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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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쾩 튀뤼크 카간국'''
'''𐰰𐰇𐰚:𐱅𐰇𐰼𐰰'''
'''Kök Türük Kağanlığı[1][2]'''

[image]
국기
[image]
영토[3]
위치
시베리아
몽골 고원
중앙아시아 일대
수도
외튀켄 의쉬[4]
정치체제
유목정
국가원수
대카간
국성
아사나(阿史那)
언어
고대 튀르크어, 소그드어
종족
튀르크족
종교
텡그리교
존속기간
동돌궐
551년 ~ 630년
서돌궐
581년 ~ 657년
돌궐 제2제국
683년 ~ 745년
성립 이전
유연#s-4
멸망 이후
위구르 제국
1. 개요
2. 명칭
3. 역사
3.1. 돌궐 제1 제국(동돌궐, 서돌궐)
3.2. 동돌궐
3.3. 서돌궐
3.4. 돌궐 제2 제국
4. 동돌궐 역대 가한
5. 돌궐 제2 제국 역대 가한
6. 돌궐 비문
7. 터키는 돌궐의 후예?
8. 현대
9. 매체
10.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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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세기8세기 사이에 중앙아시아동북아시아 북부 스텝 지대(지금의 몽골, 카자흐스탄 초원)에서 활동한 튀르크민족과 그들이 세운 유목 제국. 몽골 제국 이전 최대의 유목 제국으로 과거의 흉노유연 이후로 강력한 통합 유목국가를 세워 당대 중국사, 한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대 터키부터 중앙아시아의 여러 스탄국까지 튀르크 계통 민족국가들에서 공통 조상으로 보고 있다.

2. 명칭


고대 튀르크어
𐰰𐰼𐰇𐱅 : 𐰚𐰇𐰚 (Kök Türük)
한자
突厥
흔히 널리 알려져 있는 중국인들의 기록인 주서(周書)에 의한 음차 표기로는 突厥. 한국식 한자음으로 돌궐이라고 읽는다. 터키어로는 Göktürk Kağanlığı(괵튀르크 카안르으). 돌궐 문자로 적힌 비문을 직역하자면 쾩 튀뤼크(𐰰𐰼𐰇𐱅 : 𐰚𐰇𐰚, Kök Türük) 또는 튀르크(𐰚𐰼𐰇𐱅, Türk) 정도가 된다.
즉, 돌궐인들이 쓰던 명칭은 '''쾩 튀뤼크(Kök Türük)'''이고 돌궐은 튀르크가차이다. 쾩 튀뤼크는 ''''신성한 튀르크''''라는 뜻이다. 참조.
원어민 발음을 '투르크'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키에서느 '튀르크'가 türk에 훨씬 가깝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투르크라는 발음이다. 좀 더 세세히 따지자면 현대인의 /ㅟ/[wi] 말고 고전적으로 쓰이던 표준어상의 /ㅟ/[y]가 türk와 음성 기호상으로 같은 발음이다. 비문 자료에는 터키 빌음으르 튀뤽[türük]으로도 나온다.
본 문서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돌궐이란 말을 사용한다.

3. 역사



3.1. 돌궐 제1 제국(동돌궐, 서돌궐)


돌궐의 기원에 대해서 돌궐인이 지은 오르혼 비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사서에서 엿볼 수 있는데 주서에서는 과거에 존재했다 이 시점에는 사라진 흉노의 별종(別種)으로 나와있으며[5] 수서에서는 돌궐의 선조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원래 평량(平凉)의 잡호(雜胡, 구성이 다양한 북방 유목민족)였는데 아사나씨의 500호가 유연으로 도망하여 야금업(冶金業, 제철)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색국(塞國, saka로 추정된다. 스키타이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월지라고도 한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saka에서 나왔다는 말과 같이 Tranoid 서양계 유목민으로 본다. 한문 사료에 기록된 돌궐의 신화를 보면 대개 '''이리'''를 돌궐의 시조로 삼고 있다. <북사> 등에는 북녘 색국의 아방보(阿諸步) 부락의 17[6]명의 아들 중 하나이자 이리의 소생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 Igil Nisha čor로 추정)가 아방보가 망한 뒤 여름 신 및 겨울신과 혼인하여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흰 기러기로 변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검수(劒水)와 아보수(阿輔水) 사이에서 키르기즈를 세웠고, 또 한 명이 처절수(處折水)에서 나라를 세웠다. 큰아들인 눌도육설(納都六設, Nur Türk shad로 추정)은 발사처절시산(跋斯處折施山)에 살며 추위로부터 여러 부락을 구제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10명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은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눌도육설이 죽자 그들 중 아현설(阿賢設, Ashana shad로 추정)이 부족을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다.
동쪽으로 진출하여 몽골어 계통 언어를 쓰던 유연을 무너뜨리고, 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돌궐의 '''투멘'''(土門)은 '나라(il)를 세운 카간'이란 의미의 일릭 카간(Iliq Qaghan, 이리가한[伊利可汗])을 칭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51년에 경쟁국인 유연과 우호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신성, 백암성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는데 고흘 장군의 활약으로 실패했다. 553년에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릭 카간이 이때 사망하고, 제2대 카간인 아이 카간(Ay Qaghan으로 추정, 아일가한[阿逸可汗])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역시 사망한다.
돌궐 제국은 제3대 무칸 카간(Mukhan Qaghan, 목간가한[木杆可汗]) 치세에 확고하게 기반이 닦였다. 그는 서쪽으로는 이란사산 왕조와 연합해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발을 들이는 한편, 동쪽으로 거란을 제압한 후 북쪽 키르기스를 병합해 새외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고 전한다. 이 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고구려 인접지역인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다.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 중국 북부는 북제북주가 다투고 있어 신흥제국 돌궐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튀르크 또는 몽골계의 선비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북제, 북주를 건국하였는데, 돌궐은 중국을 공격하고 영토를 넓혀 속국으로 만들었고, 북제 북주의 중국의 분열은 돌궐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돌궐의 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타발가한[佗鉢可汗])은 조공을 바치는 북주북제를 두고 "내가 '''남쪽의 두 아들'''를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7]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돌궐제국은 동서로 매우 긴 국토였는데[8] 전성기 동서 돌궐의 영역을 모두 합치면 흑해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이것은 유목민족 특성으로 항상 이동을 하며 살아서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 돌궐이 멸망하면 돌궐 모든 지역이 멸망한 지도가 잘못 드는데, 돌궐을 황제(카간)가 사망하면 일시적으로 멸망하여 돌궐 부족들이 다른 영토로 이동하는 것이지 돌궐 전 지역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며 돌궐이 멸망해도 긴 영토에 당나라 유적 또한 보이지 않는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그들이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돌궐 제국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 그러나 이런 영토 한 지점에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의 동서를 가까운 일족에 맡겨 셋으로 분할해 지배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전의 흉노에서 좌현왕, 우현왕을 뒀던 것과 비슷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모두 카간 칭호였다는 차이가 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로 분권화됐다. 제5대 카간인 으쉬바라 카간(Ïšbara Qağhan,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이 즉위하면서부터 아사나씨 종실 내부에 권력 다툼이 생긴 것이다. 582년 충돌을 직접적 계기로 돌궐은 동서로 분열된다. 자세한 내용은 사발략가한 문서 참조. 그리고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하였지만 수나라 또한 돌궐에 조공하던 상태였다.

3.2. 동돌궐


북주 시절 우문태 밑에 있던 양견은 돌궐 군사의 협력을 받아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다. 572년 동돌궐은 수나라 수도 장안까지 쳐들어가 백성 6만명을 끌고 간다. 579년 돌궐이 다시 장안에 들어가 나가질 않자 수문제는 공녀를 보내기로 하고 달래어 장안에서 철수한다. 동서돌궐의 싸움은 수문제의 이간책까지 겹쳐 격화됐다. 궁지에 몰린 사발략가한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587년 그의 동생 막하가한은 동부는 되찾았으나 서돌궐과 싸우다 전사, 이후 야미 카안(Yami Kağan, 계민가한) 치세 때 동돌궐은 서돌궐을 이기기 위해 수나라에 일시적으로 협력했댜.
하지만 수나라고구려와의 성과 없는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하고 내란으로 붕괴되자, 그 틈을 노려 수나라의 복속에서 벗어나 다시 세력을 길러 중원의 쟁패전에 개입하며 군벌들을 후원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수양제의 손자 양정도를 내세워 돌궐의 꼭두각시로서의 수나라의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고[9], 당나라를 세운 당국공 이연도 돌궐의 신하를 칭하는 굴욕을 맛보고 돌궐군의 도움을 받아 장안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이때 돌궐군이 장안 정복하는데 장안이 유린됐고 대부분의 장안 귀족들을 끌고가 꽤 긴 시간 장안에 공백이 생긴다. 또한 당나라는 돌궐에 복속하여 신하로서 돌궐을 섬긴다. 또한 동돌궐은 당나라에 대항하여 동쪽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돌궐을 상대로 외교적 이간책을 시도했다. 힐리가한에게 불만을 품은 조카 돌리와 욱사설이 당나라로 투항해왔고, 설연타를 비롯한 철륵계 부족들도 당의 사주를 받아 돌궐에 등을 돌렸다. 게다가 수년 동안 큰 눈이 많이 내려 유목하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악재가 겹치자 당나라는 상황을 간파하고 서기 630년에 대대적으로 지금의 내몽골 지역을 기습공격해 힐리가한이 죽어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하지만 돌궐의 카간이 죽어 공백기가 생긴 것이지 광활한 영토 전부가 멸망한 것이 아니다.
힐리가한이 사망하고 돌궐인들 대부분 서돌궐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내몽골에 그대로 남았고, 634~645년 만리장성 근처 10개 주에 이주했다. 그러나 639년 돌궐 수령 결사솔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재이주시켰다.

3.3. 서돌궐


위와 같이 동돌궐은 북위부터 이어온 선비족의 왕조들과 대립했고, 서돌궐은 돌궐의 발원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이란사산 왕조, 아나톨리아 지역의 동로마 제국 등과 때로는 충돌하고 교역하며 존속했다. 그리고 영역을 넓혀 카스피해흑해까지 나아가 바다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며, 동돌궐(630년), 토욕혼(634~635년), 타림 분지도시국가들, 그리고 서돌궐과 연합한 고창 왕국(639년)을 공격하였다. 서돌궐은 마침 카를륵의 반란에 시달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당나라는 서돌궐과 652년, 653년, 657년 전쟁하였다. 657년 마지막 군주 사발라가한이 죽어 서돌궐은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돌궐인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이동한다. 카를룩이 서남쪽으로 서돌궐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서돌궐 군주의 사망으로 인한 멸망으로 서쪽으로 긴 돌궐의 모든 영토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 언제든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였다. 잘못된 지도로 인해 돌궐 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사발라가한은 죽었지만 서돌궐의 세력은 아직 건재하였다. 유목민의 지속된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 하서 지역(현 감쑤성)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현 신장지역까지 방어하려 하였지만 돌궐의 반란과 공격은 지속되었고 20년쯤 지나 돌궐이 강대해졌음을 주위에 알렸다. 강대해진 돌궐은 예전 돌궐에서 지속된 돌궐 부족들이며 국명은 똑같이 돌궐이지만 현대에서 돌궐 제2 제국이라고 부른다.


3.4. 돌궐 제2 제국


신라토번의 성장세가 둔화되자 옛 동돌궐 지역에서는 679년 니숙복, 680년 복념을 카간으로 추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둘은 진압당했지만 683년 무렵에 쿠틀루크 카안(Kutluk Kağan)(혹은 일테리시 카안(İlteriş Kağan))이 중심이 되어 무장 봉기를 일으켜 당나라에서 독립하는데, 이를 후돌궐 제국 또는 돌궐 제2제국이라고 한다.[10]
부활한 돌궐 제국은 686~687년 시기에 몽골 고원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을 격파하고, 돌궐인의 성산 외튀켄으로 돌아왔으며, 쿠틀루크 카안의 동생 카프간 카안(Kapgan Kağan, 묵철가한) 시절에 전성기를 맞아 동쪽으로는 거란을 격파해 대흥안령 산맥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부근의 바이르쿠를 복속시키며, 서쪽으로는 예니세이 강 유역의 키르기즈 동부 지역의 서돌궐 지역까지 진출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695년 돌궐의 위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묵철가한을 책봉하지만 실제론 제어할 힘은 없었고 오히려 돌궐에 도움을 받는 처지였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묵철가한의 도움을 받은 것. 또한, 698년 고구려인 대조영과 말갈인 걸사비우가 연합한 발해의 건국도 막지 못했다. 대신 묵철가한은 당나라에 돌궐인들의 반환, 물자의 공급, 당나라 공주를 공녀로 보내라는 끈질기게 요구했고 측천무후는 굴욕적으로 이 요구를 다 들어줘야 했다. 이렇게 숙적 당나라를 밟고 다시금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대를 통일하고 강성해졌다.
그러나 716년 묵철가한은 바이르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다가 기습당해 갑작스럽게 죽었고, 생전에 후계자로 정해뒀던 뵈귀는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쿠틀루크의 아들인 왕자 퀼 테긴(중국명 궐특근)의 활약으로 내분은 진정되고, 퀼 테긴이 형 빌게 카안(Bilge Kağan, 중국명은 비가가한)을 즉위시켰다.[11] 그러나 이미 돌궐 2제국의 세력은 저물기 시작한 상황. 741년 이낼 카안(이연가한)이 사망한 뒤 6년 동안 지배층의 내분으로 여러 명의 카안이 살해, 폐위당하는 막장 상황에 접어들었고 744년에 복속해있던 위구르, 바스밀, 카를룩 세 부족 연합의 반란으로 외튀켄이 함락당해 사실상 멸망한다. 그리고 얼마 안가 위구르 제국이 나타난다.

4. 동돌궐 역대 가한


'''대수'''
'''왕호'''
''''''
'''관칭'''
'''재위 기간'''
'''선대와 관계'''
01
일릭 카간(Ilig qaghan)
이리가한(伊利可汗)
튀멘(Tümen)
토문(土門)
울루그 야브구(Ulugh yabghu)
대엽호(大葉護)
552년 ~ 553년
아사나 샤다(Ashana shad)의 아들[12]
02
아이 카간(Ay qaghan)
아일가한(阿逸可汗)
이킨지 카간(Ikinci gaghana)
을식기가한(乙息記可汗)
카라(Qara)
과라(科羅)
불명
553년
일릭 카간의 장자[13]
03
무한 카간(Muqan qaghan)
목한가한(木汗可汗)[14]
이르킨(Irkin)
사근(俟斤)
불명
553년 ~ 572년
아이 카간의 동생
04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타발가한(陀鉢可汗)[15]
불명
타르두쉬 카간(Tardush qaghan)
지두가한(地頭可汗)
572년 ~ 581년
아이 카간의 동생
05
으쉬바라 카간(Ïshabara qaghan)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일릭 퀼뤽 샤드 바가 으쉬바라 카간(Ilig külüg shad bagha Ïshabara qaghan)
이리구로설막하시파라가한(伊利俱盧說莫何始波羅可汗)
섭도(攝圖)
퇼리스 카간(Tölis Qaghan)
동면가한(東面可汗)
581년 ~ 587년
아이 카간의 장자
06
바가 카간(Bagha qaghan)
막하가한(莫何可汗)
카라 초르(Qara chor)
처라후(處羅侯)
퇼리스 카간(Tölis Qaghan)
동면가한(東面可汗)
587년 ~ 588년
아이 카간의 차자
07
투란 카간(Turan qaghan)
도람가한(都藍可汗)
옹우려(雍虞閭)
야브구(Yabghu)
엽호(葉護)
588년 ~ 599년
으쉬바라 카간의 아들
08
빌게 카간(Bilge qaghan)
보가가한(步迦可汗)
점궐(玷厥)
타르두쉬 카간
달두가한(達頭可汗)[16]
599년 ~ 603년
일릭 카간의 동생 이스테미의 아들[17]
08
일릭 콴뒤 계민 카간(Ilik köndü qaghan)
이리진두계민가한(意利珍豆啓民可汗)
에르켄(Erken)
염간(染干)
퇼리스 카간(Tölis qaghan)
돌리가한(突利可汗)
599년 ~ 609년
바가 카간의 장자[18]
09
세비 카간(Sebi kaghan)
시필가한(始畢可汗)
퇼리스(Tölis)
돌길세(咄吉世)
?
609년 ~ 619년
일릭 콴뒤 카간의 장자
10
카라 카간(Qara qaghan)
처라가한(處羅可汗)
불명
일테베르 샤드(Ilteber shad)
사리불설(俟利弗設)
619년 ~ 620년
세비 카간의 동생
11
일릭 카간(Ilik qaghan)
힐리가한(頡利可汗)
돌비(咄毖)
바가투르 샤드(Baghatur shad)
막하돌설(莫賀咄說)
620년 ~ 630년
카라 카간의 동생

5. 돌궐 제2 제국 역대 가한


대수
왕호

재위기간
1대
힐질리시가한
토둔철, 골돌록
682 ~ 691
2대
묵철가한
묵철
691 ~ 716
3대
부구가한
복구, 양아지
716
4대
비가가한
묵극련, 골출록
716 ~ 734
5대
이연가한
?
734 ~ 741
6대
등리가한
비가골돌록
741 ~ 742
7대
판궐특근
?
742
8대
오소미시가한
오소미시특근
742 ~ 745
9대
백미가한
백미특근골롱복
745

6. 돌궐 비문


몽골의 오르혼 강 유역에는 8세기 돌궐 제2 카간국 시기에 세워진 석비(石碑)들이 있다. 이들 금석문이 19세기에 해독되어 돌궐인들이 고유한 표음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돌궐 문자).
20세기 중후반에는 Talât Tekin 등의 언어학자들이 돌궐어의 문법을 복원하여 돌궐어의 동명사 존재 등을 밝혔으며, 터키 정부의 주도로 비문 내용 전체를 복원하려는 목표의 프로젝트가 2000년부터 현지에서 진행 중이다.
해독된 내용 중 주요한 것들은 다음이 있다.
  • 괵튀르크 제2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장군이자 재상인 톤유쿠크(Tonyukuk, 아사덕돈욕곡)의 석비가 있다. 비문의 자세한 내용은 아사덕돈욕곡 참조.
  • 오르혼 비석 서문에는 빌게 카안의 동생 퀼 티긴(Kül Tigin, 궐특근) 장군의 비문에는 고구려를 뵈퀼리(Böküli)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를 참조.

7. 터키는 돌궐의 후예?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만주까지 호령하던 돌궐에서부터 기원한다고 말한다. 터키계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장두형 인도유럽어족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역(現 몽골초원)으로 진출했고, 돌궐 동서분열 이후 서돌궐이 쇠퇴하자 하자르 카간국(Khazars Kaganate)이 독립하여 볼가 강을 넘어 현재 러시아 남부와 키예프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게 된다. 하자르 카간국의 장군이자 벡[19]셀주크(Seljuqs)는 아랄해 북쪽에서부터 950년경에 중앙아시아의 화레즘지역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셀주크 왕조를 건국, 중앙아시아에서부터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더 나아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현재 터키공화국)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것이다.
터키는 돌궐을 자국 인공위성(괵튀르크 1,2호)의 이름으로 사용 중이고, 터키 연구가로 유명한 이희수 교수 역시 터키사에서 언급하길 터키의 국부격인 아타튀르크는 돌궐이 터키 조상이라고 강조했고, 559년 돌궐이 중국을 정복한 걸 기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59년 압델 멘데레스 대통령 체제에서도 터키는 돌궐 승전 14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고 서술했다. 지금도 꾸준히 유적 발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터키 정부의 돌궐 유적 발굴 관련 기사.#

물론 터키 오직 하나만이 돌궐인들의 후예인 것은 아니고 돌궐인 중 가장 서쪽까지 간 한 일파가 현대 터키인인 것이다. 터키가 현재 국력이 그나마 튀르크 계통 중 가장 크고 강해서 마치 터키를 튀르크라는 역사성의 대표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중앙아시아부터 캅카스까지이다. 자치구를 가지고 있는 위구르족이나 시베리아 지역까지 튀르크의 후예들은 유라시아 각지에 분포한다. 즉 터키는 돌궐족의 여러 후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일부 터키인들의 유사역사학에 대해서는 투라니즘 참조.

8. 현대


[image]

남동 튀르크

남서 튀르크

북동 튀르크

북서 튀르크

아르구(칼라지)

오구르 튀르크(추바시)
돌궐(튀르크)은 언어적 계통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볼드체'''로 표시된 것은 현재 자신들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고, † 표시가 있는 것은 현재 사멸한 종족이다.

9. 매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캐먼치킨 개파이가 돌궐 출신이라고 언급된다.

10. 관련항목


[1] 현대 터키에서는 셀주크, 오스만 등과 구분짓기 위해 ''''뿌리의 튀르크''''라는 뜻의 괵튀르크 카간국(Gök Türk Kağanlığı)라고 부른다.[2] 𐰴𐰜, 또는 𐰚𐰇𐰚(kök)은 '푸른', 혹은 '신성한'이라는 뜻이다.[3] 이 영역은 <빌게 카간 비문>에 나오는 "앞(東)으로는 카드르칸 의쉬{Qadɨrqan yɨš,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까지, 뒤(西)로는 테미르 카프그{Temir Qapɨğ, 철문(鐵門)}까지 나아갔다고 한다"라는 기록에 의거한 것이나, 실제로는 사산조 페르시아시무다리야 강을 경계로 맞닿았기 때문에 카스피해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옳다.[4] 외튀켄 산지는 아직 그 명확한 소재지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현재의 항가이 산맥 북사면의 어딘가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곳에는 후대 위구르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발가순,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돌궐 제2제국의 군주 빌게 카간(비가가한)과 그의 동생 퀼 테긴(궐특근)의 제사유적 및 비문이 있는 호쇼 차이담 등이 분포하고 있는 몽골 초원의 가장 비옥한 중심지이다.[5] 주서에서는 귀방과 철륵이 있던 위치가 언급되는데 돌궐이란 단어는 아니다. 훨씬 옛날에 있던 귀방과 철륵이 과연 돌궐과 같은 뜻인가에는 의문점이 많다. 또한 주서의 철륵이 돌궐과 상관없는 키르키스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유는 철륵이 위치한 곳이 예니세이강 상류의 바이칼 호수 서쪽이며 키르기스가 있던 위치와 일치한다.[6] 혹은 70명이라고도 하는데, 둘 다 돌궐이 성스럽게 여겼던 숫자 7이 반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7] 주서 권50 열전42 이역전.[8] 사실 이 동네 유목제국들이 과거 흉노부터 후대의 몽골 제국까지 대부분 남북보다 동서로 훨씬 긴 편이다. 남북으로 가면 갈수록 환경이 크게 달라지는데 위도대가 비슷한 동서는 비슷한 스텝 자연환경이 이어지므로 유목민들은 대부분 동서로 확장하는 게 더 편했다.[9] 뿐만 아니라 수말당초 무렵, 중국의 군웅들 중 일부는 돌궐의 힘을 빌려 황제가 되려고 했는데, 그들이 돌궐에 보낸 사신들이 워낙 많아서 길가에서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렵의 돌궐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숫자가 무려 4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역사상 북방 오랑캐들이 이토록 강성했던 때가 없었다고 중국 역사서인 수서에 기록되어 있다.[10] 이 독립 과정에서 고문간이 지휘하는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에 협력했다는 기록이 있다.[11] 이 퀼 테긴의 업적을 한문과 고대 튀르크 문자로 기록한 오르콘 비문은 19세기에 러시아인에 의해 발견돼 서양에 소개, 유명해졌다.[12] 추정.[13] 아들인지 동생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장자로 추정됨.[14] 목간가한(木杆可汗)이라고도 한다.[15] 他鉢可汗이라고도 한다.[16] 서면가한(西面可汗)[17] 투란 카간 사후 일릭 콴뒤 카간을 몰아내고 즉위.[18] 의 지원으로 복위.[19] bey,بك‎ “Beik는 터키계의 수장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