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구사
鍼灸師
한의사의 아종(?).
침구사 자격은 침을 놓는 '침사'와 뜸을 뜨는 '구사'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부분 교육과정에서는 침과 뜸을 같이 배우고 자격증도 함께 따는 것이 보통이므로 '침구사'로 통합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의학과 같은 침구 치료를 하지만, 일본 침구사들이 시행하는 '침구'는 일본에서 변형, 독자 발전을 한 것이 많기 때문에 현행 중의학, 한의학의 침구와는 다른 점이 많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눈으로 외부에서 부위를 관찰하는 것 보다는, '손으로 몸을 더듬어서 감각으로 시술 부위를 찾는다.'는 점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침구사 자격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제도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도입된 것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한의학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에도 시대에 일본의 침술은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이 시기에 주로 시각장애인들이 침술을 배우고 시술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여 침술이 거의 시각장애인의 전유물이 되었다. 말하자면 본래 한의학의 일부였던 침구가 장애인들의 전문 기술로서 여겨지면서 변질된 것이다. 동시에 안마, 지압 역시 시각장애인 복지를 중심으로 장애인들이 전업하는 일로 여겨지게 된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 문화의 도입으로 한의학이 배척되면서, 일본에서는 서양 의사 면허가 없으면 진료를 할 수 없게 되어 한의학은 빠르게 도태되었다. 그러나 비장애인들이 진료했으므로 빠르게 소멸한 한방 분야와는 달리 장애인들이 중심이 된 침구, 안마는 장애인들의 생계 문제상 제한적으로 허가 조치를 내릴 수 밖에 없었고, 사회전반의 분위기 때문에 쇠퇴하기는 했어도 존속할 수 있었다.
다이쇼 시대에 전통의학의 부흥을 주장하는 연구가들이 나타났고, 침술에 대해서 연구하는 의학자가 나타났으며 침구의 효과에 대해서 과학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침구의사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이 이 무렵 나타나기 시작했다. 쇼와 시대에는 침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체계적인 이론서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론은 결국 유사의학적인 수준이었던 모양.
태평양 전쟁 이후 GHQ 통치기에 침구는 "비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비위생적이다."는 이유로 안마와 침술, 뜸이 한꺼번에 폐지하는 정책이 내려졌다.
여기에 대항해서 교토대학의 이시카와 히데츠루마루(石川日出鶴丸)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침구존속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일단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GHQ에 대한 반발 의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대다수의 침구사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안마사, 침구사 제도가 폐지되면 생계가 곤란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전쟁으로 몰락한 일본의 경제 수준으로는 다수의 시각장애인의 실업에 대응할 만한 능력이 없어, 후생성 역시 이에 동참하면서 결국 폐지 정책은 보존 정책으로 선회했다.
최종적으로 "안마, 침, 뜸, 유도정복술" 등의 행위를 의료행위로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게 되면서 침구사는 존속이 결정되었다.
사실 일본의 침구사는 사정이 썩 좋지 않다.
일단 의학의 발달로 시각장애인의 수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침구사를 택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시각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 역시 침구사 학교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호가 크게 개방되었는데, 침구사가 너무 많이 늘어나면서 레드 오션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침과 뜸에 대해서 '아플 것 같다.','무섭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서 침구를 시술받는 사람들 자체가 줄어들었다. 한의학을 소재로 한 미디어가 널리 퍼져서 침구에 익숙한 중국, 한국과는 달리, 일본 문화에서는 침과 뜸을 미디어에서도 현실에서도 접하기 어려워 침구가 매우 낯선 기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껏 학교를 나오고 면허를 따서 개업을 해도 수익이 좋지 못하다. 통계에 따르면 침구사는 일반 대졸자보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침사, 구사 등의 제도가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에도 퍼지게 되었고, 해방 이후에 이 사람들을 남겨둔 것이 현재 한국 침구사 제도의 시작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존에 침구사로 영업하던 사람들에게 자격을 인정해줬을 뿐, 신규 자격을 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 수는 더 늘어나지 않았고 당시 면허를 얻은 사람도 역시 고령화 함에 따라서 침구사 자격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 2015년 기준으로 유효한 자격증 소지자는 침사 22명, 구사 5명 뿐이다.
김남수의 뜸사랑 등이 중심이 된 무허가 침술 단체에서는 침구사 제도의 부활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의사들의 반발 및 국가적 필요성 부재로 인하여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기사
1. 개요
한의사의 아종(?).
침구사 자격은 침을 놓는 '침사'와 뜸을 뜨는 '구사'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부분 교육과정에서는 침과 뜸을 같이 배우고 자격증도 함께 따는 것이 보통이므로 '침구사'로 통합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의학과 같은 침구 치료를 하지만, 일본 침구사들이 시행하는 '침구'는 일본에서 변형, 독자 발전을 한 것이 많기 때문에 현행 중의학, 한의학의 침구와는 다른 점이 많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눈으로 외부에서 부위를 관찰하는 것 보다는, '손으로 몸을 더듬어서 감각으로 시술 부위를 찾는다.'는 점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2. 역사
침구사 자격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제도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도입된 것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 한의학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2.1. 일본에서의 제정 과정
에도 시대에 일본의 침술은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이 시기에 주로 시각장애인들이 침술을 배우고 시술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여 침술이 거의 시각장애인의 전유물이 되었다. 말하자면 본래 한의학의 일부였던 침구가 장애인들의 전문 기술로서 여겨지면서 변질된 것이다. 동시에 안마, 지압 역시 시각장애인 복지를 중심으로 장애인들이 전업하는 일로 여겨지게 된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 문화의 도입으로 한의학이 배척되면서, 일본에서는 서양 의사 면허가 없으면 진료를 할 수 없게 되어 한의학은 빠르게 도태되었다. 그러나 비장애인들이 진료했으므로 빠르게 소멸한 한방 분야와는 달리 장애인들이 중심이 된 침구, 안마는 장애인들의 생계 문제상 제한적으로 허가 조치를 내릴 수 밖에 없었고, 사회전반의 분위기 때문에 쇠퇴하기는 했어도 존속할 수 있었다.
다이쇼 시대에 전통의학의 부흥을 주장하는 연구가들이 나타났고, 침술에 대해서 연구하는 의학자가 나타났으며 침구의 효과에 대해서 과학적인 근거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침구의사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이 이 무렵 나타나기 시작했다. 쇼와 시대에는 침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체계적인 이론서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론은 결국 유사의학적인 수준이었던 모양.
2.2. 전쟁 이후 일본 상황
태평양 전쟁 이후 GHQ 통치기에 침구는 "비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비위생적이다."는 이유로 안마와 침술, 뜸이 한꺼번에 폐지하는 정책이 내려졌다.
여기에 대항해서 교토대학의 이시카와 히데츠루마루(石川日出鶴丸)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침구존속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일단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GHQ에 대한 반발 의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대다수의 침구사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안마사, 침구사 제도가 폐지되면 생계가 곤란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전쟁으로 몰락한 일본의 경제 수준으로는 다수의 시각장애인의 실업에 대응할 만한 능력이 없어, 후생성 역시 이에 동참하면서 결국 폐지 정책은 보존 정책으로 선회했다.
최종적으로 "안마, 침, 뜸, 유도정복술" 등의 행위를 의료행위로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게 되면서 침구사는 존속이 결정되었다.
2.3. 현대의 일본 상황
사실 일본의 침구사는 사정이 썩 좋지 않다.
일단 의학의 발달로 시각장애인의 수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침구사를 택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시각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 역시 침구사 학교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호가 크게 개방되었는데, 침구사가 너무 많이 늘어나면서 레드 오션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침과 뜸에 대해서 '아플 것 같다.','무섭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서 침구를 시술받는 사람들 자체가 줄어들었다. 한의학을 소재로 한 미디어가 널리 퍼져서 침구에 익숙한 중국, 한국과는 달리, 일본 문화에서는 침과 뜸을 미디어에서도 현실에서도 접하기 어려워 침구가 매우 낯선 기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껏 학교를 나오고 면허를 따서 개업을 해도 수익이 좋지 못하다. 통계에 따르면 침구사는 일반 대졸자보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
3. 한국의 침구사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침사, 구사 등의 제도가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에도 퍼지게 되었고, 해방 이후에 이 사람들을 남겨둔 것이 현재 한국 침구사 제도의 시작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존에 침구사로 영업하던 사람들에게 자격을 인정해줬을 뿐, 신규 자격을 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 수는 더 늘어나지 않았고 당시 면허를 얻은 사람도 역시 고령화 함에 따라서 침구사 자격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 2015년 기준으로 유효한 자격증 소지자는 침사 22명, 구사 5명 뿐이다.
김남수의 뜸사랑 등이 중심이 된 무허가 침술 단체에서는 침구사 제도의 부활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의사들의 반발 및 국가적 필요성 부재로 인하여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