친구'라는 4단계의 계급으로 분류하며,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왕관까지 허락했다. 그리스어로는 필로스라고 부르며 복수형은 필로이다.[19] 안티오코스 3세의 치세 초반에 중앙에서 국정을 농단하다가 안티오코스의 역공에 숙청당한 헤르미아스, 이런 헤르미아스와 갈등을 빚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한 지방 총독들인 소아시아의 아카이오스, 페르시아와 바빌로니아의 알렉산드로스&몰론 형제의 반란이 대표적인 사례이다.[20] 왕비와 후궁 가문간의 다툼도 벌어졌기 때문에, 왕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을 공동왕에 임명해서 계승 분쟁을 막으려 했다.[21] 이런 속국 왕조 체제는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어진다. 특히 페르시아 지방의 군주들은 "프라타라카"라고 불렸는데,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할 정도로 자치권을 가졌다.[22] 그리스-마케도니아계 시민들은 대부분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 토지들은 토착민 예속농들이 경작해주었다.[23] 특히나 폴리스 같은 대도시들이 노예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24] 제국 정부는 신도시를 지으면서 원래 있던 토착 도시의 인구와 토지를 강탈하기도 했다.[25] 안티오코스 4세는 헬레니즘화를 받아들이는 토착 도시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하여 헬레니즘화를 독려했다.[26] 화폐 경제와 조세 금납화로의 전환은 군주들이 도시화 정책을 실시해서 화폐 경제가 발달한 도시들이 많이 생긴 덕분에 가능했다.[27] 노예를 매매할 때는 상업세와는 별개로 노예세를 매겼다.[28] 정치적인 지지가 필요하거나 지역민들의 호의를 사기 위한 목적으로도 감세 · 면세조치를 해주었다. 또한,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대해서도 감세와 면세 조치를 내렸다.[29] 그래도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향촌 지역에서 살았다.[30] 이렇게 거래한 사치품들은 주로 수도인 셀레우키아로 유입되었다.[31] 제국이 발행한 금화들은 선전용으로 쓰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32] 게다가 땅이 워낙 넓다 보니 피지배 종족도 매우 다양하다. 수천 년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 이집트인들만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다.[33] 그래도 셀레우코스 제국은 라이벌인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보단 상황이 훨씬 좋아서 페르시아를 완전히 상실한 안티오코스 7세의 치세에조차 몇 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그리스계 도시와 그리스인의 숫자가 적고 그리스와의 거리도 멀어서, 그리스계 도시들이 많고 그리스 본토에서 대규모 이주민을 받았던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한 군사력 약화에 시달렸다.[34] 출처: Hellenistic infantry reform in the 160's BC[35] 라피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아랍인 병력을 1만, 카르마니아인 군대를 5천씩이나 끌고 왔다.[36] 사실 이 코끼리들은 이미 늙어버린 코끼리들로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많은 수가 늙어 죽었다.[37] 마케도니아나 북부 그리스 지명 (가령:에데사), 또는 왕가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은데... 밑을 봐서 알다시피 왕의 이름이 태반이 셀레우코스 아니면 안티오코스다. 그래서 결과는? 안티오키아, 셀레우키아, 초대(?) 왕비인 아파마를 딴 아파메아 등 똑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가 너무 많아 머리를 아프게 한다. 또한 그리스 지명을 딴 도시들 역시 상당히 헷갈리게 한다.[38] 이름은 아파마(apma) 정확히는 박트리아 계열, 대부분의 마케도니아 인들이 알렉산드로스 시절 결혼했던 페르시아 여인과 이혼했지만, 셀레우코스는 이혼하지 않았고 여왕으로 살았다.아들 안티오코스 1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도시를 건설했다.[39] 알렉산드로스 발라스, 안티오코스 7세, 데메트리오스 2세의 왕비 & 안티오코스 6세, 셀레우코스 5세, 안티오코스 8세, 안티오코스 9세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