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ちょうそかべ もとちか)[1]
(1539 ~ 159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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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없는 시코쿠의 패자.'''
일본 센고쿠 시대 토사의 다이묘. 쵸소카베 쿠니치카의 장남으로, 쵸소카베 가문 21대 당주. 아버지가 쌓아올린 기반과 뛰어난 동생인 키라 치카사다와 코소카베 치카야스의 보좌를 받아 토사를 통일 하였으며 이후 아와, 사누키, 이요로 뻗어나가 시코쿠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인물이다.
종래엔 한 지방을 통일한 영웅적 인물로 각광받아, 시코쿠 전역을 통일한 탁월한 전쟁능력과 일반 병사를 위무하는 일화를 가지고 그의 리더십을 찬양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던 인물이었다. 특히 센고쿠 시대를 매체로 하는 미디어에서는 독특한 미남형 캐릭터로 설정하거나 미래를 내다본 혜안을 가진 능력자, 최종적으론 불운한 사건들에 의해 폐인이 되어버린 불쌍한 캐릭터로서 모토치카를 그려냈고, 이는 일반적인 평가의 요소와 합쳐져 폭발적인 인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쥐의 일화를 근거로 한 단순히 시코쿠라는 깡촌을 통일하는 것에 그친 동네 깡패수준의 다이묘로, 다른 대세력엔 빌빌기던 전쟁능력, 사사재흥과 금주령 일화를 근거로 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인물, 최종적으론 히사타케 치카나오라는 간신에게 총애를 쏟아버린 가문멸망의 원흉격이라는 부정적 평가 또한 따라다니기도 했다. 더욱이 현재는 과도한 평가를 받았던 인물들을 저평가하기 시작하는 풍조에 따라 모토치카의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 양극단을 오가는 지경에 놓인 상태다.
반면 역사학계에서는 모토치카의 시코쿠 전역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정복한 지역에 켄치 등을 행하는 등 시코쿠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으며, 토사 진쟈라는 토사의 이치노미야 진쟈를 재흥시키고 이와 관련된 사료를 잘 남겨둔 토목공사에 능한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소카와 가문의 일반 부교에 위치하던 쵸소카베 가문을 1국을 통치하는 토요토미 다이묘로 끌어올린 성과와, 이 시기에 작성한 현존 문서인 쵸소카베 치켄쵸, 쵸소카베시 오키테카키, 하타시 세이지키라는 사료를 근거로 들어 모토치카의 위정자로서의 내정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거는 등, 여전히 시코쿠의 패자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토사 오코 성(岡豊城)에서 태어났고 아명을 야사부로(弥三郎)라 하였다. 쵸소카베 가문을 이을 후계자로 임명되어 가신들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으나 전장에 나서는 시기가 늦어져, 1560년의 모토야마(本山) 가문과의 전쟁인 나가하마의 전투가 첫 출진이었다.[4] 이런 모토치카를 보고 가신들은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지만 일진일퇴하던 전황속, 토노모토(戸ノ本)에서 모토치카가 진젠지분고(秦泉寺豊後)와 함께 돌격하여 모토야마의 군대를 격파하자 가신들의 걱정은 말끔히 해소되었고 모토치카를 다시보게 되었다. 토노모토 전투에서 패배하자 모토야마 가문의 당주였던 모토야마 시게토키(本山茂辰)는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버리고 평야지대 최후의 거점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쿠니치카는 나가하마 성 주변의 성에 가신들을 배치하였고 나가하마 성은 파괴시키며 타도 모토야마의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쿠니치카의 몸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오코 성으로 귀환하였다.
허나 모토치카는 자신까지 오코 성으로 귀환하는 것에 반대하며 "이 앞의 우시오에 성(潮江城)을 떨어뜨리고 거기서부터 배로 돌아갈테니 아버지 먼저 돌아가십시오."라 말하고 몇명의 가신과 약 300명의 병사를 모아 출발하였다. 우시오에 성으로 진군하며 모토야마 군의 급습에도 철포로 대응하며 성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지만 우시오에 성에는 수많은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이에 모토치카는 "저 성에 병사는 없을 것이다."라 말하며 군사를 진군시켰다. 성문을 돌파하고 내부로 들어가게 되자 과연 성에는 아무도 없었고 깃발은 나무와 덩굴로 고정시켜져 흩날리고 있을 뿐었다.
위병계를 간파하고 우시오에 성을 점거한 모토치카는 의기양양하게 오코 성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버지 쿠니치카가 중태에 빠졌단 소식이었다. 쿠니치카는 모토치카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7일후엔 상복을 벗고 모토야마 가문을 멸망시킬 것을 유언으로 남기며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5] 모토치카는 이 유언에 따라 쿠니치카 사망후 7일이 지나자 가독을 이어 당주에 올랐고 3일뒤 모토야마 타도를 결의 하며 군사를 일으켰다. 모토야마 가문의 주요 거점은 산중에 있는 모토야마 성(本山城)과 평야에 있는 아사쿠라 성, 두곳이 존재하였고 모토치카는 이 두곳의 연계를 끊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두 거점 사이의 지성들을 공략했다. 이런 와중 의외의 인물이 도움을 주게 되는데 다름 아닌 모토야마 가문에 영토를 침범당한 토사 이치죠 가문의 당주인 이치죠 카네사다가 원군을 내어준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에 감사를 표하였고 이치죠의 군세는 옛 영토를 수복하였으며 쵸소카베의 군세는 모토야마 공략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1562년 9월 16일 드디어 아사쿠라 성 공략을 개시했다. 모토치카는 주력 3000명을 동원하였으며 18일, 군사를 이끌고 아사쿠라 성에서 나온 시게토키와 전투를 반복했지만 시게토키를 압도하지 못하고 오코 성으로 귀환하였다. 모토치카를 물리치는데 성공한 시게토키였으나 모토야마 성과의 연락이 어렵게 되고 서쪽에선 이치죠 가문의 군세가 건장하였기 때문에 결국 1563년 1월, 아사쿠라 성을 태워버리고 처자식과 함께 본성 모토야마 성으로 귀환하였다. 그렇게 토사평야에서 모토야마 가문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빈자리는 쵸소카베 가문이 채우게 되어 모토야마 가문을 압도하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후 내부 정비에 힘을 쏟는 모토치카는 토사의 주요 수로를 파악하고 그곳에 교역거점을 설치해 에도 시대에도 교역품으로 이용된 토사의 목재를 상인들에게 팔아 상인들이 깡시골에 가까웠던 토사에 상인들을 자주 드나들게 만들어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키나이의 정보를 손쉽게 얻을수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또한 도래인 출신으로서 한계를 가지는 자신의 신분을 타파하기 위해 상락하여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이자 친분이 있었던 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頼辰)에게 혼사를 부탁하였고 그의 여동생[6] 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성공하여 쵸소카베 가문이 미나모토의 성씨를 쓸수있도록 만들었다.[7] 모토치카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철저하게 기반을 다지던 모토치카였지만 아키 가문의 영토였던 아키 군(安芸郡)에서 가신들에 의한 트러블이 일어가면서 아키 가문의 당주였던 아키 쿠니토라(安芸国虎)가 오코 성으로 쳐들어오게 된다. 쿠니토라는 군사를 진격함과 동시에 자신과 연척관계에 있던 이치죠 카네사다에게 원군요청을 보냈는데 카네사다는 이 원군요청을 수락하여 총 5000여 명의 군세가 오코 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쵸소카베의 주력은 모토야마 성 공략에 차출되어 병력이 얼마없는 상태였기에 모토치카는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를 소집하여 대항하였다. 싸움의 전황은 쿠니토라에게 유리하였으나 우에야스 성(上夜須城)에서 쵸소카베 가신들이 포위를 뚫고 나와 오코 성에서 협격하는 모양새가 되자 쿠니토라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군사를 수습해 돌아갔다.[8] 쿠니토라의 선공에 분노한 모토치카는 당장 아키로의 침공을 계획했지만 이치죠 가문의 중재에 의해 유야무야 되어 아키 방면의 군사를 물리고 모토야마 성 공략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이미 모토치카는 모토야마 성을 몇번이고 함락시키는 것에 실패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 공략에서는 새로이 성을 쌓는 등의 만전을 가하였다. 1564년 4월, 공성을 시작하자 시게토키는 농성을 포기하고 다시한번 처자식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새로이 성을 쌓아 모토치카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후 시게토키는 실의에 빠져 병사하고 아들 모토야마 치카시게(本山親茂)가 가독을 잇게 되며 모토야마 가문은 멸망 직전의 상황에 빠졌다.[9]
1568년의 겨울, 모토치카가 모토야마의 완전 토벌을 위해 군을 진군시키자 치카시게는 개성하여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한때 토사 중앙을 호령하던 호족 모토야마 가문은 멸망하였고 모토야마의 가신들은 쵸소카베의 세력에 흡수되어 이후의 전쟁에서도 활약하게 된다.[10] 모토야마 가문을 멸망시킨 쵸소카베 가문은 드디어 이치죠 가문에게도 대적할 수 있을정도로 성장하였고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아키 침공에 착수한다.
당시 아키 가문과는 이치죠 카네사다에 의해 정전협정이 맺어져있었기에 모토치카는 쿠니토라를 도발하여 협정을 깨뜨리는 계책을 짰고 쿠니토라는 이에 낚여 모토치카에게 협정결렬의 의지를 전해 정전협정은 깨지게 되었다. 계책을 완수한 모토치카는 7000여 명의 군세를 모아 가신을 총 동원해 쿠니토라가 있는 아키 성(安芸城)으로 진군, 아키 세력의 성을 차례차례 함락시키며 나아가 이윽고 양자는 야나가레(八流)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토치카는 군세를 두 갈래로 나누어 자신은 야나가레에서 쿠니토라의 5천 군세와 격돌하기로 하고 다른 쪽은 아키 가문에서 배신한 호족들의 안내를 받아 산도를 지나가 아키 성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모토치카는 쿠니토라의 군세와 격렬히 싸우며 쿠니토라에게 이미 야나가레 주변의 성들이 쵸소카베 세력에게 함락당한것 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쿠니토라의 군세에 동요를 주었다. 이 틈을 노려 모토치카는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쿠니토라는 야나가레에서 탈출하고도 아키 성에서 모토치카의 군세와 싸우는 이중고를 거쳐 아키 성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쿠니토라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농성을 선택했으나 모토치카는 이번에도 내통자를 만들어 탈주를 유도하거나 성내의 우물에 독을 풀게 하는등 쿠니토라를 압박하여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만 갔다. 포위된 성에서 이치죠 가문의 원군조차 기대 할수 없게 되자 24일간의 농성 끝에 쿠니토라는 모토치카에게 자신의 할복과 남아있는 병사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요청을 보냈다. 모토치카는 이를 수락하였고 8월 11일, 쿠니토라는 자결, 토사의 호족 아키 가문은 멸망하였다.
모토치카가 토사 통일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이요 정복을 진행 중이었던 카네사다는 이요의 슈고 다이묘였던 코노(河野) 가문과 츄고쿠의 '''모리 모토나리'''에게 지원을 받은 사이온지 가문의 역습을 받아 아무런 결과를 남기지 못하고 토사로 귀환하게 된다.
당시 서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치카사다는 이러한 이치죠 가문의 상황을 파악하고 모토치카에게 지금 당장 이치죠 토벌을 진행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이제 막 아키 가문을 멸망시킨 모토치카는 이치죠 토벌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모토치카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자 치카사다는 지금 이치죠 가문을 토벌할 때에 얻는 이익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였고 결국 모토치카를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 군사권을 위임받아 이치죠의 영토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치카사다의 예상대로 당시 이치죠의 가신들은 당주 카네사다에 대해 불만과 불안감이 팽배한 상태였고 치카사다가 본격적으로 성을 함락시키기 시작하자 츠노(津野) 가문은 당주를 쫓아내면서 까지 쵸소카베의 세력에 투항하는 등 이치죠의 가신들은 치카사다의 침공에 크게 동요하였다.
결국 1574년 2월 카네사다는 이치죠 본가와 가신들의 압박으로 연척 오토모 소린에 의지해 분고로 달아나게 되며 이치죠 가문은 토사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고 이치죠의 본거지였던 나카무라 성(中村城)에 치카사다가 입성하였다.
자신의 가문의 영토 전체가 쵸소카베 가문에게 빼앗기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카네사다였으나 그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카네사다는 돈 파울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시코쿠로 건너와 이요, 토사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호족 세력을 모아 3500여 명의 군대를 일으켜 모토치카에게 전쟁을 걸었다. 이에 모토치카는 재빨리 군사를 모아 치카사다와 합류하였고 이들은 시만토가와의 지류 와타리가와(渡川)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7300여 명의 군사로 숫적 우위를 점했던 모토치카는 다시 한번 군대를 둘로 나눠 협격으로 상대를 물리치는 전법을 선택하여 모토치카는 본대를 이끌고 와타리가와를 도하해 이치죠의 군세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치카사다는 별동대를 이끌고 강의 상류쪽으로 올라가 도하, 이치죠 군세의 왼편을 급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이치죠의 군세는 모토치카의 본대와 와타리가와에서 혈전을 벌이다 별동대의 기습을 받게 되어 패배, 카네사다는 근처의 성으로 피신하게 되나 얼마안가 항복하게 되었고 토사에서 떠나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이번 전쟁으로 이치죠의 잔당을 쓸어버리는 것에 성공함에따라 옛 이치죠의 영지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모토치카는 15년에 걸친 토사 통일을 완수하게 되었다. 모토치카 37세 때의 일이다.
토사를 완전정복한 모토치카는 드디어 시코쿠를 통일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중앙에서 포위망을 견뎌내고 키나이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모토치카는 키나이와 시코쿠를 이동하는 아와의 상인과 이제는 오다 가문 아케치 미츠히데의 가로(家老)가 된 사이토 토시미츠에게 노부나가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고 얼마 가지않아 직접 사신을 보내 노부나가와 대면시키게 했다,
모토치카 측의 요구는 자신이 시코쿠 정복을 진행하고 영토를 점거했을시 그 영토는 쵸소카베 가문의 영토로 인정할 것. 자신의 적남에게 편위를 내려줄 것. 이 두가지가 전부. 시코쿠에도 자신의 세력을 두기로 결심한 노부나가는 이 조건을 수락하였다. 이렇게 모토치카의 적자는 노부나가(信長)의 이름에서 노부(信) 자를 하사받아 쵸소카베 노부치카라 개명하여 성인식을 치루었고, 쵸소카베 가문은 오다 가문에게 영지 점거와 복속의 허락을 받게 되어 후방의 아군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영토 확장의 당위성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아와를 향해 시코쿠 정복이라는 장대한 사업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모토치카는 시코쿠 평정의 첫발로 아와 카이후 성(海部城)을 공격하였는데, 다름이 아니라 이곳이 동생 치카마스가 아와의 호족들에게 살해당한 장소이기 때문이다.[11] 당시 아키 성주였던 치카야스까지 참전하여 카이후 성을 공격한 결과 성은 모토치카의 손에 들어왔고 성주는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지 않고 카이후에서 도망치게 되어 무난히 아와 침공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모토치카는 치카야스를 카이후 성주로 임명하고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며 호족을 공격하고 포섭함에 따라 아와 남부는 모토치카가 순식간에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모토치카는 아와를 남부에서 뿐만 아니라 서부에서도 압박하기위해 시코쿠 중앙의 산길을 진군해 아와 서부의 호족 오니시(大西) 씨와 내통하여 시코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하쿠치 성(白地城)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하쿠치 성에 도착하자 오니시 씨는 개성하여 자신의 아들을 쵸소카베 가문에 인질로 보내주었고 모토치카는 시코쿠 평정의 중앙거점을 손에 넣게되었다.
하지만 오니시의 당주는 다시 한번 미요시 측으로 배신하였고 하쿠치 성주가 없어짐에 따라 다시 새로운 인물을 뽑아야했다. 당시 인질로 쵸소카베 가문으로 들어온 오니시 당주의 아들은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는데 모토치카는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해 그를 하쿠치 성주로 임명하였다. 죽음을 각오하였던 그는 이 일로 모토치카에게 충성하며 하쿠치 성의 방비도 개선됨에 따라 모토치카는 본격적으로 아와를 지배하던 미요시 나가하루를 제거하기 위해 계책을 짜기 시작했다.
모토치카는 시노하라 나가후사 사후 나가하루와 반목하던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표적으로 삼아 나가하루 토벌의 지원을 조건으로 아와 공략에 도움을 줄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사네유키는 이에 응하였고 이미 쵸소카베 측으로 돌아선 아와의 호족 이자와 요리토시(井沢頼俊)와 이치노미야 나리스케(一宮成助)와 함께 나가하루를 공격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미요시 가문을 내분으로 혼란케 만든 모토치카는 하쿠치 성에서 출진해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1578년 1월, 나가하루의 후계자로 소고 마사야스가 이즈미에서 아와 쇼즈이(勝瑞)로 돌아왔다. 3월에는 다시 미요시 측으로 돌아선 오니시 씨를 격파하며 하쿠치 근방을 정리하는 것에 성공, 하쿠치 성을 개수하였으며 쵸소카베의 세력은 더더욱 쇼즈이가 있는 동쪽으로 나아갔다.
1579년 여름, 모토치카는 시게키요 성(重淸城)을 공격하였다. 마사야스의 원군을 얻은 시게키요 성주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얼마 못가 성을 내어주었고, 미요시 야스나가의 아들 미요시 야스토시(三好康俊)[12] 가 있던 이와쿠라 성(岩倉城)은 야스토시가 저항도 하지않고 항복함에따라 쉽사리 모토치카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쿠라 성을 손에 넣자 모토치카는 우시키 성(牛岐城)과 이치노미야 성(一宮城)을 점거하며 북진하는 치카야스와 호흡을 맞춰 쇼즈이로의 침공을 계획하였다.
아와 하쿠치 근방의 장악에 성공하게 되자 모토치카는 1578년 여름, 서 사누키의 후지메 성(藤目城)을 침공하는 것으로 사누키 정복의 기치를 높였다. 후지메 성은 호소카와 4천왕으로 대표되는 카가와(香川) 가문에 소속하는 호족 사이토(斎藤) 씨가 점거하고 있었는데 쵸소카베의 공격에 얼마 대응하지 못하고 손자를 인질로 내어주며 항복하였다.
외부세력의 침공이 시작되는 걸 알아차린 서 사누키의 호족들은 군사를 규합해 빼앗긴 후지메 성을 탈환하는데 성공, 사누키의 전초기지가 맥없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보고를 들은 모토치카는 동년 겨울에 급히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병사들은 자체적으로 공성을 시작하였고 결국 후지메 성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전초기지의 확보에 성공하자 쵸소카베의 군세는 연이어 성을 떨어뜨리며 1579년에는 카가와 가문의 거성인 아마기리 성(天霧城)을 목표로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다. 모토치카는 서 사누키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카가와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길 원하여 항복의 문서를 당주 카가와 노부카게(香川信景)[13] 에게 보내었는데 노부카게는 양자를 보내줄 것을 조건으로 이 제안에 선뜻 응하게 되며 카가와 가문은 쵸소카베의 가신이 되었고 모토치카의 차남 치카카즈는 노부카게의 딸과 혼인하여 카가와 치카카즈라 개명했다.[14]
카가와 가문을 제압한 모토치카는 코자이(香西) 가문을 공격하러 동쪽으로 진군한다. 당시의 코자이 가문은 새로운 당주를 둘러싼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소속되어있던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모토치카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하유카 성(羽床城)의 하유카 씨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모토치카는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하유카 성으로 진군하였다. 동 이요의 호족들까지 동원해 약 1만 명에 달하는 쵸소카베 군과 달리 하유카의 군세는 1000명을 간신히 맞출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하유카의 군세는 지역의 요소를 점거해 필사적으로 싸워나갔지만 결국 하유카 성까지 밀려 포위당하였고 모토치카는 노부카게를 사자로 파견하여 다시 한번 항복을 권고하였다. 그렇게 막다른 길에 몰린 하유카 씨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며 항복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유카씨와 똑같이 츄산(中讃)에 위치하는 나가오씨(長尾氏)씨 또한,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여 복속되었다.
당초 모토치카는 아와의 침공과 동시에 이요에도 치카사다를 파견해 남쪽으로 부터 밀고 올라가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576년 7월 15일, 치카사다가 36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이요 정벌군을 재편성해야만 하였기에 총대장은 히사타케 치카노부(久武親信)로 교체되었다.
하쿠치를 점거한 이후로는 하쿠치를 통해 동 이요로 군사를 보내 이요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동 이요의 호족들은 이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는데 카네코 모토이에(金子元宅)로 대표되는 이들은 대부분 쵸소카베 측으로 투항을 요청해 모토치카의 가신이 되었다.
치카노부를 대장으로 하는 남 이요 공략대는 한참 늦은 1579년 봄에야 출진하였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치카노부의 군세였으나 사이온지 가문의 영지인 오카모토 성(岡本城)을 공격하다 도이 세이료(土居淸良)의 계책에 의해 철포를 맞아 치카노부 및 여러 가신들이 전사하여 와해됨에 따라 남 이요 공략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1580년이 되자 빠르고 격렬하게 시코쿠 정복을 진행중이던 모토치카는 잠시 그 기세를 늦추게 되었다. 본거지인 토사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오다 가문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시코쿠 정복을 탐탁치 않게 보고 소고 마사야스에게 지원군을 내줄 낌새를 보이자 모토치카는 치카야스를 아즈치 성(安土城)에 파견하였다.
노부나가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렸으나 돌아온 것은 "이요와 사누키는 정복 시 오다 가문에 반환할 것, 그리고 아와 중서부를 제외한 남부와 토사만을 쵸소카베 가문의 영지로 할것."이라는 대답이었다. 물론 모토치카는 노부나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였고, 양가문의 관계는 파탄, 이윽고 노부나가가 1582년 5월, '''자신의 아들'''과 '''사천왕 중 1인'''을 군단장으로 하는 파격적인 지원군을 마사야스에게 보내주게 되면서 모토치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15]
한편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모토치카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편지를 5월 21일에 사이토 토시미츠에게 보내게 된다.[16][17]
'''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천하인에 가까워던 노부나가의 죽음은 일본 일대에 혼란을 일으켰고 시코쿠 정벌도 취소됨에 따라 모토치카는 대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마사야스 또한 이 영향으로 지원군을 잃게 되었기에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 쇼즈이를 치기에 절호의 기회였으나 모토치카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8월이 되자 진중론을 제시하는 가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아와 침공을 주장한는 이치료구소쿠의 의견을 채택하게 되며 드디어 쇼즈이로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였다.
모토치카는 치카야스와 우시키 성에서 합류하였고 군세를 두갈래로 나누어 각각 나카토미가와(中富川)와 쇼즈이로 진군시켰다. 이에 마사야스는 쇼즈이 성에서 나와 나카토미가와를 사이에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8월 28일, 아와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미요시 가문 쪽이 절대적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마사야스의 군세는 도하를 시작한 모토치카의 군세에 포위당하였고 마사야스 본인은 쇼즈이 성에 틀어박히게 된다.
성공적으로 포위를 성공한 모토치카의 군세였으나 9월 5일이 되자 뜬금없는 폭우로 미세하지만 전황이 뒤바뀌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폭우로 강물이 흘러 넘치자 마사야스가 조각배를 내어 높은곳으로 피난해 있는 군사들을 차례차례 사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폭우는 1주일을 넘기지 못하였고 강물도 차차 빠져감에 따라 마사야스가 잡은 모처럼의 호기는 부질없는 것이 되었으며 9월 21일, 결국 마사야스의 항복과 쇼즈이 성의 개성으로 마사야스는 사누키 토라마루 성(虎丸城)으로 철퇴, 쇼즈이 일대는 전쟁과 후처리로 인해 파괴됨에 따라 아와의 미요시 가문과 쇼즈이는 영향력을 잃고 소멸하게 되었다. 또한 뒷편으론 오다 가문이 침공해올 당시 미요시 가문으로 돌아섰던 이와쿠라 성을 다시 한번 제압함에 따라 아와의 중요한 지역은 전부 모토치카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아와 정복을 달성하였다.'''[18]
한편 사누키에서는 1582년 7월, 아마기리 성주 카가와 치카카즈와 하쿠치 성주 타니 타다즈미(谷忠澄)가 코자이 가문의 본거 후지오 성(藤尾城)을 함락시킨 다음 노부카게가 코자이 가문을 포섭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사누키로 피신한 마사야스의 본거지 소고 성(十河城)을 공격하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쇼즈이 성을 떨어뜨리자 이에 호응해 10월 중 이와쿠라 성에서 출발해 치카카즈와 합류, 소고 성 주변의 지역을 점거해 소고 성과 토라마루 성의 연결을 끊어 고립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겨울이 되자 눈이 내리고 병량조달에 차질이 생기자 공략을 일시 중단하게 되었다.
모토치카가 다시 시코쿠 정복을 진행하고 있을 때, 일본 중앙에서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사이토 토시미츠는 이미 하시바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사망한 상태였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문제를 둘러싼 히데요시와 카츠이에의 내전이 본격화 되는 중이었다. 카츠이에가 지지하고있는 오다 노부타카는 모토치카를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모토치카와 연락을 취하였고, 모토치카는 이에 응하게 되어 노부나가 사후 오다 가문의 권력투쟁에도 뛰어들게 되었다. 이에 맞춰 마사야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모토치카의 위험성을 알리며 증원을 요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섣불리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기에[19] 사누키에 빠르게 군사를 보낼 수 있는 아와지의 다이묘, 센고쿠 히데히사만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1583년, 히데히사는 사누키 중앙에 상륙해 쵸소카베의 군세를 공격했지만 실패, 곧바로 철퇴하였으며 4월이 되자 모토치카는 다시 한번 마사야스가 있는 토라마루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철수해있던 히데히사가 히케타 성에 입성하게 되어 순식간에 모토치카는 적을 앞뒤에 놓고 교전해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히데히사는 곧바로 출격하여 쵸소카베군을 몰아붙였으나 모토치카가 본대를 증원으로 보내자 순식간에 밀려 다시 실패, 히케타 성도 모토치카에게 떨어져 본거지인 아와지로 물러났다.
한편 토라마루 성에 틀어박혀 있는 마사야스는 모토치카의 포위에 의해 점점 병량이 떨어지고 승기가 옅어지자 토라마루 성마저 모토치카에게 내어주고 소고 성으로 도망쳐 갔다. 이렇게 모토치카가 승승장구할 때 카츠이에는 시즈가타케(賤が岳)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고 자결했으며 노부타카 또한 하시바의 군세에 항복하여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노부타카 라인은 총대장 두명이 모두 죽게되어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지만 카츠이에 사후에는 히데요시의 지지를 받고있던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결탁하여 반 하시바 세력을 결성하여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대규모 내전을 벌어야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에야스 또한 모토치카에게 연합의 참가를 요구하였고 모토치카는 이것을 또 흔쾌히 받아들여 또 다시 히데요시와 적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1584년,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싸움을 시작하자 모토치카는 5월에 소고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마사야스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개성하였으며 자신은 토라마루 성에서 최후의 농성전을 펼치게 되었다.[20]
소고 성을 손에 넣은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세력의 또 다른 격전지인 오사카 성에 출진해 히데요시 세력을 물리치고, 이에야스는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승리하여 히데요시를 양쪽으로 압박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이에야스의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의 회유에 의해 화친을 맺게 됨에 따라 내전은 히데요시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났고, 모토치카는 키나이 진출의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시코쿠 정복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아와와 사누키를 정복한 것과 마찬가지인 모토치카 앞에 남은 시코쿠의 지역은 이요 하나뿐이었다. 이미 1584년 정월에 남 이요의 공략이 시작됐었고, 치카노부의 동생, 히사타케 치카나오(久武親直)와 항복한 동 이요의 호족 카네코 모토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루지 못한 남 이요 정복에 박차를 가했다. 형이 전사했던 전장에서 치카나오는 순조롭게 사이온지 가문의 성을 떨어뜨려 나갔고 10월이 되자 사이온지 가문의 본거 쿠로세 성(黑瀨城)마저 함락시키는데 성공해 사이온지 킨히로(西園寺公広)는 항복, 남 이요는 쵸소카베 가문의 세력이 되었다.
이요의 동, 남이 항복하면서 남은 것은 코노 가문이 지배하고있는 중부뿐. 모리 가문은 이런 상황을 알아채고 원군을 보내주었지만 쵸소카베군의 항전에 의해 얼마 안 가 철군하였다. 치카나오와 모토이에는 단번에 코노 가문의 본거, 유즈키 성으로 진격하였고 이를 본 당주 코노 미치나오(河野通直)는 가신들과 합의 끝에 항복, 끝끝내 '''이요 정복을 달성하였다.'''[21]
1585년의 봄. 모토치카의 나이 47세. 1575년의 토사 평정이후로 10년만에 '''시코쿠 통일에 성공하였다.'''
평생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모토치카였지만 기뻐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마저 제압한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천하통일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 번째 목표로 반 히데요시 연합에 참가했던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들 중에서도 위치가 가깝고, 노부나가-히데요시 세력에 몇번이나 노골적인 공격을 행했던 사이카슈를 목표로 천하통일의 첫발을 내딛었다. 모토치카는 한때 함께 히데요시에게 대항했던 이들을 위해 지원군을 보내주려 했으나 곧 생각을 바꿔 히데요시에게 화친의 사자를 보냈다.
사자로 임명된 타니 타다즈미는 히데요시와 대면해 앞으로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갈 것이며 시코쿠 4개국의 병력을 지원해줄 것을 조건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으나 히데요시는 항복할 것이면 아와, 사누키, 이요 3개국을 내놓으라는 고압적인 조건을 제시함에 따라 타다즈미는 교섭을 포기하고 모토치카가 대기 중인 하쿠치 성으로 돌아왔다.[22]
결국 모토치카는 아무런 타개책도 찾지 못하였고, 히데요시가 출진한지 약 1달이 지난 4월 24일에 키이 사이카슈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모토치카는 1582년 때와 다르지 않은 심정으로 하쿠치 성을 본진으로 삼아 히데요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히데요시는 다음 목표로 내전 기간 동안 굉장히 거슬리던 모토치카가 있는 시코쿠를 지정하였고 6월 출진을 가정하며 본격적으로 상륙준비에 착수했다.
6월이 되었지만 히데요시는 병을 앓게 되어 자신이 직접 출진하지는 않았고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모리의 군세를 이요로, 우키타의 군세를 사누키로, 자신의 본대를 아와로 보내는 하시바 올스타즈를 구성하여 '''6월 16일, 시코쿠로 군대를 상륙시켰다.'''[23]
이에 모토치카는 아와 서부를 중점으로 전선을 짜, 시코쿠 중앙에서 방어를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털렸다. 총대장이 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다.'''
모리 테루모토는 미하라(三原)에 본진을 갖췄고 타카카게가 약 3만 군세의 총대장으로서 동 이요에 상륙했다. 타카카게 아래로는 킷카와 모토나가나 후쿠하라 모토토시(福原元俊) 등 쟁쟁한 가신, 다이묘들이 참여하는 모리 올스타즈가 포진, 이에 대항하는 쵸소카베의 세력은 카네코 가문의 카네코 모토이에와 약 2천의 병사가 전부였다.
6월 하순, 타카케게는 곧바로 카네코 가문의 중요 거점인 카네코야마 성(金子山城)과 타카오 성(高尾城)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모토이에는 모토치카가 조금이라도 보내준 원군과 함께 힘겹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14일에 카네코야마 성이 낙성, 17일이 되자 타카오 성마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모토이에는 할복하였다. 그의 유체는 타카카게가 직접 묻어 장사지내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요 방어의 핵심을 무너뜨린 타카카게는 중앙 이요로 진군해 차례차례 성을 떨어뜨리며 하시바의 영지를 넓혀갔다. 해안선의 확보에 성공하자 동부의 카와노에(川之江)에 본진을 두어 언제라도 하쿠치 성에 진군할 채비를 마쳐놓았다. 또한 유즈키 성을 방어하고 있던 코노 미치나오에겐 자신과 연척인 점을 이용해 그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하였다.[24]
'''털렸다(2). 총대장이 그 쿠로다 칸베에다.'''
우키타 히데이에나 칸베에같은 상당한 네임벨류를 자랑하는 이들은 약 2만의 군세로 사누키의 중앙에 가까운 야시마(屋島)에 상륙하였다. 쵸소카베 측은 쵸소카베 가문의 일문인 헤와 치카타케(戸波親武)와 약 2천 500명이 전부. 치카타케는 모토치카의 말에 따라 우에다 성(植田城)을 중심으로 주위에 성채를 여럿 쌓고 칸베에를 지세가 좁은 우에다로 유인하여 싸우기로 전략을 세웠다.
칸베에가 수월히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치카타케는 칸베에를 유인하려 하였으나 칸베에는 치카타케의 행동을 간파하였고, 우에다 일대를 무시하며 히데나가가 있는 아와로 진군함에 따라 치카타케는 히데요시 세력을 저지할수 없었고 사누키는 방치되었다.
'''꽤 버텼으나, 털렸다(3). 총대장이 그 하시바 히데나가다.'''
키나이에서 아와지를 경유해 아와로 향하는 히데나가의 군세는 약 3만으로, 부장으로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격인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따라왔으며, 후속 부대로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가 또 약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상륙할 예정이었다. 이들을 상대하는 쵸소카베의 무장은 미요시 가문의 무장이었던 토죠(東条) 씨. 하지만 이미 히데나가와 히데츠구는 모두 토사도마리에 상륙을 끝마친 상태였고, 사누키에서 내려온 칸베에와 합류에 성공하였기에 아와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이윽고 히데나가는 키즈 성(木津城)에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요소에 쌓인 키즈 성은 의외로 질기게 버티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격노하여 자기 스스로 출진하겠다고 의사표명을 했지만 히데나가가 적극적으로 저지한 끝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자 히데나가는 더 격렬하게 공성을 시작하며 성내의 물길을 끊어 버리는 등 키즈 성을 철저하게 고립시켰고, 히데요시 세력에 있는 토죠 씨의 숙부를 이용해 항복을 권고하였다. 토죠 씨는 결국 7월 8일에 항복권고를 수락한 다음 토사로 도망쳤으나 모토치카의 명에 따라 자결하였다.
키즈 성이 떨어지자 우시키 성에 있던 치카야스는 군사를 물렸고, 치카야스의 후퇴 소식을 들은 주변의 가신들 또한 토사로 군사를 물리게 되어 아와 남부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7월 15일, 히데나가는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눠 각각 이와쿠라, 카이후로 진군시킨 다음 자신은 이치노미야로 진군하였다. 히데나가는 약 5만의 군세와 이치노미야에 도착하자 아쿠이가와(鮎喰川)를 사이로 이치노미야 성의 북방에 거점을 두었다. 이치노미야 성을 지키고 있는 가신은 북성의 에무라 씨와 남성의 타니 타다즈미,[25] 그리고 5천여 명의 군사들. 히데나가는 곧 토도 타카토라와 마사카츠 등에게 명령해 성의 포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치노미야 성 또한 만만한 성이 아니었고, 한 달이 될 동안 항전이 계속되자 히데나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땅굴을 파 성내로 통하는 물길을 전부 차단하는 전술을 써 이치노미야 성을 고립시켰다. 이와쿠라로 향한 히데츠구와 칸베에 또한 이와쿠라, 와키 성을 떨어뜨림에 성공함에 따라 아와 또한 모든 방어선이 무너져내렸다.
시코쿠 대부분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나가는 이치노미야 성을 지키는 타다즈미에게 항복의 문서를 보냈다. 타다즈미는 항전을 부탁하던 모토치카를 생각하며 고뇌하였지만 결국 에무라 씨와 상의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타다즈미는 모토치카를 설득하기 위해 하쿠치로 달아났다. 이렇게 하쿠치 성을 기준으로 하는 전 방어선이 무너졌고 모토치카는 사실상 고립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도 모토치카는 항전을 생각했으나 타다즈미는 더이상 가망이 없고, 이 이상 저항하면 가문 자체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신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모토치카를 설득했다. 결국 모토치카는 타다즈미의 의견에 따라 '''항복의 문서를 히데요시에게 전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7월 12일에 모토치카의 항복을 허가하고 토사만을 모토치카에게 내려주었다. 다른 3개국은 이번 정벌에 참여한 가신들에게 나누어줌에 따라[26] 모토치카는 반년도 못가서 자신이 얻었던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었으며 30년 가깝게 진행해온 사업의 결실은 한순간에 먼지로 돌아갔다.
항복 이후 모토치카는 삼남 치카타다를 인질로 오사카 성으로 보냈다. 이요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는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타카카게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었다.[27] 인질로 보내진 치카타다는 얼마 안가 차남 치카카즈가 대체하였고 10월 20일에는 히데요시와 대면하기 위해 모토치카가 직접 오사카로 향하였다. 1586년 1월에는 치카카즈 또한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사로 귀국하였다.
몇 달 동안은 평안히 시간을 보내던 모토치카였으나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시마즈 요시히사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28] 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큐슈 정벌군의 선봉으로 파견되게 되었다. 정벌군의 총대장은 자신에게 두들겨 맞은 '''센고쿠 히데히사'''였으며 동행하는 무장은 자신이 철저하게 때려잡은 '''소고 마사야스'''. 시작부터 멸망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들은 1586년 11월 22일에 도해를 시작했다.
이들은 소린의 본거지인 후나이(府內)에 상륙하였다. 히데히사는 도착하자마자 전황을 파악하여 현재 오토모 가문의 중요거점 여럿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장기전으로 끌고가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무시하고 구원을 위해 약 6천의 군사로 12월 12일에 후나이에서 출진하였다.
성을 포위 중이던 시마즈 이에히사는 히데히사의 출진소식을 듣고 군사를 물려, 양 군대는 헤츠기가와(戸次川)에서 대치하였다. 히데히사는 이에히사가 이끄는 군세를 파악하자 당장 도하를 시작해 적을 쳐부수자는 돌격 전술을 주장했다. 이 주장을 들은 모토치카와 노부치카는 경악하며 히데히사를 뜯어 말렸지만 히데히사는 이미 돌격할 결의를 굳힌 뒤였다.
날이 되자 히데히사는 군세를 두 갈래로 나누어 돌격을 시작했다. 히데히사가 먼저 돌격을 시작하자 시마즈 세력은 바로 히데히사에게 급습을 감행하였으나 이내 후퇴하기 시작했다. 히데히사는 이를 호기로 보고 도하를 시작했으나 이는 시마즈 세력의 함정이었고 이내 히데히사의 군세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가자 히데히사는 후퇴명령을 내리기는 커녕 전장에서 이탈해 북상한 뒤, 부젠을 경유하여 자신의 영지인 사누키로 도주하였다.
원정대는 순식간에 총대장을 잃게 되었고, 이내 역습을 당하여 오토모의 가신들과 마사야스와 그의 가신들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노부치카 또한 사누키군과 같은 라인을 담당하였기에 순식간에 시마즈군과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22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29] 모토치카는 비교적 후방에 있었기에 결사의 각오로 그 생지옥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후였다. 히데요시의 세력을 갈아버린 이에히사는 소린을 포위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이내 떨어뜨리지 못하고 후퇴하여 소린은 더더욱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애지중지하던 후계자, 노부치카의 전사 소식을 들은 모토치카는 오열하였다. 모토치카는 노부치카의 시신이라도 돌려받기 위해 타다즈미를 사자로 파견하였고 니이로 타다모토(新納忠元)는 노부치카를 높게 평가하며 이 제안에 응해 그의 시신과 무구들은 토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큐슈의 이야기를 들은 히데요시는 히데히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유배지로 보내버렸다. 모토치카에게는 장남의 죽음을 위로하며 차남 치카카즈가 후계자가 될수있도록 주인장을 발급해주었고, 큐슈의 오스미를 가증해 주겠다는 제안도 해보았다.
1587년 3월, 히데요시는 자신의 병력을 한계까지 동원하여 큐슈에 상륙하였고 시마즈 가문은 이에히사를 필두로 차례차례 항복해나가, 마침내 5월 8일, 시마즈 요시히사가 머리를 깎고 항복하게 되며 큐슈는 히데요시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안팎이 정리가 되자 모토치카는 새로운 후계자를 지정하였다. 그 주인공은 히데요시의 승인을 받은 치카카즈가 아니라 자신의 사남 치쿠마마루. 치카카즈가 사누키의 명문, 카가와 가문에 입적했다곤 하지만 치쿠마마루도 이미 키라 가문의 양자로 보내져 있었기에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이해가 되지않는 후계자 지명이었다. 그렇게 치쿠마마루는 쵸소카베 가문으로 불려와 자신의 형 노부치카의 딸과 혼인을 맺어 정식적으로 모토치카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이런 이해할수 없는 후계자 지정은 쵸소카베 가문 내에 파벌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요에서 군공을 올렸던 히사타케 치카나오는 어느 가문과도 이해관계가 없는 치쿠마마루를 열렬히 지지하였고, 모토치카의 동생 키라 치카사다의 아들, 키라 치카자네(吉良親実)와 아버지 쿠니치카의 동생 쿠니야스(国康)의 아들, 히에야마 치카오키(比江山親興)는 이런 기형적인 후계자 지정에 반대하며 치쿠마마루의 후계자 지정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게되며 가중은 분열되었다.
물론 이 결정에 제일 반발한 사람은 전 후계자, 치카카즈였다. 그는 이미 천하인 히데요시에게도 인증을 받아 놓았던 상태였기에 이런 상황에 크게 분노하였다고 전해진다. 결국 후계자 후보에서 밀려난 그는 오코 성에서 머물게 되었고 얼마안가 1587년 중, 21세의 나이로 병사하게 되었다.
상황이 점점 막장으로 치닫자 치카자네와 치카오키는 모토치카에게 직언을 올리기 시작했다. 허나 모토치카는 오히려 분노하였고 1588년 10월, 이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할복을 지시하는 과격한 처우를 보여주었다. 결국 이들은 국가 공신이자 혈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군에게 자결을 명받아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을 모두 숙청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어 치카자네와 치카오키의 일족은 멸족당했다.
결국 모토치카의 후계자는 치쿠마마루로 확정되었고 치카나오는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치쿠마마루는 성년이 되자 토요토미의 중신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에게 모리(盛) 자를 편위받아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로 개명하였다.
모토치카는 토사를 하사받고 실시한 타이코켄치(太閤検地)[30] 로 큰 영향력을 얻어 평소에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곳도 측량을 행하여 쵸소카베치켄쵸(長宗我部地検帳)를 작성했다. 또한 1588년 4월에는 지쥬(侍従)에 임명되었고, 교통의 편의성을 위해 쵸소카베 가문 전통의 거성 오코 성에서 오다카사 성을 새로 축성하여 거주 장소를 바꾸었다.
1590년 3월이 되자 사실상 일본 통일을 완수한 히데요시는 걸리적 거리는 호죠 우지나오를 제거하기 위해 오다와라 성으로 군사를 진군시켰다. 모토치카도 출진의 명령을 받아 첫 출진인 16세의 모리치카와 함께 약 1만의 수군을 이끌고 이즈를 지나며 오다와라로 향했고 시모다 성(下田城)에서 싸워 군공을 올렸다. 7월에는 우지나오가 항복하여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에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31] 한편 모토치카는 오다카사 성 주변의 수해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을 느끼고 1591년이 되자 바다와 가까운 우라도 성(浦戸城)으로 다시 한번 거처를 옮겨갔다.
1592년,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의 꿈을 안고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다. 3월이 되자 모토치카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로 대표되는 5번대에 속하여 아들 모리치카와 치카타다, 치카야스의 아들 코소카베 치카우지(香宗我部親氏)와 함께 약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우라도에서 출진하여 조선으로 건너왔고, 진주성을 떨어뜨리는 등 군공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를 맺었고 이에 모토치카도 일시적으로 귀국하였다.[32]
1597년 모토치카는 토사 통치를 위해 쵸소카베지오키테가키(長宗我部氏掟書)[33] 를 제정하였다. 한편 조선과의 정전 협정은 깨졌고,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군사를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모토치카는 토도 타카토라로 대표되는 6번대에 소속해 조선으로 건너와 다시 한 번 조선 각지를 전전하였다.
하지만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나갔던 다이묘들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져 모토치카는 3월에 토사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모토치카의 나이는 딱 60세였다.
1599년 3월, 모토치카는 삼남 츠노 치카타다를 유폐시켰다. 4월에는 병이 도져 요양 겸 쿄토로 올라갔다. 상락 이후로는 토요토미 히데요리와 대면하기도 했지만 이내 병이 악화되어 5월 19일, 61세의 나이로 타지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후사는 예정대로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잇게 되었다.
보통 모토치카하면 시코쿠 통일을 달성한 다이묘라는 인식이 상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학설이 제시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모토치카가 시코쿠의 '완전 정복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가장 힘을 얻고 있다.
모토치카가 상락한 타이밍이 막 토사를 통일하여 기본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시기였고, 중앙과의 연결 방법도 정실 부인과의 혼인이라는 고전적이고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그의 정치적 행보는 확실히 이득을 계산해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시코쿠를 통일해 가는 과정 또한 물리적인 침공과 모략, 정치적 공작을 섞어 쓰는 등 굉장히 복합적으로 진행하였기에 그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고 평가되고 있다.
모토치카가 '정말로 시코쿠 전토를 통일했었나?'는 최근까지 논란이 많은 주제 중 하나로, 쵸소카베 가문의 사료는 정말 대부분이 소설에 가까운 군키모노에 근거하고 있거니와 시코쿠 전토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가 시코쿠 통일을 완수했다는 1585년에서 1년도 되지 않아 시코쿠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기에 확실한 흔적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에 와서는 구석진 지역을 제외하고 각 영토의 중요지역을 전부 점거하는데 성공하여 '''대부분 통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술했듯, 아와는 본거 쇼즈이는 불타사라졌지만 동쪽에 잔존세력이 남아있음, 사누키는 본거 야마다가 떨어졌지만 당주 소고 마사야스가 토라마루 성에서 계속 모토치카와 싸웠음, 이요는 본거 유즈키에서 토사계의 기와가 발견되어 모토치카는 이요 중심부까지 정복했었거나 코노 가문이 노시마 무라카미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아직 모름. 이라고 판단된다.
모토치카 생애 대부분의 활동지인 시코쿠 내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그의 고향인 현 난코쿠 시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뒤를 이을 코치 현의 아이콘으로 밀어주고 있지만 코치 중, 동부의 반응은 미적지근한 편이며 시만토 시로 대표되는 서부는 사카모토나 쵸소카베보다 이치죠에 더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다. 코치 바깥의 도쿠시마현, 카가와현, 에히메현에서의 모토치카의 민간 이미지는 침략자 정도에 그치며, 시코쿠 바깥에서는 깡촌의 다이묘라고 깎아내리는 인식이 많이 퍼진 편이다.
모토치카는 키가 크고 피부색이 하야며 유화하여 그 용모가 대단히 수려했지만, 필요할 때 이외에는 전혀 입을 열지않으며 사람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아니하고 그저 방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비꼬아 '히메와코(姬若子, 공주같은 아이)'라는 이명을 붙여 이를 비웃었다.[34] 또 나가하마의 전투에 나서서는 창의 사용방법을 몰라 아버지 쿠니치카로부터 "멍청한 놈!"이란 꾸짖음을 듣고 온 가신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개전에 앞서 가신인 진젠지분고가 창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의 눈을 찌르는 느낌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는데, 창쓰는 법을 처음 배운 그 전투에서 제1전공을 세웠다. 그 이후 모토치카는 토사의 걸물(土佐の出来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5][36]
토사 정복을 완수한 모토치카는 시코쿠 정복을 실시하기 전 운펜지 산(雲辺寺山)에 있는 운펜지(雲辺寺)에 들러 주지에게 시코쿠 통일의 꿈을 들려주자 주지는 "고작 주전자의 덮개가 물통을 덮으려는 행동"이라며 회의적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모토치카는 "내 덮개는 모토치카라는 명공이 만든 덮개며, 언젠가 시코쿠를 덮을 덮개가 될 것이다."라며 반문하였다.
노부나가에게 동맹의 사자를 보냈을 당시, 노부나가는 모토치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시코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모토치카를 새 없는 섬의 박쥐(鳥無き里の蝙蝠)에 비유하며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뿐이라고 평했다. 이때 회담을 진행한 쵸소카베가 사자는 나카지마 베쿠노스케(中島可之助)였는데 이 새없는 섬의 박쥐라는 말에 "노부나가 님은 봉래궁(蓬莱宮)의 '''カンテン'''"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말은 새없는 섬의 박쥐가 칭찬인줄 안 나카지마가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로 노부나가는 뭔 소린지 몰랐다고 한다. 저 '칸텐'이란 말조차 관대하게(!?) 법을 집행한다는 '관대지전(寬大之典)'을 축약한 것이라는 둥, 아니면 텐구를 말하려다 말이 꼬였다는 둥, 심지어는 '''한천'''(…)이라고 말해서 노부나가를 조롱한 것이라는 둥 썰과 카더라가 아직까지도 분분할 정도. 항간에서는 '''배트맨'''이라 불리는 등등 종종 까이고 있다. 그 덕분인지 일족임에도 불구하고 박쥐의 효심이라는 부제로 연재되기도 한다.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 일령구족)'란 쵸소카베 가문의 군제라 할수있는 관습인데, 당시 쵸소카베 영지의 농민들이나 토착무사들이 평소 농사지을 때 밭 귀퉁이에 무구를 준비해두고 출격의 호령이 들리면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것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군무에서 제외되는 대신에 농민과 무사를 겸하고 있었기에 즉응성이 좋고 영지규모에 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가농기에는 동원할 수 없었고 농지에서 멀어지는 장거리 원정에 쓸 수 없다는 결점도 있다. 이렇게만 보면 일반적인 센고쿠 시대의 반농반병과 별 다를바 없어보이고 이런 반농반병의 결점을 타파하려는 오다 노부나가등을 시작으로 유행한 병농분리책에 역행하는 구닥다리 정책일 수도 있지만 모토치카는 이들의 대우를 확실히 해서 대표자를 뽑아 격이 낮을지언정 자신의 가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아주었고 회의를 할때는 이들의 의견도 함께 들어주었다. 아와 공략 당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전략을 수정하기도 했다. 세를 면해주고 병력으로 동원하는게 좋을까 싶지만 실제로 일령구족들의 충성심은 대단해서 초쇼카베 모리치카가 세키가하라의 패전으로 개역당하자 영주님 돌려달라며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다. 농민이 무장을 허락받고 세를 면해주며 무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다는건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농민으로서 받을 최상급의 대우였을 것이다.
사누키 침공에서 하유카를 공격할 당시, 모토치카는 전술의 일환으로써 무기나기(麦薙)[37] 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술을 사용하면 주변의 농민들이 곤란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 결국 모토치카는 농민들을 생각하며 한 두렁(一畦)의 곡식만을 취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인해 주변일대에 피해를 입히는 전술을 사용했음에도 농민들의 매작은 절반씩이나 남게 되었고, 백성들은 이를 보며 "토사의 지배는 훌륭할 것이 틀림없다.", "빨리 평화가 오기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 10월 사천성 보수를 맡을 당시 감사역으로 파견된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와 말싸움이 있었다. 카즈나오는 성벽에 설치하는 텟포사마(鉄砲狭間, 성벽에서 적을 쏘기위해 뚫어놓는 구멍)를 높게 만들 것을 주문했는데 모토치카가 이를 보고 허리부터 가슴까지의 높이가 아니면 철포를 쏘기 힘들다고 말하며 직접 자세까지 잡으며 충고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묘지인 쵸소카베의 표기는 長宗我部와 長曽我部의 두가지가 보이는데 히데요시 등이 長曽我部를 사용한 반면 모토치카 본인과 모리치카는 長宗我部를 사용하였다. 이렇기에 옛날에는 최고 통치자가 사용했던 長曽我部 측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쵸소카베씨가 본거지로 하였던 지역의 이름이 소가베(宗我部)였던 것과 학자들의 의견 개진에 영향을 받아 長宗我部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38]
여러모로 소설에 의해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무장 중 한 명. 히메와코라는 별명으로 졸지에 왜소하고 소심한 미청년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노부치카 사후에 '''사랑하는 후계자를 잃어버려 미쳐린 광인''' 포지션을 받아 그의 이미지를 정말 엄청나게 깍아내렸다. 비록 후계자 지정 과정에서 많은 가신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노부치카 사후에 이루어진 통치 흔적이 연구의 과반을 점하는 느낌으로, 1587년부터 1590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진, 토요토미기 켄치의 영향을 받아 실행한 모토치카의 켄치 흔적은 전술했듯 쵸소카베치켄쵸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야마우치 가문의 토사번이 대대로 보관, 필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며 국가 중요문화재로도 등록되어있다. 다른 쿠니의 토요토미기 켄치와는 달리 상당히 세세하고도 정밀하게 기록한 것이 포인트.
1596년 8월에는 우라도에 스페인의 선박, 산 펠리페호(サンㆍフェリペ号)가 정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선 펠리페호는 마닐라로부터 멕시코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수리를 위해 일본에 정박했다고 하며 이를 본 치카나오는 모토치카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연락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곧 이 소식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직전에 일어난 진도 8급 대지진으로 인해 소모된 지출을 만회한답시고 그 화물을 뺏으려 하는데, 몇년전 내린 '배의 화물을 함부로 뺏지 말라'는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답시고 신부 추방령을 꺼내들어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11월에는 분코쿠법[39] 쵸소카베 모토치카 100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를 만들어 다음 년 3월에 실시하였다고 한다. 내용으로는 절, 진쟈의 보호와 규정, 황실과 토요토미 가문의 카몬(家紋)을 쓰지 말 것, 싸움이나 말싸움은 엄히 다스릴것, '''과음을 하지 말 것''', '''여자들은 남자가 밖에 있을 때 집에 남자를 들이지 말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말 것''' 등이 기재되어 있다.
흔히 모토치카의 토리키리역으로 아케치 미츠히데가 유명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요시 야스나가도 후반에 와서 모토치카와 외교활동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모토치카가 시코쿠 평정을 위해 토사에서 아와까지 진군한 산길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산선을 타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군세는 오보케 고보케를 넘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열차선 반대편으로 시코쿠 평정의 중앙거점으로 쓰였던 하쿠치 성터를 볼수가 있기에 거의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도산선의 코치까지 가는 노선을 타보면 에메랄드 빛 요시노가와의 협곡, 험난한 산길을 거쳐 거의 2시간 40분을 달려야 도착할 정도로 지세가 매우 험난하다.
그가 시코쿠 정복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고 하는 운펜지는 시코쿠 88개소(八十八ヵ所) 중에서 66번째의 절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 900M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인도 편하게 올라갈수 있도록 로프웨이를 설치해 놓았기에 카가와현 칸온지 시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직접 방문해 볼수 있다.
임진왜란 참전 무장답게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연행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박호인'이라는 조선인인데, 임진왜란 때 쵸소카베가의 병사들에게 끌려 왔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의료기술이나 두부제조법 등 많은 조선문화를 전래했다고 한다. 훗날 그의 자손은 아키츠키(秋月)라는 일본식 성으로 바꿔 자손 대대로 이 지역에서 두부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그의 영지였던 지금의 고치 지역에는 역시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여인이 길쌈하는 법을 알려줬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조선여인의 묘'라 해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의 근거지로 사용했던 오코 성은 현재 코치현립 역사민속자료관이 설치되어 있으며[40] 성터는 역사 유적으로 잘 정비되어 남아있다. 코치역에서 버스를 타면 약 30분 정도 지나서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치시내에서 꽤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성터 자체가 공원 비슷하게 정비되어 있고 목재로 만든 건물들은 철거되어 있지만, 흙으로 만든 토루이나 카라보리(空堀), 타테보리(竪堀)가 온전히 남아 있고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어 유적에 대해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데다, 센고쿠 다이묘의 본성 치고는 상당히 소~중규모의 성터이기 때문에 중세 일본의 성에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성터가 되겠다. 그 외에는 강 상류에서 이축시켜 온 옛 민가와 카가와 치카카즈의 묘소가 만들어져 있다.
성우 소가베 카즈유키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41]
쵸소카베 모토치카/기타 창작물
(1539 ~ 1599.07.11)
[image]
1. 개요
'''흔들림없는 시코쿠의 패자.'''
일본 센고쿠 시대 토사의 다이묘. 쵸소카베 쿠니치카의 장남으로, 쵸소카베 가문 21대 당주. 아버지가 쌓아올린 기반과 뛰어난 동생인 키라 치카사다와 코소카베 치카야스의 보좌를 받아 토사를 통일 하였으며 이후 아와, 사누키, 이요로 뻗어나가 시코쿠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인물이다.
종래엔 한 지방을 통일한 영웅적 인물로 각광받아, 시코쿠 전역을 통일한 탁월한 전쟁능력과 일반 병사를 위무하는 일화를 가지고 그의 리더십을 찬양하는 평가가 주를 이루던 인물이었다. 특히 센고쿠 시대를 매체로 하는 미디어에서는 독특한 미남형 캐릭터로 설정하거나 미래를 내다본 혜안을 가진 능력자, 최종적으론 불운한 사건들에 의해 폐인이 되어버린 불쌍한 캐릭터로서 모토치카를 그려냈고, 이는 일반적인 평가의 요소와 합쳐져 폭발적인 인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박쥐의 일화를 근거로 한 단순히 시코쿠라는 깡촌을 통일하는 것에 그친 동네 깡패수준의 다이묘로, 다른 대세력엔 빌빌기던 전쟁능력, 사사재흥과 금주령 일화를 근거로 한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인물, 최종적으론 히사타케 치카나오라는 간신에게 총애를 쏟아버린 가문멸망의 원흉격이라는 부정적 평가 또한 따라다니기도 했다. 더욱이 현재는 과도한 평가를 받았던 인물들을 저평가하기 시작하는 풍조에 따라 모토치카의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 양극단을 오가는 지경에 놓인 상태다.
반면 역사학계에서는 모토치카의 시코쿠 전역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정복한 지역에 켄치 등을 행하는 등 시코쿠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으며, 토사 진쟈라는 토사의 이치노미야 진쟈를 재흥시키고 이와 관련된 사료를 잘 남겨둔 토목공사에 능한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소카와 가문의 일반 부교에 위치하던 쵸소카베 가문을 1국을 통치하는 토요토미 다이묘로 끌어올린 성과와, 이 시기에 작성한 현존 문서인 쵸소카베 치켄쵸, 쵸소카베시 오키테카키, 하타시 세이지키라는 사료를 근거로 들어 모토치카의 위정자로서의 내정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거는 등, 여전히 시코쿠의 패자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2. 가독 상속
토사 오코 성(岡豊城)에서 태어났고 아명을 야사부로(弥三郎)라 하였다. 쵸소카베 가문을 이을 후계자로 임명되어 가신들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으나 전장에 나서는 시기가 늦어져, 1560년의 모토야마(本山) 가문과의 전쟁인 나가하마의 전투가 첫 출진이었다.[4] 이런 모토치카를 보고 가신들은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지만 일진일퇴하던 전황속, 토노모토(戸ノ本)에서 모토치카가 진젠지분고(秦泉寺豊後)와 함께 돌격하여 모토야마의 군대를 격파하자 가신들의 걱정은 말끔히 해소되었고 모토치카를 다시보게 되었다. 토노모토 전투에서 패배하자 모토야마 가문의 당주였던 모토야마 시게토키(本山茂辰)는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버리고 평야지대 최후의 거점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쿠니치카는 나가하마 성 주변의 성에 가신들을 배치하였고 나가하마 성은 파괴시키며 타도 모토야마의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쿠니치카의 몸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오코 성으로 귀환하였다.
허나 모토치카는 자신까지 오코 성으로 귀환하는 것에 반대하며 "이 앞의 우시오에 성(潮江城)을 떨어뜨리고 거기서부터 배로 돌아갈테니 아버지 먼저 돌아가십시오."라 말하고 몇명의 가신과 약 300명의 병사를 모아 출발하였다. 우시오에 성으로 진군하며 모토야마 군의 급습에도 철포로 대응하며 성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지만 우시오에 성에는 수많은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이에 모토치카는 "저 성에 병사는 없을 것이다."라 말하며 군사를 진군시켰다. 성문을 돌파하고 내부로 들어가게 되자 과연 성에는 아무도 없었고 깃발은 나무와 덩굴로 고정시켜져 흩날리고 있을 뿐었다.
위병계를 간파하고 우시오에 성을 점거한 모토치카는 의기양양하게 오코 성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버지 쿠니치카가 중태에 빠졌단 소식이었다. 쿠니치카는 모토치카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7일후엔 상복을 벗고 모토야마 가문을 멸망시킬 것을 유언으로 남기며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5] 모토치카는 이 유언에 따라 쿠니치카 사망후 7일이 지나자 가독을 이어 당주에 올랐고 3일뒤 모토야마 타도를 결의 하며 군사를 일으켰다. 모토야마 가문의 주요 거점은 산중에 있는 모토야마 성(本山城)과 평야에 있는 아사쿠라 성, 두곳이 존재하였고 모토치카는 이 두곳의 연계를 끊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두 거점 사이의 지성들을 공략했다. 이런 와중 의외의 인물이 도움을 주게 되는데 다름 아닌 모토야마 가문에 영토를 침범당한 토사 이치죠 가문의 당주인 이치죠 카네사다가 원군을 내어준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에 감사를 표하였고 이치죠의 군세는 옛 영토를 수복하였으며 쵸소카베의 군세는 모토야마 공략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1562년 9월 16일 드디어 아사쿠라 성 공략을 개시했다. 모토치카는 주력 3000명을 동원하였으며 18일, 군사를 이끌고 아사쿠라 성에서 나온 시게토키와 전투를 반복했지만 시게토키를 압도하지 못하고 오코 성으로 귀환하였다. 모토치카를 물리치는데 성공한 시게토키였으나 모토야마 성과의 연락이 어렵게 되고 서쪽에선 이치죠 가문의 군세가 건장하였기 때문에 결국 1563년 1월, 아사쿠라 성을 태워버리고 처자식과 함께 본성 모토야마 성으로 귀환하였다. 그렇게 토사평야에서 모토야마 가문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빈자리는 쵸소카베 가문이 채우게 되어 모토야마 가문을 압도하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
3. 토사 통일
이후 내부 정비에 힘을 쏟는 모토치카는 토사의 주요 수로를 파악하고 그곳에 교역거점을 설치해 에도 시대에도 교역품으로 이용된 토사의 목재를 상인들에게 팔아 상인들이 깡시골에 가까웠던 토사에 상인들을 자주 드나들게 만들어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키나이의 정보를 손쉽게 얻을수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또한 도래인 출신으로서 한계를 가지는 자신의 신분을 타파하기 위해 상락하여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이자 친분이 있었던 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頼辰)에게 혼사를 부탁하였고 그의 여동생[6] 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성공하여 쵸소카베 가문이 미나모토의 성씨를 쓸수있도록 만들었다.[7] 모토치카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철저하게 기반을 다지던 모토치카였지만 아키 가문의 영토였던 아키 군(安芸郡)에서 가신들에 의한 트러블이 일어가면서 아키 가문의 당주였던 아키 쿠니토라(安芸国虎)가 오코 성으로 쳐들어오게 된다. 쿠니토라는 군사를 진격함과 동시에 자신과 연척관계에 있던 이치죠 카네사다에게 원군요청을 보냈는데 카네사다는 이 원군요청을 수락하여 총 5000여 명의 군세가 오코 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쵸소카베의 주력은 모토야마 성 공략에 차출되어 병력이 얼마없는 상태였기에 모토치카는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를 소집하여 대항하였다. 싸움의 전황은 쿠니토라에게 유리하였으나 우에야스 성(上夜須城)에서 쵸소카베 가신들이 포위를 뚫고 나와 오코 성에서 협격하는 모양새가 되자 쿠니토라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군사를 수습해 돌아갔다.[8] 쿠니토라의 선공에 분노한 모토치카는 당장 아키로의 침공을 계획했지만 이치죠 가문의 중재에 의해 유야무야 되어 아키 방면의 군사를 물리고 모토야마 성 공략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3.1. 모토야마 멸망
이미 모토치카는 모토야마 성을 몇번이고 함락시키는 것에 실패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 공략에서는 새로이 성을 쌓는 등의 만전을 가하였다. 1564년 4월, 공성을 시작하자 시게토키는 농성을 포기하고 다시한번 처자식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새로이 성을 쌓아 모토치카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후 시게토키는 실의에 빠져 병사하고 아들 모토야마 치카시게(本山親茂)가 가독을 잇게 되며 모토야마 가문은 멸망 직전의 상황에 빠졌다.[9]
1568년의 겨울, 모토치카가 모토야마의 완전 토벌을 위해 군을 진군시키자 치카시게는 개성하여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한때 토사 중앙을 호령하던 호족 모토야마 가문은 멸망하였고 모토야마의 가신들은 쵸소카베의 세력에 흡수되어 이후의 전쟁에서도 활약하게 된다.[10] 모토야마 가문을 멸망시킨 쵸소카베 가문은 드디어 이치죠 가문에게도 대적할 수 있을정도로 성장하였고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아키 침공에 착수한다.
3.2. 아키 멸망
당시 아키 가문과는 이치죠 카네사다에 의해 정전협정이 맺어져있었기에 모토치카는 쿠니토라를 도발하여 협정을 깨뜨리는 계책을 짰고 쿠니토라는 이에 낚여 모토치카에게 협정결렬의 의지를 전해 정전협정은 깨지게 되었다. 계책을 완수한 모토치카는 7000여 명의 군세를 모아 가신을 총 동원해 쿠니토라가 있는 아키 성(安芸城)으로 진군, 아키 세력의 성을 차례차례 함락시키며 나아가 이윽고 양자는 야나가레(八流)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토치카는 군세를 두 갈래로 나누어 자신은 야나가레에서 쿠니토라의 5천 군세와 격돌하기로 하고 다른 쪽은 아키 가문에서 배신한 호족들의 안내를 받아 산도를 지나가 아키 성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모토치카는 쿠니토라의 군세와 격렬히 싸우며 쿠니토라에게 이미 야나가레 주변의 성들이 쵸소카베 세력에게 함락당한것 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쿠니토라의 군세에 동요를 주었다. 이 틈을 노려 모토치카는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쿠니토라는 야나가레에서 탈출하고도 아키 성에서 모토치카의 군세와 싸우는 이중고를 거쳐 아키 성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쿠니토라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농성을 선택했으나 모토치카는 이번에도 내통자를 만들어 탈주를 유도하거나 성내의 우물에 독을 풀게 하는등 쿠니토라를 압박하여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만 갔다. 포위된 성에서 이치죠 가문의 원군조차 기대 할수 없게 되자 24일간의 농성 끝에 쿠니토라는 모토치카에게 자신의 할복과 남아있는 병사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요청을 보냈다. 모토치카는 이를 수락하였고 8월 11일, 쿠니토라는 자결, 토사의 호족 아키 가문은 멸망하였다.
3.3. 이치죠 멸망
모토치카가 토사 통일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이요 정복을 진행 중이었던 카네사다는 이요의 슈고 다이묘였던 코노(河野) 가문과 츄고쿠의 '''모리 모토나리'''에게 지원을 받은 사이온지 가문의 역습을 받아 아무런 결과를 남기지 못하고 토사로 귀환하게 된다.
당시 서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치카사다는 이러한 이치죠 가문의 상황을 파악하고 모토치카에게 지금 당장 이치죠 토벌을 진행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이제 막 아키 가문을 멸망시킨 모토치카는 이치죠 토벌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모토치카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자 치카사다는 지금 이치죠 가문을 토벌할 때에 얻는 이익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였고 결국 모토치카를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 군사권을 위임받아 이치죠의 영토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치카사다의 예상대로 당시 이치죠의 가신들은 당주 카네사다에 대해 불만과 불안감이 팽배한 상태였고 치카사다가 본격적으로 성을 함락시키기 시작하자 츠노(津野) 가문은 당주를 쫓아내면서 까지 쵸소카베의 세력에 투항하는 등 이치죠의 가신들은 치카사다의 침공에 크게 동요하였다.
결국 1574년 2월 카네사다는 이치죠 본가와 가신들의 압박으로 연척 오토모 소린에 의지해 분고로 달아나게 되며 이치죠 가문은 토사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고 이치죠의 본거지였던 나카무라 성(中村城)에 치카사다가 입성하였다.
3.3.1. 시만토가와 전투
자신의 가문의 영토 전체가 쵸소카베 가문에게 빼앗기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카네사다였으나 그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카네사다는 돈 파울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시코쿠로 건너와 이요, 토사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호족 세력을 모아 3500여 명의 군대를 일으켜 모토치카에게 전쟁을 걸었다. 이에 모토치카는 재빨리 군사를 모아 치카사다와 합류하였고 이들은 시만토가와의 지류 와타리가와(渡川)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7300여 명의 군사로 숫적 우위를 점했던 모토치카는 다시 한번 군대를 둘로 나눠 협격으로 상대를 물리치는 전법을 선택하여 모토치카는 본대를 이끌고 와타리가와를 도하해 이치죠의 군세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치카사다는 별동대를 이끌고 강의 상류쪽으로 올라가 도하, 이치죠 군세의 왼편을 급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이치죠의 군세는 모토치카의 본대와 와타리가와에서 혈전을 벌이다 별동대의 기습을 받게 되어 패배, 카네사다는 근처의 성으로 피신하게 되나 얼마안가 항복하게 되었고 토사에서 떠나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이번 전쟁으로 이치죠의 잔당을 쓸어버리는 것에 성공함에따라 옛 이치죠의 영지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모토치카는 15년에 걸친 토사 통일을 완수하게 되었다. 모토치카 37세 때의 일이다.
4. 시코쿠 제패를 위한 싸움
토사를 완전정복한 모토치카는 드디어 시코쿠를 통일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중앙에서 포위망을 견뎌내고 키나이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 모토치카는 키나이와 시코쿠를 이동하는 아와의 상인과 이제는 오다 가문 아케치 미츠히데의 가로(家老)가 된 사이토 토시미츠에게 노부나가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고 얼마 가지않아 직접 사신을 보내 노부나가와 대면시키게 했다,
모토치카 측의 요구는 자신이 시코쿠 정복을 진행하고 영토를 점거했을시 그 영토는 쵸소카베 가문의 영토로 인정할 것. 자신의 적남에게 편위를 내려줄 것. 이 두가지가 전부. 시코쿠에도 자신의 세력을 두기로 결심한 노부나가는 이 조건을 수락하였다. 이렇게 모토치카의 적자는 노부나가(信長)의 이름에서 노부(信) 자를 하사받아 쵸소카베 노부치카라 개명하여 성인식을 치루었고, 쵸소카베 가문은 오다 가문에게 영지 점거와 복속의 허락을 받게 되어 후방의 아군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영토 확장의 당위성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아와를 향해 시코쿠 정복이라는 장대한 사업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4.1. 아와 방면
모토치카는 시코쿠 평정의 첫발로 아와 카이후 성(海部城)을 공격하였는데, 다름이 아니라 이곳이 동생 치카마스가 아와의 호족들에게 살해당한 장소이기 때문이다.[11] 당시 아키 성주였던 치카야스까지 참전하여 카이후 성을 공격한 결과 성은 모토치카의 손에 들어왔고 성주는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지 않고 카이후에서 도망치게 되어 무난히 아와 침공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모토치카는 치카야스를 카이후 성주로 임명하고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며 호족을 공격하고 포섭함에 따라 아와 남부는 모토치카가 순식간에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모토치카는 아와를 남부에서 뿐만 아니라 서부에서도 압박하기위해 시코쿠 중앙의 산길을 진군해 아와 서부의 호족 오니시(大西) 씨와 내통하여 시코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하쿠치 성(白地城)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하쿠치 성에 도착하자 오니시 씨는 개성하여 자신의 아들을 쵸소카베 가문에 인질로 보내주었고 모토치카는 시코쿠 평정의 중앙거점을 손에 넣게되었다.
하지만 오니시의 당주는 다시 한번 미요시 측으로 배신하였고 하쿠치 성주가 없어짐에 따라 다시 새로운 인물을 뽑아야했다. 당시 인질로 쵸소카베 가문으로 들어온 오니시 당주의 아들은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는데 모토치카는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해 그를 하쿠치 성주로 임명하였다. 죽음을 각오하였던 그는 이 일로 모토치카에게 충성하며 하쿠치 성의 방비도 개선됨에 따라 모토치카는 본격적으로 아와를 지배하던 미요시 나가하루를 제거하기 위해 계책을 짜기 시작했다.
모토치카는 시노하라 나가후사 사후 나가하루와 반목하던 호소카와 사네유키를 표적으로 삼아 나가하루 토벌의 지원을 조건으로 아와 공략에 도움을 줄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사네유키는 이에 응하였고 이미 쵸소카베 측으로 돌아선 아와의 호족 이자와 요리토시(井沢頼俊)와 이치노미야 나리스케(一宮成助)와 함께 나가하루를 공격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미요시 가문을 내분으로 혼란케 만든 모토치카는 하쿠치 성에서 출진해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1578년 1월, 나가하루의 후계자로 소고 마사야스가 이즈미에서 아와 쇼즈이(勝瑞)로 돌아왔다. 3월에는 다시 미요시 측으로 돌아선 오니시 씨를 격파하며 하쿠치 근방을 정리하는 것에 성공, 하쿠치 성을 개수하였으며 쵸소카베의 세력은 더더욱 쇼즈이가 있는 동쪽으로 나아갔다.
1579년 여름, 모토치카는 시게키요 성(重淸城)을 공격하였다. 마사야스의 원군을 얻은 시게키요 성주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얼마 못가 성을 내어주었고, 미요시 야스나가의 아들 미요시 야스토시(三好康俊)[12] 가 있던 이와쿠라 성(岩倉城)은 야스토시가 저항도 하지않고 항복함에따라 쉽사리 모토치카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쿠라 성을 손에 넣자 모토치카는 우시키 성(牛岐城)과 이치노미야 성(一宮城)을 점거하며 북진하는 치카야스와 호흡을 맞춰 쇼즈이로의 침공을 계획하였다.
4.2. 사누키 방면
아와 하쿠치 근방의 장악에 성공하게 되자 모토치카는 1578년 여름, 서 사누키의 후지메 성(藤目城)을 침공하는 것으로 사누키 정복의 기치를 높였다. 후지메 성은 호소카와 4천왕으로 대표되는 카가와(香川) 가문에 소속하는 호족 사이토(斎藤) 씨가 점거하고 있었는데 쵸소카베의 공격에 얼마 대응하지 못하고 손자를 인질로 내어주며 항복하였다.
외부세력의 침공이 시작되는 걸 알아차린 서 사누키의 호족들은 군사를 규합해 빼앗긴 후지메 성을 탈환하는데 성공, 사누키의 전초기지가 맥없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보고를 들은 모토치카는 동년 겨울에 급히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병사들은 자체적으로 공성을 시작하였고 결국 후지메 성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전초기지의 확보에 성공하자 쵸소카베의 군세는 연이어 성을 떨어뜨리며 1579년에는 카가와 가문의 거성인 아마기리 성(天霧城)을 목표로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다. 모토치카는 서 사누키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카가와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길 원하여 항복의 문서를 당주 카가와 노부카게(香川信景)[13] 에게 보내었는데 노부카게는 양자를 보내줄 것을 조건으로 이 제안에 선뜻 응하게 되며 카가와 가문은 쵸소카베의 가신이 되었고 모토치카의 차남 치카카즈는 노부카게의 딸과 혼인하여 카가와 치카카즈라 개명했다.[14]
카가와 가문을 제압한 모토치카는 코자이(香西) 가문을 공격하러 동쪽으로 진군한다. 당시의 코자이 가문은 새로운 당주를 둘러싼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소속되어있던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모토치카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하유카 성(羽床城)의 하유카 씨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모토치카는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하유카 성으로 진군하였다. 동 이요의 호족들까지 동원해 약 1만 명에 달하는 쵸소카베 군과 달리 하유카의 군세는 1000명을 간신히 맞출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하유카의 군세는 지역의 요소를 점거해 필사적으로 싸워나갔지만 결국 하유카 성까지 밀려 포위당하였고 모토치카는 노부카게를 사자로 파견하여 다시 한번 항복을 권고하였다. 그렇게 막다른 길에 몰린 하유카 씨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며 항복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유카씨와 똑같이 츄산(中讃)에 위치하는 나가오씨(長尾氏)씨 또한,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여 복속되었다.
4.3. 이요 방면
당초 모토치카는 아와의 침공과 동시에 이요에도 치카사다를 파견해 남쪽으로 부터 밀고 올라가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576년 7월 15일, 치카사다가 36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이요 정벌군을 재편성해야만 하였기에 총대장은 히사타케 치카노부(久武親信)로 교체되었다.
하쿠치를 점거한 이후로는 하쿠치를 통해 동 이요로 군사를 보내 이요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동 이요의 호족들은 이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는데 카네코 모토이에(金子元宅)로 대표되는 이들은 대부분 쵸소카베 측으로 투항을 요청해 모토치카의 가신이 되었다.
치카노부를 대장으로 하는 남 이요 공략대는 한참 늦은 1579년 봄에야 출진하였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치카노부의 군세였으나 사이온지 가문의 영지인 오카모토 성(岡本城)을 공격하다 도이 세이료(土居淸良)의 계책에 의해 철포를 맞아 치카노부 및 여러 가신들이 전사하여 와해됨에 따라 남 이요 공략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5. 오다 가문과의 불협화음
1580년이 되자 빠르고 격렬하게 시코쿠 정복을 진행중이던 모토치카는 잠시 그 기세를 늦추게 되었다. 본거지인 토사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오다 가문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시코쿠 정복을 탐탁치 않게 보고 소고 마사야스에게 지원군을 내줄 낌새를 보이자 모토치카는 치카야스를 아즈치 성(安土城)에 파견하였다.
노부나가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렸으나 돌아온 것은 "이요와 사누키는 정복 시 오다 가문에 반환할 것, 그리고 아와 중서부를 제외한 남부와 토사만을 쵸소카베 가문의 영지로 할것."이라는 대답이었다. 물론 모토치카는 노부나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였고, 양가문의 관계는 파탄, 이윽고 노부나가가 1582년 5월, '''자신의 아들'''과 '''사천왕 중 1인'''을 군단장으로 하는 파격적인 지원군을 마사야스에게 보내주게 되면서 모토치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15]
한편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모토치카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편지를 5월 21일에 사이토 토시미츠에게 보내게 된다.[16][17]
5.1. 그리고....
'''1582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천하인에 가까워던 노부나가의 죽음은 일본 일대에 혼란을 일으켰고 시코쿠 정벌도 취소됨에 따라 모토치카는 대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마사야스 또한 이 영향으로 지원군을 잃게 되었기에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 쇼즈이를 치기에 절호의 기회였으나 모토치카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8월이 되자 진중론을 제시하는 가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아와 침공을 주장한는 이치료구소쿠의 의견을 채택하게 되며 드디어 쇼즈이로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였다.
6. 침략 재개와 시코쿠 평정
모토치카는 치카야스와 우시키 성에서 합류하였고 군세를 두갈래로 나누어 각각 나카토미가와(中富川)와 쇼즈이로 진군시켰다. 이에 마사야스는 쇼즈이 성에서 나와 나카토미가와를 사이에 두고 군사를 배치하여 8월 28일, 아와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미요시 가문 쪽이 절대적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마사야스의 군세는 도하를 시작한 모토치카의 군세에 포위당하였고 마사야스 본인은 쇼즈이 성에 틀어박히게 된다.
성공적으로 포위를 성공한 모토치카의 군세였으나 9월 5일이 되자 뜬금없는 폭우로 미세하지만 전황이 뒤바뀌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폭우로 강물이 흘러 넘치자 마사야스가 조각배를 내어 높은곳으로 피난해 있는 군사들을 차례차례 사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폭우는 1주일을 넘기지 못하였고 강물도 차차 빠져감에 따라 마사야스가 잡은 모처럼의 호기는 부질없는 것이 되었으며 9월 21일, 결국 마사야스의 항복과 쇼즈이 성의 개성으로 마사야스는 사누키 토라마루 성(虎丸城)으로 철퇴, 쇼즈이 일대는 전쟁과 후처리로 인해 파괴됨에 따라 아와의 미요시 가문과 쇼즈이는 영향력을 잃고 소멸하게 되었다. 또한 뒷편으론 오다 가문이 침공해올 당시 미요시 가문으로 돌아섰던 이와쿠라 성을 다시 한번 제압함에 따라 아와의 중요한 지역은 전부 모토치카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아와 정복을 달성하였다.'''[18]
한편 사누키에서는 1582년 7월, 아마기리 성주 카가와 치카카즈와 하쿠치 성주 타니 타다즈미(谷忠澄)가 코자이 가문의 본거 후지오 성(藤尾城)을 함락시킨 다음 노부카게가 코자이 가문을 포섭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사누키로 피신한 마사야스의 본거지 소고 성(十河城)을 공격하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쇼즈이 성을 떨어뜨리자 이에 호응해 10월 중 이와쿠라 성에서 출발해 치카카즈와 합류, 소고 성 주변의 지역을 점거해 소고 성과 토라마루 성의 연결을 끊어 고립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겨울이 되자 눈이 내리고 병량조달에 차질이 생기자 공략을 일시 중단하게 되었다.
모토치카가 다시 시코쿠 정복을 진행하고 있을 때, 일본 중앙에서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사이토 토시미츠는 이미 하시바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사망한 상태였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문제를 둘러싼 히데요시와 카츠이에의 내전이 본격화 되는 중이었다. 카츠이에가 지지하고있는 오다 노부타카는 모토치카를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모토치카와 연락을 취하였고, 모토치카는 이에 응하게 되어 노부나가 사후 오다 가문의 권력투쟁에도 뛰어들게 되었다. 이에 맞춰 마사야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모토치카의 위험성을 알리며 증원을 요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섣불리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기에[19] 사누키에 빠르게 군사를 보낼 수 있는 아와지의 다이묘, 센고쿠 히데히사만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1583년, 히데히사는 사누키 중앙에 상륙해 쵸소카베의 군세를 공격했지만 실패, 곧바로 철퇴하였으며 4월이 되자 모토치카는 다시 한번 마사야스가 있는 토라마루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철수해있던 히데히사가 히케타 성에 입성하게 되어 순식간에 모토치카는 적을 앞뒤에 놓고 교전해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히데히사는 곧바로 출격하여 쵸소카베군을 몰아붙였으나 모토치카가 본대를 증원으로 보내자 순식간에 밀려 다시 실패, 히케타 성도 모토치카에게 떨어져 본거지인 아와지로 물러났다.
한편 토라마루 성에 틀어박혀 있는 마사야스는 모토치카의 포위에 의해 점점 병량이 떨어지고 승기가 옅어지자 토라마루 성마저 모토치카에게 내어주고 소고 성으로 도망쳐 갔다. 이렇게 모토치카가 승승장구할 때 카츠이에는 시즈가타케(賤が岳)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고 자결했으며 노부타카 또한 하시바의 군세에 항복하여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노부타카 라인은 총대장 두명이 모두 죽게되어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지만 카츠이에 사후에는 히데요시의 지지를 받고있던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결탁하여 반 하시바 세력을 결성하여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대규모 내전을 벌어야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이에야스 또한 모토치카에게 연합의 참가를 요구하였고 모토치카는 이것을 또 흔쾌히 받아들여 또 다시 히데요시와 적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1584년,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싸움을 시작하자 모토치카는 5월에 소고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마사야스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개성하였으며 자신은 토라마루 성에서 최후의 농성전을 펼치게 되었다.[20]
소고 성을 손에 넣은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세력의 또 다른 격전지인 오사카 성에 출진해 히데요시 세력을 물리치고, 이에야스는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승리하여 히데요시를 양쪽으로 압박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이에야스의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의 회유에 의해 화친을 맺게 됨에 따라 내전은 히데요시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났고, 모토치카는 키나이 진출의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시코쿠 정복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아와와 사누키를 정복한 것과 마찬가지인 모토치카 앞에 남은 시코쿠의 지역은 이요 하나뿐이었다. 이미 1584년 정월에 남 이요의 공략이 시작됐었고, 치카노부의 동생, 히사타케 치카나오(久武親直)와 항복한 동 이요의 호족 카네코 모토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루지 못한 남 이요 정복에 박차를 가했다. 형이 전사했던 전장에서 치카나오는 순조롭게 사이온지 가문의 성을 떨어뜨려 나갔고 10월이 되자 사이온지 가문의 본거 쿠로세 성(黑瀨城)마저 함락시키는데 성공해 사이온지 킨히로(西園寺公広)는 항복, 남 이요는 쵸소카베 가문의 세력이 되었다.
이요의 동, 남이 항복하면서 남은 것은 코노 가문이 지배하고있는 중부뿐. 모리 가문은 이런 상황을 알아채고 원군을 보내주었지만 쵸소카베군의 항전에 의해 얼마 안 가 철군하였다. 치카나오와 모토이에는 단번에 코노 가문의 본거, 유즈키 성으로 진격하였고 이를 본 당주 코노 미치나오(河野通直)는 가신들과 합의 끝에 항복, 끝끝내 '''이요 정복을 달성하였다.'''[21]
1585년의 봄. 모토치카의 나이 47세. 1575년의 토사 평정이후로 10년만에 '''시코쿠 통일에 성공하였다.'''
7. 천하인과 싸우다
평생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모토치카였지만 기뻐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마저 제압한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천하통일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 번째 목표로 반 히데요시 연합에 참가했던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들 중에서도 위치가 가깝고, 노부나가-히데요시 세력에 몇번이나 노골적인 공격을 행했던 사이카슈를 목표로 천하통일의 첫발을 내딛었다. 모토치카는 한때 함께 히데요시에게 대항했던 이들을 위해 지원군을 보내주려 했으나 곧 생각을 바꿔 히데요시에게 화친의 사자를 보냈다.
사자로 임명된 타니 타다즈미는 히데요시와 대면해 앞으로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갈 것이며 시코쿠 4개국의 병력을 지원해줄 것을 조건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으나 히데요시는 항복할 것이면 아와, 사누키, 이요 3개국을 내놓으라는 고압적인 조건을 제시함에 따라 타다즈미는 교섭을 포기하고 모토치카가 대기 중인 하쿠치 성으로 돌아왔다.[22]
결국 모토치카는 아무런 타개책도 찾지 못하였고, 히데요시가 출진한지 약 1달이 지난 4월 24일에 키이 사이카슈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모토치카는 1582년 때와 다르지 않은 심정으로 하쿠치 성을 본진으로 삼아 히데요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히데요시는 다음 목표로 내전 기간 동안 굉장히 거슬리던 모토치카가 있는 시코쿠를 지정하였고 6월 출진을 가정하며 본격적으로 상륙준비에 착수했다.
6월이 되었지만 히데요시는 병을 앓게 되어 자신이 직접 출진하지는 않았고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모리의 군세를 이요로, 우키타의 군세를 사누키로, 자신의 본대를 아와로 보내는 하시바 올스타즈를 구성하여 '''6월 16일, 시코쿠로 군대를 상륙시켰다.'''[23]
이에 모토치카는 아와 서부를 중점으로 전선을 짜, 시코쿠 중앙에서 방어를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7.1. 이요 루트
'''털렸다. 총대장이 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다.'''
모리 테루모토는 미하라(三原)에 본진을 갖췄고 타카카게가 약 3만 군세의 총대장으로서 동 이요에 상륙했다. 타카카게 아래로는 킷카와 모토나가나 후쿠하라 모토토시(福原元俊) 등 쟁쟁한 가신, 다이묘들이 참여하는 모리 올스타즈가 포진, 이에 대항하는 쵸소카베의 세력은 카네코 가문의 카네코 모토이에와 약 2천의 병사가 전부였다.
6월 하순, 타카케게는 곧바로 카네코 가문의 중요 거점인 카네코야마 성(金子山城)과 타카오 성(高尾城)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모토이에는 모토치카가 조금이라도 보내준 원군과 함께 힘겹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14일에 카네코야마 성이 낙성, 17일이 되자 타카오 성마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모토이에는 할복하였다. 그의 유체는 타카카게가 직접 묻어 장사지내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요 방어의 핵심을 무너뜨린 타카카게는 중앙 이요로 진군해 차례차례 성을 떨어뜨리며 하시바의 영지를 넓혀갔다. 해안선의 확보에 성공하자 동부의 카와노에(川之江)에 본진을 두어 언제라도 하쿠치 성에 진군할 채비를 마쳐놓았다. 또한 유즈키 성을 방어하고 있던 코노 미치나오에겐 자신과 연척인 점을 이용해 그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하였다.[24]
7.2. 사누키 루트
'''털렸다(2). 총대장이 그 쿠로다 칸베에다.'''
우키타 히데이에나 칸베에같은 상당한 네임벨류를 자랑하는 이들은 약 2만의 군세로 사누키의 중앙에 가까운 야시마(屋島)에 상륙하였다. 쵸소카베 측은 쵸소카베 가문의 일문인 헤와 치카타케(戸波親武)와 약 2천 500명이 전부. 치카타케는 모토치카의 말에 따라 우에다 성(植田城)을 중심으로 주위에 성채를 여럿 쌓고 칸베에를 지세가 좁은 우에다로 유인하여 싸우기로 전략을 세웠다.
칸베에가 수월히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치카타케는 칸베에를 유인하려 하였으나 칸베에는 치카타케의 행동을 간파하였고, 우에다 일대를 무시하며 히데나가가 있는 아와로 진군함에 따라 치카타케는 히데요시 세력을 저지할수 없었고 사누키는 방치되었다.
7.3. 아와 루트
'''꽤 버텼으나, 털렸다(3). 총대장이 그 하시바 히데나가다.'''
키나이에서 아와지를 경유해 아와로 향하는 히데나가의 군세는 약 3만으로, 부장으로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격인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따라왔으며, 후속 부대로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가 또 약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상륙할 예정이었다. 이들을 상대하는 쵸소카베의 무장은 미요시 가문의 무장이었던 토죠(東条) 씨. 하지만 이미 히데나가와 히데츠구는 모두 토사도마리에 상륙을 끝마친 상태였고, 사누키에서 내려온 칸베에와 합류에 성공하였기에 아와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이윽고 히데나가는 키즈 성(木津城)에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요소에 쌓인 키즈 성은 의외로 질기게 버티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격노하여 자기 스스로 출진하겠다고 의사표명을 했지만 히데나가가 적극적으로 저지한 끝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자 히데나가는 더 격렬하게 공성을 시작하며 성내의 물길을 끊어 버리는 등 키즈 성을 철저하게 고립시켰고, 히데요시 세력에 있는 토죠 씨의 숙부를 이용해 항복을 권고하였다. 토죠 씨는 결국 7월 8일에 항복권고를 수락한 다음 토사로 도망쳤으나 모토치카의 명에 따라 자결하였다.
키즈 성이 떨어지자 우시키 성에 있던 치카야스는 군사를 물렸고, 치카야스의 후퇴 소식을 들은 주변의 가신들 또한 토사로 군사를 물리게 되어 아와 남부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7월 15일, 히데나가는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눠 각각 이와쿠라, 카이후로 진군시킨 다음 자신은 이치노미야로 진군하였다. 히데나가는 약 5만의 군세와 이치노미야에 도착하자 아쿠이가와(鮎喰川)를 사이로 이치노미야 성의 북방에 거점을 두었다. 이치노미야 성을 지키고 있는 가신은 북성의 에무라 씨와 남성의 타니 타다즈미,[25] 그리고 5천여 명의 군사들. 히데나가는 곧 토도 타카토라와 마사카츠 등에게 명령해 성의 포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치노미야 성 또한 만만한 성이 아니었고, 한 달이 될 동안 항전이 계속되자 히데나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땅굴을 파 성내로 통하는 물길을 전부 차단하는 전술을 써 이치노미야 성을 고립시켰다. 이와쿠라로 향한 히데츠구와 칸베에 또한 이와쿠라, 와키 성을 떨어뜨림에 성공함에 따라 아와 또한 모든 방어선이 무너져내렸다.
7.4. 항복
시코쿠 대부분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나가는 이치노미야 성을 지키는 타다즈미에게 항복의 문서를 보냈다. 타다즈미는 항전을 부탁하던 모토치카를 생각하며 고뇌하였지만 결국 에무라 씨와 상의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타다즈미는 모토치카를 설득하기 위해 하쿠치로 달아났다. 이렇게 하쿠치 성을 기준으로 하는 전 방어선이 무너졌고 모토치카는 사실상 고립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도 모토치카는 항전을 생각했으나 타다즈미는 더이상 가망이 없고, 이 이상 저항하면 가문 자체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신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모토치카를 설득했다. 결국 모토치카는 타다즈미의 의견에 따라 '''항복의 문서를 히데요시에게 전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7월 12일에 모토치카의 항복을 허가하고 토사만을 모토치카에게 내려주었다. 다른 3개국은 이번 정벌에 참여한 가신들에게 나누어줌에 따라[26] 모토치카는 반년도 못가서 자신이 얻었던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었으며 30년 가깝게 진행해온 사업의 결실은 한순간에 먼지로 돌아갔다.
항복 이후 모토치카는 삼남 치카타다를 인질로 오사카 성으로 보냈다. 이요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는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타카카게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었다.[27] 인질로 보내진 치카타다는 얼마 안가 차남 치카카즈가 대체하였고 10월 20일에는 히데요시와 대면하기 위해 모토치카가 직접 오사카로 향하였다. 1586년 1월에는 치카카즈 또한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사로 귀국하였다.
8. 큐슈로...
몇 달 동안은 평안히 시간을 보내던 모토치카였으나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시마즈 요시히사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28] 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큐슈 정벌군의 선봉으로 파견되게 되었다. 정벌군의 총대장은 자신에게 두들겨 맞은 '''센고쿠 히데히사'''였으며 동행하는 무장은 자신이 철저하게 때려잡은 '''소고 마사야스'''. 시작부터 멸망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들은 1586년 11월 22일에 도해를 시작했다.
이들은 소린의 본거지인 후나이(府內)에 상륙하였다. 히데히사는 도착하자마자 전황을 파악하여 현재 오토모 가문의 중요거점 여럿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장기전으로 끌고가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무시하고 구원을 위해 약 6천의 군사로 12월 12일에 후나이에서 출진하였다.
성을 포위 중이던 시마즈 이에히사는 히데히사의 출진소식을 듣고 군사를 물려, 양 군대는 헤츠기가와(戸次川)에서 대치하였다. 히데히사는 이에히사가 이끄는 군세를 파악하자 당장 도하를 시작해 적을 쳐부수자는 돌격 전술을 주장했다. 이 주장을 들은 모토치카와 노부치카는 경악하며 히데히사를 뜯어 말렸지만 히데히사는 이미 돌격할 결의를 굳힌 뒤였다.
날이 되자 히데히사는 군세를 두 갈래로 나누어 돌격을 시작했다. 히데히사가 먼저 돌격을 시작하자 시마즈 세력은 바로 히데히사에게 급습을 감행하였으나 이내 후퇴하기 시작했다. 히데히사는 이를 호기로 보고 도하를 시작했으나 이는 시마즈 세력의 함정이었고 이내 히데히사의 군세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가자 히데히사는 후퇴명령을 내리기는 커녕 전장에서 이탈해 북상한 뒤, 부젠을 경유하여 자신의 영지인 사누키로 도주하였다.
원정대는 순식간에 총대장을 잃게 되었고, 이내 역습을 당하여 오토모의 가신들과 마사야스와 그의 가신들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노부치카 또한 사누키군과 같은 라인을 담당하였기에 순식간에 시마즈군과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22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29] 모토치카는 비교적 후방에 있었기에 결사의 각오로 그 생지옥에서 빠져나가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후였다. 히데요시의 세력을 갈아버린 이에히사는 소린을 포위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이내 떨어뜨리지 못하고 후퇴하여 소린은 더더욱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애지중지하던 후계자, 노부치카의 전사 소식을 들은 모토치카는 오열하였다. 모토치카는 노부치카의 시신이라도 돌려받기 위해 타다즈미를 사자로 파견하였고 니이로 타다모토(新納忠元)는 노부치카를 높게 평가하며 이 제안에 응해 그의 시신과 무구들은 토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8.1. 후계자 분쟁
큐슈의 이야기를 들은 히데요시는 히데히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유배지로 보내버렸다. 모토치카에게는 장남의 죽음을 위로하며 차남 치카카즈가 후계자가 될수있도록 주인장을 발급해주었고, 큐슈의 오스미를 가증해 주겠다는 제안도 해보았다.
1587년 3월, 히데요시는 자신의 병력을 한계까지 동원하여 큐슈에 상륙하였고 시마즈 가문은 이에히사를 필두로 차례차례 항복해나가, 마침내 5월 8일, 시마즈 요시히사가 머리를 깎고 항복하게 되며 큐슈는 히데요시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안팎이 정리가 되자 모토치카는 새로운 후계자를 지정하였다. 그 주인공은 히데요시의 승인을 받은 치카카즈가 아니라 자신의 사남 치쿠마마루. 치카카즈가 사누키의 명문, 카가와 가문에 입적했다곤 하지만 치쿠마마루도 이미 키라 가문의 양자로 보내져 있었기에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이해가 되지않는 후계자 지명이었다. 그렇게 치쿠마마루는 쵸소카베 가문으로 불려와 자신의 형 노부치카의 딸과 혼인을 맺어 정식적으로 모토치카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이런 이해할수 없는 후계자 지정은 쵸소카베 가문 내에 파벌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요에서 군공을 올렸던 히사타케 치카나오는 어느 가문과도 이해관계가 없는 치쿠마마루를 열렬히 지지하였고, 모토치카의 동생 키라 치카사다의 아들, 키라 치카자네(吉良親実)와 아버지 쿠니치카의 동생 쿠니야스(国康)의 아들, 히에야마 치카오키(比江山親興)는 이런 기형적인 후계자 지정에 반대하며 치쿠마마루의 후계자 지정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게되며 가중은 분열되었다.
물론 이 결정에 제일 반발한 사람은 전 후계자, 치카카즈였다. 그는 이미 천하인 히데요시에게도 인증을 받아 놓았던 상태였기에 이런 상황에 크게 분노하였다고 전해진다. 결국 후계자 후보에서 밀려난 그는 오코 성에서 머물게 되었고 얼마안가 1587년 중, 21세의 나이로 병사하게 되었다.
상황이 점점 막장으로 치닫자 치카자네와 치카오키는 모토치카에게 직언을 올리기 시작했다. 허나 모토치카는 오히려 분노하였고 1588년 10월, 이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할복을 지시하는 과격한 처우를 보여주었다. 결국 이들은 국가 공신이자 혈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군에게 자결을 명받아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을 모두 숙청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어 치카자네와 치카오키의 일족은 멸족당했다.
결국 모토치카의 후계자는 치쿠마마루로 확정되었고 치카나오는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치쿠마마루는 성년이 되자 토요토미의 중신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에게 모리(盛) 자를 편위받아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로 개명하였다.
9. 집안 정리와 말년의 종군
모토치카는 토사를 하사받고 실시한 타이코켄치(太閤検地)[30] 로 큰 영향력을 얻어 평소에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곳도 측량을 행하여 쵸소카베치켄쵸(長宗我部地検帳)를 작성했다. 또한 1588년 4월에는 지쥬(侍従)에 임명되었고, 교통의 편의성을 위해 쵸소카베 가문 전통의 거성 오코 성에서 오다카사 성을 새로 축성하여 거주 장소를 바꾸었다.
1590년 3월이 되자 사실상 일본 통일을 완수한 히데요시는 걸리적 거리는 호죠 우지나오를 제거하기 위해 오다와라 성으로 군사를 진군시켰다. 모토치카도 출진의 명령을 받아 첫 출진인 16세의 모리치카와 함께 약 1만의 수군을 이끌고 이즈를 지나며 오다와라로 향했고 시모다 성(下田城)에서 싸워 군공을 올렸다. 7월에는 우지나오가 항복하여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에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31] 한편 모토치카는 오다카사 성 주변의 수해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을 느끼고 1591년이 되자 바다와 가까운 우라도 성(浦戸城)으로 다시 한번 거처를 옮겨갔다.
1592년,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의 꿈을 안고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다. 3월이 되자 모토치카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로 대표되는 5번대에 속하여 아들 모리치카와 치카타다, 치카야스의 아들 코소카베 치카우지(香宗我部親氏)와 함께 약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우라도에서 출진하여 조선으로 건너왔고, 진주성을 떨어뜨리는 등 군공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를 맺었고 이에 모토치카도 일시적으로 귀국하였다.[32]
1597년 모토치카는 토사 통치를 위해 쵸소카베지오키테가키(長宗我部氏掟書)[33] 를 제정하였다. 한편 조선과의 정전 협정은 깨졌고,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군사를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모토치카는 토도 타카토라로 대표되는 6번대에 소속해 조선으로 건너와 다시 한 번 조선 각지를 전전하였다.
하지만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나갔던 다이묘들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져 모토치카는 3월에 토사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모토치카의 나이는 딱 60세였다.
10. 사망
1599년 3월, 모토치카는 삼남 츠노 치카타다를 유폐시켰다. 4월에는 병이 도져 요양 겸 쿄토로 올라갔다. 상락 이후로는 토요토미 히데요리와 대면하기도 했지만 이내 병이 악화되어 5월 19일, 61세의 나이로 타지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후사는 예정대로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잇게 되었다.
11. 평가
11.1. 시코쿠 통일은 달성됐는가?
보통 모토치카하면 시코쿠 통일을 달성한 다이묘라는 인식이 상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학설이 제시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모토치카가 시코쿠의 '완전 정복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가장 힘을 얻고 있다.
11.2. 그외
모토치카가 상락한 타이밍이 막 토사를 통일하여 기본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시기였고, 중앙과의 연결 방법도 정실 부인과의 혼인이라는 고전적이고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그의 정치적 행보는 확실히 이득을 계산해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시코쿠를 통일해 가는 과정 또한 물리적인 침공과 모략, 정치적 공작을 섞어 쓰는 등 굉장히 복합적으로 진행하였기에 그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고 평가되고 있다.
모토치카가 '정말로 시코쿠 전토를 통일했었나?'는 최근까지 논란이 많은 주제 중 하나로, 쵸소카베 가문의 사료는 정말 대부분이 소설에 가까운 군키모노에 근거하고 있거니와 시코쿠 전토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가 시코쿠 통일을 완수했다는 1585년에서 1년도 되지 않아 시코쿠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침공을 받아 항복했기에 확실한 흔적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에 와서는 구석진 지역을 제외하고 각 영토의 중요지역을 전부 점거하는데 성공하여 '''대부분 통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술했듯, 아와는 본거 쇼즈이는 불타사라졌지만 동쪽에 잔존세력이 남아있음, 사누키는 본거 야마다가 떨어졌지만 당주 소고 마사야스가 토라마루 성에서 계속 모토치카와 싸웠음, 이요는 본거 유즈키에서 토사계의 기와가 발견되어 모토치카는 이요 중심부까지 정복했었거나 코노 가문이 노시마 무라카미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아직 모름. 이라고 판단된다.
모토치카 생애 대부분의 활동지인 시코쿠 내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다. 그의 고향인 현 난코쿠 시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뒤를 이을 코치 현의 아이콘으로 밀어주고 있지만 코치 중, 동부의 반응은 미적지근한 편이며 시만토 시로 대표되는 서부는 사카모토나 쵸소카베보다 이치죠에 더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다. 코치 바깥의 도쿠시마현, 카가와현, 에히메현에서의 모토치카의 민간 이미지는 침략자 정도에 그치며, 시코쿠 바깥에서는 깡촌의 다이묘라고 깎아내리는 인식이 많이 퍼진 편이다.
12. 일화
모토치카는 키가 크고 피부색이 하야며 유화하여 그 용모가 대단히 수려했지만, 필요할 때 이외에는 전혀 입을 열지않으며 사람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아니하고 그저 방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비꼬아 '히메와코(姬若子, 공주같은 아이)'라는 이명을 붙여 이를 비웃었다.[34] 또 나가하마의 전투에 나서서는 창의 사용방법을 몰라 아버지 쿠니치카로부터 "멍청한 놈!"이란 꾸짖음을 듣고 온 가신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개전에 앞서 가신인 진젠지분고가 창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의 눈을 찌르는 느낌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는데, 창쓰는 법을 처음 배운 그 전투에서 제1전공을 세웠다. 그 이후 모토치카는 토사의 걸물(土佐の出来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5][36]
토사 정복을 완수한 모토치카는 시코쿠 정복을 실시하기 전 운펜지 산(雲辺寺山)에 있는 운펜지(雲辺寺)에 들러 주지에게 시코쿠 통일의 꿈을 들려주자 주지는 "고작 주전자의 덮개가 물통을 덮으려는 행동"이라며 회의적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모토치카는 "내 덮개는 모토치카라는 명공이 만든 덮개며, 언젠가 시코쿠를 덮을 덮개가 될 것이다."라며 반문하였다.
노부나가에게 동맹의 사자를 보냈을 당시, 노부나가는 모토치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시코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모토치카를 새 없는 섬의 박쥐(鳥無き里の蝙蝠)에 비유하며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기에 세력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뿐이라고 평했다. 이때 회담을 진행한 쵸소카베가 사자는 나카지마 베쿠노스케(中島可之助)였는데 이 새없는 섬의 박쥐라는 말에 "노부나가 님은 봉래궁(蓬莱宮)의 '''カンテン'''"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말은 새없는 섬의 박쥐가 칭찬인줄 안 나카지마가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로 노부나가는 뭔 소린지 몰랐다고 한다. 저 '칸텐'이란 말조차 관대하게(!?) 법을 집행한다는 '관대지전(寬大之典)'을 축약한 것이라는 둥, 아니면 텐구를 말하려다 말이 꼬였다는 둥, 심지어는 '''한천'''(…)이라고 말해서 노부나가를 조롱한 것이라는 둥 썰과 카더라가 아직까지도 분분할 정도. 항간에서는 '''배트맨'''이라 불리는 등등 종종 까이고 있다. 그 덕분인지 일족임에도 불구하고 박쥐의 효심이라는 부제로 연재되기도 한다.
'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 일령구족)'란 쵸소카베 가문의 군제라 할수있는 관습인데, 당시 쵸소카베 영지의 농민들이나 토착무사들이 평소 농사지을 때 밭 귀퉁이에 무구를 준비해두고 출격의 호령이 들리면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것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군무에서 제외되는 대신에 농민과 무사를 겸하고 있었기에 즉응성이 좋고 영지규모에 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가농기에는 동원할 수 없었고 농지에서 멀어지는 장거리 원정에 쓸 수 없다는 결점도 있다. 이렇게만 보면 일반적인 센고쿠 시대의 반농반병과 별 다를바 없어보이고 이런 반농반병의 결점을 타파하려는 오다 노부나가등을 시작으로 유행한 병농분리책에 역행하는 구닥다리 정책일 수도 있지만 모토치카는 이들의 대우를 확실히 해서 대표자를 뽑아 격이 낮을지언정 자신의 가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아주었고 회의를 할때는 이들의 의견도 함께 들어주었다. 아와 공략 당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전략을 수정하기도 했다. 세를 면해주고 병력으로 동원하는게 좋을까 싶지만 실제로 일령구족들의 충성심은 대단해서 초쇼카베 모리치카가 세키가하라의 패전으로 개역당하자 영주님 돌려달라며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다. 농민이 무장을 허락받고 세를 면해주며 무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다는건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농민으로서 받을 최상급의 대우였을 것이다.
사누키 침공에서 하유카를 공격할 당시, 모토치카는 전술의 일환으로써 무기나기(麦薙)[37] 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술을 사용하면 주변의 농민들이 곤란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 결국 모토치카는 농민들을 생각하며 한 두렁(一畦)의 곡식만을 취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인해 주변일대에 피해를 입히는 전술을 사용했음에도 농민들의 매작은 절반씩이나 남게 되었고, 백성들은 이를 보며 "토사의 지배는 훌륭할 것이 틀림없다.", "빨리 평화가 오기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 10월 사천성 보수를 맡을 당시 감사역으로 파견된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와 말싸움이 있었다. 카즈나오는 성벽에 설치하는 텟포사마(鉄砲狭間, 성벽에서 적을 쏘기위해 뚫어놓는 구멍)를 높게 만들 것을 주문했는데 모토치카가 이를 보고 허리부터 가슴까지의 높이가 아니면 철포를 쏘기 힘들다고 말하며 직접 자세까지 잡으며 충고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13. 기타
묘지인 쵸소카베의 표기는 長宗我部와 長曽我部의 두가지가 보이는데 히데요시 등이 長曽我部를 사용한 반면 모토치카 본인과 모리치카는 長宗我部를 사용하였다. 이렇기에 옛날에는 최고 통치자가 사용했던 長曽我部 측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쵸소카베씨가 본거지로 하였던 지역의 이름이 소가베(宗我部)였던 것과 학자들의 의견 개진에 영향을 받아 長宗我部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38]
여러모로 소설에 의해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무장 중 한 명. 히메와코라는 별명으로 졸지에 왜소하고 소심한 미청년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노부치카 사후에 '''사랑하는 후계자를 잃어버려 미쳐린 광인''' 포지션을 받아 그의 이미지를 정말 엄청나게 깍아내렸다. 비록 후계자 지정 과정에서 많은 가신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노부치카 사후에 이루어진 통치 흔적이 연구의 과반을 점하는 느낌으로, 1587년부터 1590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진, 토요토미기 켄치의 영향을 받아 실행한 모토치카의 켄치 흔적은 전술했듯 쵸소카베치켄쵸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야마우치 가문의 토사번이 대대로 보관, 필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며 국가 중요문화재로도 등록되어있다. 다른 쿠니의 토요토미기 켄치와는 달리 상당히 세세하고도 정밀하게 기록한 것이 포인트.
1596년 8월에는 우라도에 스페인의 선박, 산 펠리페호(サンㆍフェリペ号)가 정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선 펠리페호는 마닐라로부터 멕시코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수리를 위해 일본에 정박했다고 하며 이를 본 치카나오는 모토치카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연락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곧 이 소식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직전에 일어난 진도 8급 대지진으로 인해 소모된 지출을 만회한답시고 그 화물을 뺏으려 하는데, 몇년전 내린 '배의 화물을 함부로 뺏지 말라'는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답시고 신부 추방령을 꺼내들어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11월에는 분코쿠법[39] 쵸소카베 모토치카 100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를 만들어 다음 년 3월에 실시하였다고 한다. 내용으로는 절, 진쟈의 보호와 규정, 황실과 토요토미 가문의 카몬(家紋)을 쓰지 말 것, 싸움이나 말싸움은 엄히 다스릴것, '''과음을 하지 말 것''', '''여자들은 남자가 밖에 있을 때 집에 남자를 들이지 말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말 것''' 등이 기재되어 있다.
흔히 모토치카의 토리키리역으로 아케치 미츠히데가 유명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요시 야스나가도 후반에 와서 모토치카와 외교활동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모토치카가 시코쿠 평정을 위해 토사에서 아와까지 진군한 산길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산선을 타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군세는 오보케 고보케를 넘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열차선 반대편으로 시코쿠 평정의 중앙거점으로 쓰였던 하쿠치 성터를 볼수가 있기에 거의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도산선의 코치까지 가는 노선을 타보면 에메랄드 빛 요시노가와의 협곡, 험난한 산길을 거쳐 거의 2시간 40분을 달려야 도착할 정도로 지세가 매우 험난하다.
그가 시코쿠 정복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고 하는 운펜지는 시코쿠 88개소(八十八ヵ所) 중에서 66번째의 절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 900M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인도 편하게 올라갈수 있도록 로프웨이를 설치해 놓았기에 카가와현 칸온지 시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직접 방문해 볼수 있다.
임진왜란 참전 무장답게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연행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박호인'이라는 조선인인데, 임진왜란 때 쵸소카베가의 병사들에게 끌려 왔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의료기술이나 두부제조법 등 많은 조선문화를 전래했다고 한다. 훗날 그의 자손은 아키츠키(秋月)라는 일본식 성으로 바꿔 자손 대대로 이 지역에서 두부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그의 영지였던 지금의 고치 지역에는 역시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여인이 길쌈하는 법을 알려줬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조선여인의 묘'라 해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의 근거지로 사용했던 오코 성은 현재 코치현립 역사민속자료관이 설치되어 있으며[40] 성터는 역사 유적으로 잘 정비되어 남아있다. 코치역에서 버스를 타면 약 30분 정도 지나서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치시내에서 꽤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성터 자체가 공원 비슷하게 정비되어 있고 목재로 만든 건물들은 철거되어 있지만, 흙으로 만든 토루이나 카라보리(空堀), 타테보리(竪堀)가 온전히 남아 있고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어 유적에 대해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데다, 센고쿠 다이묘의 본성 치고는 상당히 소~중규모의 성터이기 때문에 중세 일본의 성에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성터가 되겠다. 그 외에는 강 상류에서 이축시켜 온 옛 민가와 카가와 치카카즈의 묘소가 만들어져 있다.
성우 소가베 카즈유키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41]
14. 대중 문화 속 쵸소카베 모토치카
쵸소카베 모토치카/기타 창작물
[1] 이름이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도 많이 특이한 편인데, 당대의 인물인 타몬인 에이쥰(多門院英俊)이 자신이 관여한 일기인 타몬인닛키(多門院日記) 텐쇼 13년 6월 21조에 "챠우스카메(チャウㇲカメ) 로 읽히는 듯 한데 재밌는 이름이다"라며 대놓고 별난 묘지라고 인증해버렸다... 한국어로는 '''조소카베 모토치카'''로 읽히고 한자 그대로 읽으면 '''장종아부원친'''이 된다.[2] 초상화의 제목은 켄폰챠쿠쇼쿠 쵸소카베 모토치카 가조(絹本著色長宗我部元親画像)이며, 모리치카가 모토치카가 사망한 뒤인 케이쵸 4년(1599)에 작성한 작품이다. 찬사어구도 포함되어있으며 모리치카가 이쿄 에이테츠(惟杏永哲)에게 직접 의뢰했다는 구절이 적혀있다.[3] 코치 현 코치 시에 있다. 글자 그대로 모토치카의 첫 출진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다. 그가 사망한지 딱 4백년 되는 1999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4] 군키에 의거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또한 치카사다도 나가하마 전투가 첫 출진이었다고.[5] 쿠니치카의 사망에 대해서는 모토야마 가문을 아사쿠라 성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는 1562년에 사망하였다는 말도 있다.[6] 정확히 말하면, 요리토키의 양아버지인 이시가이 미츠마사(石谷光政)의 친딸.[7] 여기서 모토치카는 의외의 인연을 만들게 되는데 요리토키의 동생이 다름아닌 미노 사이토 가문의 가신인 '''사이토 토시미츠(斎藤利三)였던 것이다.'''[8] 쿠니토라가 후퇴하자 가신 후쿠도메 치카마사(福留親政)는 이를 추격해 적병 20명을 손수 벰으로써 그 무용을 알렸고 "후쿠도메의 난무(福留の荒切り)"라는 무용담이 탄생하였다.[9] 이런 대치상황 속 이치죠 가문은 이요의 사이온지(西園寺) 가문과 싸우게 되었는데, 카네사다로 부터 원군요청을 받은 모토치카는 에무라 치카이에(江村親家)를 원군으로 파견해줌과 동시에 사이온지 가문에게도 공격은 하지않겠다는 서장을 보내 실리를 챙기는 것에 성공하였다.[10] 치카시게 또한 중용되었는데 1586년의 큐슈 정벌에서 모토치카의 적남 노부치카와 함께 전사하였다.[11] 시마 치카마스(島親益)는 쿠니치카의 사남, 모토치카의 셋째 동생에 해당된다. 치카마스는 몸이 약한 체질이라 쵸소카베가 이치죠와 전쟁을 벌이던 시기 온천치료를 위해 배를 타고 토사를 떠났는데 풍랑을 맞아 토사 아키의 동쪽에 있는 아와 카이후로 피난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이후의 호족 카이후 씨는 이를 보고 적습이라 판단하여 군사를 파견해 토벌하도록 하였고, 결국 치카마스는 젊은 나이에 타지에서 사망하게 되었다.[12] 군키에 의거. 학자들은 야스나가의 친족이 아닌 동족이라고 보고있다.[13] 카가와 유키카게(香川之景)라고도 불린다. 군키에 의하면 노부카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편위받은 이름이라고.[14] 이와 비슷한 시기에 7살의 삼남 치카타다를 토사의 호족, 츠노 가문의 요청에 의해 양자로 보내게 되어 치카타다는 츠노 치카타다(津野親忠)라 개명하며 츠노 가문 가신의 보좌를 받아 츠노의 당주가 되었다.[15] 당시 노부나가는 시코쿠 평정후 사누키에 노부타카를, 아와에 미요시 야스나가를 맡길 생각이었다고.[16] 서장의 내용은 대강 "왜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복을 인정하지 않는가? 거기에 나는 그의 말을 따라 군사를 물리기도 하였는데 왜 아직도 그리 강압적인가? 그대는 나에게 도움을 줄순 없는가?정도의 뉘앙스로 작성되었다.[17]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이 당시 모토치카-노부나가는 서로 적대적이었다고 인식되었지만 2014년 6월 24일 공개된 상기의 문서에서 '''모토치카는 이미 노부나가의 명령을 따라 아와 중부의 이치노미야 성 일대의 군세를 후퇴시켰고 아와 남부, 토사를 영유하여 가문을 존속시키고 싶다는 의향의 문서를 토시미츠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밝혀져 이 둘의 관계는 노부나가의 일방적인 적대감과 모토치카의 두려움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쵸소카베 가문이 이시가이-사이토-아케치 가문과 밀접하고도 친밀한 관계에 있었고, 오다 가문의 정치체제에도 확실히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시 되고있다.[18] 단, 아와 전토를 통일하지는 못했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지배적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현재의 나루토시의 끝자락에 있어서 아와지시마의 옆에 있는 아와 토사도마리 성(土佐泊城).성주를 맡은 모리 가문은 끝까지 모토치카에게 저항하여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때 아와 루트의 시코쿠 상륙의 지원을 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19] 당장 눈앞에는 정적 카츠이에가 버티고있었고, 후방에서는 모리 가문과 급하게 화친을 맺은 후폭풍이 속속히 터지고 있었기에 도저히 대규모의 군사를 원군으로 파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20] 종래에는 모토치카가 토라마루 성을 함락시키고 마사야스를 추방시켰다는 통설이 정설로 작용되어 왔다. 그러나 정작 군키모노를 보더라도 토라마루 성의 낙성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으며, 왜곡이 적은 양질의 군키모노가타리라고 평가되며 쵸소카베측에서 작성된 쵸겐키(長元記)에선 토라마루 성이 낙성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다, 1차 사료의 검토까지 더하게 되면 "모토치카가 토라마루 성을 낙성시키지 못하고, '''사누키의 완전제압에 실패했다'''"는 것이 사실로 보여진다. - 長宗我部元親と四国(2014, 吉川弘文館) p.94[21] 이요 통일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코노의 본성에서 토사의 기와가 발견되어서 이요를 정복했다는 측과, 문서상에 모리의 철병과 코노의 항복이 보이지않으므로 이요를 정복했다는 측으로 갈린다. 현재는 아무래도 후자가 우세한 상황. [22] 쵸소카베의 군키모노 쵸겐모노가타리(長元物語)에서는 히데요시가 사누키와 이요 2개국을 요구했으며, 모토치카는 이요만을 내어주고 싶다는 조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고 말하고있다.[23] 군대 편성 중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당초 예정되어있던 편성에서 살짝 변경된 구성으로 상륙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쿠로다 칸베에,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함께 사누키로 진군할 예정이던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아와로 진군하게 되었다던지...마사카츠와 칸베에는 서로를 격려하는 편지까지 나눈 상태였다.[24] 항복 이후 미치나오는 영지를 몰수당해 1587년, 츄고쿠에 있는 타카카게의 영지에서 병사하였다.[25] 본래의 이치노미야 성주, 이치노미야 나리스케가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자 얼마 지나지않아 나리스케를 살해하고 이치노미야 성에 자신의 가신을 보낸 다음 개축을 개시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원래 이치노미야 성이었던 지역을 북성(北城), 새롭게 쌓은 지역을 남성(南城)이라 불렀다고 한다.[26] 대표적으로 이요는 타카카게가, 아와는 마사카츠가, 사누키는 히데히사가 가장 넓은 영지를 갖게 되었다.[27] 1585년 9월, 사이온지 킨히로는 이 당시 타카카게에게 속하게 되어 거성이었던 쿠로세 성을 되찾게 되었는데, 2년 후 살해당하며 이요 사이온지 가문은 멸망하게되었다.[28] 히데요시는 1585년 7월 21일에 칸파쿠에 취임하였고 9월에는 자신의 성을 토요토미로 바꾼 상태였다.[29] 이시가이 요리토키도 노부치카와 함깨 전사하였다고 쵸소카베의 사료는 전하고있다.[30] 한자로 태합검지라 읽으며 일본을 통일하려는 히데요시가 전국에 있는 토지의 조사를 하기 위해 실시한 대규모 측량이다.[31] 유배지에 박혀있던 히데히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알선으로 오다와라 포위에 참가해 군공을 올려 다이묘로의 복귀에 성공하였다.[32] 1593년은 같이 진군했던 치카우지가 웅포 해전 와중 사망하고, 치카야스마저 조선에서 병사하는 등 모토치카에게 있어서 영 좋지않은 해가 되었다.[33] 속칭 쵸소카베모토치카100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로 불리우는 그것.[34] 나가하마 전투에서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오니와코(鬼若子, 귀신 같은 아이)로 바뀌었다.[35] 출처는 토사군키(土佐軍記) 등으로 보인다. 토사노데키히토(とさのできひと)라고 읽히는데 데키히토는 번역하자면 "뛰어난 인물" 정도의 의미다. 한국에 정발된 노부나가의 야망 천상기와 장성록에서는 '도사의 위인'으로 의역했다.[36] 보통 出来人는 "데키비토"로 읽혀왔는데 쵸소카베를 중점으로 연구하는 津野倫明 씨는 "데키히토"라고 그 읽는 법을 규정했다 - 長宗我部元親と四国(2014, 吉川弘文館) p.11[37] 성을 위시로 하는 적군의 방어거점 주변의 보리 등을 싸그리 쓸어버리는 병참공격계의 작전.[38] 長宗我部元親と四国(2014,吉川弘文館)p.20[39] 分国法, 한자로 분국법이라 읽으며 다이묘가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지정한 법령이다.[40] 한국어 팜플렛이 있다![41] 모리치카의 카이에키 이후, 쵸소카베의 말예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옛 성인 소가베로 바꾸어 생활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 일본에서는 소카베, 쵸소카베, 코소카베가 모두 쓰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