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에타누 벨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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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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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942.08.07-
Caetano Veloso [1]
브라질의 뮤지션. 브라질의 밥 딜런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민 뮤지션으로 꼽힌다. 본명은 카에타누 이마누에우 비아나 텔리스 벨로주 Caetano Emanuel Viana Telles Veloso.
보사노바와 삼바 같은 풍부한 브라질 음악의 자산을 사이키델릭 록과 재즈 같은 서구 음악과 시적인 가사를 도입하면서 MPB로 대표되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가능성을 넓히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Cucurrucucú paloma 같은 발라드로 한국에 유명하지만 음악적 스펙트럼이 워낙 넓고 깊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편. 특히 초기작들은 Cucurrucucú paloma 같은 발라드보다는 보사노바와 브라질 전통 음악에 영감을 받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사이키델릭 록/팝에 가깝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 [2] 사이에서 산토 아마로에서 [3] 태어났다고 한다. 형제가 상당히 많았던 대가족이라고 하는데 7남매 중 다섯째라고. 동생은 마리아 베타니아로 카에타누를 따라 가수로 성공했다.
보사노바의 주역이었던 조앙 지우베르투의 음악을 듣고 음악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한다. [4] 때마침 그가 살던 사우바도르는 브라질 흑인들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여기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동생 마리아와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평생 지기가 될 질베르투 질을 만나게 된다.
본격적으로는 1967년 'Alegria, Alegria'와 동료 가우 코스타와 함께 만든 합동 앨범 Domingo를 발표하면서 브라질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다만 처음엔 브라질 관중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Alegria, Alegria'를 비트 보이즈와 함께 처음 연주한 TV 레코드’ 방송국에서 주최한 제3회 ‘Brazilian Popular Music’ 페스티벌에서는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곡은 브라질 청년 세대에게 지지를 받고 히트곡이 되었고 카에타누는 이 곡이 실린 첫 앨범을 통해 뜨로삐까이아/MPB 흐름의 중심 인물로 부각하게 된다.
당시 브라질은 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 좌파 히피였던 카에타누는 곧 독재 정권의 표적이 된다. 결국 투옥하는 수난을 거쳐 질베르투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런 수난 속에서 음악적 기량이 부쩍 늘어 투옥과 망명 도중 나온 셀프 타이틀 앨범 두 장과 Transa는 MPB의 걸작으로 꼽히는 앨범으로 꼽히게 된다. 이후 정치 상황이 다소 안정이 되자, 1972년 귀국하게 된다. [5] 이 시기에 발표한 Araçá Azul는 과격한 실험으로 흥행 참패를 겪기도 했다. 카에타누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앨범 작업을 이어가면서 MPB 장르에서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게 된다.
1980년대 월드 뮤직 붐으로 브라질 밖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해 토킹 헤즈의 데이비드 번, 커트 코베인, 벡의 지지를 받았으며 201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평단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 삽입된 Cucururu Paloma와 카페 벨로주로 인지도가 높다. 덕분에 2016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로 내한하기도 했다.
결혼을 두 번 했으며, 큰아들 모레노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음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젊었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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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942.08.07-
Caetano Veloso [1]
브라질의 뮤지션. 브라질의 밥 딜런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민 뮤지션으로 꼽힌다. 본명은 카에타누 이마누에우 비아나 텔리스 벨로주 Caetano Emanuel Viana Telles Veloso.
보사노바와 삼바 같은 풍부한 브라질 음악의 자산을 사이키델릭 록과 재즈 같은 서구 음악과 시적인 가사를 도입하면서 MPB로 대표되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가능성을 넓히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Cucurrucucú paloma 같은 발라드로 한국에 유명하지만 음악적 스펙트럼이 워낙 넓고 깊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편. 특히 초기작들은 Cucurrucucú paloma 같은 발라드보다는 보사노바와 브라질 전통 음악에 영감을 받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사이키델릭 록/팝에 가깝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 [2] 사이에서 산토 아마로에서 [3] 태어났다고 한다. 형제가 상당히 많았던 대가족이라고 하는데 7남매 중 다섯째라고. 동생은 마리아 베타니아로 카에타누를 따라 가수로 성공했다.
보사노바의 주역이었던 조앙 지우베르투의 음악을 듣고 음악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한다. [4] 때마침 그가 살던 사우바도르는 브라질 흑인들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여기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동생 마리아와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평생 지기가 될 질베르투 질을 만나게 된다.
본격적으로는 1967년 'Alegria, Alegria'와 동료 가우 코스타와 함께 만든 합동 앨범 Domingo를 발표하면서 브라질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다만 처음엔 브라질 관중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Alegria, Alegria'를 비트 보이즈와 함께 처음 연주한 TV 레코드’ 방송국에서 주최한 제3회 ‘Brazilian Popular Music’ 페스티벌에서는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곡은 브라질 청년 세대에게 지지를 받고 히트곡이 되었고 카에타누는 이 곡이 실린 첫 앨범을 통해 뜨로삐까이아/MPB 흐름의 중심 인물로 부각하게 된다.
당시 브라질은 독재 정권 하에 있었고,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 않는 좌파 히피였던 카에타누는 곧 독재 정권의 표적이 된다. 결국 투옥하는 수난을 거쳐 질베르투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런 수난 속에서 음악적 기량이 부쩍 늘어 투옥과 망명 도중 나온 셀프 타이틀 앨범 두 장과 Transa는 MPB의 걸작으로 꼽히는 앨범으로 꼽히게 된다. 이후 정치 상황이 다소 안정이 되자, 1972년 귀국하게 된다. [5] 이 시기에 발표한 Araçá Azul는 과격한 실험으로 흥행 참패를 겪기도 했다. 카에타누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앨범 작업을 이어가면서 MPB 장르에서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게 된다.
1980년대 월드 뮤직 붐으로 브라질 밖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해 토킹 헤즈의 데이비드 번, 커트 코베인, 벡의 지지를 받았으며 201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평단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 삽입된 Cucururu Paloma와 카페 벨로주로 인지도가 높다. 덕분에 2016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로 내한하기도 했다.
결혼을 두 번 했으며, 큰아들 모레노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음악을 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