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헨베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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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4월 21일 보헤미아의 라이헨베르크(현재 체코의 리베레츠) 근교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이 승리를 거뒀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승리를 발판삼아 프라하로 진격한다.
2. 배경
1745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작위를 계승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획득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는 프로이센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여왕은 지난 전쟁 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일명 동맹의 역전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에게 3면이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과 연합해 이 3국 연합에 맞서고자 했다. 이후 양대 세력간의 갈등은 심화되다가 1756년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을 공격하면서(미노르카 해전) 7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가만히 있다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협공당할 게 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반 프로이센 동맹의 중심이 오스트리아인만큼 오스트리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면 동맹이 저절로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협상에 응하지 않더라도 전력 손실이 커서 당분간 프로이센을 노릴 수 없을 테니, 그 사이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개 격파한다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29일 작센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작센을 점거한 후 그곳을 기점으로 삼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센군은 프로이센군이 자신들을 먼저 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전쟁 초반에 큰 피해를 입고 피르나 근교에서 방어진을 형성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일 프로이센군이 로보지츠 전투에서 작센을 구원하러 오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자, 작센군은 2주 후에 항복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에 입성했다. 작센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겨울 동안 병력을 보강한 후 1757년 봄 보헤미아를 침공한다.
한편, 보헤미아 현지 수비군을 지휘하고 있던 쾨니히제크-로텐펠스 백작 크리스티안 모리츠 경은 예상되는 적의 공세를 저지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4월 20일 라이헨베르크 근교의 능선에 자리를 잡았다. 라이헨베르크는 나이세 강 근처 계곡의 언덕들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방어하기에 적합했고, 라이헨베르크 건너편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들로 둘러싸인 평원지대가 있어서 군대를 주둔시키기에 적합했다. 쾨니히제크 백작은 이 평원에 군대를 배치해 기지로 삼고 목책을 건설했다. 얼마 후, 프로이센군 선봉대를 이끌고 있던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라이헨베르크로 진군하던 중 길이 적에게 봉쇄된 걸 발견했다. 이에 그는 적을 격퇴하고 길을 뚫기로 결정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사령관: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 병력: 보병 11,450명, 기병 3,100명, 중포 12문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쾨니히제크-로텐펠스 백작 크리스티안 모리츠
- 병력: 보병 13,200명, 기병 3,500명, 용기병 500명, 야전대포 26문
4. 전투 경과
4월 21일, 베베른 공작은 나이세 강을 통과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위치를 정찰한 끝에 적이 라이헨베르크 근처에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다고 확신할 만한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즉시 적의 습격에 대비해 150명의 드래곤과 후사르 5개 대대에게 크라차우(현재 체코의 흐라스타바)에 있는 보급품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베베른은 베르츠도르츠와 나이세 사이의 공간에 군대를 편성했다. 한편 쾨니히제크 백작의 부하인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는 휘하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좌익에서 치고 나와 적의 우익을 습격하려 했다. 베베른 공작은 곧 적의 낌새를 눈치채고 우익의 대대들에게 우측의 숲에서 방어 진형을 결성한 후 적의 예상되는 공세를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7시, 베베른 공작의 양익은 베르츠도르츠 강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즉시 전열을 재편성한 후 나이세의 우측 둑에 설치된 중포들의 엄호 아래 진격을 재개했다. 중포들의 포격은 숲 속에 숨어있던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보병대 뒤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 후 베베른 공작은 칼덴 근위보병 연대와 묄뢴도르프 근위보병 연대에게 숲속의 목책을 장악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이 2개의 연대는 목책에 강력한 공세를 퍼부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잠시 저항하다가 곧 후방의 목책으로 후퇴했다.
이후 베베른 공작은 제15 드래곤 분대에게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폰 노만 소장이 지휘하는 제 15 드래곤 분대는 2개의 근위보병 연대 사이를 뚫고 나아가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기습했다. 이 갑작스런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프로이센 드래곤 분대는 이들을 맹렬히 추격했다. 그러다가 최남단 바리케이드에 주둔하고 있던 헝가리 출신의 보병대로부터 역습을 받자, 드래곤 분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와 동시에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전열을 재정비한 후 프로이센 드래곤 분대와 교전했다.
그 순간, 푸트카메르 장군의 후사르 연대 5개 대대가 숲을 가로질러 나와서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적의 공세가 수그러든 사이, 프로이센 드래곤 분대는 재집결한 뒤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를 공격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패주했고, 드래곤 분대는 그들을 추격해 프라젠스도르프까지 쫓아갔다. 한편, 베베른 공작은 제2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프로이센 왕자 하인리히 휘하 보병대를 제1 전선의 우익으로 이동시켜 적의 좌익 참호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포탄을 쏘고 총탄을 퍼부으며 저항했으나 곧 기병대가 패주하면서 그들의 좌측면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지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결국 쾨니히제크 백작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라인헨베르크에서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베베른 공작은 적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제2선 기병대를 제1 전선에 합류시킨 뒤 보병대와 함께 적을 추격하게 했다. 쾨니히제크 백작은 적의 추격에 맞서 자신의 군대를 데르펠바흐 후방의 나이세 양측 둑에 집결시킨 뒤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 장군의 잔여 기병대의 보호 아래 남쪽으로 후퇴해 리벤나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전 11시에 전투는 끝났고, 베베른 공작의 프로이센군은 라이헨베르크에 입성했다.
5. 결과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입은 손실은 장교 5명과 병사 188명 전사, 장교 25명과 병사 437명 부상이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장교 2명과 병사 85명 전사, 장교 21명과 병사 290명 부상, 장교 2명과 병사 474명이 포로 또는 실종되었다. 또한 프로이센군은 1개의 드래곤 부대기, 2개의 보병 부대기, 3개의 탄약 마차를 노획했다.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프라하로의 진군로를 확보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세를 몰아 프라하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