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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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活蘭
  • 본명: 김활란(金活蘭)
  • 창씨개명: 山岸活蘭
  • 1888년 9월 23일 ~ 1984년 2월 11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구한말,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본명은 김활란(金活蘭)으로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과 동명이인이다. 인천 출신, 이화학당 출신, 감리회 신자, 여성운동 등 많은 행적이 김활란과 겹친다.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최활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화기 신교육을 받아 이화학당 졸업 1호, 최초의 신식 헤어 스타일과 신식 결혼, 최초의 오르가니스트 등 선구적 신여성이었다.

2. 생애


1888년 9월 23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중등과 재학 중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07년 나가사키의 갓스이(活水)여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제1회로 졸업했다. 당시 학당 중등과 졸업증서 제1호를 받았다. 이후 이화학당의 교사 겸 총교사(교감)로 재직하다가, 이화학당 대학과가 신설되자 입학하여 1915년 제2회로 졸업했다.
1913년 목사 최병헌의 아들 최재학(崔在鶴)과 결혼하면서 성을 최씨로 바꾸어 활동했다.
유각경 등과 함께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설립에 참여하여 부회장을 지냈고, 유각경, 홍애시덕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설립에 참여하여 회장을 지냈다.
1933년 남편과 사별 후 정동제일교회 장로가 되었고 이화학당 이사도 지냈다.
일제 말기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를 맡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기독교 부문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다, 1963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84년 2월 11일 플로리다주에서 사망했다.

3. 기타


우리나라 최초의 오르간 연주자로 정동제일교회 오르간을 반주했다.[1]
1907년 일본에서 귀국할 때 당시 도쿄에서 유행하던 팜프도어(히사시까미) 머리를 하고 양말에 구두를 신고 발목이 보이는 짧은 검정 통치마를 입고 귀국하여 화제가 되었었다. 한국 여성 중 최초로 챙머리를 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 이화학당 제2대 메이퀸으로 뽑혔다.[2] 이후 메이퀸 선발이 없다가 1917년 제3대 메이퀸으로 뽑힌 인물은 김활란이다.
1913년 최재학과 결혼 시 정동교회에서 베일을 쓰고 웨딩마치를 울렸는데 최초의 신식 결혼식이었다.#
아들 최황은 한국인 최초의 공학박사이며, 딸 최규연은 이화여대 음대 교수를 지냈다.

[1] 최초의 피아노 및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는 이화학당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인 최애식이다.[2] 최초의 메이퀸은 이화학당 설립자인 스크랜튼 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