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모

 


성명
최준모(崔俊模)
도호
화암(化菴)
본관
경주 최씨[1]
생몰
1875년 7월 30일 ~ 1953년 10월 29일
출생지
충청도 홍주목 고북면 신기리
(현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정자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지만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최준모는 1875년 7월 30일 충청도 홍주목 고북면 신기리(현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정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0년 동학에 입도한 뒤 1892년 삼례, 보은집회에 참여했다. 1909년 6월 천도교중앙총부 직무도사실 서무원에 선출되었으며, 1919년까지 금융관의 금고원, 봉도실의 좌·우봉도, 봉례, 감사원, 승례 등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5년 8월 천도교 내부의 분규를 수습하고자 구파 측에서 결성한 통일기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천도교 구파 간부로서 중앙종리원 포덕과 위원, 종법사, 상무종법사 등을 역임했다. 1927년 6월 신간회 경성지회 창립대회에서 준비우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지회 활동에도 계속 참여했다.
1930년 12월 신, 구파가 합동한 후에는 중앙종리원 대령사의 부대령을 지냈으며, 1932년 4월 신, 구파가 다시 분열되자 구파 중앙조리원에서 부대령과 성도관정에 선출되었다. 이후 구파 천도교회와 포덕원장, 장로, 대종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박인호 교주의 지시에 따라 조선을 일본에서 독립시키자는 내용의 특별기도회를 열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1938년 3월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1938년 4월 김재계, 한순희 등과 함께 해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70일간 구속되었다가 5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해 6월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망라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되자, 1939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천도교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배일의식을 접고 친일 인사로 변모한다.
1940년 4월, 천도교 신, 구파가 합동해 천도교연맹 이사진을 새로 정할 때 이사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신, 구파 합동으로 구성된 천도교총부의 현기사 상주선도사로 선출된 후 간부들과 함께 공동 명의로 <교발(敎發) 제2호>를 발표했다.

동아 신질서 건설, 도의적 신세계 창조, 팔굉일우의 사상 등은 세계 어떤 인류의 이성에도 적합한 보편타당한 이상인 것은 말할 것도 ㅇ벗거니와, 우리는 위로 이 정신을 봉대하고 안으로 신앙통일, 규모일치를 견고히 하여 영육쌍전의 생활을 도모하며, 나아가 교화를 주로하여 포덕천하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교회의 이상을 삼고자 한다.

또한 기관지 <신인간> 1940년 5월호에서 '합동에 관한 소감과 금후의 요망'을 주제로 원로 천도교 인사들에게 의견을 물을 때, 최준모는 "교회 합동으로 신동아건설, 도의적 세계의 실현이란 신기운을 만나 동귀일체가 되려면 먼저 국민정신총동원적 통일 밑에서 우리의 신앙을 통일하고 규모를 일치하게 해 나가야 한다"는 소망과 희망을 밝혔다.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선인에 대한 전시통제 강화를 위해 전시체제가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되자, 천도교연맹도 11월에 국민총력 천도교 연맹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최준모는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신인간>으로부터 새해를 맞아 '신년의 소감과 희망'을 묻는 질문을 받자 <천조(天助)를 받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제 신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첫째 국민된 의무로는 국민을 위하여 황군통태 국위선양을 축복하는 동시에 출정황군 성업 달성하는 데에 신의 도움이 있기를 기원한다.

같은 해 2월부터 3월까지 상주선도사로서 2차례 시국강연을 하여 신도들이 <선서문>을 철저히 숙지하도록 했다. 1941년 1월에 공표된 선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신국 대일본의 만세일계의 신통적 국체의 봉대를 무상의 광영으로 함. 이를 신의에 체하여 절대 신조로 함.

2.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 신이신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국가적 복지임을 신앙함.

3. 우리는 대정익찬의 정신을 체하여 신도 실천으로써 보국안민의 신조를 현현케 함.

4. 우리는 팔굉일우의 황도정신에 기초하여 세계 신질서 건설로써 포덕천하 동귀일체 이상 도달을 확신함.

1942년에도 새해를 맞이해 <신인간> 1월호에 '동귀일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세계 구질서를 대신한 영미의 운은 쇠퇴하고 세계 신질서를 대신한 우리 제국의 운은 성진할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다만 이 성운을 가장 빠르게 완전하게 맞는 준비로써 우리들 1억 국민이 동귀일체가 잘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오직 이것을 강조합니다. 1억 국민이 동귀일체만 되면 그 힘은 능히 저 서양에서 온 비풍처우를 소각하고 대동아의 동산에 평화의 꽃을 피울 것을 확신합니다.

1941년 9월 '임전태세의 정비, 강화'를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도로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해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4월 천도교총부 부교령에 선출되었고, 1944년 4월에는 천도교 규약이 수정된 뒤 상주선도사와 연성부 주임에 선출되었고, 조직 개편이 이뤄진 천도교 연맹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천도교 총부에서 교령 정광조의 명의로 발표한 <교발> 제3호 '애국헌금수지명세표'에 따르면, 6월 26일 현재 총 8만 4454원이 모금되었는데, 이중 도훈 최준모 관내에서 3115원 70전을 헌납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9월 천도교총부가 주관한 전국대회준비위원회 교약 기초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그해 10월 부터 1953년 3월까지 구파 및 합동 천도교총부의 장로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5년 1월 기미독립선언 기념 전국대회 준비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3년 10월 29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준모가 3.1 운동에 가담했으며 박인호의 멸왜기도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 점을 고려하여 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1] 관가정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