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륵 카간
Qarlïq qaghan(갈륵가한, 葛勒可汗)
재위기간 (747 ~ 759)
위구르 제국의 제2대 카간. 葛勒을 행운으로 의미하거나 백운(白雪) 또는 순결(純潔)을 의미한다고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이름은 바얀 초르(마연철, 磨延啜).
747년,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얀 초르가 카간 위를 계승하였다. 카를륵 카간은 즉위한 후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꾸준히 파견하였다.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서역원정군이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와 탈라스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튀르기쉬의 반란으로 패배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당의 서역 지배권은 실추되었다. 위구르 제국은 이 전투로 타림 분지의 지배와 서역 일대의 오아시스를 경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위구르인이 이슬람 제국과 교역을 맺으면서 중국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다.
755년, 양귀비의 양자 안록산이 유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당의 낙양, 장안 등 대도시를 점거하였다. 756년, 이형이 영무에서 당숙종으로 즉위하고 카를륵 카간과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를륵 카간은 우선 그의 딸 이승채에게 시집 보내면서 수령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와 화친을 청하였고 당나라는 회흘공주를 비가공주(毗伽公主)라고 책봉하였다. [1] 이에 카를륵 카간은 약 4000명의 군사를 발동해 장안을 탈환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나라를 구원하는 대가로 장안에서 다량의 선물을 받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사의 난을 참조.
756년, 낙양을 수복하기 전에 숙종은 카를륵 카간과 군사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특이한 점은 이 연회에서 카를륵 카간과 광평왕 이숙이 형제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광평왕 이숙은 카를륵 카간에게 바르게 대하였고 이에 카를륵 카간은 기뻐하여 그에게 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광평왕 이숙과 부원수 곽자의 등이 위구르의 병마를 이끌고 신점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형세가 불리하자 안경서는 업군으로 물러났고 이에 당군은 여세를 몰아 낙양을 공격해 탈환하였다.
758년, 숙종은 조서를 내려 어린 딸 영국공주(寧國公主)을 위구르에 출가시킨다. 이와 같은 당의 조치는 카를륵 카간이 안사의 난을 진압한 점도 있지만, 당과 위구르가 서로 상호연합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족과 북방민족이 서로 연계하는 사례는 드물다. 이러한 관계는 이미 위구르가 유목 생활에서 농경 정착 생활로 변모해 가면서 중국 문화의 수입과 교역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고, 중국으로서도 당시의 군사력이 변방 국가, 특히 위구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어쨌든, 갈륵가한은 영국공주를 카툰(가돈, 可敦)[2] 으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륵 카간은 사망하였고 영국공주는 순장을 강요받았으나 자신의 얼굴에 자해를 하여 면하고 귀국하였다. 카를륵 카간의 뒤는 뵈귀 카간이 계승하였다.
카를륵 카간 시기 위구르 영토는 예니세이 강 상류, 추강-탈라스 근교, 내륙 아시아 및 케룰렌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다. 카간의 아들들은 돌궐 제국에서처럼 야브구와 샤드로 임명되어 제한된 지역에서 일정한 통치력을 행사했다.
[1] 비가공주는 위구르 제국 제2대 카를륵 카간의 딸로 원병을 청하러 온 이승채에게 시집을 갔다. 고대 투르크어의 “현명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2] 고대 투르크어로 군주의 부인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