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드 브래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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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투수. 커리어 내내 선발 등판 없이 불펜 투수로만 등판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찾기 힘든 정통파 언더핸드 스로 불펜 투수이며, 손이 거의 땅에 닿는 극단적인 투구폼으로 유명하다.
채드 브래드포드의 아버지는 좌반신이 가끔씩 마비되는 질병이 있었는데, [1] 이 때문에 아들과 캐치볼을 할 때 항상 언더핸드로만 던졌다. 이 투구폼이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고등학교 때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가 코치가 투구폼에 대한 약간의 조언을 해준 후 성적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199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그를 지명했으나 대학 진학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리고 2년 후 1996년 드래프트에서 다시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그를 지명했고, 정식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단 후 2년이 지난 1998년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었다. 이 시즌 성적은 29경기 30.2이닝 2승 1패 ERA 3.23. 이듬해인 1999년엔 영 좋지 않은 모습인지라 트리플 A에 머물렀고, 2000년 9월에야 다시 콜업되어 12경기 ERA 1.98로 활약하며 디비전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시즌 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포수 미겔 올리보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오클랜드로 이적했다.
당시 채드 브래드포드는 투구폼이 특이하다는 세일즈포인트를 제외하곤 그냥저냥한 불펜 투수 정도였고, 지나치게 느린 구속과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단점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허나 오클랜드는 그 유명한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 전략으로 저비용 고효율 선수들을 영입하고 있었고, 채드 브래드포드도 그 선수들 중 하나였다. 특이한 투구폼의 희소성, 뛰어난 땅볼 유도 능력[2] 과 우타자에겐 강하다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 한 것. 그리고 그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불펜의 핵으로 맹활약했다.
2001년엔 35경기 36.2이닝 ERA 2.70으로 평범해보였으나, 2002년 우타자 상대 스페셜리스트로 75경기 75.1이닝 ERA 3.11을 기록하며 불펜의 노예가 되었고, 2003년에도 72경기 77이닝 ERA 3.04로 맹활약했다. 이 중 2002년의 모습을 담은 게 영화 머니볼. 그러나 2004년 68경기 59이닝 ERA 4.42로 다른 시즌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등 쪽에 부상이 있었다. 결국 2005년 5월 7일 등 수술을 받게 되었고, 7월에 보스턴 레드삭스의 외야수 제이 페이튼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2005년 시즌 후 FA가 되어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었다. 마침 오클랜드 시절 투수 코치인 릭 피터슨도 메츠에 있었고, 그 덕인지 2006년 시즌은 70경기 62이닝 ERA 2.90으로 부활했다. 시즌 후엔 다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3년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2007년 78경기 77이닝 ERA 3.34로 활약했고, 2008년에도 활약을 이어가던 중 5월 31일 매니 라미레즈의 통산 500호 홈런을 허용했다. 이 시즌 피홈런이 단 3개였는데 불운하게도 그 중 하나가 매니의 500호 홈런이었던 것. 같은 해 8월 7일에 탬파베이 레이스로 이적했고, 그 해 월드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기도 했다. 월드 시리즈 기록은 2이닝 1피안타 무실점.
2009년 시즌 전 팔꿈치 부상을 입어 DL에 올랐고, 겨우 회복하고 복귀했으나 이번엔 등 부상이 도지는 바람에 또 쉬어야했다. 첫 등판이 6월 30일에야 이뤄졌고, 그나마 남은 시즌에서도 10.1이닝 동안 22피안타를 허용하는 등 부진이 계속되자 브래드포드는 은퇴를 결심했다. 시즌 후 언론과 메이저리그 팀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은퇴해서 미시시피에 있는 대학 팀[3] 의 코치로 부임했다.
극단적인 언더핸드 투수인 만큼 구속도 상당히 느렸다. 최고 구속이 134km/h 정도고, 평균 구속은 120km/h 정도로 상당히 낮다. 스카우터들에게 저평가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머니볼에도 출연해 투수 쪽 주연급 분량을 자랑했다. 담당 배우는 케이시 본드. 국내에서도 영화를 통해 인지도가 꽤 높아진 듯. 2011년 정대현이 볼티모어로 이적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미국에도 이런 언더핸드 투수가 있었다는 식으로 잠깐 우리나라 언론에 나왔다. SK의 박종훈이 처음 나왔을 때 "한국의 채드 브래드포드"라며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상 90~00년대 이후 채드만큼 극단적인 언더핸더면서도 성공하고 또 롱런한 투수가 없기에, MLB에선 거의 잠수함 스타일의 대표격이다. 미국에서 위의 정대현을 두고 '채드 브래드포드 스타일의 투수' 라고 언급할 정도이고, 현장이나 스카우팅 리포트 등에선 이미 언더핸드라는 말보다 '채드 브래드포드 스타일' 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일 정도로 거의 언더핸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수준.
독실한 침례교도로도 유명했다. 선술한 머니볼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4]
화질이 좀 나쁘긴 하지만 그의 투구폼과 플레이가 궁금하다면 여기를 보자.
1. 개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투수. 커리어 내내 선발 등판 없이 불펜 투수로만 등판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찾기 힘든 정통파 언더핸드 스로 불펜 투수이며, 손이 거의 땅에 닿는 극단적인 투구폼으로 유명하다.
2. 프로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채드 브래드포드의 아버지는 좌반신이 가끔씩 마비되는 질병이 있었는데, [1] 이 때문에 아들과 캐치볼을 할 때 항상 언더핸드로만 던졌다. 이 투구폼이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고등학교 때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가 코치가 투구폼에 대한 약간의 조언을 해준 후 성적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199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그를 지명했으나 대학 진학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리고 2년 후 1996년 드래프트에서 다시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그를 지명했고, 정식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2.2. 프로 시절
입단 후 2년이 지난 1998년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었다. 이 시즌 성적은 29경기 30.2이닝 2승 1패 ERA 3.23. 이듬해인 1999년엔 영 좋지 않은 모습인지라 트리플 A에 머물렀고, 2000년 9월에야 다시 콜업되어 12경기 ERA 1.98로 활약하며 디비전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시즌 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포수 미겔 올리보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오클랜드로 이적했다.
당시 채드 브래드포드는 투구폼이 특이하다는 세일즈포인트를 제외하곤 그냥저냥한 불펜 투수 정도였고, 지나치게 느린 구속과 좌타자에게 약하다는 단점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허나 오클랜드는 그 유명한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 전략으로 저비용 고효율 선수들을 영입하고 있었고, 채드 브래드포드도 그 선수들 중 하나였다. 특이한 투구폼의 희소성, 뛰어난 땅볼 유도 능력[2] 과 우타자에겐 강하다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 한 것. 그리고 그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불펜의 핵으로 맹활약했다.
2001년엔 35경기 36.2이닝 ERA 2.70으로 평범해보였으나, 2002년 우타자 상대 스페셜리스트로 75경기 75.1이닝 ERA 3.11을 기록하며 불펜의 노예가 되었고, 2003년에도 72경기 77이닝 ERA 3.04로 맹활약했다. 이 중 2002년의 모습을 담은 게 영화 머니볼. 그러나 2004년 68경기 59이닝 ERA 4.42로 다른 시즌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등 쪽에 부상이 있었다. 결국 2005년 5월 7일 등 수술을 받게 되었고, 7월에 보스턴 레드삭스의 외야수 제이 페이튼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2005년 시즌 후 FA가 되어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었다. 마침 오클랜드 시절 투수 코치인 릭 피터슨도 메츠에 있었고, 그 덕인지 2006년 시즌은 70경기 62이닝 ERA 2.90으로 부활했다. 시즌 후엔 다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3년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2007년 78경기 77이닝 ERA 3.34로 활약했고, 2008년에도 활약을 이어가던 중 5월 31일 매니 라미레즈의 통산 500호 홈런을 허용했다. 이 시즌 피홈런이 단 3개였는데 불운하게도 그 중 하나가 매니의 500호 홈런이었던 것. 같은 해 8월 7일에 탬파베이 레이스로 이적했고, 그 해 월드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기도 했다. 월드 시리즈 기록은 2이닝 1피안타 무실점.
2009년 시즌 전 팔꿈치 부상을 입어 DL에 올랐고, 겨우 회복하고 복귀했으나 이번엔 등 부상이 도지는 바람에 또 쉬어야했다. 첫 등판이 6월 30일에야 이뤄졌고, 그나마 남은 시즌에서도 10.1이닝 동안 22피안타를 허용하는 등 부진이 계속되자 브래드포드는 은퇴를 결심했다. 시즌 후 언론과 메이저리그 팀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은퇴해서 미시시피에 있는 대학 팀[3] 의 코치로 부임했다.
3. 기타
극단적인 언더핸드 투수인 만큼 구속도 상당히 느렸다. 최고 구속이 134km/h 정도고, 평균 구속은 120km/h 정도로 상당히 낮다. 스카우터들에게 저평가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머니볼에도 출연해 투수 쪽 주연급 분량을 자랑했다. 담당 배우는 케이시 본드. 국내에서도 영화를 통해 인지도가 꽤 높아진 듯. 2011년 정대현이 볼티모어로 이적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미국에도 이런 언더핸드 투수가 있었다는 식으로 잠깐 우리나라 언론에 나왔다. SK의 박종훈이 처음 나왔을 때 "한국의 채드 브래드포드"라며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상 90~00년대 이후 채드만큼 극단적인 언더핸더면서도 성공하고 또 롱런한 투수가 없기에, MLB에선 거의 잠수함 스타일의 대표격이다. 미국에서 위의 정대현을 두고 '채드 브래드포드 스타일의 투수' 라고 언급할 정도이고, 현장이나 스카우팅 리포트 등에선 이미 언더핸드라는 말보다 '채드 브래드포드 스타일' 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일 정도로 거의 언더핸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수준.
독실한 침례교도로도 유명했다. 선술한 머니볼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4]
화질이 좀 나쁘긴 하지만 그의 투구폼과 플레이가 궁금하다면 여기를 보자.
[1] 책 머니볼 에서는 뇌졸중으로 설명이 된다. 뇌졸중으로 인해서 불수가 되었고, 완치되어서 아들과 캐치볼을 하겠다는 집념으로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을 했지만 휴우증으로 인해서 팔을 어깨위로 들수는 없었다고 나와있다.[2] 머니볼에 따르면 마이너리그 시절 채드의 땅볼과 뜬공 타구의 비율이 5:1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자료에 걸맞게 피홈런도 적었다고 한다.[3] Hinds Community College. 커뮤니티 칼리지는 2년제 공립 대학으로 커뮤니티 칼리지 캠퍼스 소재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고등교육을 제공하고 직업훈련, 평생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4년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으며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교양과목 및 전공기초 등을 이수하고 학부 3학년으로 편입이 가능하다. 4년제 대학에서 1학년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학비가 저렴하고 학점 취득이 어렵지 않아 미국 학생 뿐만 아니라 한국인 유학생들도 커뮤니티 칼리지 수료 후 편입 트랙을 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 커뮤니티 칼리지 시스템 문서 참조.[4] 예를 들면 11장 인간적인 요소에선 "... 그가 언제나 가까이 하는 손때 묻은 책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한 권은 하비 도프먼과 칼 구엘이 쓴 <<야구에서 배우는 승부의 법칙>>이었고, 또 다른 한 권은 성경이었다."는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