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梨花學堂'''
1. 개요
188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오늘날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
1885년, 미국인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북감리회의 선교 정책에 따라 조선에 발령받았고, 긴 항해 끝에 조선 땅을 밟았다. 그녀는 52세의 과부였으며, 자신의 아들인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에 왔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교육자였던 그녀는, 조선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스크랜튼 부인은 조선 소녀들과 여성들의 지위가 매우 열악하여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 이때까지 조선에 없었던 '''여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의사였던 아들이 세울 병원 부지까지 합쳐 서울 정동에 몇 채의 집을 사들였고, 여학교를 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서구개방이 이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서양식 교육과 문물이 낯설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던 데다가 조선인들은 낯선 서양인을 몹시 경계했고,[1] 이제까지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였기에, 쉽지 않았다.[2] 처음에는 단 1명의 여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을 정도로, 여학생을 모으는 일은 어려웠으며 학교는 몇 년간 재정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길에 버려진 여자아이, 기를 형편이 되지 않아 부모가 맡기고 간 여자아이, 학교 일꾼의 딸[3] 등이 스크랜튼 부인의 학생이 되었고 학교는 어느 정도 틀을 잡을 수 있었다.
이화학당은 멀리 떨어져 사는 소녀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소녀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며 모든 생활을 다 했다. 과목은 한글, 영어, 한문, 성경 등을 배웠다. 특히 이화학당의 영어교육은 이전까지 조선에서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기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영어 교육은 스크렌튼 부인이 우리말을 거의 못했기 때문에[4] 영어로 수업을 진행해야 해서, 의사소통을 위해 이는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또한 성경교육은 한국 최초의 채플 클래스이기도 하다. 초창기에는 빨간 옷감으로 지은 한복을 교복으로 입었다.[5] 점차 과목, 학제, 교사 등이 정비되고, 학교는 점점 발전했으며 처음에는 여학생들을 보내기 꺼려했던 조선인들도 점차 여자 아이들을 이 곳에 보내게 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를 치하하여, 친히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이화'라는 교명은 당시 학교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하얀 배꽃에서 따온 것으로, 배꽃처럼 희고 맑고 깨끗하라는 의미라고 전해진다. 스크렌튼 부인은 이화학당의 성공 노하우를 발판삼아 매향여학교와 삼일소학당을 세웠다.
이듬해인 1887년에는, 의료선교를 위하여 조선 여성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도 의사였지만, 남녀의 구별이 엄격한 당시 조선의 풍속 때문에 스크랜튼 부인은 미국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후 미국인 여의사들이 와서 조선 여성들을 치료했다. 이 병원은 일반 교육기관에서 전문학교와 대학교로 승격을 거쳐 바로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다. 이 후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 박에스더를 시작으로 조선인 여자 의사들도 많이 생겨나며 이 역할을 대체되었다.
스크랜튼 부인은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으로서 이후로도 이화학당 업무와 여학생들의 교육, 또한 기독교 발전에 많은 노력을 다했고 1904년까지 교장으로 일했다. 교장에서 퇴임한 후로는 이화학당의 성공 노하우를 발판삼아 수원에 삼일소학당이라는 여학교도 세웠고, 말년에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자신은 조선 땅에서 죽겠다는 신념이 확고해서 미국으로 가지 않고 1909년 소천했다. 일생토록 한국에서 헌신한 그녀는, 사후 한강변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1918년 보통과와 중등과/고등과를 이화여자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고등학교로 신설하였고 1925년 대학과를 전문학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켜 신설하였으며 1946년 대학교로 승격시켜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만들었다.
이 문서에 이화학당의 후신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화여자대학교에 가깝다. 이화학당에서 이화학원이 갈라져 나올때 이화여고도 함께 갈라져 나왔기 때문. 현재 법인 이화학당에 속한 학교는 이화여대와 이화여대 사범대학 부속학교들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화학당 소속인 이화여자대학교는 신촌으로 이사했고, 이화학원 소속인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만이 정동에서 원래의 이화학당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화여고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화학당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 열사 99주기 추도예배를 진행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나오는 목화학당의 모델이 이화학당으로 보인다.
2. 학교재단
이화학당의 중고교 과정이 1915년에 분리되고 1925년에 대학과가 전문학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격상되며 분리되었고 마지막까지 이화학당으로 남아 있던 유치원 사범과[6] 가 1928년에 이화보육학교로 개칭되었다. 194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가 재단법인 이화학당을 구성하였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따로 재단을 세워 두 학교가 분리되었다.
2.1. 학교법인 이화학당
- 이화여자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이화·금란고등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이화·금란중학교
- 이화여자대학교병설미디어고등학교
- 이화여자대학교병설영란여자중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
2.2. 학교법인 이화학원
예술학교인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도 본래 이화학원 소속이었으나, 두 학교는 이화학원에서 분리되어 따로 재단을 설립했다.
- 이화여자고등학교
-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 팔렬고등학교
- 팔렬중학교
[1] 서양인들이 조선인들은 잡아간다는 소문도 있었을 정도였다.[2] 엄밀히 말하자면 여성을 위한 서당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매우 드물었다.[3]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4] 간단한 인사말이나 행정용어 정도는 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업을 진행할만큼의 실력은 안 돼서, 초반에는 몸짓 발짓으로 수업을 진행해 어떤 이들은 '무용수업' 이라고 별명을 붙혀줄 정도였다.[5] 이후 일명 유관순 교복이라 불리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게 되었고,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오늘날의 교복에 이른다.[6]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오늘날의 유아교육과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범학교는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가는 중등교육기관이었는데 이 사범학교에 유치원 교육은 사실 없었다. 당시에 유일하게 유치원 사범 교육과정이라 봐도 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