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히메

 

甲斐姬
1. 甲斐姬
2. 대중문화 속의 카이히메


1. 甲斐姬


(1572? ~ ?)
전국시대에도 시대 초기의 인물로 관동 호죠 가문의 가신이자 오시 성의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의 장녀로 관동 제일의 미녀로 불렸으며, 무예와 병법에도 뛰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2만을 이끌면서 호죠 가문의 오다와라 성을 공격할 때, 우지나가가 오다와라 성으로 들어가자 지성인 오시 성에서 직접 갑옷을 입고 농성을 지휘하기도 했던 여걸이다. 800의 병력인 상태에서 주변의 백성들 3천을 모이게 하여 4천 가량의 병력으로 오시 성 방어를 하였다.
히데요시의 수공 지시를 받은 이시다 미츠나리가 물길을 잘못 파서 수공에 실패하는 등의 삽질을 해서 꽤 잘 버티다가 오다와라 성이 함락되자 항복하였다. 이때 자신을 여자라고 무시한 적장 미야케 다카시게(三宅高繁)를 쏴 죽였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가모 우지사토에게 맡겨지면서 아와시로 후쿠이 성에서 살다가 하마다 쇼겐, 하마다 쥬자에몬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변이 일어난 것을 아는 사람들과 이들의 병사들을 장악하였으며, 우지나가가 돌아오자 진압하였다. 이러한 무용담을 들은 히데요시가 측실로 삼았다고 한다.
히데요시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딸인 나아히메를 길렀다. 도요토미 가문이 패망한 이후에는 센히메의 조력으로 나아히메와 함께 조명, 그 시대 히메들이 그랬듯이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2. 대중문화 속의 카이히메



2.1. 전국무쌍 시리즈


카이히메(전국무쌍)

2.2.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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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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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2.3. 노보우의 성


히데요시의 후호조가 토벌 당시 오시성 공략에 관한 내용인 영화/소설 노보우의 성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사무라이를 추격하여 벤 일도 있을정도로 무예가 출중하며[1], 맨손으로 2~3명의 가신들을 내동댕이 치는 괴력녀이다. 성이 항복한후[3] 항복의 징표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다.

[1] 창을 주무기로 쓰는듯 하다.여성용 창술인 나기나타의 원조 쯤 되는듯..[2] 나가치카의 변호를 겸해서 줄거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다면, 원래 나가치카는 전투를 달갑지 않아하는 인물이라, 성에 남은 호전적인 무장들을 달래고 어르면서 자기 사촌 형인 성주의 항복 지시를 따르고자 했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가 상당히 군공과 명예에 집착하는 인물이라 다른 지성들이 싸움없이 항복하자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없어진다고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휘하 수하 중 나츠가 마사이에라고, 미츠나리의 다른 수하들의 평에 의하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여 사절로는 적합하지 않은 자를 일부러 보냈는데, 이들의 우려대로 마사이에는 상대가 어차피 항복할테니 오시 성에게 온갖 모욕을 주며 무례를 범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양아치가 뭘 요구하듯이 “카이히메라는 여자를 관백께 내놔.”라고 말한다. 안 그래도 마사이에의 무례에 화가 쌓이던 나가치카는 이 마지막 말에 결국 뚜껑이 열리고 전쟁을 선언한 것. 이 소식을 들은 미츠나리는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기뻐하고, 미츠나리의 동료와 부하들은 이럴려고 마사이에를 보냈냐고 기가 막혀한다. 결국 그냥 항복만 받으면 될 일이 전투로 이어진 것은 나가치카와 미츠나리의 공동 책임인 셈.[3] 성주는 관백측에 전쟁이 시작되면 항복하겠다고 밀약을 맺은 상태였으나, 임시성주인 나리타 나가치카가 제멋데로 진짜 전쟁을 해버린다.[2]석전삼성의 2만 대군에게 불과 500명의 군사로 선전하고, 수공까지 버티지만 본성이 함락되자 명령에 의해 항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