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모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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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쾨니히제크 -로텐펠스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모리츠는 1705년 11월 24일 쾨니히제크 -로텐펠스 일대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제크-로텐펠스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직속령이었다. 모리츠가 속한 가문은 본래 라벤스부르크 근처의 프론호펜 성을 짓고 가문 이름을 '프론호펜'으로 지었다가 1725년 '쾨니히제크'로 변경했고, 1565년 로텐펠스군을 인수한 뒤 1629년 7월 29일 신성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쾨니히제크-로텐펠스 백작으로 봉해졌다. 모리츠의 아버지는 에우세비우스 쾨니히세크-로텐펠스 백작이고,어머니는 만데르셰이드 운트 블랑켄하임 백작부인 클라라 필리피나 펠리차스였다.
모리츠는 젊은 시절 그의 삼촌인 로타르 요제프 폰쾨니히제크-로텐펠스가 이끄는 연대에서 군대에 입대했고, 1726년에 중위가 되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가 속한 연대는 슐레지엔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감시병 부대에 배속되었다. 1734년에서 1736년 사이, 이 연대는 이탈리아로 이동해 모리츠의 삼촌 로타르의 지휘를 받았고, 1734년 2월 18일 카치아너 대령이 로타르의 후임자로서 사령관에 진급했을 때 모리츠는 연대장으로 취임하여 대령이 되었다. 모리츠는 1734년 6월 1일 꼴로르노 전투에 참여했고, 6월 29일에 파르마 근처 산 피에트로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9월 15일에 꼴로르노의 적진을 기습하는 작전에 참가했으며, 1734년 9월 19일 구아스탈라 전투에서 연대장으로서 척탄병들을 이끌고 적과 육탄전을 벌이다가 부상당했다.
1735년 4월 28일, 모리츠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에 참가해 1737년 10월 1일 티모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1741년 4월 3일, 모리츠는 중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제16 보병 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모리츠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보헤미아와 바이에른에서 싸웠다. 그는 1742년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에서 2선의 3개 보병연대를 지휘했으나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 1743년 5월 9일 브라우나우 전투에서 말이 총에 맞는 바람에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1744년 보헤미아 전역에 복귀했고, 1745년 9월 30일 조르 전투에서 좌익에 배치된 보병 연대를 지휘했으나 또다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1746년, 그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전출되었고 1748년에는 라인강 전역에 참가했다.
전쟁이 종식된 후, 모리츠는 쾰른 궁정에서 오스트리아 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1751년 8월 8일, 모리츠의 삼촌이자 오스트리아 야전군 원수 로타르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754년 6월 12일, 모리츠는 야전군관으로 승격했다.
2.3. 7년 전쟁
1757년 3월 말, 모리츠는 라이헨베르크, 가벨 및 니에메스 지역에 주둔한 보헤미아 군단(보병 18,000명, 기병 4,900명)을 지휘했다. 그해 4월 20일, 프로이센군이 프라하를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모리츠는 적의 갑작스런 공세에 깜짝 놀라 황급히 병사들을 수습해 프라하를 향해 후퇴했다. 4월 21일, 그는 라이헨베르크 인근 언덕에서 철수를 중지하고 이곳에서 적과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에게 패한 그는 남쪽으로 32km 떨어진 리베나우로 후퇴했다. 이후 그는 4월 23일에 리베나우에서 요한 지그문트 맥콰이어 폰 이니스킬린 장군 휘하의 군단과 접점을 이루어 보병대 21개 대대, 척탄병 27개 부대, 기병대 49개 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4월 25일, 모리츠는 슐레지엔에서 북동쪽으로 진군하고 있는 프로이센 군단이 자신의 후방을 위협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융분츨라우[1] 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4월 26일 뮌헨그레츠 인근에 이르렀을 때 뮌헨그레츠가 이미 적에게 공략당한 걸 확인한 그는 융분츨라우로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저녁 무렵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바이스바서에 도착했다. 4월27일, 모리츠는 네우베나테크에서 자신의 기병대를 집결시키고 이저강 하류 일대의 모든 탄약고들을 파괴한 뒤 브랜다이스로 진군했다. 저녁 무렵 브랜다이스에 도착한 그는 증원군과 합세해 보병 26개 대대, 척탄병 32개 부대, 기병 49개 대대를 지휘하게 되면서 총 2만 명의 보병대와 5천 명의 기병 및 후사르들을 이끌게 되었다.
이후 모리츠는 브랜다이스의 다리를 철거하고 님부르크에서 멜니크 사이에 있는 엘베 강을 가로지르는 모든 다리를 파괴했다. 4월 29일, 모리츠는 님부르크의 탄약고들을 보호하고 세르벨로니 장군의 군단과 연락망을 형성하기 위해 드르셀 소장에게 6천 명의 병력을 맡겼고, 브랜다이스 주변에 소규모 분견대를 배치했으며, 자신은 브랜다이스에서 약 12,000명의 보병대와 3,500명의 기병대를 이끌었다. 5월 2일, 모리츠의 군단은 프라하로 이동했고,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 참가해 우익 보병대를 지휘했으나 또다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
1758년 8월 30일, 모리츠는 야전군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튜턴 기사로 임명되었으며, 알자스-부르디 주의 지역 군행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지역의 주요 도시인 알츠하우젠으로 가서 몇몇 유명한 예술가들을 초빙했다. 1763년, 모리츠는 알츠하우젠에 성 세펠레 성당을 세웠다.
2.4. 이후의 경력
1774년 11월 말, 모리츠는 지역 군행관의 지휘를 잃고 16명의 남성 오케스트라와 많은 수행단과 함께 임멘슈타트로 갔다. 그는 임멘슈타트 성의 내부를 정돈하고 승마학교를 설립했다. 그 후 그는 1776년 임멘슈타트를 떠나 우르차흐로 갔고, 그곳에서 1778년 7월 21일에 사망했다. 향년 73세.
[1] 현재 체코 믈라다볼레슬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