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3세
1. 개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명목상 카롤루스 왕조의 통합 프랑크 왕국 국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탈리아왕 등을 겸했다.
2. 생애
카롤루스 왕조의 루트비히 2세(독일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중 막내이며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 864년 슈바벤 공작, 라이티아 백작, 865년 알레마니아 분국의 분봉왕을 거쳤다. 876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알레마니아의 왕이 되었다. 879년 병석에 누운 형 카를만에게서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권을 위임받고, 880년 이탈리아를 상속받았다. 881년 교황 요한네스 3세에게 축성을 받고 황제가 되었다. 882년 동프랑크왕국의 국왕인 형 청년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바이에른, 프랑켄, 작센을 차지하고 동프랑크 국왕이 됐다. 884년 샤를로망 2세가 죽자, 5촌 조카의 자리도 가져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 됐다. 이로써 카롤루스 대제 이후 베르됭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하지만 간질과 뇌졸중 등의 질병으로 제대로 정무를 주관할 수 없었다. 서자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황후 슈바벤의 리첼다에게 간통 혐의를 주장하며 폐위시키려 했으나, 리첼다는 온갖 고문에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고 리우트바드 주교는 그녀가 무죄라고 선고했다. 일련의 실정들로 인해 여러 귀족들은 물론 교단과도 불화를 겪는다.
특히 886년 파리에 침공한 노르만족을 돈으로 매수해 돌려보낸 일이 발각돼 조카 아르눌프를 중심으로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맏형 카를만의 서자인 아르눌프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영토인 바이에른을 요구하다가, 그가 외적을 돈으로 매수해서 되돌려보냈다며 그에게 대항한 반란을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아르눌프와 제후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서프랑크의 귀족들 특히 라울 등은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협력했다. 887년 11월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는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수도인 아헨에 입성했다. 이어 11월 11일 카를3세 비만왕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르눌프에 의해 개최된 제국회의에서 폐위됐다.
알레마니아로 옮긴 카를은 노이딩겐에서 888년 1월 사망한다. 그의 퇴위와 죽음을 기점으로 카롤루스 대제가 만든 프랑크 왕국은 완전히 붕괴된다.
서프랑크의 통치자로도 재위했지만 보통 그는 서프랑크의 왕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이에 따라 외드의 뒤를 잇는 샤를 3세 단순왕이 프랑스의 국왕 샤를 3세로서 인정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