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애시덕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홍애시덕'''
'''洪愛施德'''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2년 3월 20일
경기도 수원군
<color=#fff> '''사망'''
1975년 10월 8일
서울특별시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애시덕은 1892년 3월 20일 경기도 수원군에서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였던 홍정후(洪正厚)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홍오순(洪五順)이었으나 부친을 따라 개신교로 개종한 뒤 성경에 나오는 에스델의 이름을 따 '홍애시덕'으로 개명했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1912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뒤 이화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여성 계몽운동과 문맹 퇴치운동을 전개했다. 1917년 이화학당 대학 본과에 입학한 뒤 1919년 유관순 등과 함께 비밀결사 여성동지회(女性同志會)를 조직, 여성운동을 폈다. 또한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에는 김활란, 김함라, 윤성덕, 김보린, 김애은, 김신도 등 이화학당 출신 교사 및 학생들로 구성된 7인 전도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해방, 민족계몽운동을 펴다가 일경에 붙잡혀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6월, 홍애시덕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초대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3년 9월 유각경(兪珏卿)·최활란 등과 함께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朝鮮基督敎女子節制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여성의 권익옹호 및 사회풍토 개선활동을 통해 여성의 지위향상에 힘썼다. 1926년 12월에는 김활란, 방신영(方信榮)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를 결성하고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협력을 모색하였다.
1927년 1월, 그녀는 재경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在京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의 발기총회준비위원에 선임되어 여성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을 쏟았다. 동년 4월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좌·우익 여성단체의 통일적 기관인 근우회(槿友會)의 결성준비에 참여하여 동년 5월 27일 창립총회에서 21명의 집행위원 중 한명으로 선임되어 김활란·이현경(李賢卿)과 함께 조사부를 맡아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1928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되는 감리교동아회(監理敎東亞會)에 김창준·조병옥 등 교계대표 8인과 함께 한국교회대표단(韓國敎會代表團)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이후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교회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매진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동료 김활란 등이 일제에 영합하여 정신대 참여 독려, 내선일체 찬양, 징병 독려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녀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8.15 광복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홍애시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