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전투
[image]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5월 6일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프라하에 몰아넣었으나 그 과정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1745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작위를 계승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획득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는 프로이센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여왕은 지난 전쟁 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일명 동맹의 역전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에게 3면이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과 연합해 이 3국 연합에 맞서고자 했다. 이후 양대 세력간의 갈등은 심화되다가 1756년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을 공격하면서(미노르카 해전) 7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가만히 있다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협공당할 게 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반 프로이센 동맹의 중심이 오스트리아인만큼 오스트리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면 동맹이 저절로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협상에 응하지 않더라도 전력 손실이 커서 당분간 프로이센을 노릴 수 없을 테니, 그 사이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개 격파한다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29일 작센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작센을 점거한 후 그곳을 기점으로 삼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센군은 프로이센군이 자신들을 먼저 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전쟁 초반에 큰 피해를 입고 피르나 근교에서 방어진을 형성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일 프로이센군이 로보지츠 전투에서 작센을 구원하러 오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자, 작센군은 2주 후에 항복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에 입성했다.
작센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겨울 동안 병력을 보강한 후 1757년 봄 보헤미아를 침공한다. 보헤미아 현지 수비군은 이에 맞섰으나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패퇴했고, 프로이센군은 여세를 몰아 프라하로 물밀듯이 진격했다. 5월 초,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는 프라하 근교에서 집결했는데, 그 규모는 11만 5천 명에 달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적이 프라하를 노리는 게 명백해지자 급히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5월 초까지 아직 병력이 전부 집결하지 못해 6만 명에 불과했다. 이에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은 프라하의 동쪽에 참호를 파 방어태세를 취했고, 뒤늦게 도착한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는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부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적이 전 병력을 모으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결심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5월 6일 적을 향한 공세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대왕
- 부사령관: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 병력: 66개 보병대대, 113개 기병중대, 82개 중포, 128개 대대포
3.2. 오스트리아군
- 총사령관: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
- 부사령관: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 병력: 56개 보병대대, 5개 그렌저 기병대, 62개 척탄병 대대, 132개 기병중대, 112개 대대포, 61개 중포, 총 76,500명
4. 전투 경과
4.1. 전장의 지형
프라하 전투의 전장은 프라하의 동쪽에 위치한 완만한 고원지대로, 몰다우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로케트니처 개울과 보티츠 개울 사이에 위치했다. 이 고원에는 큰 장애물이 없었고 스터보홀리, 운터-포크제르니츠와 호스타비츠에 작은 언덕 몇개가 있는 정도였다. 보티츠 개울은 몰다우로 흘러들어갔는데, 이 몰다우 근처 남쪽으로는 보다 경사진 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가파른 고원의 서쪽 비탈은 정원과 포도원으로 덮여 있었다. 한편 로케트니처 개울이 흘러들어가는 베츠위츠 계곡 주위에는 습지대가 형성되었고 운터-포크제르니츠, 호스타비츠, 케이지, 그리고 할루페틴 근처에는 여러 연못들이 있었다. 호스타비츠에서는 남쪽으로부터 작은 개울이 운터-미촐로프와 스터보홀리 사이의 연못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주변엔 축축한 풀밭이 있었다. 케이지와 흐루페틴 사이에는 계꼭이 더 가빠른 비탈을 이루고 있었으며, 운터-포크제르니츠에서 케이지를 향해 북서쪽으로 흐르는 개울은 이후 급격히 남서쪽으로 회전하여 80m까지 좁아져 일련의 바위 덩어리로 뒤덮인 비탈길을 거슬러 흘러가서 헤르들제즈와 할루페틴까지 이어졌다.
전장의 북쪽에는 지스카베르크 평원이 있었다. 이곳은 가파르고 거대한 녹색 언덕으로, 최대 170m에 달하는 경사로에서 형성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땅이 매우 기름져서 오래 전부터 농부들이 이 곳에 정착해 대규모 농장을 건설했다. 프라하 바로 북쪽으로 흐르는 몰다우 강은 지스카베르크의 북서쪽 모퉁이에 닿은 다음 북쪽 비탈길을 따라간다. 지스카베르크의 동쪽 비탈은 매우 완만했고 지형은 부분적으로는 깊은 늪지대를 형성했다.
4.2. 양군의 배치
5월 6일 새벽 1시, 슈베린 장군의 군대는 프로이센군의 일반적인 3열 대형을 갖추고 프라하를 향해 진군했다. 새벽 5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군단에게 2열을 갖춰 행진할 것을 지시했으며 폰 핀크 대령을 파견해 주변 지형을 정찰하게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진영에서는 브랜다이스에서 프로이센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이어서 프로섹에 주둔한 부대는 두 개의 프로이센 부대가 북쪽과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적이 5월 6일 당일에 승부를 볼 작정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후 슈베린 장군이 프로섹 앞에 자신의 군단을 배치했고,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의 군단도 다블리츠에 도착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의 본군도 곧 도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적이 접근해오자 즉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총사령관 카를 알렉산더는 좌익을 맡았고 브라운 남작은 우익을 맡았다. 중앙의 보병대는 통상 4개 대열이 아닌 3개 대열로 배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은 텐트를 철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좌익은 이 명령에 따랐지만 우익의 브라운 남작은 시간을 절약하고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텐트와 짐을 내버려두는 것을 선호했다. 한편 기병대는 일부만 도착했을 뿐 나머지는 아직 주변을 수색 중이었고, 오스트리아 야전 포병대는 여전히 행군 중이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슈베린, 빈터펠트, 그리고 몇명의 부관들과 함께 오스트리아군의 모든 진형을 볼 수 있는 프로섹의 동쪽 산등성이로 말을 몰았다. 그는 망원경으로 적의 위치를 점검한 후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이 적과 합류하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즉시 전투를 개시하려 했지만 슈베린이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결정하자고 제의하자 이에 따라 슈베린과 빈터펠트에게 정찰대를 이끌고 살펴보게 했다. 두 장성들은 정찰대를 이끌고 운터-포크제르니츠와 스터보홀리 사이의 지형을 살펴본 뒤 운터-포크제르니츠 근처의 초원을 가로질러 적진으로 향하는 것은 적의 거센 반격에 직면할 테니 힘들겠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그들은 오스트리아 우익에 대한 공격을 방해할 장애물은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하지만 본진으로 돌아온 슈베린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전투를 하루라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병사들이 며칠 동안 강행군을 하느라 지칠대로 지쳤으니 휴식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오기 전에 승부를 보고 싶었기에 슈베린의 요청을 거부했다. 슈베린은 이에 맞서 몇차례 말다툼을 벌였으나 끝내 대왕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슈베린과 빈터펠트는 스터보홀리를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지점으로 선정하고 그곳에 주공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확인한 초원 지대가 사실은 늪지대와 연못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슈베린의 군대가 좌익에 강력한 군단을 편성하는 동안 프리드리히 대왕은 우익에 휘하 부대를 배치했다. 그런 후 대왕은 운터-포크제르니츠 쪽으로 대열을 서서 좌측으로 행진할 것을 명령했다. 프로이센군은 2개의 대열로 구성되었는데, 첫번째 전선은 40개의 보병대대와 43개의 기병중대로 구성되었고, 두번째 대열은 21개의 보병대대와 43개의 기병중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예비대는 45개의 기병중대가 있었다. 또한 82개의 야전포 중 20개는 좌익에 배치되어 초기 공세를 지원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운터-포크제르니츠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를 진군했다. 좌익 기병대의 첫번째 전선은 운터-포크제르니츠 마을을 통과했고 두번째 전선은 운터-포크제르니츠 동쪽에 있는 연못을 따라 하천을 지나갔으며, 예비 기병대는 베츠위츠의 길을 택했다. 한편 제1 전선의 보병대는 운터-포크제르니츠 하단의 진흙투성이 초원을 힘겹게 행진했다. 어떤 곳에서는 병사들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진흙더미를 헤쳐나가야 했을 정도로 그들은 심한 고생을 겪었다. 그리고 제2 전선 보병대는 연못의 서쪽에 위치한 평지로 진군했으나 역시 땅이 질퍽해 진군에 어려움을 겪었다.
프로이센 야전포병대 역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흙탕에 빠진 포대를 끄집어내느라 고생했고 길이 지나치게 협소해서 보병대가 지나갈 때까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 바람에 그들의 진군은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 전투가 개시될 즈음 최전방 대대에는 포병 지원이 없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이때 들이쳤다면 그들은 영낙없이 무너졌을 테지만, 그들에겐 다행히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은 그들이 멀리 진군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며 방관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오전 9시경,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맡은 브라운 남작은 마침내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 우익 측면에 위치한 스터보홀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즉시 루체시 백작으로 하여금 운터-미촐로프 북쪽에 있는 연못에 기병대를 이동시키게 하고 카를 알렉산더에게 적이 아군의 우익 측면을 노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이 보고를 받자 제2 전선의 보병대 2개 사단을 우익에 보내 적의 측면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또한 22개 척탄병 대대를 호몰렌베르크로 보내 우측면에 재배치된 기병대와 2개 보병 사단의 새로운 진지 사이의 간격을 좁히게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포병 예비군은 새로 배치된 우익을 지원하기 위해 서둘러 호몰렌베르크에 포대를 설치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 진지의 재편성 후 지스카베르크 평원에 남아 있는 기병부대는 좌익 기병대 제1 전선의 3개 연대뿐이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이전의 좌익 2선 보병의 진군이 헤르들제즈 부근의 협곡에 의해 심각하게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진지의 재배치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이때쯤 프러시아 기병 좌익 제1전선의 큐라시어 기병대는 스터보홀리를 우회하여 마을 남쪽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좌익의 제2전선을 이루고 있는 드래곤들은 아직 운터-포크제르니츠의 동쪽의 평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게다가 야전포병들은 아직 운터포크제르니츠 마을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고, 보병 좌익 제1전선은 이제 막 스터보홀리의 연못 주변 저지대에 일렬로 배치되고 있었고, 보병 좌익 제2선은 운터-포크제르니츠에서 스터보홀리로 가는 댐을 이제 막 통과하고 있었다. 슈베린 장군은 이때 보병 좌익 제1전선의 선두에 서서 오스트리아군을 살펴본 후 적이 새로운 대열을 형성할 충분한 시간을 줘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어려운 지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대에 진격을 재촉했다. 병사들은 마침내 할당된 위치에 도달하여 대열을 갖췄다. 그 후 슈베린과 빈터펠트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4.3. 프로이센군의 1차 공세와 좌절
오전 11시경, 좌익 기병대 선두를 이끌고 있던 폰 슈나이치 중장은 적의 방비가 예사롭지 않은 걸 보고 공격을 주저했으나 슈베린이 공격 명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루체시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로이센군의 공세를 꼼짝 않고 기다렸다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탄을 퍼붓고는 돌진했다. 프로이센군 퀴라시어들은 이러한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제1전선을 돌파했지만, 그 뒤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역습을 받자 기세가 꺾였고, 뒤이어 좌측면과 후방에서 후사르 기병대에게 공격받자 결국 후퇴했다.
그 후 후방에서 재집결한 슈나이치의 큐라시어 기병대는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2선의 대로군 제20대대와 푸트카머 후사르 부대, 그리고 와텐버그 후사르 부대의 지원을 받은 그들은 운터-미촐로프와 큰 연못 사이를 뚫고 북서쪽으로 전진하여 적의 후사르들을 압도했다. 이후 큐라시어 기병대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몰아붙였고 프로이센 후사르들도 적 기병대의 측면을 요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이들의 공격을 어렵게나마 격퇴했고, 슈나이치 기병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우익 기병대는 힘겨운 전투를 치르면서 더이상 싸울 여력을 상실했다.
한편, 스터보홀리 북쪽에 있는 프로이센 보병대는 오후 1시 경에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야간 행진을 하고 진흙더미를 헤쳐 나가느라 탈진해버린 상태였고, 자연히 유리한 지형을 활용해 거센 반격을 가하는 오스트리아 보병대에게 밀렸다. 게다가 그들을 지원할 포대는 여전히 현장에 도착하지 않아서, 그들은 오스트리아 포병대에게 유린당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폰 포크 장군을 비롯한 몇몇 장교들이 부상당했고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빈터펠트는 어떻게든 공세를 지속하기 위해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도중에 목이 총탄에 꿰뚫리는 바람에 낙마하여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이리하여 프로이센군의 공세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4.4. 슈베린의 전사와 브라운의 부상
[image]
슈베린의 전사
한편, 슈베린은 좌익 기병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후 스터보홀리 북동쪽 댐에 올라가서 보병대의 상황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보병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자 즉시 전장으로 달려가서 보병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부대기를 들고 전장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의 총탄 세례를 한 몸에 받고 전사했다. 이에 동요한 보병대 전체가 스터보홀리 후방의 두베츠로 달아났다. 위버즈노 대령은 이들을 어떻게든 집결시키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마침 예비군 3개 기병대대를 이끌고 오고 있던 한스 요아힘 폰 치텐 장군에게 이들을 집결시키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치텐은 즉시 도주하는 병사들을 수습하여 운터-미촐로프의 연못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제1전선 보병대의 잔여 병력을 재편성했다.
적이 이렇듯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는 걸 목격한 브라운 남작은 마침내 반격의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익 병력을 집결시킨 후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가 선두에 서서 진군하는 군대를 독려하던 중 포탄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오더니 그의 다리 하나를 날려버렸다. 결국 그는 들것에 실려 들판으로 이송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지휘관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개별적으로 진군했다. 게다가 그들은 경애하는 지휘관이 중상을 입은 것에 분노해 적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지나친 나머지 다짜고짜 적진을 향해 돌진해버렸고, 그 바람에 그들과 본대 간의 간격이 벌어지고 말았다.
4.5. 프로이센군의 반격
프리드리히 대왕과 폰 치텐 장군이 오스트리아에 다시 공격을 가하기 위해 남쪽에서 프로이센군을 집결시키는 동안, 하우트카르모이 장군과 베베른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벌어진 틈새를 알아차리고 이 사이에 프로이센 보병대를 투입했다. 여기에 프로이센 포병대는 아군을 추격하는 적 보병대에게 포화를 퍼부어 그들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군 소속의 크로아티아 인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이 위치한 북쪽에서 틈새를 파고드는 적과 격렬하게 맞서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로 결국 패퇴했다. 여기에 치텐 장군의 기병대가 진격을 개시, 오스트리아 우익 기병대를 격파해버리면서, 오스트리아군 우익 부대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후퇴를 개시해 타보르 산의 서쪽 끝자락에 새로운 전열을 구성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를 멀리 쫓아낸 프로이센 좌익 기병대는 전열을 재편성했지만 말들이 너무 지쳐서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지 못했다. 이 말들은 며칠간 야간 행진을 벌였고 12시간 이상 안장을 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단지 350여 명의 기병대 만이 렌툴루스 대령의 지휘를 따르며 오스트리아군 보병대의 우측면을 공격할 뿐이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 우익 보병대는 기병대가 패주하고 브라운 남작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부재한 상황에 처하면서 위험에 처했다.
4.6. 프로이센군의 마지막 공격
[image]
오스트리아군은 오후 1시 30분부터 스터보홀리에서 패퇴하기 시작했고, 프로이센군은 그런 그들을 악착같이 추격했다. 하지만 아직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오랜 행군과 뒤이은 격전으로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함부로 적을 추격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동생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가 개울에 뛰어들고는 "대왕 만세!"를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앞다퉈 개울을 건너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적의 기세에 짓눌린 오스트리아군은 점점 전의를 상실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몰다우 강의 건널목을 저지해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를 차단하려 했다. 그는 휘하 예비군을 이끌고 몰다우 강을 건너려는 오스트리아군과 친히 교전을 벌여 상당한 포로를 잡아들었다. 그러나 약 1만 6천 명의 오스트리아인들이 가까스로 몰다우 강을 건너 후방으로 달아났고, 며칠 후 프라하로 진군하고 있던 다운 백작의 군대와 합류했다. 오후 3시경, 오스트리아군 전체가 프라하로 퇴각했다. 약 4만 명의 오스트리아인들이 프라하에 몰려들었고 전투 도중 부상을 입은 카를 알렉산더는 프라하에서 벗어나 다운 백작과 합세하려 했지만 곧 프라하가 적에게 에워싸이면서 실패했다. 이렇게 해서 프라하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4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프라하 요새에서 적에게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었다.
5. 결과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401명의 장교와 14,00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슈베린 백작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포크 중장, 빈터펠트 중장 등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412명의 장교들과 12,900명의 병사들을 잃었으며 40명의 장교와 4,500명의 병사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브라운 남작은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했고 카를 알렉산더 역시 전투 도중 2번 기절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또한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33개의 대포와 많은 수의 깃발, 11개의 부대기와 40개의 부교를 탈취했고, 오스트리아군은 4개의 대대포와 3개의 깃발을 포획했다. 이렇듯 막심한 피해를 입은 끝에 적을 격퇴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요새를 에워싸고 적을 굶겨죽이려 했으나 얼마 후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오스트리아군이 근처까지 이르자 어쩔 수 없이 3만 5천 병력을 차출해 다운 백작과 맞선다. 그러나 그는 콜린 전투에서 다운 백작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고, 결국 오스트리아를 조기에 굴복시켜 전쟁을 빨리 끝내려던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