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틀룩 빌게 퀼 카간
Qutlugh bilge kül qaghan(골돌록비가궐가한, 骨咄祿毗伽闕可汗)
재위기간 (742 ~ 747)
위구르 제국의 초대 카간. ‘고귀하며 현명하고 강한 군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름은 쿠틀룩 보일라(골력배라,骨力裴羅).
본래 위구르족은 철륵의 일파로써 돌궐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돌궐이 멸망하기 직전에 설연타, 위구르 등이 동돌궐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점은 돌궐족에게는 뼈아픈 역사로 남아있었다. 돌궐은 당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가 682년, 일테리쉬 카간의 필두로 당의 기미지배에 대해 봉기해 재흥하는데(돌궐 제2제국) 자신들이 멸망시킨 국가가 다시 일어났으니 위구르족은 당연히 몽골 초원에 있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위구르족은 돌궐에 쫓겨 당나라의 하서지방에 있었다. 727년에 반란을 일으켜 이들은 다시 북방으로 귀환하였다. 당시 주동자는 호륜(護輪)으로 이 사람의 아들은 바로 쿠틀룩 보일라였다.
쿠틀룩 보일라는 이런 가족관계여서 인지 742년 추장이 되어 같은 철륵계인 바스밀과 카를룩과 연합해 돌궐에 대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위구르, 카를룩, 바스밀 등은 쿠틀룩 야브구를 죽이고 바스밀의 추장을 힐질이시 가한으로 추대한다.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돌궐 제2제국은 붕괴되었고, 몽골 초원의 패권은 세 부족의 손에 달려 있었다. 국인들이 판 퀼 테긴의 아들을 오즈미쉬 카간으로 삼고 그의 아들 갈랍치를 타르두쉬 샤드(서살)로 삼지만, 나라의 존망은 이미 끝난지 오래였다. 결국 742년, 오즈미쉬 카간을 인정하지 않는 위구르, 카를룩, 바스밀 등이 난을 일으켜 744년, 오즈미쉬 카간은 이들 세 부족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와 함께 돌궐 제2제국은 멸망하였다.
쿠틀룩 보일라는 우야브구 일테베르의 직위로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봉의왕으로 책봉되었다.[1] 쿠틀룩 보일라는 우선 카를룩의 추장을 설득해 연합하여 바스밀을 공격해 격파한다. 바스밀의 추장은 당시 좌야브구로 돌궐 멸망이후 영향력이 위구르와 버금갔을 정도였다. 바스밀을 격파한 쿠틀룩 보일라는 스스로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라 칭하였다. 745년, 쿠틀룩 보일라는 돌궐의 바이메이 카간을 살해[2] 하고 위구르 제국을 건국하였다. 후일의 카라발가순(Kara Balgasun) 근교의 오르두 발리크(Ordu Balik)에 수도를 정하고, 동부 스텝 지역에서 확고한 지배권을 확립한 쿠틀룩 보일라는 745년 당으로부터 위구르의 지배자로 인정받아 회인가한(懷仁可汗)으로 책봉되었다.
쿠틀룩 보일라는 반란을 일으킬 바스밀을 불시에 차단하였지만 위구르 제국은 건국 초기 불안정하였다. 왜냐하면 746년에 카를룩이 위구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쿠틀룩 보일라는 카를룩의 변수를 생각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카를룩 난의 진압은 기록에 나와있지 않지만 어느정도 막은 것으로 보인다. 747년, 이윽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쿠틀룩 보일라는 사망하였고, 죽음과 동시에 토쿠즈 타타르가 위구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쿠틀룩 보일라의 아들 바얀 초르가 반란을 진압하였고 그는 카를륵 카간으로 즉위하게 된다.
[1] 회흘의 추장이 야브구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카를룩(葛邏祿)과 바스밀(拔悉密)으로부터 가한으로 추대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수있다.[2] 이 시기에 돌궐족의 남은 카간의 씨족들은 당에 망명하였고 몽골 초원에 있던 돌궐족은 대부분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