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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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트 코베인의 주요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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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Kurt Cobain'''
'''본명'''
커트 도날드 코베인
Kurt Donald Cobain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67년 2월 20일
워싱턴 주 애버딘
'''사망'''
1994년 4월 5일(향년 27세)
워싱턴 주 시애틀
'''소속'''
너바나
'''포지션'''
보컬, 기타
'''신체'''
175cm
'''활동'''
1982년 ~ 1994년
'''가족'''
'''배우자'''
코트니 러브(1992년 ~ 1994년)
'''자녀'''
프란시스 코베인(1992년 출생)
'''서명'''
[image]
1. 개요
2. 상세
3. 생애
4. 기념지(Memorial)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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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번에 불타는 것이 낫다.'''[1]

'''사람들은 내가 남들과 다르고 튄다는 이유로 비웃는다. 나는 그들 모두가 개성없이 똑같은 놈들이라는 이유로 비웃는다.'''

'''태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한 줄기 빛이 있음이니(Though the sun is gone, I have a light''')

미국가수. 젊은 나이인 27세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생존했다면 57세.
미국의 전설적인 그런지 락 밴드 '''너바나'''의 프론트맨이었다. 생전 너바나에서는 작곡, 작사,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2. 상세


'''1990년대 대중음악계를 상징하는 락스타'''[2]이자 '''락의 판도를 바꾼 불세출의 천재'''로 일컬여지며, [3] 대중 음악계 통틀어서 커트 코베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이콘도 드물다. 롤링 스톤 등 권위 있는 평론가들이 꼽는 세기의 명곡에서 상위권에 항상 과거 1950년대 ~1980년대 명곡[4]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커트가 작곡한 너바나의 대표곡인 Smells Like Teen Spirit은 90년대 이후 곡들이 20위 권안에 전멸할 때 조차 항상 10위 권 안에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Nevermind' 앨범 역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을 뽑는 각종 명반 리스트에서 매번 10위권 내지 20위권 안에 든다.
많은 음악 칼럼니스트들, Charles R. Cross, 가디언지, 미디어 출처, 출처2 등 많은 언론들은 커트 코베인을 '''마지막 록 아이콘'''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음악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일 뿐 아니라 대중문화계 전반적으로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안겨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X세대의 아이콘으로 반드시 꼽히는 인물이다.[5] 너바나 이후로 미국이나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록 장르의 뮤지션이 음악을 넘어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경우는 없다.
아내는 록 가수이자 배우인 코트니 러브[6]로 커트 코베인과 결혼하기 전부터 막장 중의 막장이었는데 커트가 죽은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마약과 각종 사고로 뉴스에 오른다. 코트니 러브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펑크 록 그룹 의 리더였고 가슴을 드러낸 채 라이브를 하기도 하는 등 성욕을 도발하는 이미지의 악동이다.
딸은 코트니 러브 슬하로, 이름은 프란시스 코베인, 시각 예술가 겸 모델이다.[7] 1992년생으로 현재 31세이며 이제는 사망할 당시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다.

3. 생애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 주 에버딘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도 '중산층인 척 하는 화이트 트래시[8]'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코베인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전기의 후기에서 그의 워싱턴 주 애버딘 생가를 취재한 뒤 '비교적 가난하다고 알려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집도 커트 코베인의 집에 비하니 대궐같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였다.[9] 커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웬디는 19살, 아버지는 21살에 불과했고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잦은 마찰과 다툼으로 이혼하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코베인은 아버지를 증오하였고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의 가족 사진'''
그의 우울증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 둘 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맞는다.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적인 건강 문제는 그의 양가에 두루 존재하였으며 그의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하였다. 그의 외증조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서 죽었으며 다른 두 명의 삼촌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또한 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 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나왔다. 당장 절친이자 같은 밴드에 속해 있던 크리스 노보셀릭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사실 그 바닥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 중 기자가 커트 코베인에게 '스스로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커트는 "자신은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다.
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현장에 올 때까지 몇 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커트 코베인에게 자살과 우울증은 그리 먼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생전 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는지 혹은 특별히 의도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일부 있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하기도 했으며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10]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그는 대마초, ,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고,[11] 동시에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처음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훗날 얼터너티브 록밴드 Melvins로 음악사에 족적을 남기는 다른 멤버들과 fecal matter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1년 남짓 활동한다. 이 때 녹음한 Illiteracy Will Prevail라는 이름의 데모 테이프는 지금도 유튜브 등에서 풀버젼을 찾아볼 수 있다.[12]
마침내 1987년, 커트 코베인은 자신을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해서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너바나를 결성했고 2년 후인 1989년 데뷔 앨범 Bleach를 발매한다. 인디 시절, 커트 코베인은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당시 커트는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연 중에는 금주, 금연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요구했다고 한다.
Bleach는 언더에서 발매한 앨범치고는 차트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너바나는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들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이미 시애틀을 넘어선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잠재력을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0년에는 첫 앨범 Bleach의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을 해고하고 데이브 그롤을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이때부터 미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이 너바나와 계약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의 권유로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과 메이저 데뷔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믹싱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작곡 하며 녹음을 했고 이 녹음본은 "다듬어지지 않은" 사운드를 추구하는 커트 코베인조차 사운드가 지나치게 거칠게 느껴져 앨범의 완성도를 해칠까 걱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부치 빅이 녹음물을 손 본 마스터 테입을 들려주자 커트 코베인은 결과물이 너바나의 다듬어 지지 않은 음악이 아닌 너무 "깔끔한 팝송"이 되었다고 경악했다고 한다. 커트는 Nirvana의 정체성을 어디까지나 펑크 록 밴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렇게 완성된 앨범에 대해 불만을 품었지만 가난에 지쳐 사회적 성공을 원했기에 앨범이 발매되자 매니저 앞에서 왜 MTV에 앨범의 첫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가 자주 나오지 않냐고 불평했을 정도로 밴드의 유명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조지프 히스의 '혁명을 위하여'는 이러한 코베인의 자기모순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Smells Like Teen Spirit의 대박 히트 후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Nevermind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앨범이라는 식으로 호평들을 하기 시작했지만, 커트는 자작곡들이었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운드로 밴드가 성공한 것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밴드가 <Smells...>만이 히트한 원 히트 넘버 밴드로만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해 하며 점점 음악에 흥미를 잃어갔다. 다만, Nevermind 수록곡들 대다수는 90년대에 매우 유명했다.
언론에서는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이지만 이성애자인 커트를 그의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양성애자로 몰아가는가 하면,[13] 커트가 낙태를 찬성한다는 발언을 하자 부부가 심각한 마약 중독자라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은데도 낙태를 하지 않고 프렌시스 빈 코베인을 낳았다는 이유 등으로 까댔다.[14] 커트 코베인의 지인들도 커트가 밴드의 성공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자 "무명 시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는 장사꾼이다"라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던 사람이 성공하니 엘비스처럼 행동한다며 그를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불우한 주변 환경은 그로 하여금 약물에 대한 탐닉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록씬에서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굉장히 꺼렸고 그를 약물중독자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몹시 싫어하였다. 때문에 인터뷰에서 매번 자신이 마약 중독자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약문제는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사망하기 고작 1달 전인 1994년 3월 로마에서 헤로인을 투여하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그의 자살은 헤로인 중독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커트는 죽기 직전 아내인 코트니가 자신과 결혼한 후에도 전남친인 빌리 코건과 밀회를 즐기는 등 여러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MTV UNPLUGGED 라이브에서 부른 마지막곡,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이 자신이 빌리 코건의 약혼녀였던 코트니를 가로채서 결혼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과 코트니가 다른 남자들과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분노 등이 담긴 코베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15]
이 외에도 그는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울증과 더불어 복통척추측만증을 비롯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다.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커트가 위장 수술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은 뒤, 커트는 주위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해했다고 한다. 코트니가 위장병으로 괴로워하는 커트에게 진통제로 헤로인을 사용해보라고 권유했다는 것은 코트니 타살설의 증거 중 하나로 거론된다.
'''커트 코베인의 생전 마지막 찍힌 것으로 알려진 사진. 사망 10일 전인 3월 26일에 찍었다고 한다'''
새로 나온 음반 In Utero가 대중음악계에 레전드를 쓴 전작보단 덜하지만 그래도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밴드 해체의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1994년 4월 5일[16], 커트 코베인은 약물중독 요양소에서 탈출한 후, 헤로인을 치사량으로 맞은 뒤 Auto-5 산탄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하는 실로 충격적인 최후를 맞았다.[17] 인터넷에 나오는 시체 사진을 보면 머리가 턱만 남고 윗부분이 다 날아간 처참한 모습이다.[18][19] 그가 자살한 방에는 Automatic for the People라는 앨범이 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인기와 명예의 정점에서 27살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은 미국 락씬을 넘어 전 세계 음악계에 엄청난 충격과 비통함을 불러 일으켰다.[20] 미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해서 조심스럽게 방송했으나 몇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했고, 프랑스에서도 자살한 팬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락카페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팬들이 울면서 너바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자살로 판명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의문사로 보기도 한다[21]. 자살 직전의 미공개 인터뷰에선 너바나를 해체하고 너바나와 정반대인 포크 장르로 솔로 앨범을 내거나 아내 코트니의 밴드 홀에 가입할지 말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반응이 다양한데, 록스타들은 대부분 슬퍼하는 분위기였고, 유서에 자신의 곡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의 구절이 인용된 닐 영과 데이브 그롤이 몸담고 있는 푸 파이터즈는 각각 <Sleeps With Angels>와 <Friend of a Friend>라는 추모곡을 쓰기도 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코베인 사망 이듬해 발표된 6번째 앨범 One Hot Minute 9번째 트랙 Tearjerker란 곡으로 커트를 추모했다.[22] 힙합씬에서는 노래에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문장을 집어넣기도 했다.[23] 라이브 퍼포먼스와 정규 2집에서 적극적으로 락을 차용한 MGK의 경우 "코베인이 돌아왔다(Cobain is back)"라는 문구로 자신을 대변하기도 했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 당시 신문기사의 사진'''
경찰의 경비에 의해 기자가 근처 나무에서 올라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하루를 담은 영화 "라스트 데이즈"(거스 밴 샌트 감독)가 있지만 불친절한 거스 밴 샌트 영화에 속하니 유념하고 볼 것. 무엇보다도 영화 속에서 그는 커트 코베인이라 불리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에 가깝다.
2015년 1월 24일,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Kurt Cobain: Montage of Heck이며 감독은 브렛 모르겐이다. 코트니 러브가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라고 하며, 그의 딸인 프란시스는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커트 코베인을 소재로한 영상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족이 제작에 참여한 사례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몇몇 장면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다고 한다. 5월 4일에는 HBO를 통해서 TV로도 방영되었다.

4. 기념지(Memorial)


커트 코베인을 기리던 자원자들이 관리하던 기념공원(Memorial Park)이 그가 태어난 도시 Aberdeen시에 의해 2015년 정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첫번째 공식 기념공원이 탄생했다. 이 기념지의 이름은 Kurt Cobain Memorial Park 혹은 Kurt Cobain Landing이라 불린다. 이 공원은 작다. 멈추지 않고 걷는다면 가로지르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공원 안에는 그의 펜더 재규어 기타상과 그가 이 공원의 위를 가로지르는 Young Street Bridge에서 가사를 떠올렸다고 전해지는 'Something In the Way' 가사를 적은 팻말, 그리고 그의 사진과 그의 생전 어록(혹은 말했다고 믿어지는 어록)을 함께적은 돌판이 있다. '커트 코베인의 에어기타'라는 기타 스탠드같이 생긴 조형물도 있으나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참고로 그곳의 돌판은 비석이 아니며 커트 코베인은 땅에 묻히지 않고 화장을 했다. 돌판에 적힌 어록들 중 "...they(마약을 말함) will fuck you up"의 Fuck 부분은 파여져 있는데 누가 훼손한것이 아니라 Aberdeen시의 시장이 그 단어를 기입하는걸 원치 않아서 그렇다. 공원은 Young Street Bridge가 위로 가로지르고 있어 그 브릿지의 밑을 볼수 있는데 그를 기리는 팬들의 그라피티를 구경할수 있다.
언급해두었듯이 말그대로 작은 공원이므로 실망을 할 수도 있다. 너무 초라하고 잘 관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실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커트의 수난많던 어린 시절 집에서 나온 그가 노숙을 하며 밤을 지새기도 했던 장소에 직접 앉아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있다고 할수있을것 같다. 사실, 이 Bridge 밑에서 커트가 노숙을 했는가는 의문이 남긴한다. 커트의 일생에 대한 책인 Charles Ross의 책 Heavier than Heaven에서는 커트가 가출을 했을시 함께했던 친구를 인터뷰했는데 그가 말하길 사실 다리밑에서 노숙을 한건 사실이 아니고 24시 열려있는 병원의 대기실같은 곳에서 밤을 지새웠다라고 한다.
이 기념공원은 커트 코베인을 기리는 첫번째 공식 기념물은 아니다. 그를 기리는 첫 공식 기념물은 이 공원에 들어가기 위해 필시 통과해야할 Aberdeen시의 입구에 세워진 'Welcome to Aberdeen'이란 환영 도로표지판 밑의 'Come As You Are'라 적힌 표지판이다. 이것은 2005년에 만들어졌으며 만약 원한다면 차를 멈추고 도로표지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지만 필시 운전 중일 것이므로 안전하게 정차하고 뒤차를 위험하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커트의 기념공원에 대해 한가지 언급하자면 이 기념공원은 민가의 '''바로''' 앞에 있다. 문자 그대로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주인은 매일 찾아드는 커트의 팬들을 봐야한다. 이 작은 공원은 전용 주차장 따윈 없으며 고로 팬들은 그의 집앞에 주차를 한다. 꽤나 팬들에게 시달린 모양인지 집 앞에 페인트로 팻말을 만들어 못에 박아놓았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집은 커트의 기념품 상점이 아니고, 이 집은 커트가 살았던 집이 아니며, 자신은 커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고(그러나 옆집의 이웃은 알았으며), 자신은 많은 구경객에 힘들어 하고 있으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이 직접 911을 불러야하고, 다리밑의 주사기등의 뾰족한 물건에 조심하고, 자신들의 물건을 가져가지 말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 모든 말들은 영어의 대문자로 적혀있는데 영문에서 대문자로 적는것은 소리를 지르는 모양새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단걸 생각해보면 방문객으로서 그들을 존중해야할 이유를 알 수 있다.(당신이 커트의 팬이고 이 조그만 공원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행위는 하지 절대 하면 안 된다.)
이 공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커트가 정말로 어린시절을 보낸 집이 보존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볼수도 없고 심지어 공식 기념물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칠 순 없을것이다. 얼마나 가깝냐면 차로 1분 걸어서 3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집의 넘버는 1210이며 노란색의 조그맣고 낡은 집이다. 이 집에는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지만(확실하지 않다.) 이 집의 이웃집에는 분명히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두집 정도 앞에사는 주민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돌판에 적혀있는 가장 첫 문장 : I'd rather be hated for who I am than be loved for who I am not(내 본모습으로 미움받을 지언정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지는 않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말은 커트 코베인이 최초로 만든 말은 아니다.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André Gide(앙드레 지드)의 Autumn Leaves에 적혀있는 같은 의미의 말을 약간 다르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커트 코베인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돌아봤을때, 그의 죽음과 자기모순과 그로 인해 괴로워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5. 기타


  • 음악성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잘생겼다. 항상 금발의 긴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낡은 가디건만 주로 입었음에도 그것이 하나의 패션 트렌드가 될 만큼 잘생겼었다.[24] 특히 파란 눈동자가 매력적으로 그가 태어났을 때 병원 간호사들이 눈이 예쁘다고 감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심한 우울증으로 자신을 매우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토비 베일에게 차인 것도 자신이 못생겼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울면서 거울을 부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는 Nevermind 수록곡인 <Lithium>의 가사에서도 드러나는데, "I'm so ugly"라는 가사가 있다. 아내인 코트니 러브는 훗날 코베인의 다큐멘터리 영화인 '커트 코베인 : 몽타주 오브 헥'에서 코베인이 굉장히 귀엽고 브래드 피트보다 잘생겼는데도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른다는 점을 매력으로 꼽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 사진. 어린 시절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모태미남이다.
  • 무대에서 보이는 분노와 폭발적 매너와는 달리, 실제 성격은 점잖았으며 극심한 우울증과 마약 중독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신경질을 내는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는 주위사람들에게 친절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는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로 유명하며 그로인해 양성애자라는 오인을 받기도 하였다. 낙태 찬성주의자인 그의 면모는 Pennyroyal Tea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저항정신의 상징적 인물답게 진보적인 면모를 보였다. 토비 베일과 사귀게 되고 비키니 킬올림피아의 라이엇 걸 밴드들과 어울리면서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사상과 별개로 그녀와는 굉장히 좋지 않게 끝을 맺었는데, 평전에 따르면 자신과 약혼까지 했으면서 헤어진 그녀의 밴드 비키니 킬이 예전에 약속했던 컴필레이션 앨범을 같이 녹음하자고 하자 커트는 매우 불쾌해했고,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이용해먹으려는 페미나치라고 일기장에서 깠다.[25] 그러나 그가 페미니스트임은 부정할 수 없는데, 대표적으로 In Bloom의 가사는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꼴마초들이 너바나의 음악을 가사의 뜻도 제대로 모르고 부르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 음악적 성향은 두말할 것도 없는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이지만, 팝이나 어쿠스틱풍의 곡도 좋아하여 ABBA나 바셀린같은 밴드도 자주 들었다. 그리고 코베인은 메탈리카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메탈리카의 공연에 찾아가서 그 떡진 금발을 휘날리며 헤드뱅잉을 하면서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본 커크 해밋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커트가 가장 좋아하는 메탈리카의 곡인 'Whiplash'를 연주해 주었다고 한다.(커크 해밋 인터뷰 중) 사실 너바나가 갑자기 팍 뜬 이유가 팝 메탈의 야들야들한 미들이 강한 기타톤에 질린 락키드들이 코베인의 하이게인 디스토션 기타 톤에 열광함에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스래시 메탈 밴드인 메탈리카가 너바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 커트 코베인이 추구했던 리프 중심의 간단한 음악 스타일 때문에 그의 기타 실력은 과소평가된 경향이 있는데 이펙터는 별로 쓰지 않으면서도[26] 그런지 특유의 어둡고 노이지한 톤을 이끌어냈고 파워 코드를 기반으로 한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기타리프들을 만들어냈다. 비록 너바나의 음악은 리프 중심이었고, 기타 솔로는 절제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In Bloom'에서 볼 수 있듯이 수준급의 기타 솔로를 연주할 수 있는 테크닉 또한 가지고 있었다.
  • 많은 뮤지션들이 그렇지만, 커트는 유독 명확한 가사를 기피했다. 대표적으로 'Smells Like Teen Spirit'은 그냥 라임에 맞게 아무 말 떡칠을 해놨다. 그럼에도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에 관한 자전적인 곡 "Sliver"는 꽤나 정확한 가사를 전달하고 있다. 이 곡에서 알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제목인데, 커트는 자신이 제목을 'Sliver'라고 부르면 다른 사람들도 역시 'Sliver'라고 부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타이틀을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 공연 중에 드럼셋 등에 몸을 던지거나 기타를 박살내는 퍼포먼스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가 쓴 기타 대부분은 온전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라이브 중 박살내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니... 이 퍼포먼스는 BLEACH 시절 드러머와의 불화 때문에 시작되었다. 당시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은 자신이 너무 작곡에 기여를 못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커트와 크리스는 그의 드러밍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라이브 공연중에 실수를 왕창 하거나 아예 곡을 연주를 못하는 상황이 나오면 둘이서 빡쳐서 무대를 개박살냈던 것이다. 드러머가 데이브로 바뀐 이후에도 이 관행은 계속되는데 이는 지병인 만성 위염장염의 고통 때문이었다고 한다.
  • "Smells Like Teen Spirit" 곡이 본인의 자작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반면, 본인은 이 노래를 무척 부르기 싫어했다고 한다.[27] 영국의 뮤직뱅크격인 BBC의 Top Of The Pops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연주했을 때 방송사 BBC의 핸드싱크요구에 반발해서 개판친 전설적인 공연 영상이 존재한다. 일명 커트 코베인이 마이크 먹는 영상.[28] 코베인 본인은 스미스모리세이 모창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 대부분의 작곡을 도맡고 프론트맨을 하는 등 비중은 밴드 내 제일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밴드 초창기에는 수익을 공정하게 나눴으나 코트니가 곡은 당신 혼자 썼는데 왜 수익은 공평하게 나눠?라고 항의하자 아무래도 사랑하는 여자와의 경제적인 문제다 보니 결국 밴드의 인세 중 50%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바꿨다고 한다. 이로 인해 절친이었던 크리스 노보셀릭과의 사이가 조금[29] 나빠졌고 1992년에 열린 커트-코트니의 결혼식에 불참하게 된다. 커트 사후 코트니가 너바나의 곡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노보셀릭은 "난 코트니와 항상 잘 지낼려고 노력해보지만 그녀는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커트는 데이브 그롤이 곡 작업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엿들었고[30]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겨 In Utero 앨범부터는 그롤의 곡들을 적극적으로 수록하고자 하였지만 그롤이 스스로 자신의 곡들은 '너바나스럽지 않다'고 여기며 합주를 통한 공동작곡의 형식을 지향하거나 커트의 곡 작업을 응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커트는 1994년 자살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나는 혼자 곡을 만드는 것에 지쳤고 밴드는 해체 직전의 상황이다. 멤버들과 합주를 해서 곡을 만들려고 해도 소음만 나오고 음악은 안 나온다."라는 말을 했다.
  • 딸인 프란시스 코베인과는 애증의 존재인데 프렌시스는 인터뷰에서 '자살한 아버지가 정말 밉다. '내 나이 5살 때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치열했던 사춘기 시절 스스로 내 곁을 떠난 아빠에 대한 원망이 가시질 않는다'고 하지만 전 남편과 아버지인 커트 코베인의 기타를 두고 소송을 벌이거나 아빠의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커트 코베인의 50번째 생일날 sns에 '오늘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아빠의 50번째 생일이 되었을텐데, 아빠 생일 축하해요. 아빠의 사랑하는 딸 프렌시스 코베인 드림'한 걸로 보아 그리움과 원망의 감정이 있는 듯하다.
  • 둠 2의 레벨 21이름은 'Nirvana'인데, 커트 코베인이 몸담은 밴드 너바나의 어원인 열반으로 봐도 되지만, 레벨 디자인의 정황을 감안하면 커트 코베인 및 너바나를 의미한다고 봐도 된다. 시작지점에 슈퍼 샷건이 놓여져있는데, 레벨 이름과 연관지어보면 명백히 커트 코베인의 산탄총 자살에 대한 리퍼런스다. 단 이 리퍼런스가 고인드립이라고도 볼수있지만, 둠의 제작진들에 메탈헤드가 상당하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때 오히려 고인드립이라기보다는 단순 리퍼런스 내지 추모의 의미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많다.
  • 한 시대를 대표했던 뮤지션이라는 상징성과 음악실력과 비극적인 인생사로 인한 충격적인 자살 등의 이유로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과 우대를 받으며, 그들의 곡들의 노랫말에 자주 등장한다.


[1] 그의 유서에 써 있는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본래는 닐 영의 My My, Hey Hey라는 곡의 가사 구절 중 하나이다. 닐 영은 상심한 나머지 코베인의 죽음 이후 한동안 이 곡을 공연에서 부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 가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짧고 굵게 살고 가란 뜻으로 쓴 것이 아니라, 당시 섹스 피스톨즈의 리더였던 쟈니 로튼이 '로큰롤은 죽었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 말이었다. 닐 영은 로튼의 그 말을 듣고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단 차라리 한번에 불태우는 게 낫다. 왕은 죽었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라는 가사를 쓴다. 왕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말한다. 즉 저 가사는 애초에 죽은 사람을 기리는 '추모'의 뜻으로 쓴 것이었으니 닐 영이 죄책감에 비통해 할 만도 했다.[2] 링크[3]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열풍을 주도한 인물로,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사운드가든 등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의 대표적 하위 장르라고 볼 수 있는 그런지 록의 시대를 열었다. 또한 커트의 음악들은 2000년대 유행했던 락 음악들에도 큰 영향력을 주었다. [4] 비틀즈의 수많은 명곡들과 롤링 스톤즈의 Satisfaction, Sympathy of tbe Devil,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 순위를 보면 거의 1960년대의 격변기 시절 노래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한다.[5] 그의 아들뻘인 XXXTENTACION이 X세대의 자식뻘인 Z세대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하다.[6] 1992-1994 혼인. 커트가 사망함으로써 사별.[7] 딸이 엄마의 코와 아빠의 눈을 닮았는데 그다지 미인은 아닌 코트니 러브를 더 많이 닮았다. 다만 록 스피릿은 둘 다 닮았다는 평이다. 참고로 딸 이름은 코베인이 죽어라 좋아했던 스코틀랜드 인디 팝 밴드 더 바셀린즈(한국의 바세린하고는 상관 없다.)의 여성 보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본인을 죽어라 사랑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자신을 저버리고 자살한 아버지 커트를 당연하게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너바나보다는 오아시스, 머큐리 레브, 브라이언 존스타운의 음악을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8] 백인 하류층을 뜻하는 말. 대표적 사례로는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 에미넴을 들 수 있다.[9] 후에 너바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몽타쥬 오브 헥'의 어머니 웬디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 당시 어렸던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고, 결혼 후에도 가능한 한 빨리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10] "Something In The way"의 노랫말은 내가 만약 가출했을 때 다리 밑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살았을 거라고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11] 시간이 지나서 성공 이후로는 헤로인까지도 손댔다.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그리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게 아니었기 때문에 너바나가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헤로인이나 코카인을 그리 쉽게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12] 사실 녹음 상태가 매우 조악하고 가창력이나 연주도 아직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하여 그다지 들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 커트 코베인의 초기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뿐.[13] 다만 코트니 러브를 만나기 전에는 성적 지향에 혼란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4] 실제로 코트니는 낙태를 하려고 했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던 커트가 아이를 낳자고 설득했다고 한다.[15] 빌리 코건은 본래 코트니 러브와 약혼했으나 코건이 스매싱 펌킨스 투어를 도는 사이 러브가 코베인과 바람을 피웠고 코베인의 아이를 갖게 되자 코건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뒤 코베인과 결혼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코건은 우울증에 걸리고 스매싱 펌킨스 활동을 중지했으며 심지어는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코건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코베인과 결혼하더니 다시 코베인을 배신하고 코건과 바람을 피운 것이다.[16] 발견된 건 3일 후인 1994년 4월 8일.[17]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1987년 버드 드와이어라는 정치인이 자살하는 비디오를 구해서 자주 돌려봤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시신 사진이 검열 없이 바로 나오고 심지어 실제 비디오가 인터넷에 도는데, 정신건강과 고인의 안식을 위해 찾아보지 말자.[18] 당장 버드 드와이어의 경우, 권총으로 쏘더라도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 코피를 쏟는 등 시체가 처참해지는데, 무려 샷건으로 머리를 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심한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고, 무엇보다도 고인의 안식을 위해서 사진을 검색해서 찾는 짓은 자제하도록 하자.[19] 다만 그것이 실제 커트의 자살 사진이 아니라는 말이 많다. 실제로 커트의 아내 코트니 러브는 '앞으로도 커트의 시신 사진이 유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그의 사망 당시 사진 중 2014년에 발견된 사진들은 머리 부분이 나와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루머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20] 이반카 트럼프도 커트의 자살 당시 울었다는 말을 한 적 있다.[21] 음모론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게 아내인 코트니 러브가 죽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혹은 커트의 적들이 연합하여 암살했다는 설도 많다. [22] 또한 Californication에서 코베인을 언급하는 가사도 있다.[23] 에미넴의 Cum On Everybody, 퍼블릭 에너미의 Are You Gonna Go Our Way 등.[24] 일명 그런지 패션. 커트가 등장하기 전의 락스타들은 가죽자켓에 딱붙는 바지, 화려한 헤어스타일을 추구했으나 커트의 후줄근한 패션은 그 유행을 깨버린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25] 정말로 페미나치라고 써놨다. 그러나 비키니 킬이 딱히 너바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니었다. 왜나면 너바나의 이름을 팔면 잘 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올림피아의 로컬 밴드로 남았으니...[26] 생전에 쓰던 이펙터는 앰프 드라이브는 아예 사용하지 않고, 고작 보스 DS-1 디스토션과 Small Clone 코러스 이펙터 페달이 전부였다.[27] 코베인 평전에 따르면 Nevermind 발매 전에 라이브로 공연했을 당시에는 관객들의 호응이 높아서 사실은 그도 이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히트곡으로 떠오르고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어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자 이러한 원인이 의 지나친 히트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점차 이 곡을 부르기 싫어했다. 심지어 어떤 공연에서는 커트한테 을 부르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해 버린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공연에서 Teen Spirit만 듣고 공연장을 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다고. 다만 공연장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이었기 때문에 말년에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종종 부르기는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수록 자기모순이 심해졌겠지만.[28] 이 퍼포먼스는 영국 언론에서 "가장 반항적인 락 퍼포먼스"에서 10위권에 들어가기도 했다.[29] 사실 크리스가 코트니를 싫어하게 된 것에 가깝다.[30] 데이브 그롤은 이미 너바나 시절부터 수 많은 자작곡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