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소카베 쿠니치카
1504년 ~ 1560년 6월 15일 長宗我部国親
토사 쵸소카베 가문 20대 당주. 모토치카의 토사 통일과 시코쿠 제패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
19대 당주 쵸소카베 카네츠구(長宗我部兼序)의 아들. 쵸소카베 가문의 본성인 오코 성(岡豊城)이 모토야마(本山) 가문에 의해 함락되며 호족으로의 쵸소카베 가문이 멸망하게 되자 가문의 부흥에 일생을 바쳐 쵸소카베 가문을 재건하고 모토야마 가문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킨 다이묘. 아들로는 쵸소카베 모토치카, 키라 치카사다, 코소카베 치카야스, 시마 치카마스(島親益)가 있다.
쵸소카베 카네츠구가 당주가 되자 모토야마 가문, 야마다(山田) 가문과의 대립이 격화되며 모토야마 가문을 위시한 호족연합에게 에게 오코 성으로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다. 쵸소카베 세력은 단 500명이었다고 전해지며 카네츠구는 농성을 선택했지만 패배는 명확하였고 결국 오코 성은 모토야마 연합에게 떨어지게 된다. 토사모노가타리(土佐物語)에는 당시의 일이 자세히 묘사되어있는데 오코 성 함락 전날 카네츠구는 콘도 아무개(近藤某)에게 자신의 적남 쿠니치카를 맡기며[1] "아무래도 나는 내일 전사하게 될터이니 자네가 센오마루를 이치죠 가문에 데려다주게."라고 말하였다. 이에 콘도는 눈물을 흘리며 주군의 마지막 명령을 완수할 것을 맹세했다. 다음으로는 쿠니치카를 불러 "너는 아직어리다. 후에 용감하게 자라 반드시 우리 가문을 재흥시키고 우리의 원수 모토야마 가문을 멸망시키거라. 패전의 굴욕을 씼고 나의 한을 달래주는것이다."라 말하였다. 쿠니치카는 이때부터 가문의 재흥과 복수를 달성하리라 다짐했다. 심야가 되자 이 두명은 포위된 성을 빠져나가 이치죠 가문의 영지로 도착하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2] 이후 카네츠구는 가신들에게도 피난명령을 내렸으나 카네츠구와 같이 죽기를 원한 가신들은 자신의 아이와 젊은이들만 피난시키고 주연을 열며 최후의 각오를 다짐했다. 날이 밝자 모토야마 연합은 총공격을 가했고 쵸소카베 가문은 열세에 몰린 채 카네츠구는 자결하고 오코 성은 적들의 손에 떨어지는 결말로 끝이났다.
이후 쿠니치카는 이치죠 가문 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쿠니치카가 성인의 나이가 되자 이치죠 가문의 당주 이치죠 후사이에(一条房家)의 영향력으로 모토야마 연합과 화친을 맺고 1518년 8월 27일 쿠니치카는 성인식을 올리며 오코 성으로 귀환해 쵸소카베 가문을 다시 세우는 것에 성공하였다. 가문 재건 이후로 쿠니치카는 토사의 호족들과 교류를 가지는 한편 요시다 타카요리(吉田孝頼)[3] 같은 인재를 등용하는 등 쵸소카베 가문의 기반을 다져갔다. 이후에도 후사이에의 중재로 토사는 평온한 날을 보내게 되었으나 1539년 후사이에가 사망하면서 토사는 긴장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쿠니치카의 나이 36세 오코 성에서 '''적남이 태어났으며''' 아명을 야사부로(弥三郎)라 지었다.
모토치카 탄생 후 토사의 정세는 더욱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모토야마 가문은 동진하여 키라(吉良) 가문을 멸망시켰고 아키(安芸) 가문은 코소카베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군사를 내었다. 쿠니치카는 남부로 진격하여 나카오카 남부를 제압하는 것에 성공하여 쵸소카베 가문을 모토야마 가문, 아키 가문과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성장시켰다. 이후 쿠니치카와 타카요리는 군대를 강화시키기위해 한가지 방안을 짜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다. 한편 아키 가문의 공격을 받고 있는 코소카베 가문은 쵸소카베 가문에게 위협을 느끼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 한 결과 쵸소카베에게 종속되기로 결정하였고 쿠니치카는 이를 수락하여 자신의 아들 야시치로(弥七郎)를 코소카베 가문에 보내게 되었다.
1556년 부터 모토야마 가문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진젠지카몬(秦泉寺掃部)을 항복시켜 그의 아들 분고(豊後)를 모토치카의 사범으로 삼았고 모토야마 가문이 제의한 화친을 수락하였으나 1560년 자신의 보급부대가 모토야마 가문에게 습격당한것을 빌미로 잡아, 자신의 부하를 죽음으로 처벌한 모토야마 시게토키의 화해 제안을 무시하고 나가하마(長浜) 성으로 돌격하였다. 성에 도달한 쿠니치카는 야습을 걸었고 나가하마 성은 하루만에 쵸소카베 가문이 가져가게 되었다. 쿠니치카는 다시 한번 나가하마 성으로 군사를 진군시키고[4] . 토노모토(戸ノ本)에서 모토치카의 활약으로 쵸소카베 군이 승리하게 되면서 모토야마 가문을 물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쿠니치카는 얼마안가 병에 걸렸고 1560년 모토야마 가문에 대한 복수를 전부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다.
쵸겐모노가타리(長元物語)에서 말하길 이치죠 가문에서 비호받고 있을 당시 후사이에가 연회를 개최하는 일이 있었다. 연회에서 쿠니치카를 본 후사이에는 난간에서 뛰어내리면 아버지의 원수를 해치우는데 도움을 줄것이라 말했고 이에 쿠니치카는 약 3미터의 난간에서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쿠니치카가 진짜로 뛰어내리자 후사이에는 황급히 정원으로 내려갔으나 후사이에를 본 쿠니치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에 후사이에는 "목숨을 건 낙하였도다 정말 훌륭하구나. 앞으로의 미래가 참으로 믿음직스럽다"라고 쿠니치카를 평가하였다한다.
모토치카기(元親記)에는 모토야마 가문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 '''여장'''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들호랑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토탈 워: 쇼군2에서 시대상 아들 모토치카를 제치고 쵸소카베 가문 캠페인의 메인무장으로 등장한다. [5]
토사 쵸소카베 가문 20대 당주. 모토치카의 토사 통일과 시코쿠 제패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
1. 소개
19대 당주 쵸소카베 카네츠구(長宗我部兼序)의 아들. 쵸소카베 가문의 본성인 오코 성(岡豊城)이 모토야마(本山) 가문에 의해 함락되며 호족으로의 쵸소카베 가문이 멸망하게 되자 가문의 부흥에 일생을 바쳐 쵸소카베 가문을 재건하고 모토야마 가문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킨 다이묘. 아들로는 쵸소카베 모토치카, 키라 치카사다, 코소카베 치카야스, 시마 치카마스(島親益)가 있다.
2. 본성 함락
쵸소카베 카네츠구가 당주가 되자 모토야마 가문, 야마다(山田) 가문과의 대립이 격화되며 모토야마 가문을 위시한 호족연합에게 에게 오코 성으로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다. 쵸소카베 세력은 단 500명이었다고 전해지며 카네츠구는 농성을 선택했지만 패배는 명확하였고 결국 오코 성은 모토야마 연합에게 떨어지게 된다. 토사모노가타리(土佐物語)에는 당시의 일이 자세히 묘사되어있는데 오코 성 함락 전날 카네츠구는 콘도 아무개(近藤某)에게 자신의 적남 쿠니치카를 맡기며[1] "아무래도 나는 내일 전사하게 될터이니 자네가 센오마루를 이치죠 가문에 데려다주게."라고 말하였다. 이에 콘도는 눈물을 흘리며 주군의 마지막 명령을 완수할 것을 맹세했다. 다음으로는 쿠니치카를 불러 "너는 아직어리다. 후에 용감하게 자라 반드시 우리 가문을 재흥시키고 우리의 원수 모토야마 가문을 멸망시키거라. 패전의 굴욕을 씼고 나의 한을 달래주는것이다."라 말하였다. 쿠니치카는 이때부터 가문의 재흥과 복수를 달성하리라 다짐했다. 심야가 되자 이 두명은 포위된 성을 빠져나가 이치죠 가문의 영지로 도착하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2] 이후 카네츠구는 가신들에게도 피난명령을 내렸으나 카네츠구와 같이 죽기를 원한 가신들은 자신의 아이와 젊은이들만 피난시키고 주연을 열며 최후의 각오를 다짐했다. 날이 밝자 모토야마 연합은 총공격을 가했고 쵸소카베 가문은 열세에 몰린 채 카네츠구는 자결하고 오코 성은 적들의 손에 떨어지는 결말로 끝이났다.
3. 가문 재건
이후 쿠니치카는 이치죠 가문 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쿠니치카가 성인의 나이가 되자 이치죠 가문의 당주 이치죠 후사이에(一条房家)의 영향력으로 모토야마 연합과 화친을 맺고 1518년 8월 27일 쿠니치카는 성인식을 올리며 오코 성으로 귀환해 쵸소카베 가문을 다시 세우는 것에 성공하였다. 가문 재건 이후로 쿠니치카는 토사의 호족들과 교류를 가지는 한편 요시다 타카요리(吉田孝頼)[3] 같은 인재를 등용하는 등 쵸소카베 가문의 기반을 다져갔다. 이후에도 후사이에의 중재로 토사는 평온한 날을 보내게 되었으나 1539년 후사이에가 사망하면서 토사는 긴장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쿠니치카의 나이 36세 오코 성에서 '''적남이 태어났으며''' 아명을 야사부로(弥三郎)라 지었다.
모토치카 탄생 후 토사의 정세는 더욱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모토야마 가문은 동진하여 키라(吉良) 가문을 멸망시켰고 아키(安芸) 가문은 코소카베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군사를 내었다. 쿠니치카는 남부로 진격하여 나카오카 남부를 제압하는 것에 성공하여 쵸소카베 가문을 모토야마 가문, 아키 가문과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성장시켰다. 이후 쿠니치카와 타카요리는 군대를 강화시키기위해 한가지 방안을 짜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다. 한편 아키 가문의 공격을 받고 있는 코소카베 가문은 쵸소카베 가문에게 위협을 느끼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 한 결과 쵸소카베에게 종속되기로 결정하였고 쿠니치카는 이를 수락하여 자신의 아들 야시치로(弥七郎)를 코소카베 가문에 보내게 되었다.
1556년 부터 모토야마 가문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진젠지카몬(秦泉寺掃部)을 항복시켜 그의 아들 분고(豊後)를 모토치카의 사범으로 삼았고 모토야마 가문이 제의한 화친을 수락하였으나 1560년 자신의 보급부대가 모토야마 가문에게 습격당한것을 빌미로 잡아, 자신의 부하를 죽음으로 처벌한 모토야마 시게토키의 화해 제안을 무시하고 나가하마(長浜) 성으로 돌격하였다. 성에 도달한 쿠니치카는 야습을 걸었고 나가하마 성은 하루만에 쵸소카베 가문이 가져가게 되었다. 쿠니치카는 다시 한번 나가하마 성으로 군사를 진군시키고[4] . 토노모토(戸ノ本)에서 모토치카의 활약으로 쵸소카베 군이 승리하게 되면서 모토야마 가문을 물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쿠니치카는 얼마안가 병에 걸렸고 1560년 모토야마 가문에 대한 복수를 전부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다.
4. 일화
쵸겐모노가타리(長元物語)에서 말하길 이치죠 가문에서 비호받고 있을 당시 후사이에가 연회를 개최하는 일이 있었다. 연회에서 쿠니치카를 본 후사이에는 난간에서 뛰어내리면 아버지의 원수를 해치우는데 도움을 줄것이라 말했고 이에 쿠니치카는 약 3미터의 난간에서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쿠니치카가 진짜로 뛰어내리자 후사이에는 황급히 정원으로 내려갔으나 후사이에를 본 쿠니치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에 후사이에는 "목숨을 건 낙하였도다 정말 훌륭하구나. 앞으로의 미래가 참으로 믿음직스럽다"라고 쿠니치카를 평가하였다한다.
5. 기타
모토치카기(元親記)에는 모토야마 가문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 '''여장'''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들호랑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토탈 워: 쇼군2에서 시대상 아들 모토치카를 제치고 쵸소카베 가문 캠페인의 메인무장으로 등장한다. [5]
[1] 당시의 쿠니치카는 매우 어렸기 때문에 센오마루(千翁丸)라는 아명을 사용하고 있었다.[2] 허나 최근 연구에서는 카네츠구는 낙성 당시 생존하였으며 토사를 떠돌다 모토야마, 야마다 가문과 강화를 맺는 것에 성공하였고 이후 쿠니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애초에 토사모노가타리는 군키모노에 가까운 사료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적혀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 요시다 씨는 모리치카의 카이에키 이후로도 토사에 남게되었고 막말까지 그 가계가 이어져 요시다 토요를 배출하였다.[4] 당시 쿠니치카는 22세의 모토치카와 20세의 치카사다와 함께 종군하였고 아들들은 이번이 첫 출진(初陣)이었다,[5] 오다나 도쿠가와도 오다 노부히데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에 밀렸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